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음료수만 파는 편의점은 없다 (3)2021.11.19.
아침 일찍 출근한 강 피디는 한 손에 아이스커피를 들고 룰루랄라 걸음을 옮기다가 일순간 멈춰 서고 말았다. 편집실 한쪽에 웅크리고 있는 누군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헉! 감독님!”
권태홍 감독이었다. 하지만 대꾸는 없었다. 편집실 문이 열려있어서 충분히 들었을 텐데도,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미동조차 없다. 그런 그에게 강 피디가 다시 한번 물었다.
“설마 밤새신 거예요?”
“…….”
“대체 뭘 보시는데…….”
의아해진 강 피디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권태홍 감독이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공으로 만든 파도 풀장이 보였다. 그 한가운데에 눈에 띌 정도의 미녀는 아니지만 건강미가 한층 돋보이는 미인이 래시가드를 입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눈에도 탄탄한 몸을 드러낸 남자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물고 있었고.
“서 셰프네요?”
뭔지 알 거 같았다. 얼마 전 남해 통영까지 가서 찍어온 것일 터다.
“이거 편집 끝난 거 아니었어요?”
손이 빠르기로 유명한 권태홍 감독이기에 촬영 다음 날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온 거로 알고 있었다. 이제 여기에 음악을 입히고 자막을 넣으면 얼추 얼개가 맞춰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은 건 다시 한번 손보는 후반부 작업만 있을 뿐. 한마디로 칠부 능선을 넘겼다고 봐도 좋다. 한데도 무슨 고민이 있어서 저렇게 넋을 잃고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눈 밑이 시커먼 것을 보면 아무래도 밤까지 새운 것 같은데.
“감독님, 좀 쉬었다가 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후우! 이건 아냐.”
갑자기 말문을 연 권태홍 감독 때문이었다.
“예?”
“……아니라고.”
“그게 무슨?”
강 피디의 질문에도 권태홍 감독은 대답 대신 인상을 찡그리며 혼잣말을 내뱉을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시 찍어야지.”
“……?”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강 피디. 갑자기 그의 손에서 아이스커피를 낚아채 단번에 빨대를 쭈욱 빨아대더니, 권태홍 감독이 살 것 같다는 얼굴을 했다.
“하!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헐!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자!”
벙찐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강 피디에게 어느 틈엔가 권태홍 감독이 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응? 뭡니까? 이건?”
“뭐긴. 얼른 가서 먹을 것 좀 사 와. 아, 자네가 먹고 마실 것도 포함해서.”
“예. 그, 그러죠.”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서던 강 피디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근데, 방금 전에…… 다시 찍어야겠다고 하신 말씀은 뭡니까?”
“응? 아, 그거…….”
싱긋 웃어 보이던 권태홍 감독이 한차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뭔가 이상하더라고. 뭐랄까, 아무리 봐도 갓솁만이 가진 반짝거림이 없다고나 할까? 흠, 아무래도 그날…… 아팠던 게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이대로는 안 되지 싶어. 그러니 별수 있나? 다시 찍어야지.”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건 또 뭐야?”
스케줄이나 출연료 문제가 걸릴 텐데도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 권태홍 감독을 강 피디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만 강 피디가 한 손에 카드를 쥔 채로 돌아섰다. 혼자 남겨진 권태홍 감독이 핸드폰을 꺼내든 것도 그때였다.
“어디 보자, 실장님 전화번호가 어디 있더라.”
요즘 핫하디 핫한 서진영인지라, 재촬영을 하게 되면 돈도 시간도 더 필요할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얼마가 더 들어도 좋아요. 무조건 최상으로 뽑아내세요. 그게 당신에게 이 일을 맡기는 이유니까요.”
김서연의 말을 떠올리며 권태홍 감독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어딘지 모르게 강압적인 요구였지만, 상관없다. 그런 요구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기에. 머릿속으로 서진영이 레이싱을 하던 때의 얼굴을 떠올리며 권태홍 감독은 한층 짙은 미소를 흘렸다. ***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이들은 또 있었다.
“간단히 작성해봤는데, 알아보기 힘들거나 하진 않으신지?”
강형식의 질문에 장동일 상무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딱 적당해.”
말뿐만은 아닌 듯했다. 장동일 상무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솔직히 그간 말은 안 했다만,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게 베스트지. 다만…….”
“…….”
“너도 알겠지만, 이 일이 실제로 가능하려면 전제가 필요하기에 쉽사리 입 밖에 낼 수 없었을 뿐.”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칼자루의 문제다. 칼을 뽑는 것도, 그리고 휘두르는 것도. 그런 연후에 그 칼로 무를 자를지 혹은 칼춤을 출지는 모르지만, 그 모든 건 결국 칼자루를 쥔 사람의 의지에 달린 것. 그리고 그 칼자루는…….
“저도 녀석이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다행한 일이지. 우리에겐…… 고맙기도 하고.”
보고서까지는 아니지만, 서진영과 나누었던 얘기들을 그나마 핵심만 담아 만든 서류를 한차례 바라보며 강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에선 어딘지 모르게 따스한 느낌이 담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예.”
*** 촬영장은 언제나 그랬듯 스튜디오였다. 다만 오늘은 다른 날과는 사뭇 다를 터였다. 시작은 여기서 하지만, 대부분의 촬영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루어질 터였다. 물론 촬영을 마치는 곳도 여기가 아닐 테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스튜디오로 나선 한진석이 멘트를 던지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예선 경합일입니다. 후우, 맛있는 도전의 오디션을 위해 전국에서 수없이 많은 분들이 각 도시별로 몰려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예선 4번째 시간이 다가왔네요. 아, 말이 길었군요. 예순네 명의 참가자분들께서 한껏 긴장하고 계신데, 더 이상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 끌지 않겠습니다. 자, 모시겠습니다. 오늘도 엄정한 심사와 함께 오디션을 끌어주실 분입니다. 서 셰프님이십니다.”
방청객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서진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즘 엄청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오, 부정하진 않으시네요?”
“민망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크크크,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예전에 비해서 많이들 알아보시는 거로 아는데, 그 때문에 불편하거나 하진 않으신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조금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게 다 절 응원해주시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와, 긍정적인 마인드군요. 그러고 보면 부쩍 팬들도 늘어나신 거로 아는데, 이참에 SNS 같은 거 한번 해보시는 건 어떨지?”
한진석의 질문에 서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건 좀…….”
말을 잇지 못하고 살짝 얼굴을 붉히는 그를 보면서 한진석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녹화방송이니 망정이지, 생중계였다면 모르긴 몰라도 여성 팬들이 지금쯤 TV 앞에서 두 손으로 양 볼을 쥐고 꺅꺅거리지 않을까 싶었다.
“더 이상 서 셰프님을 괴롭히다간 나중에라도 이분 팬들께 협박편지라도 받을까 무서우니, 이쯤 해두도록 하죠. 대신…….”
씨익 웃으며 그가 말을 이어갔다.
“까칠함과 소심함 말고는 볼 게 없는 남자를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장경묵 씨 모셔봅니다.”
방청석에서 환호성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스튜디오 안으로 한 명의 남자가 까불거리며 들어섰다. 거의 10년 차의 경력을 가진 개그맨, 장경묵이었다.
“하하하! 반가워요, 반가워요!”
자기가 무슨 대스타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걸어들어온 장경묵이 다시 한번 자신을 소개했다.
“장경묵입니다.”
와아아아아아! 또다시 방청석이 들썩이자, 그가 한껏 으스대며 거드름을 피웠다.
“봤죠?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뭐야? 너 이런 이미지였어?”
“형, 제가 말했잖아요. 내가 이래 봬도 개그계의 박천호라니까!”
“그러게. 인기 장난 아닌데?”
사담인 듯 사담 아닌 듯 주고받는 두 사람, 한진석과 장경묵이 낄낄거리다가 이내 정색하며 말을 높이기 시작한다.
“오랜만이죠? TV에 출연하시는 게?”
“요즘 많이 바빴거든요.”
“안 불러준 건 아니고?”
“진짜 바빴거든요!”
“지난번에 성무 씨가 그러던데요? 맨날 자기 피시방에서 살다시피 한다고…….”
“에헤이! 그런 거 아니거든요! 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다시금 낄낄거리던 한진석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하자, 장경묵이 얼른 시선을 돌리곤 서진영에게 말했다.
“와아! 실제로 보니까, 장난 아니네요! 헬스 많이 하시나 봐요! 몸이 그냥 돌덩이네 돌덩이! 반가워요, 서셰프님! 아, 서 셰프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예? 아, 예……. 저도 반갑습니다.”
“아참. 대기실에서 보니까, 윤정희 선배님도 와 계시던데. 오늘 게스트가 저 혼자만이 아니었…….”
“야이! 그걸 왜 네가 말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한진석이 순간적으로 표정을 바꾸어 사람 좋은 얼굴을 해 보이더니 웃으며 소개했다.
“데뷔 연도를 따지면 어지간한 분들보다 선배라고 해도 무방하실 겁니다. 그런데도 요즘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 쪽까지 영역을 넓혀 대한민국 안방극장을 석권하시고 계시는 분입니다! 윤정희 씨를 모십니다!”
*** 윤정희의 출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장경묵이 게스트로 출연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아무튼,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있자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이젠 정말 나도 연예인이구나. 뭐, 정확히 말하면 방송인쯤 되겠지만 이런 식으로 쉽게 연예인들을 만나고 또 함께 방송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특히나 한진석이 얘기하는 걸 들으면서도 전혀 위화감 들지 않는 걸 보면.
“와아, 분위기 좋은데요? 윤정희 선배님과 장경묵 씨에 서 셰프님까지. 이 정도면 예능에서는 거의 어벤저스 급 아닌가요?”
“오! 그거 좋다! 표현 굳!”
장경묵이 낄낄거리다가 갑자기 정색하더니 묻고 있었다.
“그럼 난 뭔데? 아이언맨인가? 아니면 캡틴…….”
“예. 그건 장경묵 씨 혼자 있을 때 많이 생각하시고요. 오늘도 변함없이 오디션을 치르게 될 텐데요. 서 셰프님, 어떤 미션을 내주실 거죠?”
난 한진석에게서 시선을 떼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는 윤정희를 지나 방청객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금 눈길을 돌려 이번엔 스튜디오 한쪽에 줄을 맞춰 서 있는 64명의 참가자를 바라보았다. 지난번과는 달리 조리대는 보이지 않았다. 복장도 조리사의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연령대에 맞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천천히 말했다.
“오늘도 팀플입니다.”
웅성거리는 소리.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얘기했다.
“다만. 지난번과는 달리 4명이 한 팀이 됩니다.”
“와우! 그럼 열여섯 팀인가요?”
“맞습니다. 4명씩 16팀이 경합을 벌이게 됩니다.”
“혹시 지난번처럼 팀이 테스트에 통과하더라도 채점 점수가 낮으면 떨어질 수도 있는 겁니까?”
요령껏 끼어들어 물어오는 한진석에게 눈짓을 해 보이곤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이번엔…….”
“……?”
눈을 반짝이는 한진석뿐만 아니라 게스트들, 그리고 방청객들이 궁금한 표정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천천히 얘기했다.
“팀별로 결정됩니다. 본선에 진출할지 어떨지가.”
*** 간단히 설명하자면 4차 예선은 팀별 대항이었고, 예선 무대는 스튜디오가 아닌 길거리였다. 과제는 길거리 음식. 컨셉은 푸드트럭이다. 장소는 이미 섭외를 끝내놓았고, 누구와 팀을 이룰 건지도 내부 회의를 통해 결정해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참가자들은 스튜디오를 떠나 스텝들이 안내하는 장소로 움직여야 했다. 물론 팀마다 VJ가 카메라를 들고 따라붙었다. 한진석과 나 그리고 게스트들은 여전히 방송국에 남아 있었지만.
“다들 상기된 표정들이네요.”
“아유, 겁먹었네. 겁먹었어!”
한진석의 얘기에 장경묵이 얄미운 소리를 하자 윤정희가 손으로 그의 어깨를 탁 치며 한 소리한다.
“얘! 지금 그런 말이 나오니? 애들 불쌍하지도 않아?”
“선배님도 참. 오디션이잖아요, 오디션!”
“그건 나도 알지. 그래도 안쓰럽잖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얘기하고 있는 그들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16개의 화면으로 분할된 4대의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