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법 (1)2021.07.14.
크리스마스이브라고 해서 살짝 긴장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왜 있잖은가.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커다란 홀에서 막 파티 같은 거하고 그러는 거. 당연히 그럴 줄 알았더랬다. 한데, 그게 아니란다. 다른 회사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삼한 그룹에선 모토로 삼는 핵심적인 키워드 중 하나가 ‘가족’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파티는 없었다. 대신 새해에는 꽤 빡셀 거라고 준석이 형이 겁을 주긴 했다. 대체 얼마나 힘들길래 저러는 걸까 싶기도 한데. 그건 그때 가보면 알 일이고. 오히려 한가한 느낌마저 드는 이브 날이었다. 특히 저녁엔 회장님을 비롯해 모든 식구가 저마다의 일정으로 집을 비워서 주방 식구들끼리 조촐하게 밥을 먹고는 그대로 퇴근했다. 그러곤 곧바로 저택을 나와 이하연을 만나러 갔다. 하루건너 만나는지라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안 만날 수도 없지 않은가. 다른 날도 아니고,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말이다. 오늘은 이하연을 만나고 나서 바로 외삼촌댁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전에 꼭 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
“역시 이브 날은 고기가 제격인 거 같아요.”
이하연이 소 갈빗살을 숯불에 구우며 하는 말에 헛웃음이 나온다. 난생처음 들어본 말이라서.
“그런가요?”
“그럼요. 외식 중에 돈이 제일 안 아까운 게 고기랬어요.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엔 고기를 먹어줘야죠.”
칠면조가 아니라? 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누가 그래요?”
“우리 할아버지요.”
고기를 한 점 집어 기름장에 찍어 입에 넣고 씹다가 쿨럭거렸다.
“어머 어뜩해. 여기 물!”
“아, 고마워요.”
헐이다, 진짜. 누가 그랬다고? 할아버지면…… 대현 그룹 이 회장님? 나참. 검소하다 못해서 자린고비란 소리까지 듣는 분이라고 하더만 진짜인가 보네. 이참에 평소 궁금해하던 걸 물었다.
“진짜 집에서 5찬밖에 안 올라와요?”
“음, 살면서 그 질문만 한 백 번쯤 받아본 거 같아요. 인터뷰까지 포함해서.”
그래서? 진짜인가요? 궁금한 눈빛을 해 보이자, 이하연이 빙그레 웃는다. 그렇게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대답한다.
“그거 틀렸어요.”
“그죠?”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재벌가에서 반찬 다섯 가지만 상에 올린다는 게 말이 돼…….
“국 빼고 네 가지. 이유 없이 그 이상 올리면 불호령이 떨어져요. 반찬 많아 봐야 남기기만 한다고.”
“……!”
“그래도 생일날이나 특별한 날엔 열 가지쯤 올려도 뭐라 하진 않으시지만, 굳이 집에서 그렇게 차려 먹을 일 있나. 그냥 나가서 먹으면 되죠.”
혀를 쏙 내미는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진짜 장난 아니네. 무슨 재벌가에서 그렇게까지……. 왠지 이하연이 소탈한 면모를 보이는 게 이해가 간다. 원래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고, 특히나 가풍은 어떤 교육보다 우선하는 법이니까.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이 회장을 보고 자란 그녀이기에 오히려 재벌 3세 같지 않은 행동거지를 보이는 거겠지.
“많이 먹어요.”
난 고기를 그녀 쪽으로 슬그머니 밀어주며 말했더랬다.
“앙. 나 살찌면 어쩌라고요.”
“찌긴 뭘 쪄요. 딱 보니까, 아무리 먹어도 살찌는 체질이 아니구만.”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잘 찌는 체질인데. 이렇게 먹다가 막 뚱뚱해져서 시집도 못가면 어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그녀. 이하연이 날 은근한 눈으로 보다가 불쑥 물어왔다.
“그래도 좋아요? 나 막 살쪄서 배 이만큼 나와도?”
난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씩 웃어 보였다.
“뭐 어때요.”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만족스러웠던가 보다. 그녀가 배시시 웃는데……. 장난기가 도져서 툭 내뱉었다.
“어차피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닌데.”
“아……!”
“크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자, 그제야 장난이라는 걸 알곤 그녀가 날 흘겨본다.
“엊그제도 그러더니……. 자꾸 놀리고. 못됐어, 진짜!”
“많이 먹어요. 하연 씨는 살쪄도 예쁘니까.”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그래요?”
“장난은 무슨.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다고.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늙는 게 당연한 거고, 조금씩 배도 좀 나오고 주름도 생기고……. 그러다 흰머리도 나고. 남자의 경우엔 이마가 벗어질 수도 있겠죠. 그래서 그게 어때서요? 외모도 결국 사람 마음 따라가는 거래요. 왜들 그러잖아요. 그 사람의 인생은 얼굴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고. 그래서 어떻게 살았냐에 따라 관상도 바뀔 수 있다고도 하고.”
꽤 길게 얘기하고 있는데도 이하연은 한마디 말도 없다. 평소처럼 맞장구도 치지 않은 채 그저 날 보며 배실배실 웃고만 있다. 참나,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자요.”
난 쌈을 하나 싸서 그녀 앞에 놔주며 손짓으로 먹으라 했다.
“칫. 이왕이면 먹여줄 것이지.”
“예? 뭐라고 했어요?”
“아, 아니에요.”
다 들었지만, 못 들은 척했다. 안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이 살짝 민망한 느낌인데, 쌈까지 싸서 먹여주다간 얼굴이 화끈거릴 거 같아서. 아, 그전에 손발이 오그라들려나? 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근데 밥 다 먹고 우리 어디 가요?”
다행히 그녀가 물었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글쎄요. 영화 볼까요?”
“앙! 영화 좋아요.”
그녀가 좋단다. 그럼 뭐 결정된 거지. *** 영화관은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이 좋은 날 다들 갈 데가 그렇게 없나? 하긴, 여행계획이라도 잡아놓지 않은 한 오늘 같은 날엔 어디를 가도 자리가 없겠지. 그나마 극장은 자리라도 많지. 그것도 재밌는 건 대부분 만석이었지만.
“볼 게 이거밖에 없네.”
<복제반란>이란 묘한 제목의 영화였는데, 딱 봐도 뻔한 클리셰로 짜깁기해놨을 거 같았다. 그래도 스릴러니까, 하품만 하다가 나오진 않겠지.
“이거 별점이 거의 바닥인데요?”
내가 핸드폰으로 잽싸게 검색해서 알려주자, 그녀가 방긋 웃는다.
“괜찮아요. 영화 보러 온 것도 아닌데.”
그럼 뭐하러 온 건데요?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이왕이면 재밌는 걸 보면 좋겠지만, 것보다는 같이 보내는 시간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선 오히려 영화가 극악할 정도로 재미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기억에 오래 남을 거 같기도.
“그럼 표 끊을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뒤로 한 채 영화표 두 장을 끊었다. *** 예상대로였다. 하아……. 어떻게 한 치도 빗나가질 않는지.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뻔한 내용을 뻔하게 풀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지루해 죽을 판인데, 뻔한 결말을 빙빙 돌리며 숨기느라 주인공만 피똥을 싸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한 편 보다가 고구마만 실컷 먹고 나온 기분이었다.
“사이다라도 사 먹든지 해야지, 원.”
영화관을 빠져나오며 툴툴거리자, 이하연이 킥킥 웃는다.
“이제 우리 어디 가요?”
그러곤 묻길래,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8차선 도로 너머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백화점이요? 뭐 살 거 있…….”
말하다 말고 은근한 눈빛으로 날 보는 건 또 뭐람. 에효, 그러지 않아도 그쪽 건 이미 준비해 뒀거든요? 지난번에 명제준 시장 편의 방송을 녹화할 때 사둔 게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걸 지금 말할 필요는 없겠지.
“가요.”
“예에!”
밤이 되자, 한결 많아진 인파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경기가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역시 날이 날인 만큼 사방이 색색의 불빛으로 어지럽다. 건물마다 휘황찬란한 조명들이 빛을 발하며 거리는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곳곳에서 들려오는 캐롤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명확하게 알려준다. 사람들 역시 신명이 나는지, 다들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쌍쌍이 걸어가고 있다. 대부분 팔짱을 끼었고, 개중엔 손을 잡은 연인들도 보인다. 그 속에서 우리만 묘한 거리를 유지하며 나란히 걷고 있자,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젠장. 얼른 빠져나가든지 해야지.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
손을 감아오는 따스한 느낌. 감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당연히 뿌리칠 수도 없었고. 아니,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애당초 손을 잡는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 미쳤네. 이게 뭐라고. 겨우 손잡은 거 가지고. 요즘은 초딩들도 사귄다며 손 붙잡고 다니는 판국에. 잠시 잠깐 발걸음이 멈췄지만 이내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손을 폈다. 그러자, 이하연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 순간 난 손가락을 벌려 천천히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렇게 깍지를 끼는 순간, 이하연의 콧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입매가 활처럼 휘어 있었다. 두 볼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은……. 초롱초롱하다 못해 반짝거린다. 그 눈동자에 내가 비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불쑥 물어왔다.
“우리 진짜 오늘부터 1일?”
웃음이 난다. 동시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당차게 물어오던 것과는 달리 초조한 듯 날 바라보던 그녀가 비로소 안심했는지 배시시 웃고 있었다. *** 백화점에서도 우린 단 한시도 손을 풀지 않았더랬다. 손바닥에 땀이 차는 듯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니, 긴장돼서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달까. 아, 진짜……. 이 나이 먹고 이러고 있으니 조금 한심스럽긴 하다만. 그래도 그녀가 먼저 용기를 내서 내민 손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란 놈……. 진짜 못났다 싶었다. 결혼이고 집안이고 간에 못내 나서질 못하고 결국 그녀에게 결정을 떠넘긴 꼴이니까. 그러니 하다못해 내가 먼저 그 손을 놓는 건 있을 수 없다.
“이거 어때요?”
몸이 살짝 뜬 느낌에 심장 고동 소리까지 들려올 정도였지만,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누구 주려고요?”
핸드백을 가리켜서 그런가, 그녀가 살짝 가라앉은 음성으로 묻고 있었다. 난 옅게 웃어 보였다.
“외숙모요.”
“외숙모요?”
“아, 제가 말 안 했던가요?”
“들었으면 기억하고 있을 텐데……. 아, 그때…… 유나 언니 바에서 한번 얘기했던 것도 같아요. 외삼촌 당뇨 있으시다고.”
“맞네요. 그때 살짝 얘기하긴 했네요.”
“그럼?”
“처음이거든요. 가족들한테 크리스마스 선물 사주는 거.”
가만히 날 바라보는 그녀. 이하연의 눈가가 조금씩 조금씩 젖어 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끝내 눈시울 붉히며 말했다.
“바보같이.”
“…….”
“여자 물건을 남자가 고르면 어쩌겠단 거예요?”
“아!”
“그리고요. 엄마 같은 분이라면서요. 그런데 겨우 이 정도로 퉁치려고요? 그 나이 먹도록 처음으로 해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인데도?”
“……그러게요.”
“자꾸 그렇게 남의 얘기하듯 할 거예요?”
핀잔 아닌 핀잔을 주던 이하연이 손을 쑥 내밀어 내 볼을 감쌌다. 여전히 한 손을 풀지 않은 채로.
“진영 씨한테 소중한 분들이면, 저한테도 그래요. 그분들 아니었으면 지금의 진영 씨도 없었을 거고, 제가 진영 씨를 만나는 행운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오늘은…….”
“……?”
“제가 하잔 대로 해요.”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어느 틈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런 날 기껍게 바라보던 이하연이 내 손을 잡아끌며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에르메스? 여기 장난 아닐 텐데? 내가 살짝 겁먹은 표정을 해 보였지만, 이하연은 보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거든가. 그녀는 내 손을 끌고 서슴없이 매장 안으로 발을 들이더니, 직원에게 대뜸 물었다.
“백 좀 보여주세요.”
“반갑습니다, 고객님. 직접 쓰실 건가요?”
“아뇨. 어머님 선물로 드릴 거예요.”
“어머님이라시면…….”
“보기보다 젊으세요. 그리고 미인이시고요. 스타일도 좋아요. 맞죠?”
“예? 예에…….”
안 꾸미셔서 그렇지. 우리 외숙모가 미인이시긴 하지. 도대체 외삼촌 같으신 분이 어떻게 꼬셨나 싶을 정도로.
“그러시다면, 이건 어떠십니까? 올해 나온 신상품으로…….”
이하연은 말을 다 듣지도 않았다.
“좋네요. 주세요.”
“예?”
“아, 저것도 괜찮네요. 같이 포장해주시고요. 진영 씨, 작은 엄마 지갑은 어때요?”
“그건…….”
솔직히 모르겠다. 거기까지 신경 쓰질 못해서.
“온 김에 지갑도 보죠.”
가격표도 보지 않는 그녀. 이러다간 통장에 있는 돈이 다 거덜 날 판이라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비싼 건 오히려 외숙모가 부담스러워할 거예요.”
이하연이 싱긋 웃어 보인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여자는 다 똑같아요. 남자들 주머니 사정 생각해서 참는 거지. 예쁘고 좋은 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다 아는 법이라고요.”
끙. 할 말이 없다. 대현 어페럴을 책임지고 있는 그녀인지라 패션 쪽이라면 나하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통할 테니.
“그리고 아까 약속했잖아요. 오늘은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준다고.”
“……알겠어요.”
이젠 나도 모르겠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그녀가 직원 모르게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속삭였다.
“여기선 제가 살게요. 진영 씬 있다가……. 알겠죠?”
“예? 왜 하연 씨가?”
“왜긴요. 그럼 빈손으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