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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활로 (2) (121/204)

#121. 활로 (2)2021.07.09.

역삼동 방향으로 골목길을 올라가고 있는데, 뒤를 따르는 신현정 피디는 아무 말도 없다. 아까부터 저런 상태다.

“흠, 이쯤이었던 거 같은데…….”

한 3년 전엔가 왔던 터라, 길을 찾기 힘들다. 이사라도 간 건가 싶기도 한데, 가능성이 아주 없지 않다. 이 동네 땅값이 오죽 비싸야 말이지. 농담이 아니라 지금 서 있는 길 한복판, 사방 1.8㎡면 몇천만 원을 훌쩍 상회할 테지. 한마디로 난 지금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천만 원 이상 하는 돈 바닥을 밟고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서울이란 도시가 엄청난 집값을 자랑하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난 언제쯤이나……. 아니지. 그전에 외삼촌 집부터 좀 어떻게 해야지. 지난번에 가봤을 때 보니 그새 더 낡았더라. 조금만 더 모으면 신축 아파트까지도 가능할 거 같다. 어느새 생각이 가족들한테까지 이어지다 보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다.

“혹시 저기 있는 집 아니에요?”

신현정 피디가 내가 못 보고 지나친 좁은 골목 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 맞네요.”

자동차는 절대로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이었다. 이런 데 있으니 찾을 수가 없지. 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방향을 틀었다. 예전에 하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 때문인지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고인다. *** 탁. 수저를 내려놓으며 냅킨으로 이마와 콧등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후아!”

그걸로도 모자라 참았던 숨까지 내뱉자, 그런 날 신현정 피디가 웃으며 바라본다.

“어? 왜 웃으세요?”

“하도 맛나게 먹으셔서.”

“맛있잖아요.”

“예. 맛있네요.”

“어째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인데요?”

“사실 입맛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근데, 봐요. 벌써 반도 더 먹었죠?”

“에휴. 그거 먹고 어떻게 힘을 써요? 팍팍 좀 드시지 않고.”

왜인지 그녀 앞에선 자꾸만 오버하게 된다. 말투도 살짝 떠 있고. 아마도 그녀의 살짝 처진 어깨가 신경 쓰여서겠지.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신현정 피디에게 말했다.

“요 앞에 유명한 바리스타가 하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 가볼까요?”

“그래요.”

수저를 놓으려는 그녀. 난 얼른 그녀를 만류했다.

“아뇨. 아뇨. 다 먹고 가죠. 혹시 바쁘신 거예요?”

“그런 건 아니지만…….”

훗! 하고 웃어 보였다. 참네, 이런 웃음소리라니. 무슨 사극 찍는 것도 아니고. 살짝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아마 제 얘기 듣고 나면, 한동안 밥 먹을 시간도 없을걸요? 그러니까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둬요.”

멍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그녀가 일순 눈을 빛냈다. 그러더니 숟가락을 단단히 쥐고 삼계탕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여 분 뒤, 우린 작은 카페에 와있었다. 3년 전, 이 근방에서 일할 때 가끔 와봤던 곳이었다. 한데 신기하게도 가게 사장님,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선 꽤 알아준다는 바리스타 분께선 날 기억하고 계셨다.

“오랜만에 뵙네요. 한 2년 됐나?”

“3년 조금 넘었네요.”

“시간이 참 빠르군요. 그새 이렇게……. 뭐 드릴까요?”

“아메리카노로 두 잔……. 아, 피디님은 다른 거 드실래요? 근데, 여기 커피는 아메리카노로 마시는 게 제일 좋아요. 정말 실력 하나는 이거거든요.”

내가 치켜든 엄지를 보곤 두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그럼, 저도 같은 거로 할게요.”

“이거 가져가세요.”

진동벨을 주는 사장님께 다시 한차례 웃어 보이곤 막 돌아설 때였다.

“아,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아, 예.”

난 신현정 피디의 눈치를 보며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물었다.

“아까 드렸던 말씀 말인데…….”

“…….”

“혹시 건방지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의욕이 앞서다 보니, 말이 먼저 나갔네요.”

“괜찮아요. 절 신경 쓰시느라 그러시는 거 잘 아는데요.”

“한데, 괜한 짓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미 컨셉 잡고 계시는 게 있으면…….”

“몇 개 있긴 한데, 딱 이거다 싶은 게 없어서 고민 중이었어요. 그러니까 편히 말씀하셔도 돼요.”

“그래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신현정 피디를 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실은요…….”

설명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내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신현정 피디가 모습이 달라졌다. 이제까지 조금은 지친, 그러면서도 뭔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예전과 같이 반짝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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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랬단 말이디?”

고윤수 주방장의 물음에 김진호 셰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고민하는 듯 보였습니다만, 그래도 결심은 했나 봅니다.”

김진호 셰프가 덧붙이자, 고윤수 주방장이 소리 없이 웃는다. 그 표정이 뭔가 재밌다는 얼굴이었다.

“거 아새끼래, 쫄보라고만 생각했는데 꼭 기런 것만은 아닌가 보구만 기래.”

“원래부터 당찬 친굽니다.”

“기거야 니래 잘 봐서 기런 거고. 암튼, 앞으로 니가 고생이 많겠다 야.”

“괜찮습니다.”

“기래. 이왕이면, 제대로 해보라우. 그 아이래 소질은 있어야. 것도 기렇디만 무엇보다도 성품이 괜찮디 않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래, 기래. 알았으니, 기만 가보라.”

김진호 셰프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방을 빠져나가자, 고윤수 주방장이 낄낄 웃었다.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이제야 비로소 걸음마를 시작하려는 건가?”

그가 보기엔 그랬다. 그동안은 늘 누군가 자리를 깔아줘야 움직이던 서진영이었다. 그런데도 몇 달 사이에 그 위상이 달라진 건, 말 그대로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물론 거기엔 수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게 서진영 본인이라는 것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움직였다고 말하기엔 어렵다. 언제나 등 떠밀리듯 움직였고, 운 좋게 결과가 좋았을 뿐이다. 한데 이제는…….

“어디 한번 해보라우. 내래 한번 보갔어. 니래 어디까지 가는디.”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진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서지영과 얘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현정은 묘한 열기를 느꼈다. 이런 기분을 대체 언제 느껴보는 걸까?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를 기획할 때도 이러진 않았던 것 같다. 서진영의 기획안이 참신해서? 아니다. 굳이 평가하자면, 신선하진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말한 컨셉은 이미 여기저기서 써먹을 만큼 써먹은 것이었고, 분명 자극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대신 어떤 면에선 뻔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놀라운 건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컨셉이 만나서 기묘한 시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1+1은 반드시 2는 아니다라는 걸 말해주는 것과 같았다. 오디션과 리얼 예능을 합친다라……. 물론 기막힌 발상은 아니었다. 오래전 외국에서 이와 비슷한 컨셉의 방송이 나온 적도 있었고. 하지만 국내에선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게 말이 쉽지, 실제로 하려고 한다면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돈이 많이 든다. 그다음으론 방송을 끌어나갈, 주도적인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근데, 그걸 어떻게든 해결할 방안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과연 JTL에서 이를 어찌 받아들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정 안되면 다른 방송국으로 가면 될 일이다. 아직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르르르. 전화가 걸려온 것은 운전대를 잡은 채 한창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녀는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곤 망설였다. 고민준 본부장…… 선배였기 때문이다. 어쩔까 고민하던 신현정은 전화를 받았다. 당연히 핸즈프리였다.

“선배?”

“어, 그래. 나다.”

스피커폰을 통해 들려오는 고민준의 목소리는 잔뜩 취해있어다.

“무슨 일이야? 나 지금 운전 중인데 이따가 통화하면 안 될…….”

“현정아.”

혀 꼬부라진 목소리에 신현정은 할 말을 잃었다. 서로가 서로의 주량을 안다. 그만큼 오래된 사이니까. 오죽하면 둘이 부부냐는 소리까지 들을까. 사실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고민준이 보기보다 쑥스러움이 많아서 그녀에 대한 애정을 간접적으로만 표현할 뿐 직접적으로 대시하지 않아서 그렇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가 그녀를 마음속에 담고 있다는 걸. 물론 신현정도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결혼’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거나, 아직은 일을 하고 싶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그런 그들이니만큼 지금 고민준이 저 정도까지 어눌한 말투로 얘기하려면 얼마나 마셔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못해도 소주 3병은 마셨을 거다.

“선배, 술 많이 마셨어?”

“마셨지.”

“저번에 병원에서 그랬다며? 술이랑 담배 줄이라고.”

“병원? 크흐흐흐. 그게 뭐? 술 좀 마신다고 죽겠냐? 안 죽어, 안 죽어. 이 고민준이 겨우 술 몇 병 마신다고 안 죽는다고! 근데, 현정아. 나, 지금 죽을 거 같다. 큭! 진짜 죽겠다고!”

“…….”

“너한테 미안해서.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 씨팔! 세상이 너무 좆 같아서! 크흑……미안하다. 미안…….”

덩치가 산만 해서 학교 다닐 때 후배들이 곧잘 곰 같다고 놀리던 남자가 울고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보이지 않을 행동이었다. 특히나 그녀 앞에서라면. 그런데 왜일까? 신현정은 마음이 아팠다. 뭔가 가슴이 답답해져 오고, 눈가가 촉촉해진다. 결국 차를 도로변에 세웠다. 이러다간 사고라도 낼 거 같아서. 그런 채로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를 듣다가 신현정이 가만히 선배의 이름을 불렀다.

“민준 형.”

그 시절, 오빠나 선배 대신 부르던 호칭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현정아. 미안해……. 미안……흑흑.”

“그만해.”

“……크흑.”

“바보같이 왜 그래? 형이 뭘 잘못했는데?”

“그래도……. 내가 좀 더 잘났으면…….”

“그랬으면 뭐? 날 책임져주기라도 할 거야? 아님 이제 와서 프러포즈라도 할래? 그럴 거면 좀 일찍 하든가? 나, 선배 기다리다가 노처녀 된 거 몰라?”

술 마셨다니까 하는 얘기였다. 취중 진담이라던데. 오히려 반대다. 모르긴 몰라도 내일 아침이면 아무것도 기억 못 하겠지. 바보 같은 선배는.

“미안해……. 내가 바보 같아서……. 미안…….”

봐라. 얼마나 취했는지,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그녀 얘기는 들을 생각도 안 한 채, 자기 얘기만 반복하고 있는 거.

“그래. 선배는 바보지.”

“미안……. 흑.”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거고.”

신현정은 쓰게 웃고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훑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한차례 가볍게 코를 훌쩍인 뒤 말했다. 어느새 그녀의 음성이 달라져 있었다. 한층 단단해진 어투다.

“걱정하지 마. 나 거기 아니더라도 잘 할 수 있어. 설마 까먹은 건 아니지? 내가 누구한테서 배웠는지.”

이제 막 대학에 들어왔을 때, 그녀에게 접근했던 남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진심으로 방송 일을 가르쳐준 건 고민준이었다. 그때를 떠올릴 것도 없이, 방송국에 들어와서도 그랬다. 자기 일보다 더 자기 일처럼 뛰어다녔고, 또 기뻐해 주었더랬다. 그랬기에 선배가 예능 쪽으로 부서를 옮기라고 했을 때도, 진심으로 고민했고 결국 옮긴 그녀다.

“있잖아. 형. 나 방금 서 셰프 만나고 오는 길이야.”

“…….”

자는 걸까? 어딘가에서 곯아떨어졌을 고민준이 떠올라 그녀는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런데도 전화를 끊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속상한 모양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마음껏 얘기했다. 누구도 듣지 못할 테지만. 한편으로는 선배한테 하는 얘기라는 것도 맞으니까. 세상에 단 한 사람.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그 사람에게.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생각해봤는데, 괜찮은 거 같아. 선배는 어때? 괜찮지 않아?”

“…….”

“나, 다시 한번 해보려고. 그래서 보란 듯이 성공해서 김동하 그 인간이랑 전부 다 후회하게 해줄 거야. 그러니까, 형…….”

“…….”

“너무 걱정 마.”

그 말을 끝으로 신현정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화 역시 끊지 않았다. 그런 채로 한동안 대로변에 차를 세우고 있던 그녀가 다시 출발한 것은 그로부터 30분이 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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