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도약 (3)2021.11.12.
고윤수 주방장님의 숙소에 오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해가 바뀌곤 처음 오는 건가? 그런데도 변함이 없다. 고즈넉한 느낌이었다. 침대 없이 생활하시는 것도 여전하시고, 그렇다고 소파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 그저 바닥에 작은 상 하나만 놓아두고 있다. 그 위에 올려놓은 찻주전자에선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밤이 늦은 터라 공기가 싸늘해진 탓도 있을 터다.
“말해보라우. 무슨 일이네? 진짜로 차이기라도 한 거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기래? 애새끼래 비 오는 날 버려진 강아지 꼴로 걸어가길래, 내래 기런디 알았디 뭐이가. 뭔 일 있는 거이네? 눈가가 시커멓다, 야.”
가만히 날 보고 계신 고윤수 주방장님과 눈을 맞췄다. 깊은 눈빛. 그러면서도 내 속을 읽으려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저 고요하게 기다려주고 있다. 마치 바람을 기다리는 호수처럼.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실은…….”
한참의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고윤수 주방장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저 듣고만 계셨다. 그리고 모든 얘기가 끝났을 때,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셨다. 탁. 가볍게 입술을 축인 뒤, 내려놓는 찻잔이 상위에 놓였다.
“내래 해방 직후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 모르디.”
“…….”
“종각 뒤에 난 길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양아치들이랑 얽혀서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고, 전쟁통에는 총까지 맞아봤더랬디. 한데 말이야, 니래 그거 아네? 사람, 쉽게 안 죽는다는 거이.”
“진짜 힘드셨겠네요.”
“기렇지. 힘들었디. 애미애비 없이 세상 한복판에 떨궈진 애새끼한테 살아남는다는 거이 쉬울 리가 있간? 기래도 이젠 살 만하디 안 갔니?”
후우, 고윤수 주방장님도 강형식과 비슷한 얘기를 하시려는 건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서진영, 고민하라우.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거이야. 기게 인생이야. 니래 남들 하란 대로 살 것도 아니잖네? 기렇다고 누가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고. 기러니, 어쩌갔니? 대갈통이 깨질 것처럼 아파도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답을 내는 수밖에.”
“…….”
“한 가디만 잊디 말라. 니래…….”
“……?”
“요리사야.”
“……!”
“아니네?”
*** 조용한 바임에도 제법 손님이 많았다. 딸랑. 문 위에 걸려 있는 방울이 울렸지만, 누구도 돌아보지 않은 건 그만큼 가게 안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온 남자, 장동일도 신경 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 상무님. 오셨어요?”
얼굴을 보고야 반갑게 맞이하는 여자에게 장동일이 그저 고개만 끄덕거려 아는 체했다. 그러곤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시선이 한곳에 이르러서야 눈을 빛냈다. 저벅저벅. 바닥에 깔아놓은 원목 마루 덕분에 발을 옮길 때마다 묵직한 울림이 일어났다.
“좀 늦었군.”
“아닙니다. 저도 지금 막 왔습니다.”
자리에 앉는 장동일에게 김추성은 친근한 어조로 말하곤 웃어 보였다.
“한잔 드릴까요?”
“맥주, 좋지.”
꼴꼴거리며 잔을 채워가는 황금색 액체를 보다가 장동일이 물었다.
“이제 애가 두 살이던가?”
“곧 있으면 생일이죠.”
“세월 참 빠르군.”
“지난번 돌잔치 때 주신 돈은 정말 잘 썼습니다. 사실 그때 좀 어려웠거든요. 하하, 집사람이 지금도 이사님 얘기만 하면 엄청 기뻐합니다. 언제 한번 들르십시오. 좋아하시는 북어찜 대접하죠. 아, 우리 집사람이 장모님 닮아서 음식 좀 한다는 얘기 드렸던가요?”
“허허. 정말 김 팀장 맞나? 예전엔 그렇게 웃어라 웃어라 해도 삭막할 정도로 차갑게 굴더니만. 쯧, 회사 다닐 때 그랬으면 오죽 좋은가.”
“몇 차례 굴곡을 거치고 나니, 이렇게 되더군요.”
밝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김추성을 잠시 말없이 보던 장동일이 맥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사님 모시고 중동에서 삽질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저도 마흔이 코앞입니다.”
“삽질은 무슨. 그때, 자네…… 운전만 주구장창 하던 거 잊었나? 그리고 지금 늙은이 앞에서 나이 자랑을 해? 자네는 아직 멀었으니 벌써부터 쉰내 나는 소리 하지 말게.”
탁.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장동일 상무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마 옛날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김추성은 삼한 그룹 휘하 삼한 전자의 팀장 출신으로, 흔히들 말하는 자신의 오른팔이었다. 입사 직후 똘똘하게 굴길래 뒤를 밀어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미친 듯이 일하며 능력을 발휘해 불과 6년 만에 팀장 자리에 오른 그였다. 하지만 장동일 상무가 사내 정치에서 밀려나며 김추성 역시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해 지방으로 발령 나게 되었는데……. 대나무처럼 꼿꼿한 성격 탓인지, 부당한 인사 조처에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 회사를 뛰쳐나온 것이다.
“부탁했던 일은 어찌 되었나?”
장동일이 상념에서 빠져나와 묻자, 김추성이 한차례 주위를 살피곤 대답했다.
“확실히 이상하더군요. 한서 사운드라고 하면 그쪽 계통에선 제법 알아주는데…….”
설명이 이어질수록 장동일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렇게 한참 만에 김추성의 얘기가 끝나자, 장동일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눈앞에 앉아 있는 이를 빤히 쳐다본다. 그의 머릿속에 걱정이 스쳐 갔다. 누군가의 뒤를 캐는 일 정도는 사실 회사 직원을 시켜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사외 인력을 동원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강윤식을 의식해서였다. 그렇기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혹여라도 김추성에게 화가 미치지 않을까 하는.
“알고 있겠지만, 조심해야 하네.”
“걱정 마십시오. 하하, 이런 일 어디 한두 번 해봅니까?”
“그리고 여기.”
장동일이 건네는 봉투를 슬쩍 열어본 김추성이 화들짝 놀란다.
“너무 많습…….”
“됐어. 넣어둬. 날 푼돈에 사람 부리는 염치없는 사람 만들지 않으려면.”
“……잘 쓰겠습니다, 이사님.”
*** 늦은 밤이라지만, 사무실의 불빛은 꺼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 아무도 없는 시간대라 더욱 좋았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지만 이렇게 깊은 밤에는 회사에도 직원이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일주일 뒤에 올릴 거라고 했나요?”
강윤식의 물음에 최 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이상 없어야 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최 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저도 무사할 수 없어요. 알고 있죠?”
“그, 그럼요.”
서류를 들어 책상 맨 아래 서랍에 넣은 뒤, 열쇠로 잠그며 강윤식이 말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겁먹은 표정 짓지 말고요. 우리가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들어갈 기술이에요. 그걸 이왕이면 한국 회사 쪽으로 돌리자는 것뿐이고. 아니에요?”
최 팀장은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나 쏟아내고 있었다. 아니긴 개뿔. 원래 삼한 전자에서 고려 중인 음향 회사는 외국계 회사였다. 그것도 일 년 전부터 꾸준히 조사해왔고, 이제 막바지에 이른 상황. 한데, 그걸 강윤식이 단독으로 뒤집으려고 한다. 한서 사운드? 국내에서 제법 알아주는 회사지만, 과연 그 기술력이 세계에서도 통할는지. 의문이 들지만, 그걸 입 밖에 낼 정도로 자신은 멍청하지 않다.
“그……렇죠. 다 회사를 위한 일인걸요.”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고, 표정 관리 잘해요. 혹여라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도록. 가봐요.”
“쉬십시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서는 최 팀장을 보면서 강윤식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사람이 이렇게 없나? 괜스레 떠오른다. 한마디만 하면 척 알아듣던, 김추성 팀장이.
“후우,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면 뭘 하나? 자신의 사람이 아닌 것을.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마는 강윤식.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번 일만 잘되면…….’
사내의 입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룹의 핵심이랄 수 있는 삼한 전자에서도 제법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될 터였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
“진짜 안 돼요?”
보조석에 타고 있던 한청이 간절한 어조로 애원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말해. 안된다니까.”
“히잉. 저, 본선 가고 싶다고요.”
이게 왜 이래? 어디서 애교를!
“징그럽거든!”
“뭐예요! 사랑스러운 후배가 이렇게 귀염을 떠는데, 그게 할 말이에요!”
“흑심이 느껴지니까 그렇지!”
“아잉, 그러지 말고요오오오.”
“야! 미쳤어! 지금 운전 중인 거 몰라?”
“아 몰라요. 사고 나면 우리 둘이 몰래 바람피우다가 죽었…….”
“아직 결혼도 안 했거든!”
“사실은 전…… 애만 둘이에요.”
“장난 그만 치고 이거 놓지 못해! 진짜로 죽고 싶지 않으면!”
그제야 내 팔뚝을 감고 있던 팔을 푼다. 그러곤 한청이 툴툴거렸다.
“치사해. 내일이면 알게 될 일을. 흥! 미션이 뭔지 몰라도 전 통과할 거라고요!”
“예, 예. 그러세요. 그리고 너야말로 너무한 거 아니냐? 내일이면 알게 될 일이라며? 그런데 그걸 꼭 오늘 알아야겠냐고!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궁금하니까 그러죠.”
“어어? 조금 전엔 본선 올라가고 싶어서 그런다고 하지 않았냐?”
“몰라요.”
“얀마! 다시 말하지만, 나도 알려주고 싶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잖냐?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지만, 눈매는 살짝 휘어있다. 얼씨구? 장난이구먼. 하긴, 내가 아는 한청이 그럴 리가 없지. 다른 건 몰라도 요리에 대한 자부심만은 이미 호텔 주방장급인 녀석인데. 겨우 하루 전에 <맛있는 도전>의 예선 경합 미션을 알아봐야 크게 도움 될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 이것만 말해줘요. 이번에도 팀플이에요?”
하아, 장난 아니었어? 난 한청을 슬쩍 흘겨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오늘 사진뿐만 아니라 영상도 찍는다고 하던데, 괜찮겠냐?”
KS 그룹이 개장을 준비 중인 테마파크 광고를 찍기 위해 가는 중이다. 내 소개로 한청은 이미 며칠 전에 계약한 상황이었고.
“걱정 말아요. 저 은근 무대 체질이라니까요.”
“은근은 뭐냐?”
“아, 쫌!”
녀석이 벌컥거리는 걸 보자니,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잘해. 돈도 돈이지만, 기회니까.”
“예.”
차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녀석이 속삭이듯 덧붙였다.
“고마워요.”
“응?”
“고맙다고요.”
“뭐래. 안 들리니까, 좀 크게 말해봐.”
“아씨! 뭐예요! 다 들리는 거 알거든요!”
킥킥거리다가 손을 뻗어 카스테레오를 켰다. 그러곤 얼마 전 구입한 CD를 틀자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 소리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며 운전을 하고 있는데, 한청이 어이없다는 듯 날 쳐다본다.
“뭐? 왜?”
“음악…….”
“…….”
“완전 구려요.”
헐, 얘가 진짜.
“구리긴 뭐가 구려?”
“……이 차 엄청 비싼 차 아녜요?”
“그게 뭐?”
“이런 차 몰면서 뽕짝이 웬 말? 어이가 없네, 진짜!”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웃었다.
“몰라. 내 마음대로 하고 살 거야.”
*** 통영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오! 좋은데? 청아, 바람에서 막 바다 냄새 나는 거 같지 않냐?”
“예! 바람도 좋고, 햇살도 좋아요. 흐흐, 이따가 시간 남으면 우리 바다에도 들어갔다 와요.”
“아직 추울 텐데?”
“5월인데요?”
“그래도 아직 물이 찰걸?”
“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는 건 싫은데.”
“자식하곤.”
한청의 머리를 헝클어뜨리자, 녀석이 입술을 삐죽거린다.
“내가 앤가.”
“응. 아직 애지.”
“아 몰라요. 저 혼자라도 갈 거예요!”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내일 예선 안 치를 거야?”
“힝. 짜증 나!”
우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한청이 갑자기 눈을 빛낸 것도 그때였다. 녀석이 손을 들어 올려 바다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 배다!”
“배?”
시선을 돌려 바라보자, 바다에 배…… 정확히는 제트스키가 물살을 가르며 질주하고 있다.
“우리 저거 타요!”
“흠, 그럴까?”
재밌어 보인다. 뭐, 직접 운전하는 것도 아니니 안전할 테고……. 아니지. 어쩌면 나레이션이 운전법도 가르쳐주지 않을까. 호오! 그럼 진짜 재밌겠는데. 어디, 나레이션에게 부탁해볼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저만치서 김서연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 옆에는 대일 기획의 권태홍 감독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따라라라라, 라라……. 갑자기 들려오기 시작한 BGM. 응? 어째서 이 타이밍에? 설마?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진짜로 제트스키 모는 법을 알려주려는 건가? ……하고 생각하는데. - 미친 소리 작작 해라. 지금 제트스키 탈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