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음료수만 파는 편의점은 없다 (2)2021.11.17.
의아한 눈빛은 아니다. 다만, 느낀 걸 테지. 내가 아무런 연유도 없이 이럴 리 없다는 걸. 그만큼 지금 내가 녀석을 부른 목소리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당연하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이제까지와는 궤가 다는 얘기가 될 테니까. 지금까지 이어져 온 판을 엎을 수 있느냐 없느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판을 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건……. 성공한다면, 그때쯤 녀석의 입지가 지금과는 전혀 달라져 있을 거란 얘기기도 하고. 가만히 내가 말하기만을 기다리는 강형식의 눈동자가 슬쩍 흔들리는 게 보인다. 속으로라도 웃을 법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나 역시도 떨린다. 이거 진짜 얘기해도 되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대감도 든다. 두려움 속에 흥분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있던 것이다.
“사업 잘되지?”
일단 운부터 띄웠다.
“어? 그, 그렇지.”
“다행이야. 생각한 대로 흘러가서.”
“그렇지.”
“이번 달에도 많이 들어오겠다, 그치?”
“그렇지.”
“이러다가 나 진짜 부자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 아, 벌써 부자인가?”
연거푸 ‘그렇지.’만 세 번을 말한 강형식이 더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바뀌어 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슬쩍 눈빛을 흘린다. 대체 뭘 얘기하려는지는 몰라도, 더 이상 뜸들이지 말고 이실직고하라고. 나도 모르게 입술 한쪽이 말려 올라간다.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빨라요.
“형식아.”
다시 한번 녀석을 불렀다. 이번에도 강형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층 더 강한 눈빛을 흘린다.
“우리 사고 한 번 치자.”
“……?”
눈이 살짝 치켜졌다가 이내 가늘어진다. 의중을 모르겠다는 얼굴에서 한 번만 더 뜸을 들이면 멱살부터 잡아올지 모를 기세다. 크크큭.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왜? 겁나?”
“글쎄다. 사고라면 나도 소싯적에 칠 만큼 쳤다만?”
“그러니까, 더 나이 먹기 전에 한 번 더 치자는 거지.”
“음, 넌 범생 아니었냐?”
“원래 제대로 된 사고는 그런 놈들이 치는 법이잖아? 왜 아닌 거 같아?”
“그렇다 치고. 그래서 무슨 사고를 어떻게 치자는 거지?”
난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곤 물었다.
“오다 보니까 요 앞에 편의점 새로 생겼더라. 여기 안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못 보던 가게가 다 생기고. 참네, 진짜 웃기는 거지. 대한민국 수도라고 해봐야 손바닥만 한데, 뭐 좀 된다 싶으면 건물마다 하나씩 생기니. 커피숍도 그렇고 말이야. 근데, 예전부터 진짜 궁금하던 건데…….”
“…….”
“솔직히 편의점에서 도시락 파는 거 오버 아니냐?”
“흐음, 난 그다지 이용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
“그럼, 거기서 파는 커피도 못 마셔봤겠네.”
“그렇긴 하지.”
“너라면 그럴 만도 하지.”
금세 수긍하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도시락은 말할 것도 없고, 우산에 담배, 손톱깎이, 생리대…… 통신카드까지 팔더라.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백화점인 거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묻는 말에 대답해 줬다.
“브랜드.”
“……?”
“서셰프의 선택 말이야.”
잠시 날 바라보던 강형식의 눈빛이 점차 깊어져 간다. 그러다가 뭔가 깨달았는지 슬그머니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귓가에 쐐기를 박아넣었다.
“음료수만 파는 편의점은 없잖냐.”
*** 내 계획을 모두 들은 강형식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술병을 기울여 잔을 가득 채웠다.
“후아!”
한 큐에 털어 넣으니, 목구멍에 불이 붙는 느낌이겠지.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말리지 않았다. 녀석은 녀석대로 복잡한 머릿속을 가라앉힐 방법과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잠시 기다려주자 녀석은 생각을 정리했는지 대뜸 물었다.
“언제부터냐?”
“뭐가?”
“그런 생각은 언제부터 했냐고.”
언제부터긴. 오늘 낮에 나레이션에게 등 떠밀리듯 억지로 떠올리게 된 거지.
“그걸 알면 뭐가 달라지고?”
“그냥 궁금해서 물었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던지듯 상체를 눕히며 녀석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야.”
“왜?”
“너, 그냥 지금 하던 거 다 때려치우고 나랑 장사나 하자.”
“미친놈. 너 아니라도 언젠가는 나도 장사할 거거든?”
그게 내 꿈인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번듯한 가게를 열고 내가 손수 만든 요리를 파는 것. 어릴 때부터 줄곧 꿈꾸어오던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강형식이다.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니냐.”
“뭐래.”
“너도 알잖아? 솔직히 지금 네가 말한 대로 하려면, 혼자 힘으론 안 된다는 거.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끌어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솔직해질 것까진 없고. 그냥 이제까지처럼 하자고. 넌 사업하고, 난 요리하고. 모양새도 좋잖아? 혹여라도 돈 때문에 싸울 일도 없고 말이야.”
녀석도 알고, 나도 안다. 설사 동업을 하더라도 녀석과 내가 돈 때문에 다툴 일은 없으리란 걸. 모르긴 몰라도 내가 불만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녀석이 내 몫을 떼어줄 테고, 나는 나대로 적정선 이상으론 욕심내지 않을 테니까. 둘이 죽고 못 사는 친구라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저놈이나 나나. 그걸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강형식은 더 이상 토 달지 않았다. 이미 결심이 확고하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네 말대로라면 준비해야 할 게 많을 텐데……. 그거야 나랑 장동일 상무님이 알아서 한다고 치더라도, 넌 괜찮겠냐? 거의 사외이사급으로 신경 써야 할 텐데?”
“못할 건 또 뭐야?”
막말로 망하게 생겼는데 무슨……. 강윤식이 이번에 한서 사운드 건으로 그룹 내에서 확실한 입지를 다지고 나면, 과연 강형식을 그대로 놔둘까? 그때쯤 되면 강 회장은 또 어떻게 나올까? 만일에 하나…… 아니, 그렇게 될 공산이 무척 큰데, 여하튼 지금도 강형식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강윤식이 눈엣가시 같은 녀석을 치워버리고 나면, 나를 어떻게 할지는 뻔한 일이다. 셀럽? 웃기는 소리다. 지금 운 좋게 누리고 있는 인기 같은 건 강윤식이 마음먹고 손을 내저으면 한순간에 쓸려나갈 거다. 돈? 이제껏 내가 벌어들인 돈은, 아닌 말로 강윤식이 하룻밤에 써버려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못할 정도의 푼돈일 수 있다. 당연히 날 지켜주진 못한다.
“아까 말했다시피, 차근차근 범위를 넓혀가자고.”
“아침에 간단히 데워먹을 수 있는, 브런치 류부터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시기적으로도 잘 맞물릴 거 같지 않아?”
“노린 거 아니고?”
“글쎄. 마음대로 생각하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계약조건은 지난번과 같아?”
“그게 중요해?”
“다른 사람들…… 일테면 장동일 상무님 같은 분한텐 그 점도 중요하겠지.”
“그럼, 그런 골치 아픈 문제는 장동일 상무님께 맡기면 되겠네.”
“미친 새끼. 통이 큰 건지, 멍청한 건지. 이럴 때 보면 알 수가 없다니까.”
혀를 내두르는 녀석을 보면서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냥 겁이 많은 거거든? *** 묘수라고 할 수는 없다. 굳이 말하자면, 토끼굴 정도 되려나? 강윤식이 자꾸만 연기를 피워대니까 어쩔 수 없이 살길을 도모하려는 몸부림 정도겠지. 그렇긴 한데, 이게 또 제법 괜찮은 생각이란 게 문제다. 아예 말도 안 되면 코웃음을 치고 말 텐데. 웃기게도 전례가 있거든. 누가 알았겠냐고. ‘서 셰프의 선택’이 주부들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킬 줄. 본질적으로야 사모님의 레시피가 워낙 뛰어난 덕분이겠지만, 운 좋게도 시기까지 맞물려 ‘나’라는 브랜드가 인지도를 갖추며 안 그래도 순항 중인 배에 순풍까지 더해진 결과였다. 아무튼 ‘서 셰프의 선택’이란 브랜드가 대박 아닌 대박을 치고 있는 상황이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품 라인을 확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품목은 거의 무한대다. 각종 수프부터 시작해 간단한 요리까지. 쉽고 빠르게 데워먹을 수 있는 것으로 스타트를 끊고, 그 후로는 좀 더 손이 많이 가지만 대신 이제껏 나온 인스턴트 요리와는 명백히 차별화된 전략을 앞세운다면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다. 질을 높이고, 가격을 낮추는 방식으로 소비자들에게 접근하면서 갓솁이 보증한다는 말만 덧붙이면 적어도 외면받지는 않겠지. 그럼 되는 거다. 무슨 일이든 시작이 중요한 거니까.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되는 거지. 그러다가 나중에는 국수, 스파게티면 같은 것들도 팔고, 흑설탕 같은 것도 팔다 보면 삼한 식품 내에서 ‘서 셰프의 선택’은 고급 브랜드로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삼한 식품의 주가가 올라가는 건 당연한 일이고, 강형식 또한 능력을 인정받게 될 테지. 그다음은 녀석에게 달린 거지만, 일단은 여기까지가 내가 손을 보탤 수 있는 영역이다.
“일단 지르긴 했는데, 이거 잘하는 건지 모르겠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대를 잡고 손이 살짝 떨린다. 젠장. 이래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건데. 안 하던 짓을 하려니까,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게 다 나레이션이랑 엮이면서 시작된 일이다. 후우, 다시 생각해도 파란만장하네. 아직 일 년도 안 된 시간 동안 진짜 무수히 많은 일이 있었다. 황당한 건 아직 진행형이라는 거고. 부르르르.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확인해 보니 이하연이다.
“예, 하연 씨.”
반갑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자정도 훌쩍 넘긴 깊은 밤에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가 살짝 들떠있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 딸이래요!
응? 뜬금없기도 하지. 앞뒤 다 자르고 하는 말이라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게 무슨 얘기죠?”
- 아이참, 유나 언니요!
박유나 씨 얘기인가 본데……. 아! 머릿속에 번뜩이며 지나가는 생각.
“아직 예정일이 2주 정도 남지 않았어요?”
- 아, 진짜 놀랐다니까요! 애가 뭐 그리 급한지, 난리도 아니었어요. 갑자기 양수가 터져서…….
흥분한 건지, 약간은 높아진 하이톤으로 중언부언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두 사람, 이하연과 박유나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아이는 조카나 다름없을 테니.
“지금 어딘데요?”
- 하필이면 형부가 전지훈련을 간 거 있죠. 그래서 언니가 급하게 연락했더라고요.
아니, 다른 가족들은 없나? 친정엄마한테 전화하면 될걸. ……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한 개인사를 모르는 이상 함부로 말할 것도 아니라서 그저 그런가 보다 할 따름이다.
“저도 갈까요?”
빈말로 물은 건 아니다. 놀랐을 두 사람을 생각해서였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보고 싶기도 했고. 돌이켜보면, 박유나의 임신 사실을 처음 알아챈 것도 내가 아니었던가. 나레이션의 얘기를 듣고 알게 된 거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나도 아주 관련이 없다고 할 순 없다. 그래서인지 궁금하다. 아까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테고.
- 오늘 통영 갔다 온 거 아니에요? 피곤할 텐데…….
“어딘지만 말해줘요. 금방 갈 테니까.”
- 여기가 어디냐면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차를 길가 한쪽에 급히 세웠다. 잠시 후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쳐 넣은 뒤 다시금 출발했다. *** 아침 일찍 방송국에 도착해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며 하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여어, 세 셰프님, 굿모닝입니다!”
한진석이 살갑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원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편이거든요. 응? 근데, 셰프님은 어제 잠을 못 주무셨나? 눈이 좀 충혈됐는데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면서 어제 새벽 일을 떠올렸다. 아이는 정말이지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듣기로 갓 태어난 아이는 아직 살이 오른 것도 아니라서 피부도 쭈글쭈글하고 눈까지 감고 있어, 혈육이 아니면 딱히 귀엽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던데. 전혀 아니었다. 눈꺼풀이 덮여 있다곤 해도, 엄마를 빼다 박았다는 게 여실히 느껴질 정도로 눈이 크고 예뻤다. 거기다가 가만히 누워서 손발을 꼬물거리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아직 내 아빠가 되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만, 생판 남이 내가 봐도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인데, 진짜 아빠는 어떤 느낌일까. 아니게 아니라, 박유나가 몇 번의 시도 끝에 미국에 가 있는 남편, 그러니까 애 아빠인 김주형과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무슨 이산가족이 상봉한 줄 알았다. 두 사람 다 어찌나 우는지. 그런데도 행복하다는 게 절절히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더랬지.
“웃으시는 거 보니까, 뭐 좋은 일 있나 봐요?”
건물로 들어가기 전, 한진석이 묻길래 서슴없이 얘기했다.
“그냥요. 꿈이 하나 더 생겼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