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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33화 (33/315)

33화

벚꽃 피는 계절

우진은 오늘 소연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상한 상황극부터 시작해서……. 갑자기 얘, 왜 이래?’

사실 상황극 자체만 놓고 보자면.

오히려 그것은, 우진이 알던 소연과 어울리는 장난이었다.

때문에 우진이 진짜로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에 과도하게 공감 중인 지금의 소연이었다.

“아니, 그게 진짜야?”

“와, 오빠네 어머니 너무 고생하셨다.”

“그래서, 그럼. 그 집에선 그냥 쫓겨 난 거야?”

“으아, 내가 다 열 받잖아?”

소연의 반응만 모아놓고 보면, 우진이 무슨 엄청난 인생 고난을 구구절절 읊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실 우진이 이야기한 것들은, 정말 담백하고 간결하게 표현한 그의 어린 시절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실수로 인해 집이 빚더미에 앉았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어머니께서 홀로 고생하셨으며.

지금까지 어머니와 우진을 버티게 해 준 유일한 원동력이 바로, 어머니께서 운영하시는 수제비 칼국수 집이라는 이야기.

물론 완전히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안타까운 가정사인 것은 맞았다.

우진도 전생에서 이십 대가 되었을 때 즈음에는, 자신보다 불쌍한 사람이 몇 없을 거라는 착각도 하고 그랬으니까.

지금도 사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우진의 감정도 조금 먹먹해지기는 중이었는데, 소연의 격한 공감으로 인해 차오르던 감정이 쑥 하고 들어가 버렸다.

뜬금없이 제3자가 더 공감하고 슬퍼해 주니, 민망해진 느낌과 비슷하였다.

어쨌든 우진의 이야기가 끝났다.

“아무튼. 내 얘기는 이정도야.”

그리고 소연은, 더욱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래, 좋았어. 빨리 어머님께 선물할 수제비 칼국수 가게 컨셉부터 잡아보자고.”

이 이야기를 그대로 컨셉까지 끌고가자는 소연의 말에 우진이 살짝 난색을 표했지만…….

“저, 정말 이대로 괜찮겠어?”

소연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물론이지. 이정도 스토리면, 충분히 진정성 담긴 디자인을 녹여낼 수 있을 거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소연이 네 얘기도 한번 들어보는 건…….”

“그건, 좀 나중에. 오늘은 오빠 이야기만으로 충분해.”

“…….”

소연은 우진이 본 그 어느 때 보다 더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디어 스케치를 시작했다.

해서 우진도 멋쩍은 표정으로, 그녀와 함께 작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뭐,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소연은 옐로 페이퍼에 선을 슥슥 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공간구성은 나중 문제야.”

“오늘은 이 컨셉을 교수님께 컨펌받아서 통과시키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스토리를 어떤 식으로 아이디어 스케치에 녹일지부터 한번 고민해 보자고.”

평소였다면 우진이 했을 대사를 먼저 읊어대며, 아예 프로젝트를 주도하기 시작하는 소연.

우진은 그녀의 이러한 변화가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시작됐는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내 어린 시절 얘기가 나오면서부터인 것 같은데……’

우진은 소연의 감탄스런 공감능력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주도에 따라 컨셉 기획을 같이 시작하였다.

하지만 막상 작업이 시작되자, 우진 또한 금세 프로젝트에 몰입하였다.

그것은 당연했다.

처음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프로젝트에 몰입되지 않는 것도 이상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삼십 분 정도가 더 지났을 무렵…….

“클라이언트 설정이 독특하군요. 아니, 평범하다고 해야 하나.”

“좀 더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스토리가 담긴 클라이언트를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좋아요. 두 사람이 이 감성을 어떻게 디자인에 녹여낼지 기대가 되네요. 이대로 한번 진행해보죠.”

고승훈 교수의 흡족한 평가를 끝으로, 두 사람은 결국 이 프로젝트를 컨펌받을 수 있었다.

“좋아. 다음 작업은 이제 평면디자인부터 시작해야겠지?”

컨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욕 넘치는 소연을 보며, 우진이 한숨을 푹 쉬며 얘기했다.

“오늘 수업시간 끝났어, 한 선생.”

“음, 벌써?”

“컵밥이나 먹으러 가자. 출출해.”

“그……럴까?”

우진은 아쉬움이 남은 듯 보이는 소연을 데리고, 재빨리 강의실을 나섰다.

프로젝트 자체는 몰입해서 진행했지만, 막상 수업이 끝날 때가 되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 어린 시절에 대해 누구한테 얘기하게 된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우진은 자신의 아픈 과거를 누구에게 꺼낸 적이 없었다.

우진은 힘든 것을 누구한테 털어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딱히 나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주의였으니까.

하지만 어쩌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과 과거를 공유하게 되었고, 그것은 우진에게 복잡한 감정이 되어 돌아왔다.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상처에, 아직 아픔이 조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렇게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까지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이것 참, 모르겠네.’

학교 본관 건물을 향해 걷는 사이, 우진은 소연의 옆모습을 슬쩍 응시하였다.

그녀는 오늘 우진에게, 조금 더 특별한 친구가 된 것도 같았다.

* * *

인터넷 사이트에 우진이 올린 구인공고는, 무척이나 심플한 내용이었다.

[모형작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손재주가 좋은 사람을 구합니다.]

[기본급은 이천사백만 원에서 시작이지만, 두 달의 수습 기간 이후 작업능력에 따라 연봉을 재협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실력만 좋다면, 두 배 이상의 연봉도 지급할 용의가 있습니다.]

다른 회사들처럼 구구절절 인재상이나 이력서 양식을 나열하지도 않았다.

이력서는 자유 양식이었으며, 우대하는 것은 직접 만든 포트폴리오 정도.

하지만 우진이 제시한 조건이 파격적이었던 탓인지, 제법 많은 사람들의 이력서가 우진의 메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석현, 이 사람, 이 사람. 이렇게 둘 어때?”

“일단 불러볼 수준은 되는 것 같아.”

“이 남자는?”

“손재주야 잘 모르겠지만, 모형제작에 딱히 애착이 있는 것 같진 않네.”

“그래?”

“당장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작업을 재밌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게 중요해.”

석현은 중간고사 준비로 바쁨에도 불구하고, 우진과 함께 작업실에 모여 이력서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공부할 시간까지 쪼개 가며, 함께 일할 사람을 뽑기 위해 작업실에 출근한 것이다.

석현은 지금 무척이나 열정적이었다.

이제는 그도 우진이 벌이는 사업의 규모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어쩌면 석현이 취미 이상의 노력과 시간을 할애할 만한 가능성까지도, WJ 스튜디오에서 찾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이력서 통해서는 딱 셋만 뽑으면 돼. 사실 그것도 좀 많아.”

“네가 말했던 두 사람은, 확실히 데려올 수 있는 거야?”

우진의 물음에, 석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한 명은 이미 확답을 줬고, 내가 볼 때 나머지 하나도 거의 넘어왔어.”

석현이 데려온다는 사람은, 그와 같은 프라모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온라인 친구였다.

물론 온라인으로만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얼굴도 한 번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채용제안을 보내자고 할 만큼, 석현이 물정에 어두운 인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둘 다 실력은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어. 여러 번 같이 작업해봤거든.”

우진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너랑 비교하면?”

“음…….”

사실 대답하기 낯간지러울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석현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지금 뽑는 사람들이 앞으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나는 나보단 조금 못할 거고, 다른 한 놈은 거의 나 정도 돼.”

“오호.”

“둘 다 건축모형은 처음일 거라 조금 버벅일 순 있는데, 모형작업을 워낙 좋아해서 금방 적응할 거라고 봐.”

석현의 설명에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석현이라는 비슷한 케이스가 얼마나 빨리 적응했으며 얼마나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줬는지 경험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한동안은 건축모형 일만 가져오겠지만, 인프라가 갖춰지면 다른 것도 시작할 거야.”

생각지 못했던 우진의 이야기에, 석현의 두 눈이 반짝였다.

“예를 들면?”

의욕적인 석현의 기색을 느낀 우진이, 피식 웃으며 대답하였다.

“제품모형이나 자동차 모형 쪽으로도 시장이 좁지 않을 테고…….”

“그리고?”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거기서 규모가 더 커지면, 대형 파빌리온(pavilion) 제작까지도 확장 시켜 볼 생각이 있어.”

파빌리온이라는 단어를 들은 석현은, 살짝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제품이나 자동차 모형 쪽 일은 어렴풋이라도 감이 오는데, 파빌리온은 대체 뭘 말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그 단어 자체가,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었으니까.

“파빌리온? 그게 뭔데?”

“쉽게 조형물이라고 생각하면 돼.”

“조형물……?”

대기업의 신사옥이나 대규모 상업 시설 등.

상업지구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빌딩들은, 그 앞이나 주변. 혹은 건물 내부의 로비를 거대한 조형물로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진의 경험상 이쪽 시장의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노다지였다.

‘워낙 스케일이 크다 보니, 디자인만 잘 뽑으면 부르는 게 값이지.’

단가 자체가 비싸기도 했지만, 우진이 노다지라 얘기하는 이유는 수요에 비해 부족한 공급 때문이었다.

3미터에서 5미터 정도의 크기는 기본에, 정말 대규모 작업의 경우 10미터에 육박하는 조형물이 설치되기도 했으니.

이 작업을 제대로 된 퀄리티로 해줄 수 있는 업체가 시장에 많지 않은 탓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크기만 큰 쇳덩이 얹어놓고 수억씩 받아 챙기던 업체도 있었지.’

물론 석현에게 말했듯, 이것은 좀 시간이 지난 후에나 도전해볼 수 있는 작업이었다.

어지간한 공정이 전부 작업실 내에서 자급자족 될 정도의 설비들을 갖추기 전까지는, 우진으로서도 엄두가 나지 않는 시장이었으니까.

우진의 설명을 듣던 석현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반문하였다.

“넌 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아는 거냐?”

“내가 이래 봬도, 무려 건축 디자인학도 아니냐.”

“진짜 보면 볼수록 신기한 놈이라니까. 내가 볼 때 군대가 있는 동안, 최소 외계인이라도 만나고 온 게 분명해.”

“…….”

여튼 파빌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마무리한 우진과 석현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채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면접을 볼 사람들을 다섯 정도 추린 뒤에는, 추가될 직원들을 어떤 식으로 운용할지에 대한 계획에 대해 고민하였다.

“앞으로 모형 파트는, 네가 디렉팅 해줘야 해 석구.”

“내가……?”

“당연한 얘기겠지만, 일은 내가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따 올 거야.”

“그건 다행이네.”

“하지만 지난번처럼 적극적으로 모형작업을 도와줄 시간은, 이제 없을지도 몰라.”

우진이 작업에서 빠지겠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석현은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걱정마. 너한테 배울 건 거의 다 배웠으니까.”

“하긴, 작업 실력만 따지자면, 네가 나보다 위지.”

우진은 석현의 자신감이 기꺼웠다.

그의 모형작업 실력이야 처음부터 누구보다 믿고 있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사업에 가담해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었으니 말이다.

‘다음 주쯤 해서 메이저 건설사 몇 군데만 다녀와야겠어. 신입이 와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처음부터 너무 많은 일을 가져오는 것은 독이 되겠지.’

우진의 시선이 넓어서 휑해진 작업장 구석구석을 향했다.

지금은 비어있지만, 각종 설비들을 들여오면 곧 빼곡히 채워질 중요한 공간들.

‘천웅 쪽 일 끝내서 잔금 받으면, 그걸로는 슬슬 설비를 하나씩 매입해야겠어.’

계획대로 착착 성장하는 WJ 스튜디오를 보며, 우진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석현과의 회의를 마친 우진의 기분을 더욱 기껍게 만들어준 것은, 때맞춰 날아온 진태의 문자였다.

[우진아. 지난번 거기로 나와라. 오늘은 형이 산다.]

우진은 진태를 잘 안다.

만약 그의 제안을 거절할 것 같았으면, 이렇게 만나자는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진태가 마음을 정했음을 느낀 우진은, 5월의 일정을 더욱 구체화 시키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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