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34화 (34/315)

34화

시공(施工)

다른 신입생들에 비해 한 과목을 덜 듣는 우진의 시간표는, 그렇게 빡빡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간표 안에서도 아무 수업도 없는 날은 하루뿐이었고.

오늘이 바로 우진의 공강 날인 금요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진에게, 늦잠을 자거나 뒹굴거릴 시간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실이 조금 부실해 보여서, 구조체를 좀 덧대줘야 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렇군요.”

“시선이 잘 닿지는 않는 부분이니, 여긴 석고보드 몇 장 덧대서 시트로 마감처리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비용은 얼마나 추가될까요?”

“많아야 오십만 원을 넘지 않을 겁니다.”

우진은 지금 현장에 나와 있었다.

오늘은 시공에 앞서, 마지막으로 천웅건설의 디자인팀과 함께 현장을 체크 하는 날.

천웅건설 측에서는 디자인 팀장인 손준기가 현장에 나와 있었고.

우진은 그와 함께 마감재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체크 해 가며, 의견을 조율하는 중이었다.

“손 팀장님. 여기 머테리얼 보드(Material Board)*[공사에 사용되는 각종 마감재를 분류해 놓은 서류]에 표시되어 있는 마감재, 혹시 좀 바꿔도 됩니까?”

“음. 이거면……. 출입로 양측으로 이어지는 아트월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이정도면 제 재량으로 가능하긴 한데……. 어떻게 바꾸시려고요?”

지금까지 두 사람의 최종 디자인 점검은, 아주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왔다.

사실 시공업체의 디자인 이해도를 확인하러 손준기가 직접 나온 것이었는데.

지적하거나 시정 해야 할 거리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우진의 세심함과 꼼꼼함에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준기는 우진의 첫 번째 제안에, 큰 거부감 없이 호의적으로 대답하였다.

사실 시공업체가 마감재 변경제안을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디자인팀 입장에서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이 아트월이 지금 사실상, 고객들의 동선을 유도하는 역할이잖아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사선으로 붉게 깔리는 이 타일들 말입니다.”

“말씀하세요.”

“면적을 조금 줄이고 포인트를 줘서, 아예 천연 대리석으로 시공해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예에?”

우진의 말을 들은 준기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제안에 불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우진의 제안은 마감재의 업그레이드였고, 천웅건설의 입장에서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시공단가는 이미 픽스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공간에 생각지 못했던 하자가 있어서 추가공사를 해야 하는 것이라면 비용이 추가되겠지만, 이미 결정된 디자인 시안의 마감재를 바꾼다고 예산이 추가 지급되지는 않는다.

이미 WJ 스튜디오는 최종 계약서에 사인을 한 상태였고, 자재 변경 의견을 낸 것은 준기가 아닌 우진이었으니까.

그래서 보통 이런 경우에 시공업체들은, 더 싸구려 자재를 사용하기 위해 얕은수를 쓰기도 한다.

그런데 우진은 오히려 더 비싼 자재로 업그레이드를 제안했다.

해서 준기는 의아했지만, 일단 우진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어떤 대리석을 쓴다는 건지,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뭐, 의도 자체는 좋은데……. 그래도 디자인 컨셉이 바뀌어선 안 됩니다.”

“그 말씀은……?”

“마감재의 종류가 바뀔 수는 있어도, 색감이나 톤 자체가 바뀌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기존 적갈색 타일과 비슷한 색감의 대리석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그거라면 당연합니다. 기존 색감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대리석을 미리 생각해 뒀으니까요.”

자신 있는 우진의 대답에도, 준기는 아직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존의 폴리싱 타일은 채도가 높아 브라운보다는 레드에 가까운 적갈색이었고.

이렇게 붉은 채도를 유지하는 천연 대리석은 그리 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인조대리석이면 몰라도, 분명 천연 대리석이라고 했는데…….’

준기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우진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가방을 열어 자신의 머테리얼 북을 꺼냈다.

이어서 천연 대리석 페이지를 펼친 뒤, 한쪽 구석에 붙어있는 붉은 대리석 조각을 검지로 짚었다.

“여기 보이는 ‘로소 레판토’ 정도면 어떻습니까.”

로소(Rosso)는 이태리어로 ‘붉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정열적인 붉은 빛깔을 띈 대리석이 로소 레판토(Rosso Lepanto)였다.

선명하게 짙붉은 빛깔을 띤 대리석을 보며, 준기의 입에서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음…….”

사실 디자인 팀장인 준기도, 모든 대리석의 종류와 단가를 달달 외우진 못한다.

해서 우진이 제시한 이 붉은 대리석이, 정확히 어떤 자재인지까지 기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벌써 10년이 넘게 이 일을 해오는 그는, 감으로 알 수 있었다.

비싸다.

우진이 제시한 이 대리석이, 무척이나 고가의 대리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예쁘네요.”

“그렇죠?”

“확실히 포인트 디자인으로 이 녀석을 발라주면……. 고급감이 확 살아나긴 하겠어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진과 시선이 마주친 준기는,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사실 우진의 제안이 그의 마음에도 쏙 들었기 때문에,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궁금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마감재가 업그레이드된다고 해서, 추가비용이 따로 지급되진 않습니다.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홍보관으로 통하는 출입로는 꽤나 중요한 공간이다.

고객들이 공간에 들어서며 처음 만나게 되는 섹터였으며, 때문에 프리미엄관의 첫인상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기존에 마감재로 지정되어 있던 붉은 빛깔의 폴리싱 타일도, 타일치고는 꽤나 고급 자재였다.

600미리 타일 한 장당 대략 2~3만 원 정도 하는 녀석이었으니, 다른 타일의 2배 가까운 값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천연 대리석에 비할 수는 없다.

게다가 우진이 제시한, 한눈에 봐도 고급 져 보이는 로소 레판토라면.

모르긴 몰라도 기존 타일의 열 배는 넘는 가격이리라.

“뭐, 생색내려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지만, 아마 기존보다 오백 정도는 더 깨질 겁니다.”

“…….”

“그래도 전 그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어째서요?”

“오백만 원으로 WJ 스튜디오의 신뢰도와 인지도를 확 올릴 수 있다면, 제 생각엔 남는 장사니까요. 그것도 아주 많이.”

우진은 설명이 충분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준기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거 하나 바꾼다고, 시공업체의 신뢰도나 인지도가 올라간다고?’

물론 ‘이거 하나’는 아니었다.

그 뒤에도 우진의 제안은, 서너 번 더 이어졌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더 바꾸고 싶은 부분은 없습니다.”

“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데……. 기분 탓입니까?”

“하하, 팀장님. 기분 탓입니다.”

우진이 계산하기로. 자재비용은 약 삼사천만 원 정도 증가했다.

WJ 스튜디오가 남길 수 있는 돈이, 그만큼 줄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우진은 이것이, 더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우진이 추가로 들인 비용은 삼사천 정도겠지만.

천웅 관계자들이나 프리미엄관 고객들이 느끼는 인테리어 고급감은, 시공비 일억 이상이 추가된 효과일 테니까.

우진이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 테니까.

‘기존이랑 느낌이 완전히 다를 거야. 이제 공사만 잘하면……. 그림 한 번 제대로 뽑아낼 수 있겠어.’

게다가 이 홍보관에서 메인으로 밀어줄 컨텐츠 또한, 우진이 만든 건축모형이다.

손준기는 느끼지 못했겠지만, 우진이 제안한 디자인 변경 건들은 조금이라도 그 모형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때문에 그 누가 어떻게 생각하던, 우진으로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투자라고 할 수 있었다.

“더 이야기하실 부분은 없죠?”

“완벽합니다. 오늘 이야기한 대로만, 확실하게 시공해 주신다면 말이지요.”

“그럼, 내일 아침 일찍부터 공사 시작하겠습니다.”

우진이 손을 내밀자, 팀장 손준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 대표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완성된 프리미엄관의 모습이 기대되는군요.”

“적어도 실망하시진 않을 겁니다. 하하.”

손준기와 마지막 조율을 끝낸 우진은, 노트에 몇 가지 메모를 추가한 뒤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어서 휴대폰을 꺼낸 그는,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디자인 변경 픽스 했어.”

[그래? 그럼 이대로 발주 넣는다?]

“그렇게 해줘 형.”

[뭐,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되지만, 대표님이 시키는데 해야지 뭐.]

“흐흐. 그럼 좀 부탁할게.”

휴대폰 너머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바로 어제 WJ 스튜디오에 합류한 진태의 목소리였다.

진태는 지난번 우진이 샀던 것 이상으로 거하게 고기를 대접한 뒤.

그 길로 우진의 작업실에 와, 고용계약서에 사인을 했던 것이다.

우진은 오늘 외부에서 움직일 일이 많았기 때문에, 자재 발주를 진태에게 대신 부탁하였고 말이다.

잠시 후 모든 견적서가 간결하게 정리되어 우진의 문자로 날아왔고, 그것을 본 우진은 헛웃음을 지으며 지하철 역사로 걸어 들어갔다.

“히야, 어쩌면 오천은커녕……. 삼천도 못 남기겠는데 이거?”

벌어들일 돈이 더 줄어든 상황이었지만, 우진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완공 후에 더 큰 이득이, 이미 눈 앞에 아른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시 휴대폰을 든 우진은, 쉴 새 없이 계속 전화를 돌렸다.

우선 내일 시공 일정에 필요한 철거 인력 수급부터 체크했으며…….

“예, 소장님! 내일입니다. 아시죠?”

[안다 녀석아. 내가 무슨 아마추어도 아니고…….]

“아침 7시에 문 열어놓는답니다. 그때까지 철거반 보내주세요!”

[정확히 맞춰 갈 거야. 일 하나는 확실하게 하는 놈들로 보냈으니까.]

“흐흐, 역시 소장님! 감사합니다!”

미리 컨택해 둔 다른 작업반의 반장들에게도 한 번 더 연락을 돌렸다.

“김 반장님! 저 WJ 스튜디오 서우진입니다.”

[아, 서 대표님이시군요. 김진태 반장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내일 모레 목공 시작입니다. 전기는 오후부터 작업하면 되니까, 1시까지만 현장에 와주세요.”

[배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진은 정말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전화를 돌리는 것뿐 아니라, 발로도 하루 종일 뛰어다닌 것이다.

특히 가장 많이 움직인 것은, 최대한 저렴하고 좋은 자재를 떼어 오기 위한 발품.

더 좋은 시공 퀄리티를 위한 투자와 아낄 수 있는 돈을 아끼기 위한 흥정은,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후우, 그래도 어떻게 일정은 다 소화했네.”

계획했던 모든 일정을 끝낸 우진은,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피로는 몰려왔지만, 그것과 별개로 정신은 아주 맑은 상태였다.

‘내일부터 드디어……. 착공인가?’

오늘도 그렇게, 여느 때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우진의 하루가 또 한 번 지나갔다.

그리고 WJ 스튜디오의, 첫 번째 공사가 시작되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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