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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39화 (39/315)

39화

프리미엄이란?

사실 병재가 당황한 것은, 처음 홍보관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였다.

‘뭐지? 주말이라곤 해도, 홍보관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06, 07년. 그러니까 근 10년 이내, 부동산이 최고의 호황이던 시절.

그때는 인 서울 괜찮은 자리에 아무 브랜드나 홍보관을 오픈해도,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여들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08, 09년이 지나면서 마지막 불꽃까지 전부 꺼져버린 지금.

어지간한 위치에 분양하는 대부분의 아파트들은, 전부 미분양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였다.

업계 1위인 제운건설의 ‘더 빌리지(The Village)’도 그랬고, 거의 그에 준하는 최상위 아파트 브랜드인 명성건설의 ‘수경(秀景)’또한 마찬가지였다.

소비자들의 심리가 전부 죽어버린 마당에 아무리 메이저 건설사의 브랜드가 분양을 한다 해도.

어지간한 입지에 분양하는 것이 아니라면, 소비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천웅건설의 홍보관에는 ‘줄’이 늘어서 있었다.

강남은커녕 달동네에 가까운 아현 뉴타운에 첫 번째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인데 말이다.

물론 부동산 호황 시기에 봤던 끝이 보이지 않는 수준의 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근 일 년 썰렁한 모델하우스만 봐왔던 병재에겐, 충격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야, 진욱아.”

“예, 팀장님.”

“우리 지금 잘못 찾아온 거 아니지?”

“아마……. 그럴 겁니다.”

홍보관에 오는 동안에도 속으로 욕밖에 않고 있던 병재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자신의 제안서로 ‘더 빌리지(The Village)’ 홍보관을 이렇게 붐비게 만들 수만 있다면, 회사에서 그의 입지는 완전히 달라질 테니 말이다.

해서 마른 침을 집어삼킨 병재는, 차분히 줄을 서서 홍보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건물 안에 첫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병재는 완전히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상방으로 뻥 뚫려 엄청난 층고를 자랑하는 프리미엄 브랜드 홍보관의 입구는, 병재를 비롯한 제운건설 직원들을 완전히 압도해버렸으니 말이다.

‘여기가 무슨 호텔 라운지야? 모델하우스 구조가 무슨 이렇게 생겼어?’

3층 높이까지 쭉 솟아있는 커다란 세 개의 기둥.

그 기둥을 따라 높게 펼쳐진, 아름답고 고급스런 아트월(Art Wall).

아트월에 수놓아진 유려한 패턴의 붉은 천연 대리석들은, 디자인의 고급감을 몇 단계는 더 업그레이드시키고 있었으며.

그 벽의 높은 곳, 한가운데 새겨진 ‘Clio’라는 폰트는, 구름 위에 떠있는 학 마냥 황금빛으로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공간은 병재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선 당신은, 프리미엄 브랜드 클리오에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해서 잠시 동안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멍한 표정으로 멈춰 있던 병재는,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저도 모르게 이다음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대체 모델하우스는 얼마나 고급지게 만들어 놨길래, 홍보관 입구부터 이렇게 공을 들인 거야?’

병재는 무의식적으로 걷고 있었지만, 자연스레 홍보관의 중앙 홀을 향하고 있었다.

아트월부터 포인트 디자인으로 사용된 장밋빛 대리석이 그의 동선을 끌어당기듯 리드하였고.

마치 고가의 미술품들이 전시된 ‘미술관’처럼, 복도를 따라 장식된 모던한 디자인의 그림들이 그의 시선을 쉴 틈 없이 빼앗았으니 말이다.

해서 말을 잃은 병재는 디자이너의 의도를 쫓아 움직일 수밖에 없었으며.

공간을 따라 빨려 들어간 그의 시선의 종착점은, 홀 중앙에 전시된 팔각형의 거대한 단상이었다.

정확히는 그 단상 위에 전시된,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나 지금, 분양홍보관에 온 거 맞지?’

미술관을 좋아하는 아내를 따라 유명 전시를 보러 갔을 때도, 이렇게 집중해서 작품들을 감상한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이 홍보관이, 유명 미술품들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얘긴 아니다.

미술품들은 병재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이 분양홍보관은 그의 전문분야가 녹아있는 곳이었으니.

애초에 대하는 자세부터가,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전제들을 차치하고라도, 병재는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커다란 스케일로 전시된 모형 앞에 선 그는, 놀랍게도 ‘전율’하고 있었으니까.

‘미친, 소름이 다 돋네. 회사에 돌아가서 이런 얘기를 했다간, 미친놈 취급받기 딱 좋겠지만 말이야.’

병재는 모형에 둘러쳐진 얇고 반투명한 금빛 펜스에 손을 얹은 채, 모형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고개를 쭉 뽑았다.

옆에서 보면 웃긴 모양새였지만, 누구도 병재를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이 모형 주변에는 병재 말고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펜스 앞에서 똑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냥 아파트 실물을 복사해서 가져다 놨네. 대체 어떤 변태 같은 놈이 이런 걸 만든 거야?’

현대미술에 유행하는 장르 중, 하이퍼 리얼리즘(Hyper Realism)이라는 분야가 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작품’일 뿐, 그런 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가 분양홍보관의 모형을 제작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만약 진짜 그런 사람을 데려다가 이 모형을 제작했다면, 못 해도 수억 단위의 돈이 모형에만 들어갔을 테니 말이다.

‘정말 그만큼 돈을 쓴 건 아니겠지? 이 정도 작정하고 만들었으면, 그랬을 수도 있겠는데…….’

모형 앞에 선 병재는, 한참 동안 그것을 감상하였다.

대체 어떤 변태를 데려와야 제운건설의 더 빌리지 홍보관에도, 이 정도 퀄리티의 모형을 전시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모형의 퀄리티에 대한 감탄은 곧, 클리오 아파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사고의 흐름이 자연스레 그렇게 이어진 것이다.

‘프리미엄 브랜드로 만든다더니, 커뮤니티 시설도 말도 안 되게 호화롭네. 이거 이렇게 만들면, 관리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건가?’

아파트 단지 모형의 한편에는, 단지 지하에 쭉 펼쳐져 있는 커뮤니티 시설들까지도 만들어져 있었다.

단지 내 카페는 물론, 사우나에 스크린 골프. 거기에 제법 큰 규모의 수영장까지.

커뮤니티 시설을 이렇게까지 뽑은 천웅건설도 놀라웠지만, 병재가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이 모든 시설을 전부 다 모형으로 만들어 낸 변태 모형제작자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병재의 이러한 생각들은, 다시 한번 ‘클리오’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여기, 위치도 꽤나 괜찮네. 아현 뉴타운에서는 사실상 대장 자리가 될 것 같은데…….’

애초에 아파트를 분양받고자 하는 고객이 아닌, 경쟁사 브랜드 분석을 위해 왕림한 병재였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어느새 그 또한 한 명의 고객이 되어 있었다.

병재 또한 건설사의 직원이기 이전에,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진 한가정의 가장이었으니까.

한참 동안 이어진 모형 감상이 끝난 뒤, 병재가 향한 곳은 평형 타입 별 모델하우스였다.

1층이 오로지 모형에 집중된 공간이었다면, 2층부터 3층까지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갈 각 평형의 모델하우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민 평형인 25, 34평부터 시작해서. 47평, 그리고 53평까지 다양하게 구성된 평형 타입들.

여기서 53평형 분양분이 제법 많은 것을 확인한 병재는, 또다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현동에 대형평형을 이렇게 많이 집어넣어 놓다니……. 진짜 배짱 한 번 두둑하네.’

한때는 대형평형이 열풍인 적도 있었지만, 이제 그 거품은 완전히 꺼진 상태였다.

지금은 서울 대부분 지역에서 25평형이 강세였고.

강남 같은 부촌이 아닌 다음에야, 40평대도 잘 만들지 않는 것이 트랜드였으니 말이다.

40평형대만 하더라도 5인 가족 이상이 아니라면 실용적인 관점에서 과하게 넓은 평수였으니.

사실상 50평대부터는 ‘사치재’라고 분류해야 하는 상품.

낙후된 아현동에 50평대 상품을 만들었다는 것은, 천웅건설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전부 다 국민 평형으로만 가득 채워 분양해도, 미분양을 걱정해야 하는 마당에 말이다.

‘진짜 미쳤어. 미친놈들이야. 이건 아무리 봐도 도박이라고.’

클리오 브랜드를 런칭하는 천웅건설에 대한 병재의 평가가,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나 하는 멍청한 놈들’에서 ‘수천억’ 단위의 사업장을 놓고 도박하는 미친놈들’ 정도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병재의 그 평가는 다시 한번 더, 바뀔 수밖에 없었다.

모델하우스까지 전부 다 구경한 다음, 저도 모르게 상담창구 앞의 번호표를 뽑으면서 말이다.

‘이거 분양가가 얼마라고 했지? 한번 미친 척하고 질러봐?’

병재는 천웅건설 프리미엄 브랜드에 대한 분석이고 나발이고, 이 아파트에 살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 * *

올해로 서른하나가 된 임수하는, 작년까지만 해도 데뷔 칠 년 차의 무명배우였다.

연기 전공도 아니었고 연예계에 줄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연기가 좋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오디션을 보고 배우가 되어, 오랜 시간 동안 무명으로 조연 혹은 단역을 연기해 온 실력파 여배우.

하지만 그녀의 꾸준함이 보상받은 것인지, 작년부터 그녀의 연기 인생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였다.

조연으로 합류한 국내 마이너 영화에서 그녀의 캐릭터가 꽤나 호평을 받았으며.

그 덕에 연말 시상식에서 조연상까지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전히 배우로서의 인지도는 많이 부족한 편이었지만, 이제는 작품도 어느 정도 골라 받을 수 있는 인정받는 조연이 된 것.

덕분에 올해부터는 여기저기서 예능 섭외도 들어왔으며, 드디어 그녀의 통장에도 목돈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래. 올해도 열심히 노력하면, 이렇게 점점 더 나아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낙관하지만은 않았다.

꾸준한 배우가 될 자신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박 배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까지는 크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통장에 억 단위의 돈이 처음으로 생긴 순간.

그녀는 이 돈으로, 가장 먼저 ‘집’을 사야겠단 생각을 하였다.

‘서울에 내 몸 눕힐 집 한 채만 있으면……. 한결 마음 편히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서른이 넘었지만, 그녀는 딱히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나이든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와 살고 싶기도 하였고, 예전부터 서울에 번듯한 집 한 채라는 막연한 목표도 가지고 있었기에.

집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먹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파트 분양이었다.

‘그래. 모아둔 돈에 이것저것 보태면……. 괜찮은 아파트 한 채 정도는 충분히 분양받을 수 있을 거야.’

수하는 아파트 분양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주변에 결혼해서 집을 가진 친구도 몇 있었고, 부동산에 관심 있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으니까.

그녀의 의지와 관계없이, 종종 분양과 관련된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계약금에 잔금 낼 돈은 모아뒀으니, 중도금만 어찌어찌 해결하면…….’

그래서 스케줄이 없는 주말인 오늘 아침.

그녀는 매니저에게 연락도 않은 채, 조용히 차를 끌고 강남으로 향했다.

물론 그녀에게 십억 단위가 넘는 강남 아파트를 분양받을 만큼 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관심 있는 신규분양 아파트의 모델하우스가, 청담동에 있었던 것뿐이었다.

‘친구가 부동산 더 떨어질 거라고 조금 더 기다렸다. 사라고 했는데……. 그래도 일단, 구경해서 손해 볼 건 없을 테니까.’

부동산에 관심 많은 친한 언니가 하나 있었지만, 일부러 연락은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현동의 아파트 분양홍보관에 같이 가자고 하면, 가보기도 전에 욕부터 먹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뭐? 아현동? 너 거기 가보기는 했어? 완전 달동네야 달동네. 야, 차라리 분양받을 거면 무리해서라도 강남을 사. 대출 풀로 땡기고 여기저기 긁어모으면, 전세 끼고 한 채 정도는 어떻게 살 수 있을 거야.]

언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라도 했는지, 수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홍보관의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끼익-

그런데 운전석의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순간.

수하는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홍보관을 빙 둘러선 사람들의 숫자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

‘주차장에도 차가 많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뉴스에서 최근 텅 빈 모델하우스에 대한 기사만 접해왔던 그녀로서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았던 의외의 상황.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마음 먹고 나왔다가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 수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기다랗게 늘어진 줄의 맨 뒤에 붙어 섰다.

‘이거 이러니까……. 뭔가 오기가 생기잖아?’

이어서 홍보관 직원이 건네는 팸플릿을 받아 든 수하는, 그것을 관심 있게 읽으면서 입장할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사실 그녀가 줄까지 서며 기다리는 이유는, 단순히 오기가 아니었다.

‘우와, 이거 사기 아냐? 아파트 외관이 이렇게 예쁠 수 있다고?’

‘와……! 내장도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커뮤니티 카페는 무슨 VIP라운지처럼 생겼잖아?’

팸플릿에 소개된 사진들과 설명들은, 그녀가 인터넷 기사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럭셔리하고 멋졌다.

분명 강남의 ○○○팰리스처럼, 리버뷰가 나오는 수십억 대의 럭셔리 주상복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거공간과 뭔가 다르면서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 고급스러운, 특별한 디자인이 홍보사진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단의 줄이 짧아질수록, 그녀의 기대감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모델하우스에 들어가면, 실제로 시공된 내부까지 볼 수 있다고 했지? 정말 팸플릿처럼 훌륭할까?’

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차례가 왔을 때.

“앞에 다섯 분, 기다려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입장해 주세요.”

수하는 정말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홍보관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

잔뜩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그녀는, 기분이 살짝 상할 수밖에 없었다.

휙-

자신은 줄까지 서가며 열심히 기다려서 홍보관에 이제야 입장하건만.

왠 젊은 남자 하나가, 자신의 앞으로 너무 당당히 지나서 들어갔으니 말이다.

관계자라면 모르겠지만, 딱 봐도 앳돼 보이는 것이 20대 초반 정도의 어린 학생.

‘무슨 새치기를 이렇게 당당하게 해?’

홍보관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따끔하게 한 마디 해주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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