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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프린트-23화 (23/315)

23화

제이든 테일러(Jayden Taylor)

“내일 임원 회의가 있어.”

“이걸 내게 주면, 내가 최대한 예산은 땡겨 와 보도록 하지.”

“이틀만 시간을 줘.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우진의 모형을 확인한 박경완은, 헤어지는 순간까지 기분 좋은 표정으로 파안대소했다.

기상천외한 모형을 가져온 우진 덕에, 생각지도 못했던 카드가 하나 생긴 셈이었으니까.

‘확실히 박경완을 선택한 건, 괜찮은 한 수였다니까.’

사실 박경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우진을 더 이용해 먹을 수도 있었다.

실력과 별개로 우진의 사회적 위치는 한낱 대학생일 뿐이었고.

경완은 그에게 일거리를 주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경완은 그러지 않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함부로 가르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우진은 경완의 태도와 별개로 어떻게든 길을 만들었겠지만, 그래도 그의 호의 덕분에 일이 더 잘 풀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진은, 받은 대로 돌려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부장님이 최대한 예산을 땡겨 보겠다고 했으니……. 일반 모형 외주의 1.5배 정도까진 단가를 맞춰볼 수 있으려나?”

우진이 계산하기로 이정도 규모의 모형 외주라면, 시세를 감안했을 때 대략 천 이삼백만 원 선에서 계약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경완은 이 모형의 가치를 알아봤고, 최대한 많은 예산을 당겨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우진이 내심 예상하는 액수는 천 칠백에서 이천만 원 선정도.

물론 이정도 퀄리티의 모형은 일반모형의 세 배가 넘는 가치라고 생각하지만, 대기업 예산이 그렇게 쉽게 재가(裁可)날 리는 없었으니까.

‘제작원가는 대략 백오십만 원 안에 맞출 수 있을 것 같고, 그럼 못 해도 천오백 이상은 남겠지. 석현에게 외주 비용으로 사백오십 정도 끊어줘도, 무리는 없겠어.’

당장 통장의 돈이 바닥나기는 했지만, 재료 매입비용은 걱정할 필요 없었다.

계약금으로 10~20% 정도는 미리 받을 수 있을 테니, 그것으로 재료를 충당하면 되는 것이다.

‘천오백 정도에 이정도 퀄리티를 뽑아주는 게 수지 안 맞는 장사긴 하지만……. 그래도 더 길게 봐야 하니까.’

당연히 우진은, 이번 외주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나면 천웅건설 쪽 일을 싹 다 끌어올 생각이었으며.

우진의 모형이 들어간 모델하우스가 열리면 이슈메이킹을 해서, 더 많은 대형 건설사들의 외주를 모조리 긁어모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닥치는 대로 모든 일을 받아서 할 생각은 없었다.

우진이 생각하는 계획은 바로, 건축모형의 프리미엄화.

그는 일반모형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력의 두세 배 이상으로 최고의 모형 퀄리티를 유지하는 대신.

최소 다섯 배 이상의 단가를 형성시키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조 단위가 움직이는 아파트 건설 사업장에서.

확실한 마케팅 효과만 보장된다면, 몇천 정도는 우스운 단위의 금액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완벽해 보이는 계획에서, 우진이 한 가지 놓친 부분이 있었다.

“엇, 부장님. 이틀 정도 필요하시다더니, 빨리 연락 주셨네요?”

오랜만에 야근(?) 없이 숙면을 취하고 등교 중이던 우진의 휴대폰으로, 오전부터 박경완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결정 났다.]

“벌써요?”

[내가 미리 작업을 좀 쳤지.]

“네?”

[이번 외주 단가, 삼천오백 쳐주마. 이정도면 만족하겠지?]

“……!”

경완이 부른 액수에 너무 놀란 우진은, 순간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삼천…… 오백? 진짜로?’

물론 궁극적인 우진의 목표는, 이 정도 규모의 외주 한 번에 오천 정도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시장에서 형성된 시세라는 게 분명히 있었고, 꽉 막힌 대기업에서는 그 틀을 깨뜨리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박경완이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거의 세 배 가까이 단가를 튀겨 온 것이다.

“물론……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요.”

우진의 목소리가 재밌었는지, 수화기 너머로 호탕한 경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프하핫, 네놈도 놀라긴 놀라는 모양이구나.]

“솔직히 이렇게까지 땡겨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난 한 사천까지 땡겨보려 했어. 아직 검증이 덜 돼서 이 정도가 한계였던 거지.]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우진의 목소리를 들은 경완이, 마치 무용담을 늘어놓듯 자신의 수완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듣던 우진은,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박경완이……. 이정도 능력 있는 아재였나?’

하루 반나절이라는 짧은 시간에 경완이 한 것은, 재무팀과 마케팅팀을 먼저 설득하는 것이었다.

건축모형의 예산을 단지 모델하우스 건설예산에서 세팅한 것이 아니라, 마케팅 부서의 입김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너, 마케팅에 매일 얼마나 많은 눈먼 돈이 증발하는지 아냐?]

“제가 어떻게 압니까.”

[뭐, 구체적인 액수를 말해줄 순 없지만……. 대기업 마케팅이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거든.]

작게는 전단지부터 시작해서, 옥외 광고판, 대형 플렛폼 메인 배너까지.

매년 대규모 비용을 태우는 천웅건설 마케팅 부서에게 몇천 정도는 그리 크지 않은 액수였고. 경완이 해낸 건 그들을 혹하게 만든 것이었다.

모형에 투자하는 일이천 정도로, 모든 마케팅 효과를 대폭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이다.

경완의 제안에 혹한 마케팅팀이 재무팀을 들들 볶았고.

결국 오늘 있었던 오전 회의에서 모든 임원진이 우진의 모형을 함께 보게 되었다.

그 결과 뽑혀 나온 예산이, 경완이 말한 삼천 오백만 원이었던 것.

물론 우진의 모형이 누구든 혹할 만큼 높은 퀄리티로 뽑혔으니 가능한 시나리오였지만, 그래도 경완의 능력이 대단한 것은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었다.

[너, 이번 아현 3-2구역에서, 천웅건설 프리미엄 브랜드가 런칭 되는 건 혹시 들었냐?]

우진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대답하였다.

“글쎄요. 아파트 벽에 새겨진 Clio? 이게 신규 브랜드였나 봐요?”

원래 천웅건설에서 짓는 아파트의 브랜드는 단순히 CW였다.

천웅의 약자를 따서, 그대로 아파트 브랜드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치열해지는 건설사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천웅건설은 큰 모험을 감행했다.

클리오(Clio)라는 프리미엄 브랜드를 새로 런칭하면서, 기존에 고수하던 아파트 외관 디자인까지 싹 다 바꾼 것이다.

그리고 우진이 기억하는 전생에서, 천웅건설의 이 전략은 완벽히 먹혀 들어갔다.

업계 10위에 간신히 턱걸이 중이던 천웅건설이, 클리오라는 브랜드를 런칭하면서 몇 년 안에 5위권으로 뛰어올랐으니 말이다.

사실 우진은 이 아현 3-2구역에 지어질 아파트의 풀 네임까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Mapo Clio Prestige). 말 그대로 대박 났던 아파트지.’

신축 아파트들이 들어오기 전 아현동은,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아현 헬 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던 동네였다.

‘아현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개발 예정에 있기는 했지만, 울퉁불퉁한 언덕에 다 쓰러져가는 빌라와 판잣집으로 가득했던 동네의 이미지가 좋을 리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뉴타운이 다 완성된 뒤.

그러니까 약 7~8년 뒤의 아현동은, 완전히 다른 동네가 되었다.

분양가 5~6억 대였던 아파트들은 죄다 10억 이상으로 가격이 튀어 올랐으며.

강북의 신흥 부촌으로 우뚝 자리 잡았으니 말이다.

‘사실 아현동이 입지는 좋았지. 직주근접으로는 이만한 동네도 없었으니까.’

마포대교만 건너면 바로 여의도 증권가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서울역, 종로, 광화문과 인접한다.

이런 위치에 깔끔하게 정돈된 뉴타운이 완성되니, 고소득 대기업 직장인들의 수요가 몰려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천웅에서 지을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 아파트는. 그 아현 뉴타운의 가치를 견인한, 소위 말하는 대장 아파트였다.

그게 우진이 이 아파트를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고 말이다.

크게 흥행할 아파트의 마케팅에 자신의 지분이 들어간 게 알려진다면, 장기적으로 그의 가치도 함께 치솟을 게 당연했으니까.

‘그나저나 이 아재는 갑자기 브랜드 얘기를 왜 꺼내는 거지?’

잠시 뜸을 들였던 박경완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 신규 브랜드 런칭 하면서, 마케팅팀에서 아예 작정하고 홍보관을 오픈할 생각인가 봐.]

“분양 홍보관이요?”

[아니, 모하 말고 인마.]

“……?”

[아예 신규 브랜드 자체를 홍보하기 위한 홍보관을, 따로 꾸미려고 하는 거야.]

박경완의 이야기를 듣던 우진은, 살짝 놀랐다.

‘뭐지? 전생에서도 있었던 일인가?’

사실 그가 전생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클리오 브랜드의 홍보관이 따로 오픈됐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우진이 놀라든 말든, 경완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다리가 잘 맞았어. 이번에 클리오 브랜드 홍보관 오픈하면서 네 모형을 가져다 쓰면……. 그림 좀 제대로 뽑히겠더라고.]

우진의 표정에,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생각지 못했던 이벤트가, 한 가지 더 생긴 셈이었으니 말이다.

‘이래서 삼천 오백이 가능했구나.’

그리고 경완의 이야기를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정리한 우진은, 이 이벤트를 어떻게 최대한 이용할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기 시작하였다.

‘홍보관 오픈 날짜가 언제지? WJ 스튜디오를 알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횐데.’

하지만 우진의 생각은 더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경환의 목소리가, 다시 귓전으로 흘러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우진아.]

“예?”

[이거, 일정 좀 당겨야겠다.]

“일정을…… 당겨요?”

아파트 한 동을 작업하는데, 밤샘 작업을 포함해 꼬박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한데 이 <마포 클리오 프레스티지> 아파트단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총 열여섯 동을 추가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모듈 작업인 것을 감안하면 단순 곱셈으로 시간이 늘진 않겠지만, 그래도 꼬박 세 달 정도는 일정을 잡아야 하는 것.

원래의 일정대로라면 방학 직전까지 시간이 있어서 여유로웠지만, 경완의 말하는 폼을 보니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4월 초까지 끝내보자, 꼬마.]

“네……? 대체 그게 무슨 미친 일정이에요!”

놀라서 지하철인 것도 잊고 큰 소리를 낸 우진을 향해, 경완의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래서 삼천 오백까지 어떻게든 만들어 온 거야. 세상에 공짜는 없다, 짜샤.]

경완의 목소리를 들은 우진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필요 이상으로 잘해준다 싶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만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정도의 기브 앤 테이크는 있어야, 우진도 마음이 편했으니 말이다.

경완의 말대로 세상에 공짜는 없었고, 남에게 빚지고 사는 건 우진의 성격과 맞지 않았으니까.

“좋습니다, 부장님. 어떻게든 한 번 만들어보죠.”

[흐흐,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학교 가서 메일 보내놓겠습니다. 그 주소로 도면이랑 디자인 시안 싹 보내 주세요.”

[알겠다. 수고해, 애늙은이.]

경완과의 전화를 끊은 우진은,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계획이 조금 많이 수정되게 생겼지만, 나쁜 방향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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