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프린트-25화 (25/315)

25화

신입사원

글로벌 문화 이해하기 수업은, 우진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꿀 같은 수업이었다.

뒷자리에 앉아 헬보이(우진은 제이든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와 잡담 좀 나누다 보니, 금세 수업시간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한 데에 대한 부담도 딱히 없었다.

어차피 시험도 없으며, 출석 체크 말고는 평가수단이 없는 수업이었으니까.

심지어 지난번의 결석은 수강 변경 기간임을 감안하여 체크하지도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제부터 출석 도장만 잘 찍으면 2학점을 날로 먹는 셈이었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 헬보이.”

“What?”

“아니야, 암튼 고맙다고.”

아이러니하게도 함께 수업을 듣는 동안, 우진은 제이든과 가장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수업이었다기보다는, 거의 잡담시간이었던 것.

어쨌든 그 덕에 우진은, 제이든이 어떤 녀석인지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진, 저녁에 클럽 어때.”

“우리 바쁘다니까?”

“Oh, shit. 그걸 오늘부터 바로 해야 한다는 거였어?”

“뎃츠 롸잇.”

“제발 이상한 발음으로 영어 하지 마, 우진.”

“웃기는 놈이네. 네가 한국말 하는 거랑 비슷한 거잖아.”

“젠장, 내 한국말 발음이 그렇게 shit이었어? 앞으로 영어로만 말할까?”

“음……. 사실 그 정돈 아니야.”

제이든은 엄청나게 놀기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대체 이런 놈이 어떻게 그런 스타 디자이너가 됐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 헬보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집에 친구들을 불러서 벌이는 파티였다.

“엄마, 아빠는 지금 영국에 계시거든. 우리 집은 넓고, 텅텅 비어있다고.”

재밌는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녀석이 술을 싫어한다는 점.

“술 없이 파티를 한다고?”

“난, 맛있는 것만 먹어 브로.”

“음?”

“술은 쓰고 맛없거든.”

정확히 어떤 파티일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제이든 만큼은 그 파티에서 신나게 노는 것 같았다.

자신의 파티를 설명하는 그의 눈은, 엄청나게 초롱초롱했으니 말이다.

“내년엔 진짜 좋은 집으로 이사하거든? 그땐 너도 초대해 줄게 우진.”

“다음 달도 아니고, 내년?”

“뭐, 그전에도 원한다면 초대해 줄 수 있어.”

“사양할게.”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감은 잘 오지 않았지만, 피자 치킨, 혹은 초콜릿이 메인일 것만 같은 파티에는 딱히 초대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해서 우진은 제이든의 파티에 초대받는 대신, 그를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하였다.

“자, 오늘은 워밍업이야. 딱 세 시간만 하고 가자.”

“Warming-up? 내가 아는 그 워밍업이랑 같은 말을 하는 것 맞지?”

“자꾸 토 달면, 다음 주부터 모델링 같이 안 한다?”

“홀리 쉿. 알겠어. 일단 물 한 잔만 마시고. 시작해 볼게.”

작업을 시작하기 직전까지도, 끊임없이 입을 놀리며 구시렁거리는 제이든.

하지만 막상 작업이 시작되자, 제이든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모형작업에 어느 정도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오우, 이렇게 끼워 맞출 걸 미리 예상하고 잘라둔 거야?”

“당연하지. 모형 제작도 설계가 제일 중요하거든.”

“유 나이스.”

시간이 지나 수업을 마친 석현도 작업실에 나타났고, 그에게도 제이든을 소개해 줬다.

“석구, 여기 우리 신입사원이야.”

“신입…… 사원?”

“인사해, 헬보이. 아니, 제이든.”

“누구야?”

“나랑 같이 일하는 동업자야.”

석현은 신기한 눈으로 제이든을 훑어보았고, 제이든은 별생각 없이 석현에게 인사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작업자가 추가된 WJ 스튜디오의 작업실에는, 점점 더 활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한 사람이 더 추가된 WJ 스튜디오는 마감 기일을 맞추기 위해 항상 불이 켜져 있었으며.

신입사원 ‘헬보이’도, 생각보다 빠르게 작업실에 적응하였다.

웃긴 것은, 석구와 헬보이가 예상보다 죽이 더 잘 맞는다는 점이었다.

“석현, 악덕 업주에게 당장 치킨을 시키라고 요구하자.”

“좋아, 제이든. 만약 시켜주지 않는다면, 노동청에 전화하겠다고 협박해야겠어.”

“얼씨구.”

처음 작업에 합류한 제이든에게서, 가장 많이 느껴지는 감정은 작업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여튼 그 또한 디자인학도였고, 미래의 스타 디자이너였으니.

건축모형 작업에 자연히 흥미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이든의 그 호기심은, 점점 더 ‘재미’로 바뀌고 있었다.

우진과 석현에게서 배우는 각종 모형제작 노하우들이, 그를 완벽히 홀려버린 것이다.

“금속 프레임은, 거울 시트를 사용해서 포인트를 주는 게 좋아.”

“거울 시트? 그게 뭐지?”

“거울처럼 빛을 완전히 반사 시키는 마감 시트인데, 그걸 얇게 잘라서 프레임에 붙이면 금속 느낌이 제대로 살거든.”

“오호.”

그림을 그리는 데 기교와 노하우가 있듯, 모형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진이 가진 노하우가 대부분 모형을 체계적으로 만드는데 필요한 기술들이라면.

석현이 가진 노하우는 도색이나 마감처리 등, 모형의 퀄리티를 높이는 데 좋은 기교와 기술들.

제이든의 손재주는 뛰어난 편이었고, 해서 두 사람의 노하우를 빠르게 흡수하였다.

“창문 같은 부분 끼워 넣을 땐, 무조건 핀셋으로. 지문 묻으면 퀄리티 떨어진다고.”

“스프레이로 초벌 한 번 한 다음에 붓으로 마감 도색 할 예정이니까, 일단 조립 끝난 모형들은 저쪽 방에 모아두자.”

“제이든, 세필 하나 가져와서, 짙은 회색으로 이쪽 얇게 칠해줘.”

“세필이 뭐야, 석현?”

“얇은 붓을 말하는 거야.”

“오케이.”

그리고 세 사람의 작업이 점점 더 시너지가 나기 시작하자, 그것은 우진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속도를 만들어 냈다.

‘이러면 굳이 한 명 더 안 찾아도 되겠는데?’

만약 속도가 지지부진하고 마감에 맞추기 힘들 것 같았으면, 우진은 소연이나 혜진이라도 작업에 부르려 했었다.

동기들 중에 그나마 가장 친한 두 사람이 그녀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석현과 우진의 숙련도도 갈수록 올라가서인지, 작업 속도는 첫 일주일 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빨라졌고.

그 결과 3월이 끝나갈 즈음, 작업의 공정률은 거의 7할 이상 넘어가고 있었다.

“4월 둘째 주 안으로는 어떻게든 끝내 보자, 우진. 4월 하반기부터는, 중간고사 공부도 좀 해야겠어.”

“중간고사는 무슨……. 공대 생활 접고 우리 학교로 편입 어떰?”

“엄빠한테 맞아 죽을 일 있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진이 모형작업에만 모든 신경을 쏟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수업들 중, 필요하다 생각되는 강의들은 열심히 배우며 따라가는 중이었으니까.

덕분에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3D맥스 등의 디자인 툴 실력도 많이 늘어났고 말이다.

‘이번 모형작업이 끝나면, 디자인 툴 공부에 좀 더 공을 들여봐야겠어. 1학기가 지나고 나면, 슬슬 공모전도 알아보고 해야지.’

공모전은 디자이너가 이름을 알리는데, 아주 좋은 수단 중 하나다.

특히 건축디자인 일을 따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학부생들에겐, 자신의 네임벨류를 쌓기 위한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해서 우진은 슬슬, 공모전과 관련된 정보들도 수집하기 시작했다.

굵직굵직한 국내 공모전들은 전생에 참여해 본 적도 있었고 아는 것도 많았지만.

공모전들의 구체적인 타임라인까지 전부 다 기억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딸깍- 딸깍-

저녁 11시가 넘어 석현과 제이든이 귀가한 뒤.

혼자 남은 우진은, 각종 공모전 사이트를 탐색하였다.

그리고 그러던 중, ‘서울시 공공디자인 공모전 SPDC(Seoul Public Design Contest)’라는 한 줄의 글귀가 우진의 눈을 자극하였다.

* * *

선빈은 요즘, 말 그대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동기들은 바쁜 척한다며 핀잔을 주곤 했지만, 그런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선빈이 느끼기에 지금 이 기회는, 1학년인 그에게 오기 힘든 기회가 분명하였으니까.

“선배님들까지 이기긴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특선 이상은 따내고 말겠어.”

물론 공모전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기회라고 할 수는 없었다.

SPDC 공모전의 참여자격은, 현재 서울시 소재 디자인학부에 재학 중인 모든 대학생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선빈은 지도교수인 ‘박준민’에게 선택되었고, 덕분에 일반적인 도전자들과 출발선이 조금 다르게 되었다.

작품 평가에 어떤 이권이 개입한다는 얘긴 아니다.

SPDC의 심사위원들은, 공모전 출품 마감일이 지난 뒤 서울시 디자인재단 내부에서 따로 결정되니까.

그렇기에 출발선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정보의 차이’ 정도로 설명할 수 있었다.

“디자인된 건물의 미관도 중요하지만, 이 공모전은 실제로 지을 건축물에 대한 디자인 공모다, 선빈아.”

“아름다운 미관을 가졌으면서도 현실성 있고, 실용성이 뛰어나며……. 공공성까지도 확실히 고려돼야 입상할 수 있다는 얘기야.”

“건축법에 대한 부분은 내가 주기적으로 컨펌 해줄게. 그러니까 자료조사부터 시작해서, 확실하게 준비하도록 해.”

실제 건축사무소의 대표로 일했던 박준민의 도움은, 신입생인 선빈에게 엄청난 것이었다.

그가 공부하는 데 한계가 있는 수많은 실무적인 부분들을, 현직 교수가 직접 케어해 주는 것이니 말이다.

그것도 보통 대학의 교수도 아닌 K대 디자인학부 교수의 전폭적인 지원을, 신입생 중 몇 명이나 받아볼 수 있겠는가?

‘절대 실망시켜드릴 수 없지.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려야 해.’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그의 목표 중 하나인 AA스쿨로의 유학에도, 분명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공모전이라 하였다.

“AA스쿨에서는 어지간한 공모전 입상성적을 점수로 반영해 주지 않지. 하지만 SPDC라면, 확실히 그들도 매력을 느낄 거야.”

하여 선빈은 요즘, 거의 모든 시간을 이 공모전 준비에 쏟고 있었다.

6월로 예정되어 있는 공모전은 아직 주제조차 발표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지난 입상작들을 분석하고 설계에 대한 지식을 쌓으며, 내실을 최대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실무공부를 위해, 중견 건설 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사무실에도 종종 찾아갈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다.

그리고 그 결과, 선빈은 점점 더 자신감이 생기고 있었다.

‘좋아. 이렇게 조금만 더 준비하면…….’

특선을 넘어 우수상.

우수상을 넘어 최우수상까지.

잘하면 대상을 받아 자신이 디자인한 건물이 서울에 세워질지도 모른다는 부푼 꿈이, 선빈의 가슴에 가득 들어찬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선빈이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음, 생각해보니 SPDC가 있었네. 이거 2010년 수상작이 어떤 거였지?”

과거 수상작뿐 아니라 올해 수상 될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까지도 알고 있는.

규격 외의 존재 하나가, 같은 공모전에 관심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이었다.

골든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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