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음료수만 파는 편의점은 없다 (1)2021.11.14.
충격적이다. 이제껏 나레이션에게 별별 소리를 다 들어봤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므로. 살짝 민망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울컥한 마음도 든다. 내가 뭘 또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얘기까지 들어야 하는 건지. 그래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속으로 투덜거렸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가 뭔지를 알려주면 될 일이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솔직히 기분이 별로다. 뭐랄까, 장난치다가 걸려서 엄마한테 혼나는 기분이랄까. 이 정도쯤은 괜찮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데, 생각지도 못했을 정도로 크게 야단맞았을 때 절로 입이 튀어나오게 되는 그런 느낌이다. 이런 내 속내를 읽은 건지, 나레이션이 말하고 있었다. - 서진영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음, 나레이션도 진정한 걸까? 말투가 아까와는 사뭇 달라졌다. 평소대로 되돌아왔다고나 할까. - 강윤식은 지금……. 이어지는 얘기들. 그 얘기들을 듣는 사이,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김서연과 권태홍 감독이 인사를 건네왔지만, 나로서는 가까스로 아는 체만 한 뒤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듣는 둥 마는 둥 맞장구만 쳐줄 뿐이었다. 그런 나를 눈치 빠른 한청이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고, 김서연 역시도 뭔가를 감지했는지 묘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으로선 다른 무엇보다도 나레이션의 얘기를 듣는 게 중요했으니까. *** 그로부터 한 시간여 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반쯤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만큼 나레이션이 말해준 것들이 쇼킹했기 때문일 터다. 옷을 갈아있을 때도, 콘티를 확인할 때도, 대본을 읽으며 권태홍 감독의 지시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도 몸 따로 마음 따로. 내가 생각해도 평소의 나답지 않았다.
“컷! 컷!”
벌써 몇 번째 NG인지 모르겠다.
“아, 진짜 오늘 왜 그러……. 후우, 10분만 쉬어갑시다. 그리고 서진영 씨 저 좀 잠시 보고요.”
울컥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권태홍 감독이 한소리를 하려다가 스텝들과 배우들을 한차례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날 따로 부른 권태홍 감독은 그사이 감정을 추슬렀는지 격앙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따지는 거 같지도 않았고. 물론 질책하는 느낌은 확실히 깃들어 있다. 뭔 일인인지는 모르지만, 프로가 왜 이래? 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죄송합니다.”
“후우, 그래요. 사람이 늘 잘할 수는 없지. 그래도, 신경 좀 써주세요. 우리 이거 밥벌이잖수? 프로는 프로답게? 오케이?”
“……예.”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자, 권태홍 감독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는다. 촬영장으로 돌아오는 나를 두 여자가 각기 다른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한청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김서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런 그들에게 옅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별일 아니라는 듯 행동했지만, 솔직히 지금의 난 멘붕 상태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레이션의 얘기대로라면, 이제껏 애써온 것들이 물거품이 될 판이니. 후우, 강윤식……. 진짜 난 놈은 난 놈이네. 정당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일을 꾸미고 실행에 옮기는 결단력만은 과연 대한민국 상위 1% 답다고나 할까. 역시 범은 개를 낳지 않는다는 거겠지. 한서 사운드의 기술을 삼한 전자에서 만드는 핸드폰에 밀어 넣을 생각을 하다니. 아니, 사실 이건 결과론적인 얘기고. 그 이전에 강윤식이 설계하고 수립한 계획과 그걸 밀고 온 배짱이 놀랍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우선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자금을 세탁하고, 그 돈으로 한서 사운드의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당연하게도 명의는 철저하게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서 사운드를 사실상 자신의 소유로 만든 뒤, 현재 그룹 내에서 자신이 가진 지위를 십분 활용해 지난 일 년 동안 논의 중이던 협력사 선정에 뛰어들었다. 대외비라고 할 수 있는 협력 조건에 철저하게 맞춘 건 말할 것도 없고. 협의 안건으로 쓰일 서류가 오늘 회장 선까지 올라갔다는 나레이션의 얘기였다. 그로 인한 회의는 일주일 정도 뒤에나 열리겠지만, 사실상 모든 건 끝난 거나 진배없을 터다. 협력사 선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내 인사들에게 약이란 약은 다 쳐놓은 상태인 데다가, 강 회장이 납득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로 도배해놓다시피 한 상황인지라 이제 와서 판을 뒤집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 특히 강형식이나 장동일 상무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니,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레이션이 나를 통해 말해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듣고 보니 납득이 된다. 장동일 상무도 일찌감치 낌새를 알아채곤 조사에 들어간 상태란다. 다만…….
“타이밍이 문제란 거겠지.”
나레이션이 나서기 전에 모든 게 결정되어버렸다는 것. 한마디로 한발 늦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한발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도 없을 터고. 당연하게도 이번 일이 가져오는 여파는 강형식에게 있어서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겨우 협력사에 불과한 한서 사운드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한 거에 불과하다지만, 그 대상이 무려 삼한 전자라는 게 문제다. 1년 매출만 십조를 상회하고, 브랜드 가치만 따져도 천문학적인 기업. 단일 기업으로는 이미 대한민국은커녕 세계 어느 나라의 기업도 쉽사리 넘볼 수 없는 위상을 지닌 곳이 바로 삼한 전자다. 오죽하면 삼한 전자를 계열사로 두고 있는 삼한 그룹의 규모가 우리나라 재계 2위부터 5위까지를 모두 합산해도 미치지 못할 거라는 얘기가 있을까. 뭐, 실제로 그렇진 않겠지만,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회사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강형식에게 무척이나 위협적이란 것만은 틀림없다. 이러니 내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
“오빠, 괜찮아요?”
촬영장으로 결정된 워터파크 내에 서서 멍때리고 있을 때, 한청이 다가와 묻고 있었다.
“어? 어……. 괜찮아.”
“얼굴 엄청 빨간데. 열나는 거 아니에요?”
머뭇거리다 다시 물어오는 한청을 보고 있는데 녀석이 느닷없이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온다. 그러곤 다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더니 울상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응? 뭐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녀석이 권태홍 감독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 한청의 덕분으로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다. 열이 많이 올랐던 걸까? 촬영을 속행할 컨디션이 아니라고 판단한 권태홍 감독의 지시로 난 지금 호텔 객실에 올라와 쉬는 중이다. 후우, 약을 먹은 덕분인지 몸이 축축 늘어진다. 반면 머리는 아까보다 한결 가볍다. 적어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진 않는다. 그 상태로 30분 정도 지나자, 안개가 껴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머릿속이 점차 맑아지는 느낌이다. 그제야 생각이라는 게 돌기 시작한다.
“이미 닥친 건 닥친 거고. 이제 어쩐다?”
선을 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 그러자 상황이 명료해진다. 대부분이 내가 아닌 강형식이 고민하거나 직접 움직여야 할 것들이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녀석에게 전화해서 지금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정도.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고급 정보라면 고급 정보인데, 그걸 일반인인 내가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니까. 어떻게 얘기해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강형식이 나중에라도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는 거지. 아마 그 때문에 나레이션이 그동안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게 아닐까 싶었다. 자, 그럼 이 문제에 관해선 사실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데……. 하면, 어째서 나레이션은 내게 얘기해준 걸까? 그저 상황의 심각성도 모르고 제트스키나 타겠다고 깝죽거리는 게 보기 싫어서였을까? 그건 아닐 거다. 뭔가 복안이 있다는 건데. 그도 아니면, 다른 돌파구라도 있는 걸까? 또다시 머리가 복잡해지려고 할 때, 이상할 정도로 졸음이 몰려온다. 약 때문인가? 눈앞이 가물거리는가 싶더니 뚝 하고 의식이 끊기며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 귀를 때리는 소리는 바닥까지 깊이 내려가 있던 의식을 끌어올리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진정된 건지 몸 상태가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고, 그 덕분에 벨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눈을 뜬 나는, 지금 내가 누워 있는 곳이 객실 침대 위라는 걸 인식하곤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곤 누군가 연거푸 누르고 있는 차임벨 소리에 반응해 곧바로 침대를 내려왔다. 그렇게 비척거리며 문 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석상처럼 우뚝 서서 귀를 기울였다.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들려주는 나레이션의 얘기에 현 상황을 타개할 복안이 있을 것임을.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5분 정도가 흐른 뒤. 문을 열었다.
“오빠!”
걱정이 한가득인 한청에게 웃어 보였다.
“왔어?”
“……괜찮아요?”
“괜찮지 그럼.”
“전화도 안 받고, 문 두드려도 하도 반응이 없길래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요.”
“약 먹고 자서 그런가, 한잠 들었었나 봐. 쯧, 한심하다 그치? 한여름엔 개도 안 걸리는 게 감기라던데. 몸살인가? 하여튼, 덕분에 살았다. 깨워준 것도 고맙고.”
“피이. 아직 여름 안 왔거든요.”
“응? 그런가?”
다시 한번 씩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짚었다.
“가자. 다들 기다리겠다.”
답이 보여서 그런가, 개운하다. 속도 뻥 뚫린 느낌이고. 잘 될지는 몰라도, 뭔가 돌파구가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없던 힘이 생길 판이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서 강혁만 만나면 되는 건가. 아니, 그전에 촬영부터 마무리해야겠지.
“정말 괜찮은 거죠?”
재차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한청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 이후로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촬영도 무난하게 끝나고, 저녁 무렵이 되어 급히 서울로 올라왔다. 하루 만에 해치우기엔 스케줄이 뻑뻑하긴 했지만, 내일 <맛있는 도전> 촬영도 있는 데다 언제 내 몸 상태가 악화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권태홍 감독이 스텝들을 들들 볶은 덕분이었다. 떠나기 전 김서연이 아쉬운 눈길로 쳐다보긴 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랐다. 이하연을 생각해도 그렇고, 지금 상황이 그녀와 노닥거릴 때는 아니란 판단에서였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휴게소에 잠시 들러 간단히 요기를 한 것 빼곤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자정이 되기 전 톨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었다.
“지금 막 다리 건넜는데? 여기? 강남대로 쪽으로 가고 있어. 어떻게 할까? 거기로 가? 오케이. 알았어. 이따 보자.”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뒤, 한청의 집이 있는 종로 쪽에 들렀다가 다시금 다리를 건너며 강형식과 통화했다. 밤이 깊어서 그런가, 거리는 한산했다. 뻥 뚫린 도로를 내달려 녀석을 만난 곳은 예의 그 카페인지 바인지 모를 가게였다.
“오셨어요?”
이제는 낯이 익다 못해 가벼운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게 된 여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말해준다.
“이미 와서 기다리고 계세요.”
가게에 달랑 하나뿐인 룸으로 들어가자, 강형식이 보인다. 한눈에도 지쳐 보이는 모습으로 넥타이까지 풀고서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밥은 먹고 술 마시는 거냐?”
“점심을 말하는 거라면.”
녀석의 맞은편에 앉으며 혀를 찼다.
“왜? 목욕도 일 년에 한 번, 네 생일 때나 하지?”
“뭐야? 보자마자 잔소리야? 진짜 그러지 마라. 요즘 얼마나 일이 많은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니까.”
“동남아 어디라고 했지? 협의가 잘됐나 봐?”
“베트남. 아, 그리고 일본 쪽하고도 얘기가 오가는 중.”
“잘됐네.”
솔직히 말해서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서 셰프의 선택’을 런칭할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 성공적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니까. 국내에서 대박친 거로도 모자라 해외에서도 입질이 오는 중이라나. 그런 만큼 강형식은 정신없이 바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뭐, 이 타이밍에 녀석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좀 안쓰럽기는 하다만. 어쩌겠냐고. 내가 보기엔 유일한 활로인 것을.
“형식아.”
녀석이 따라준 술잔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불렀다. 강형식이 응? 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