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신입사원
우진의 수요일 수업은, 조운찬 교수의 디지털 공간 그래픽과 글로벌 문화 이해하기였다.
지난주 조운찬 교수의 휴강 선언과 제이든의 꼬드김으로, 하루 깔끔하게 놀았던 시간표.
하지만 당연히도 오늘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조운찬 교수는 정시에 강의실에 들어왔고, 수업은 시작되었으니까.
“지난주에 휴강해서 아쉬웠죠?”
“네!!”
“이제 중간고사 때까지, 휴강은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
학생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표정이었지만, 조운찬 교수는 웃으며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우진은, 그 어느 때 보다 집중하여 수업을 듣기 시작하였다.
‘다른 수업도 중요하지만, 조운찬 교수 수업만큼은……. 무조건 제대로 들어야 해.’
우진의 전생에서 조운찬은, 젊은 나이에 플리츠커 상을 받은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디자이너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뒤인 2014년 이후.
지금도 건설 중이며 훗날 동대문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을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가 2014년 3월에 완공되는데, 이 건축물의 설계 과정에 조운찬이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 DDP를 디자인한 건축가는, ‘자하 하디드’ 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 건축가이다.
때문에 이때 조운찬은, 디자인으로서 유명해진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DDP에는, 조운찬의 디자인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았으니까.
다만 DDP를 시공하는 도중에 생겼던 제법 유명한 이슈의 중심에, 조운찬이 서 있었을 뿐이었다.
‘DDP는 처음에, 시공이 불가능한 디자인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던 건축물이었지.’
지금은 아직 건설 시작단계였지만.
우진이 회귀하던 때에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라고 하면, 업계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수식어는 바로 ‘세계 최대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이었다.
내, 외부 어딜 봐도 직선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마치 우주선같이 생긴 건축물.
4만 5천여 장에 달하는 각기 다른 형태의 유기적인 외장패널을 이어 붙이기 위해, 3차원 입체설계 방식을 한국 최초로 도입했던 건축물.
당시 서울시는 자하 하디드라는 천재적인 건축가의 작품을 건축물로 구현해 내기 위해,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이라는 건축기법을 도입하였었다.
정확히는 서울 디자인 재단과 SH물산이라는 업계 1위의 건설업체가 협업하여, 결국 이 기하학적 구조의 건축물을 성공적으로 준공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명해진 것이 바로 조운찬이었다.
그가 해외에서 연구하고 학위를 땄던 분야가 바로 BIM 공법과 관련된 것이었었고.
3D설계기법을 사용해 시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 바로 조운찬 이었으니 말이다.
해서 우진이 조운찬 교수에게 배우고 싶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조운찬 교수의 눈에 들어서, 그가 공부한 3D 설계기법을 전부 배워내야 해. 시간이 지날수록 비정형 건축물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더 늘어날 테니 말이지.’
물론 1학년 수업에서 조운찬이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디지털 공간 그래픽’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수업은, 사실 가벼운 3D 모델링을 배우는 수업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진이 수서 현장에서 사용했던 스케치업이 3D계의 그림판 같은 프로그램이라면, 조운찬이 가르치는 프로그램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모델링 프로그램인 3Ds Max.
심지어 이 맥스는 우진이 전생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프로그램이었기에.
디지털 공간 그래픽 수업은, 여러모로 우진이 열심히 들을 수밖에 없는 수업이었다.
“자, 좌 클릭하면 화면 중앙에 피벗(Pivot)이 생겼죠? 이걸 기준으로 드래그해서…….”
스케치업과 조작방식이 달라 처음에는 조금 헷갈렸지만, 그래도 우진은 다른 신입생들보단 훨씬 빠르게 프로그램을 배워 나갔다.
다들 우진 못지않게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이미 스케치업 이라는 3D프로그램을 어느 정도 통달한 경력이 있는 우진이 당연히 빠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가상공간에 삼차원 모형을 그려내는 작업인 ‘3D모델링’의 본질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오늘 수업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첫 수업이니 과제는 내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오늘 배운 것들, 한 번씩은 다 다시 해보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나긋나긋한 조운찬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수업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힘없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하…….”
“이거 왜 이렇게 어렵냐.”
“으아아, 하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그런 동기들의 한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우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델링에 대한 개념도 없는 상태에서 3D맥스라니……. 어려울 만도 하지.’
하지만 한숨을 내쉬는 학생들 사이에서 단 한 명.
수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컴퓨터 앞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 인물이 우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다름 아닌 제이든.
어울리지 않게 인상까지 팍 쓴 채로, 열심히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그를 보며, 우진은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물씬 솟아올랐다.
“야, 제이든. 수업 끝났잖아. 그만 일어나.”
“오우, shit. 잠칸만, 브로. 이거 지금, 이해하고 가야돼.”
“우리 교양수업 몇 시지? 삼십 분 남은 건가?”
“방해하지 마, 우진. 나 지금 진지해.”
붉어진 얼굴로 구시렁거리는 제이든을 보며, 우진이 슬쩍 한마디를 던졌다.
제이든을 낚기 위한, 미끼를 슬쩍 투척한 것이다.
“그거, 자꾸 선만 그려지고 면이 안 올라와서 그러는 거지?”
“What? 그걸 어떻게…….”
“형이 알려줄 테니까, 컴퓨터 끄고 따라와. 커피나 한잔하면서 얘기하자고.”
우진의 말에 반색한 제이든은, 그대로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진 형, 이거 잘해?”
조금은 의심스런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호의적인 목소리로 묻는 제이든.
그런 그를 향해, 우진이 씨익 웃으며 얘기했다.
“적어도 오늘 했던 건 다 이해했어. 그러니까 따라오기나 해.”
“Bloody Hell…….”
또다시 행복해진(?) 제이든을 강의실에서 끌고 나온 우진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멀대 하나를 더 대동하여 카페로 향했다.
오늘 수업이 끝나 집에 가려던 선빈까지, 함께 카페로 끌고 온 것이다.
선빈은 약간의 앙탈을 부렸지만…….
“너도 와, 선빈.”
“나 바쁜데…….”
이 순수한 멀대를 꼬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잔말 말고 따라와. 핫초코 큰 사이즈로 하나 사줄 테니까.”
“콜.”
까페에 도착한 세 사람은, 구석의 제법 편한 자리에 둘러앉았다.
이어서 핫초코를 쪽쪽 빨고 있는 두 멀대를 보며, 우진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였다.
“야, 선빈, 제이든.”
“응?”
“뭐야, 왜 무게 잡고 그래 형.”
당연한 얘기겠지만, 우진이 둘을 여기까지 데려온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너희, 돈 좀 벌어볼 생각 없냐?”
“Money?”
“아르바이트?”
사실 이유란 간단했다.
모형작업에 도움이 될, 적절한 일손이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뜻밖의 변수로 인해, 일정이 반 토막 나버린 WJ 스튜디오의 외주.
그 일정 안에 작업을 완성해 내기 위해, 우진은 일개미를 포섭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 둘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선빈이야 디자인의 밤 때 괜찮은 실력을 확인해서였고.
제이든은 미래의 스타 디자이너였으니, 모형작업 실력이 궁금해서였다.
인물 자체가 재밌기도 하고 말이다.
우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형 작업실 있는 거 알지?”
“알지.”
“작업실?”
우진은 자신의 작업실에 대해 모르는 제이든을 위해 간단히 설명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 형이 건축모형 알바를 시작했는데…….”
굳이 세세한 설명까지 늘어놓지는 않았다.
일단 한번 일을 해보고, 길게 갈 만한 인재라고 생각될 때 하나씩 풀어도 늦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단 첫 번째 일개미 후보였던 선빈부터가, 곧바로 우진의 제안을 거절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일손이 부족하니 같이 모형 알바를 하면……. 알바비를 좀 챙겨주겠다는 말이지?”
“맞아, 그거지.”
“난 안 할래.”
“왜?”
“요즘 준비하는 게 좀 있거든.”
“준비?”
“여튼, 좀 바빠. 사실 솔깃하기는 한데……. 아무래도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솔직히 선빈만큼은 거절하지 않을 줄 알았던 우진은, 살짝 당황하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기에, 딱히 더 얘기를 꺼내기도 애매했다.
“그럼 제이든은?”
제이든의 의사를 묻는 우진의 표정은 살짝 긴장되었다.
물론 이 둘 말고도 써먹을 동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제이든조차도, 그렇게 끌려 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나, 아르바이트 필요 없어.”
“응?”
“아빠가 용돈 많이 줘.”
“…….”
우진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아빠가 용돈을 많이 준다니!
하지만 기가 막힘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생각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생각해보니, 제이든 테일러는 부자였지.’
그의 부모가 정확히 뭐 하는 사람인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에서 제이든에게 유명세를 안겨줬던 한남동 건축물의 건축주가 그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이, 문득 우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 건물 시세가 최소 200억은 넘었을 테니까.’
그게 최소 십몇 년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 없던 돈이 그때 200억이나 생기지는 않을 터였다.
우진이 회귀한 것처럼, 정말 특별한 일이 생기거나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제이든은, 돈 말고 필요한 게 따로 있었다.
“돈은 안 줘도 돼, 우진.”
“응?”
“나랑 같이 맥스 해주면, 네 작업 도와줄게.”
“오호?”
유창하면서도 뭔가 의미전달이 어눌했지만, 우진은 제이든이 하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3D맥스 공부를 도와달라는 말이겠지.’
그리고 그 제안은, 우진에게도 나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우진 또한, 맥스 공부를 열심히 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하여 우진은 망설임 없이, 제이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제이든. 그러자고.”
우진이 주먹을 내밀자, 제이든이 씨익 웃으며 자신의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쳤다.
“Deal.”
그리고 그것으로, WJ 스튜디오의 첫 번째 일개미가 선출되었다.
‘좋았어.’
물론 제이든이 돈을 안 줘도 된다고 했다 해서,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뭐, 선빈이는 좀 아쉽긴 하지만, 바쁘다니까 어쩔 수 없지.”
“미안해 형.”
“아냐, 바쁘면 먼저 가 봐. 나는 제이든이랑 곧 교양 들으러 가야 하니까.”
“알겠어, 그럼 먼저 가볼게.”
자리에서 일어난 선빈은 정말 바쁜 것인지, 서둘러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제이든과 둘이 남겨진 우진은, 일개미의 신뢰를 얻기 위해 떡밥을 좀 더 뿌리기 시작하였다.
“제이든, 너 노트북 있지?”
“응.”
“맥스 혹시 깔려있어?”
“Sure.”
제이든이 노트북을 켜자 그 앞에 앉은 우진은, 능숙하게 마우스를 움직여 맥스를 세팅하였다.
이어서 교양수업까지 남은 30분 동안.
제이든과 나란히 앉은 우진은, 오늘 수업내용을 하나씩 재현해 주었다.
자신도 수업 내용을 한 번 복기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이렇게 한 번에 삼차원 도형을 만들어주는 툴도 있지만, 평면을 Extrude 하는 방법도 있어.”
“도형의 세그먼트를 직접 움직여서, 모양을 변형시킬 수도 있지.”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보던 제이든이 행복해졌음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와우. Bloody Hell!”
피와 지옥을 좋아하는 이 특이한 영국 친구와 우진은, 그렇게 조금씩 더 친해지기 시작하였다.
골든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