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벚꽃 피는 계절
좋은 공간, 좋은 건축물을 설계하기 위해선, 사실 좋은 클라이언트의 존재가 선결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아무리 디자이너, 설계자의 실력이 빼어나다 하더라도.
클라이언트의 요구조건이 터무니없거나 예산이 말도 안 되게 빡빡하다면, 멋진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말이다.
해서 우진은 이렇게 ‘가상의 클라이언트’를 설정할 수 있다는 전제조건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클라이언트를 마음대로 설정해 보는 것도, 학부생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일 테니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클라이언트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이번 중간과제의 결과물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무작정 좋아 보이는 요소들만 죄다 때려 박는다면, 클라이언트 캐릭터가 붕 하고 떠버리겠지. 실존하지 않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고객은, 오히려 마이너스일 수 있어.’
그래서 우진이 떠올린 아이디어는, 실존하는 누군가를 가상의 클라이언트에 대입해 보자는 것이었다.
현실에 있는 인물을 클라이언트로 설정하고, 디자인하고 싶은 구도에 따라 우진과 소연의 입맛에 맞게 조금씩 조건을 조정한다면.
좋은 디자인을 뽑아내기 편하면서도, 더 사실적인 클라이언트를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해서 우진은 소연에게 생각난 의견을 이야기하였고, 그 말을 들은 소연은 두 눈을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그렇지?”
“그러고 보니, 왜 이렇게 마음에 드는 설정이 없나 고민 중이었는데…….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아.”
그리고 의견을 모은 두 사람은, 가장 먼저 유명인들을 떠올려 보기 시작하였다.
실존하는 유명 인물들을 노트북으로 검색해 보면서, 독특해 보이는 배경을 가진 클라이언트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한참을 그렇게 검색하던 소연이, 문득 우진을 향해 물어보았다.
“으음. 그런데, 오빠.”
“응?”
“혹시 이건 어때?”
“어떤 거?”
“이렇게 유명인을 찾을 게 아니라, 우리 주변인을 클라이언트로 설정해 보는 건 어떨까 해서 말이야.”
“오호?”
소연의 아이디어를 들은 우진은, 살짝 반색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의견을 듣는 순간, 확실히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소연이 말대로 평범한 주변인이 클라이언트가 되는 게, 오히려 다른 조에 비해 돋보일 수 있는 차별점이 될지도 몰라.’
아마 대부분의 동기들은, 호화롭고 아름답고 멋진 공간을 설계하기 위한 클라이언트를 구상 중일 것이다.
건축디자이너의 꿈을 가진 대부분의 이들은, 그런 화려한 공간을 가장 먼저 꿈꿀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소연의 의견대로 보다 더 현실적이고 친근한 클라이언트를 설정하는 것은, 분명히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치였다.
게다가 이것은, 고승훈 교수의 감성에도 제법 맞아떨어지는 발상이라고 생각되었다.
“좋은 생각이야.”
“오빠도 그렇게 생각해?”
“응. 교수님, 스토리 좋아하시잖아.”
“스토리?”
“항상 디자인에는 스토리, 철학이 담겨야 한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셨는데……. 기억 안 나?”
“생각해보니 그러네?”
우진의 동의를 얻자 더욱 신난 소연은, 펜대를 세워 잡고 옐로 페이퍼를 죽 찢었다.
옐로 페이퍼는 디자인학도들이 아이디어 스케치나 메모를 할 때 자주 쓰는 아이템인데, 소연은 이것을 무척이나 애용하였다.
“자, 그럼 지금부터 한번, ‘스토리’를 들어 볼까나?”
마치 취조실에 들어온 형사마냥, 우진의 책상 앞에 바짝 다가앉은 소연.
“뭐야, 갑자기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
그녀는 펜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스럽게 우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내 주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나……?”
“서우진 고객님. 어떤 공간을 원하십니까?”
“켁…….”
“돈은 충분히 있는 거죠?”
“…….”
당황한 나머지 말이 없어진 우진을 향해, 소연이 강압적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대답해.”
“그렇다고…… 치자.”
우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신나 보이는 소연에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소연의 흥이 더욱 돋은 것은 당연했고 말이다.
“소연 건축사무소에, 아주 잘 오셨습니다. 저희가 디자인 비용이 조금 비싸기는 한데, 실력 하나는 확실하거든요.”
“정말?”
우진의 태클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상황극에 심취한 소연.
“당연하죠.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으……음? 방금 그건 조금 과한 설정인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건축사무소가 무슨 길거리에서 닭 꼬치 파는 푸드 트럭이냐.”
“미래의 디자이너 한소연은 이미 엄청나게 성공해서, 재벌만큼 돈이 많다는 설정이거든요.”
“얼씨구……. 그러다 행복회로 녹아서 없어지겠어, 한 씨.”
하지만 상황극에 심취한 것과 별개로, 소연은 무척이나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정말 우진을 클라이언트 삼아, 과제를 진행해보려는 듯하였다.
“일단 필요한 공간이나 말해봐, 서우진 고객님.”
“정말, 내가 클라이언트야?”
“그렇다니까? 물론 좀 들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바꿀 거지만.”
“그런 게 어딨어.”
“그러니까 빨리 대답이나 해. 어떤 공간을 원하시냐고요, 고객님?”
소연의 말을 듣던 우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장난. 혹은 상황극이 당황스러운 것을 떠나,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원하는 공간……?’
지난 생에서부터 오늘까지.
우진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한 공간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누군가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설계하고 시공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몸 눕힐 곳만 있으면 만족하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만큼 그의 인생에는 항상 여유가 없었고, 그런 생각이 들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수업 듣다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진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WJ 스튜디오.”
“응?”
“내 건축사무소 이름이야.”
우진이 꿈꾸는 가장 행복한 공간은.
그가 일구어낸, 그의 사람들이 일하는, 그의 꿈이 담긴 디자인 건축사무소였으니 말이다.
“뭐야. 이름도 벌써 지어놨던 거임?”
“여튼, 내 사무실 좀 설계해 줘. 직원은 서른 명 정도일 거고, 대지 200평 정도에 5층에서 7층 정도 되는 사옥을 지을 거야.”
술술 요구조건을 얘기하는 우진을 보며, 이번에는 소연 쪽에서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우진에게서 기대했던 것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소연이, 뭔가 어색해진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서우진 고객님.”
“예?”
“아무래도 사무실은 안 될 것 같아요.”
“뭐가? 아니. 그 전에, 시작도 안 해 놓고 왜 안 된대?”
우진은 황당해했지만, 소연은 더욱 뻔뻔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스토리’ 가 부족하잖아요.”
“스토리?”
우진은 소연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더 들어보기로 했다.
“아직 사회경험도 없는 고객님에게, 오피스와 관련된 스토리가 어디 있겠어요.”
“…….”
‘있어. 아니, 많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우진은 가까스로 참고 소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스물두 살 서우진 고객님의 ‘진짜’ 스토리가 담긴, 그런 공간을 한번 설계해 보자구요.”
짐짓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소연을 보며, 우진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이거, 완전 답정너잖아?’
정확히 이 팀원이 뭘 하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틀린 말도 없었다.
하여 우진은, 그녀가 하자는 대로 장단을 맞춰보았다.
“내 스토리가 담긴 공간이라…….”
소연의 입맛에 맞춰주려면, 회귀 전의 이야기들은 일단 배제해야 했다.
아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어디서 소설을 쓰냐며 핀잔을 줄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해서 우진이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스무 살까지의 기구했던 그의 인생사였다.
2년 전이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20년 전이기도 한.
이제는 정말 희미해져 가는, 그의 어릴 적 이야기들.
그리고 그 빛바랜 과거를 떠올리던 우진의 머릿속에는, 자연히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졌다.
스물두 살 우진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단 한 사람.
‘어머니.’
그래서 우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수제비 칼국수 집.”
“응……?”
“클라이언트 서우진이 원하는 공간은……. 아늑한 수제비 칼국수 집이야.”
의외의 이야기에 당황한 소연의 두 눈이, 놀란 토끼의 그것처럼 휘둥그레 확대되었다.
* * *
소연이 우진을 클라이언트로 잡은 것은 조금 충동적인 행동이었고, 때문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만한 행동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굳이 이유를 찾자면.
첫 번째가 그냥 우진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을 것 같아서였고.
두 번째는…….
‘궁금하니까.’
말 그대로 우진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서였다.
“지금 내 주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나……?”
“서우진 고객님. 어떤 공간을 원하십니까?”
우진은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10학번 동기들 사이에서 그는 조금 특별하고 신기한 친구였다.
디자인의 밤 때 함께했던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친분도 없었던 데다.
강의만 끝나면 항상 귀신같이 어디론가 사라지니, 학기가 시작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친해지기 힘든 동기였던 것이다.
게다가 우진과 가장 친해 보이는 동기라고는, 그만큼이나 특이한 녀석인 영국인 유학생에, 오티 때부터 붙어 다니던 소연과 혜진 정도가 전부였으니.
처음에는 관심을 갖던 동기들도 이제 그냥 ‘항상 바쁜 형 혹은 오빠’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그와 한 조가 되어 과제를 진행하고 있는, 소연을 빼고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학교 와서 제일 친해진 오빠인데……. 사실상 아는 게 거의 없다는 말이지.’
소연이 다른 동기들과 달리 우진에 대해 궁금해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신입생들에겐 우진이 가장 친해지기 어려운 동기일지 몰라도, 소연에게는 우진이 가장 친한 동기였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은 소연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활달하고 예쁜 소연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인기 많고 두루두루 친분이 있었으니.
그녀가 우진을 가장 친한 동기로 생각한다고는, 다들 떠올리지 못할 것이었으니까.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 소연이 우진과 붙어 다니는 것은, 착하고 예쁜 언니가 학교생활에 적응 못하는 불쌍한(?) 오빠를 챙겨주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으며.
남자 동기들 사이에서 예쁜 소연과 붙어 다니는 우진은, 은연중에 질투의 대상일 뿐이었다.
정작 우진은 별생각이 없으며, 오히려 소연이 자꾸 요상한 영국놈과 어울리는 우진에게 질투 아닌 질투를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다.
‘제이든인지 제이슨인지. 그 초딩 같은 영국인은……. 대체 왜 동네에 좋은 학교 놔두고 우리 학교까지 유학을 온 거야?’
소연은 우진과 함께 학교에 있을 때가 가장 재밌었다.
별 것 아닌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스낵바를 털어먹을 때도.
카페에서 핫초코를 하나씩 나눠 들고, 연애하느라 바쁜 혜진의 뒷담화(?)를 할 때도 말이다.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단지 우진과 함께 있을 때 재밌고 편했던 것.
그래서 소연은 충동적으로 얘기했다.
“스물두 살 서우진 고객님의 ‘진짜’ 스토리가 담긴, 그런 공간을 한번 설계해 보자 구요.”
어쩌면 지금 이 과제를 함께할 때가 바로, 그 어느 때 보다 우진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상황일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런 꿍꿍이를 가지고 말을 꺼낸 소연조차, 우진에게서 이런 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수제비 칼국수 집.”
“응……?”
“클라이언트 서우진이 원하는 공간은……. 아늑한 수제비 칼국수 집이야.”
“갑자기? 수제비 칼국수?”
우진이 전에 없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어머니께서 십 년이 넘게 수제비 칼국수를 팔고 계시거든. 비좁고 허름한 가게에서.”
“아…….”
“비록 과제긴 하지만, 어머니께 아늑하고 멋진 수제비 칼국수 집을 설계해 드리는 것도 괜찮은 선물이 될 것 같아서.”
“그, 그래.”
“이 수제비 칼국수 집을 주제로 가면, 네가 말하는 바로 그 스물둘 서우진의 스토리를 진정성 있게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우진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갑작스레 훅하고 들어오는 기묘한 감정에, 소연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우진은 자신의 이야기를 짧게 풀어놓았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