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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활로 (3) (122/204)

#122. 활로 (3)2021.07.11.

  신현정 피디와 만난 뒤 하루가 지나고, 또 한차례 방송이 나갔다. 페이슬리 박의 세 번째 방송, 그녀가 할아버지와 만나게 되는 마지막 편이었다. 이번엔 다들 바쁘다고 해서 이하연과 둘이서만 보게 되었는데, 딱히 볼 곳이 없어서 일이 끝나고 난 뒤 한강 고수부지로 가서 차 안에서 보았다. 비좁고 답답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호프집에서 보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그렇다고 주인도 없는 강형식의 오피스텔에서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물론 박유나의 바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은 더 이상 운영되지 않고 있었다. 박유나가 임신을 하면서 적어도 아기를 낳을 때까진 일을 하지 않기로 남편인 김주형과 상의한 결과였다. 얼마 전 다른 사람이 인수까지 마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니 갈 데가 있나. 그나마도 이하연이 차가 있길래 망정이지.

“불편하죠?”

방송을 보면서 내가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눈을 크게 바라보니, 어느새 이하연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어지간히 집중하고 있나 보다. 손바닥만 한 핸드폰으로 보는데도 저런다. 하긴, 화면 크기가 문제인가? 내용이 중요하지. 페이슬리 박이 막 병원에 도착해서 할아버지의 병실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찍을 땐 몰랐는데, 정말 짠하다. 그러고 보면 신현정 피디는 찍기도 잘하지만, 편집 또한 기막히게 하는 거 같다. 타고난 건지, 아니면 오랫동안 쌓인 노하우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송국도 미쳤지. 그런 인재를 냅다 걷어차다니. 뭐, 그들로서는 어딘가에서, 아마 정치권이겠지만, 아무튼 압력이 들어오니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보기엔 아니올시다……다. 세상에 리스크 없이 얻을 수 있는 게 있던가? 그렇게 정치권이며 재벌들 눈치만 보니, 자꾸만 시청자들을 케이블이나 유투븐 같은 곳에 빼앗기는 거 아니겠나.

“어뜩해!”

페이슬리 박이 누워 있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는 장면에서 이하연이 손으로 입을 막고 어찌할 줄 몰라 한다. 그러다가 페이슬리 박이 오열하기 시작하자, 덩달아 그녀가 그 큰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진짜 어떡하면 좋아!”

나중엔 엉엉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래느라 한참 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얼마 전에 들었는데, 할아버지도 깨어나시고 지금은 좀 나아졌대요.”

그렇다고 해서 페이슬리 박의 할아버지가 오래 사실 것 같진 않았지만, 그 말까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굳이 입 밖에 꺼낼 까닭은 없을 테니까.

“정말요?”

훌쩍거리며 되묻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사람이 너무 순수해도 문제인데……. 이런 사람이 사업은 어떻게 한대?

“그렇대요.”

“근데, 페이슬리 박…… 참 예쁜 거 같아요.”

헐. 누가 누굴 보고 예쁘네 마네 하는 건지. 어지간한 연예인은 옆에 서는 순간 오징어로 만들어버리는 비주얼을 지닌 주제에. 난 기가 막혀서 이하연을 보다가 이번엔 다른 의미로 어이가 없어졌다.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물어왔기 때문이다.

“전번 주고받은 거 보니까, 친한가 봐요?”

속으론 웃음이 났지만, 별거 아닌 척 대답했다.

“당연하죠. 같이 방송까지 한 사이인데. 조만간 서울 오면 한번 보자고 하더라고요. 아, 그때 같이 나갈래요?”

“……생각해보고요.”

왠지 시무룩한 모습이 귀엽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이상해서일까? 결국, 참지 못하고 킥킥대고 말았다.

“거짓말이에요. 친하긴요, 겨우 한번 본 사이인데. 전화도 저한테 온 게 아니라 피디님한테 온 거고요.”

이하연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날 흘겨본다. 그러더니 삐친 얼굴이 되어 고개를 홱 돌렸다.

“왜 그래요.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앙! 못됐어!”

“그래요.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기분 풀어요. 아! 뭐 좀 마실래요? 차 안에만 있었더니 답답한데, 잠시 나가서 걸을까요? 아니면 어디 가서 뭐 좀 먹을래요?”

“음……. 배가 막 고프진 않은데, 그래도 좀 출출하긴 하네요.”

화제를 바꾸니까 금세 표정을 달리하곤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그녀였다. 크큭. 이렇게까지 순진한 여자도 드물 거다. 만약 이게 연기라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정도는 껌으로 탈 실력인 거고. 그렇다면야 나로선 당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연기 같진 않다.

“많이 배고픈 게 아니면, 우리 그냥 여기서 대충 때워요. 좀 답답하긴 한데, 지금 도로로 나가봐야 한창 막힐 때라 길바닥에서 시간만 보낼 거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전 좋아요.”

“그럼, 내릴까요?”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 그러곤 얼른 보조석 쪽으로 가서 문을 열어주니, 이하연이 기분 좋다는 듯 밖으로 나온다.

“춥죠?”

“쪼금?”

“옷 벗어줄까요?”

툭 던진 말에 그녀가 눈을 빛내며 날 쳐다본다. 이런 경험이 처음인가 보다. 하긴, 나도 처음이니까. 피장파장인가? 난 씩 웃으며 바지를 벗…….

“……!”

눈이 휘둥그레져서 날 바라보는 그녀를 보다가 킥킥거렸다. 그러곤 얼른 허리띠에서 손을 떼곤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진짜 못됐다니까.”

“웃으라고 한번 해봤어요.”

“킥.”

뒤늦게 웃음이 터진 그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고 있는데, 지나가던 남녀가 우릴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러다가 남자 쪽이 이하연을 보고는 깜짝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그래, 그 심정 알지. 어지간해야지. 얼굴이 깡패다. 몸매는 보스급이고. 방금 지나쳐간 남자는 모르겠지만, 심지어 그녀의 집안은 재벌이다. 거기에 똑똑하고 성격도 좋다. 뿐만 아니라 오직 직진 스타일이라, 사귀면 필시 한 사람만 바라볼 여자지. 이런 여자가 또 있을까? 없겠지. 적어도 내 인생에서 다시 만날 일은 아마도 없을 거다. 그러니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걸 테고. 다만……. 너무 넘쳐서 탈이랄까. 격이 안 맞는다고나 할까. 자격지심일지……. 아니, 사실이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분에 넘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게 문제라면 문제.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참 난처하기만 하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예? 아뇨. 그냥……. 아참, 제가 얘기했던가요?”

“……?”

뭐가요 하는 눈빛을 해 보이는 그녀를 이끌고 매점 쪽으로 움직였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이브라 그런가, 추운 날씨임에도 한강 둔치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 때문에 매점 앞쪽도 북적거린다.

“프로그램에서 하차할까 해요.”

“예?”

“뭐 드실래요? 컵라면? 아니면 커피?”

“잠깐만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 방송 그만둔다고 한 거 맞아요?”

“예.”

걸음을 멈춘 채 날 쳐다보는 그녀였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고. 아무래도 신현정 피디에게서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한 모양이다. 들었다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텐데.

“신현정 피디도 그만두게 됐고, 그래서 그런지 더 이상 흥미도 못 느껴서…….”

“자, 잠깐만요!”

“…….”

“누……가 그만둬요?”

하아, 역시 못 들었군.

“그렇게 됐어요.”

“아니, 왜? 헐. 진짜 언니도……. 얘기라도 해줄 것이지.”

“아시잖아요, 피디님 성격. 하연 씨 걱정할까 봐 말 안 한 거겠죠.”

“그래도 그렇죠. 나한테는 얘기해줘야지. 근데, 이유가 뭔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혹시 아픈 건 아니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권고였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강제로 쫓겨난 거나 다름없는데……. 사실대로 말하자니, 그랬다간 이하연 성격에 방방 뛸 게 틀림없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이미 눈치를 챈 듯하다.

“설마? ……아니죠?”

그 설마가 내가 생각하는 거랑 같다면…… 맞다. 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러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피디라고 해봐야, 방송국 입장에선 그저 월급 받고 일하는 샐러리맨에 불과한 것을. 부서를 옮기라면 옮겨야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지방으로 발령을 내도 군말 없이 짐 싸 들고 기차를 타야 하는 신세. 심지어는 회사에서 쫓겨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납득하지 못하면 악착같이 버티면서 부당하다며 싸움 아닌 싸움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봐야 개인이 당해낼 순 없는 노릇이다. 괜히 심력만 낭비하고,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는 꼴. 그걸 각오하고 덤빈다고 해도 종국에 가선 너덜너덜해지게 마련인 것. 억울하지만, 그나마 웃으면서 얘기할 때 순순히 물러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그걸 알기에 신현정 피디로 군말 없이 물러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방송국을 그만둔 거겠지.

“아니 왜요? 현정 언니만 한 실력자가 어디 있다고?”

“위쪽에서 압력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앙! 그게 뭐야! 진짜 더럽네! 아……. 언니, 방송국까지 그만둔 건 아니겠죠? 그 언니 성격이면 그러고도 남는데…….”

오랫동안 알아온 사이라 그런가, 한마디만 듣고도 모든 걸 알아채는 그녀다. 똑똑하긴 똑똑하네.

“……JTL로 가기로 했다나 봐요.”

“아앙. 속상해! 그게 뭐야! 그동안 언니가 KBC에서 한 게 있는데! 프로그램 좀 잘되니까 쫓아내고 낙하산이라도 앉히려는 거야, 뭐야!”

애당초 이유는 그게 아닌 거 같지만, 결과적으론 그렇게 될 테지.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괜스레 말해봐야 속만 쓰릴 테니.

“아무튼, 저도 이참에 그만두려고요.”

“……속상했겠어요.”

“저보단 피디님이 마음고생 하셨죠.”

“아유, 진짜! 그런 일이 있으면 빨랑빨랑 연락할 것이지.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라…….”

핸드폰을 꺼내며 어디론가 전화를 하려는 그녀를 말렸다. 그 어디가 어딘지는 뻔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날 바라보는 그녀는 왜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먼저 말할 때까진 모르는 척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럴까요?”

고개를 끄덕여주자, 한숨을 푹 내쉰다. 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베어 물곤 말했다.

“춥네요. 얼른 뭐라도 좀 먹죠. 이러다가 입 돌아가겠어요.”

“……예.”

여전히 안타까운지 표정이 좋지 않은 그녀와 함께 매점으로 다가갔다. *** 서진영과 만나온 뒤,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하연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그녀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곽진우 부장이었다.

“너무 늦은 시간에 걸어서 미안해요.”

- 아닙니다. 이제 겨우 10시도 안 됐는걸요.

얼마나 야근을 많이 하면 저녁 10시인데 ‘아직’이란다. 기가 막힌 얘기였지만, 이하연으로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브랜드 하나를 런칭한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많았고, 사람은 부족했으니까. 막말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자 하나 만나자고 개인적인 욕심으로 쏙 빠져나온 게 미안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인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아직 퇴근 안 하신 거예요?”

- 안 그래도 직원들 다 보내고, 아침에 쓸 자료만 정리하고 들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하아, 고생이 많네요.”

- 런칭하면 늘 있는 일이잖습니까? 근데, 어쩐 일로…….

아차 싶었던 이하연이 머뭇거리다가 얘기했다.

“그…… 있잖아요. 사적인 일이라 부탁드리긴 뭐한데…… 뭐 좀 알아봐 줬으면 해서요.”

- 사적인 일이 어딨습니까? 다 필요하시니 그러는 걸 텐데. 그냥 말씀만 하십시오.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저야 한결 마음이 편하죠.”

- 언제든 얘기만 하십쇼. 저 곽진우입니다. 아시잖습니까? 능력 밖의 일이라면 모를까, 사람 캐는 일이라면 어지간한 일은 제 손에서 다 가능하다는 걸.

사실이었다. 원래 대현 그룹 정보실에 있던 사람을 어렵사리 빼 온 게 바로 그였으니까. 어지간한 국가정보원보다 능력이 좋은 사람이 바로 곽진우 부장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삼한 그룹의 정보력이 국가와 비등할 정도란 얘기기도 했고.

“KBC에서 얼마 전…….”

그녀의 얘기를 곽진우 부장이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경청하던 끝에 흔쾌히 알겠다고 말한 것은 모든 얘기가 끝난 뒤였다.

“부탁 좀 드릴게요.”

- 아이고. 왜 그러십니까. 자꾸 그러시면 제가 더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평소처럼 하십시오.

“예. 그럴게요.”

원래 할아버지인 대현 그룹의 회장이 아끼던 사람이었던지라 오래전부터 집에 자주 드나들곤 했고, 어릴 때부터 아저씨라 부르던 사이였다. 문득 그때 생각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선 덧붙였다.

“항상 고마워요.”

필요하다는 말에 군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자신의 회사로 부서를 옮겨준 것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었다.

- 하하하. 뭘요. 저야 뼛속까지 대현인 아닙니까.

웃으면서 전화를 끊는 그였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난 뒤, 이하연은 싸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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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영 앞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을 얼굴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평소라면 그런 표정이 될 일이 거의 없는 게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감히 누굴 건드려. 한동안 그녀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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