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시운전 (1)2020.10.23.
당연한 얘기지만 난 이하연과 통화하지 않았다.
“괜찮겠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시간 없다니까.”
“주말엔 쉬지 않아?”
“일은 쉬지.”
물론 대체로 그렇다는 거다. 강 회장을 비롯해 가족 중 누군가가 지인 혹은 친구 등을 초대하는 경우가 생기면 주방 식구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몇은 출근해야만 한다. 뭐, 나로서는 따로 수당을 받을 수 있으니 좋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그런 일은 없었다. 출근한 지 얼마 안 돼서 처음 맞는 주말을 앞둔 탓이긴 하지만. 게다가 그 시간에 좀 더 요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차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신경 쓰이는 일도 있었고…….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요 며칠 예의 그 나레이션이 들려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걔 끈질긴데. 어쩌면 찾아올지도 모른다?”
“에이, 설마.”
손사래를 치며 웃어 보이자, 강형식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강형식과의 간격 때문에 1미터는 떨어져 보이는 화면이지만 대체로 알아볼 수는 있었다. 까똑 화면인데, 강형식이 터치로 넘기는 화면 가득 나에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있다. 진짜 이해가 안 간다.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뭐 그리 관심을 갖는 건지. 부족한 게 없이 자란 여자라 그런 건가? 왜 있잖아. 항상 비싸고 맛있는 음식만 먹던 사람은 오히려 길거리 음식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는, 뭐 그런 거.
“정말 모르겠어서 그러는데, 그 여자……. 좀 별나지 않아?”
내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묻자, 강형식은 대답 대신 날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너야말로 별나다고 생각진 않냐?”
글쎄. 그다지 그렇다고 생각진 않는데?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딱히 말로 옮기진 않았다.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으니까. 아마 얼굴에 다 쓰여 있을 테지. 아니나 다를까. 강형식은 내 표정에서 속내를 읽었는지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너 말이야. 재벌이라고 해서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야…….”
할 말이 없다. 나로서는 아는 게 없으니까. 그저 막연하게 재벌가의 사람들은 평범과는 거리가 멀고 일반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할 뿐. 설사 상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더라도 분명 세상을 보는 관점만은 다를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후우, 말을 말자.”
결국, 강형식은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걸 포기한 듯했다.
“근데, 이건 무슨 차냐?”
화제도 돌릴 겸 내가 물었고,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 강형식은 기다렸다는 듯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 참, 이 자식 이거 그냥 폼으로 수퍼카를 모는 게 아니었나 보네. 아무래도 취미가 이쪽인 모양이다.
“페라리 피닌파리나 세르지오!”
방금까지 자신이 직접 정비하고 있던 차를 자랑스럽다는 얼굴이 되어 바라보며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씁쓸하기도 하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마냥 쓸쓸하게만 지내나 싶었더니만. 좀, 아니 많이 비싼 취미긴 해도, 뭐라도 좋아하는 게 있다니 다행이랄까. 내가 내심 안심하고 있을 때, 강형식은 정말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떠들어댔다.
“혹시 아는지 모르겠는데, 이탈리아의 디자인 하우스 피닌파리나가 제작한 페라리거든, 이거. 기본적으로 바디 자체는 페라리 458 스파이더인데, 속이고 겉이고 간에 싹 다 바꾼 거라고 보면 돼. 후후후, 4.5리터 V8 자연흡기 엔진을 탑재해서 무려 605마력이거든. 그런데도 무게가 150kg밖에 나가질 않아서 엄청난 가속력을…….”
끝없이 이어질 거 같은 설명에 살짝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들었다. 가끔 가다가 와! 오! 같은 리액션도 해가면서. 그래서 그런가, 강형식은 진심으로 기쁜 듯 보였다.
“이거 전 세계에서 6대밖에 없거든. 장난 아니지?”
“그럼 엄청 비싸겠네?”
“그야 그렇지.”
음, 재벌 3세가 비싸다고 말할 정도면 진짜 장난 아니겠네. 괜히 물었다가 듣고 나면 상실감만 커질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다른 차도 볼래? 애스턴마틴 발키리도 있고, 부가티 베이론도 있는데. 아! 라이칸 하이퍼스포트 본 적 없지?”
이보세요. 앞서 말한 차들도 전부 모르거든요? 본적은커녕 들어본 적도 없는 차들에 대한 얘기를 계속해서 듣고 있을 만큼 한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모처럼 즐거워 보이는 강형식의 텐션을 나 때문에 떨어뜨리고 싶진 않았다. 덕분에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차고를 돌면서 그와 함께 차를 보고, 또 얘기를 나누었다. 후우, 차들이 무슨……. 그냥 도로를 질주하는 비행기라고 해도 되겠네. 끝까지 가격은 듣지 않은 채 그곳을 떠나며 결심했다. 언젠가 차를 사게 된다면, 무조건 국산차를 사기로. 비싼 차는 비싼 차대로 보관이며 정비 등 부가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은 하루였달까.
“이건 뭐 자랑하러 왔다가…….”
오히려 역으로 자랑질만 실컷 듣다가는 꼴이네. 그래도 나쁘진 않다. 조금이지만, 강형식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달까. 뭐랄까. 말로만 친구가 아닌 진짜 가까워진 느낌? 돌아보니 강형식은 또다시 차에 매달려서 낑낑대며 렌치를 들고 설쳐대고 있었다. *** 전화가 걸려온 것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쉬는 날이었기 때문에 아침까지 늦잠을 자고 있을 때 걸려와서 잠결에 덥석 받은 게 패착이었다.
“누구……요?”
- 어머, 어이없어. 이름도 기억 못 하는 거예요?
“아, 죄송해요. 지금 막 깨서…….”
- 이하연이요, 이! 하! 연!
“……아!”
잠이 완전히 깨면서 형광등처럼 뒤늦게 기억이 떠올랐다. 동시에 어제 강형식과 했던 얘기들도. 레오파드? 피식하고 웃으며 핸드폰에 대고 물었다.
“근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시죠?”
- 뭐 좀 물을 것도 있고……. 겸사겸사?
그래서 나한테 물을 건 뭐고, 그 겸사겸사라는 건 또 뭘까?
“말씀하세요.”
- 전화로는 좀 그래요.
“음, 근데 어쩌죠? 제가 좀 바빠서 만나긴…….”
- 아, 쫌!
놀래라!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느닷없이 빽하고 고함친 이하연이 이제까지 차분하기만 하던 목소리와는 달리 빠르고 통통 튀는 톤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 사람이 왜 그렇게 꽉 막혔어요? 누가 형식이 오빠 친구 아니랄까 봐! 여자가 이 정도까지 말하면 알아들을 것이지! 오늘 쉬죠? 아네요?
“그, 그렇긴 그런데…….”
- 뭐 할 일 있어요? 빨래? 청소? 아님 누구 만날 사람 있어요?
“아……아뇨. 그렇진 않은데, 그래도…….”
- 그럼 나와요!
“예?”
- ……저도 얼마나 망설이다가 전화했는데. 진짜 이럴 거예요?
후우, 사람 참 할 말 없게 만든다. 게다가 뭐랄까, 여기서 싫다고 하면 왠지 죄짓는 느낌이랄까. 그때, 그녀가 불쑥 물었다.
- 누가 사귀자고 했어요? 그냥 밥이나 한 끼 먹자는 건데, 남자가 뭘 그렇게 빼고 그래요?
헐. 대박! 이 여자가 어디서 도발을? 워낙 사는 세상이 달라서 어지간하면 엮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재벌 3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이젠 나도 모르겠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요?”
*** 여자가 요물은 요물이다 싶었다. 가로수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전날에 보았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뭐야? 나에 대해 알아보기라도 하고 나온 거야? 한마디로 말하면 취향 저격이다. 발목까지 오는 하얀색 긴 치마에 살짝 핑크빛이 도는 블라우스 차림. 거기에 깔끔한 재킷을 걸쳤다. 화장도 그때처럼 진하지 않았고.
그런데도 아기처럼 고운 피부에서는 잡티라곤 하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눈은 또 어찌나 큰지. 미친! 깜빡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맑고 큰 눈동자를 가렸다가 보였다 하는 게……. 후우, 성형수술 한 게 분명해. 속눈썹도 붙인 걸 거야. 어쩌면 머리카락도 붙인 거 아닐까? 근데,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은 머리칼……. 색이 원래 저랬던가? 기억하기론 갈색인가로 염색했던 거 같은데. 탐스러운 검은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밥 먹자고 하지 않았나요?”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묻자, 그녀가 빤히 날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눈에 뭐가 씌었지.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러게요. 댁이 뭐가 아쉬워서 이 귀중한 토요일에 절 만나고 계십니까? 덕분에 저 역시 취업하고 처음 맞은 주말을 이렇게 허비하게 생겼습니다만. 그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응? 오랜만인데? 반가운 것까진 아니지만, 간만에 들려오는 BGM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요사이 들려오질 않아서 안 그래도 의아해하던 참이었기에.
“어머, 지금 표정 너무 좋다!”
참네, 이 여자도……. 이상한 데서 꽂히네. 그러든지 말든지 잔잔하게 깔리는 배경음악과 함께 나레이션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이하연은 사실 숫기가 없는 편이다. 내성적인 성격인 그녀는 부끄럼을 많이 타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 때문에 학교 다닐 때도 그녀가 사귄 친구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 하! 누가? 설마 날 협박하듯 해서 불러낸 저 여자가? 진짜 어이가 없……. - 그런데도 그녀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그날 보았던 남자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서였다. 사실 그녀 본인조차도 그 남자의 어디에 그렇게 끌렸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 번쯤은 다시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갈수록 가슴속에서 진해져 가는 이 사람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를. 미쳤네. 도대체 그날, 나이트에서 내게 뭘 봤는지 모르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한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절대 이해 못 할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와 나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아니 건널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하지 않냐고. 안 그래도 시간이 모자란데, 그냥 재미 삼아 연애……. 아, 이건 좀 앞서갔나? 아무튼, 의미 없는 만남을 갖고 싶진 않다. 그래서 말했다. 단호하게.
“들으셨겠지만, 강 회장님댁에 요리사로 고용된 사람입니다. 제 얘기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돌려 말하는 거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랑 댁이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지만 말을 끝까지 이어나갈 수 없었다. 왜냐면 다음 순간 들려온 나레이션 때문이었다. - 지금 이하연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 작년에 갑자기 쓰러져 수술까지 받아야 했던 아버질 닮았다는 것을. 그땐 정말이지 이대로 돌아가시는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나 24시간도 모자라 수술 전후는 말할 것도 없고 퇴원하실 때까지 병실에서 살다시피 했던 그녀다. 그만큼 아버질 사랑하고 또 존경하는 그녀가 보기에 그날 밤 보여준 서진영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불의는 조금도 참지 못하는 성격. 아버지의 대꼬챙이 같은 성격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녀의 눈에 비친 서진영은…….
“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뇨. 별거 아니에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뭐 이래? 어떻게 요즘 보는 사람마다 이러 건지. 그저 평안하고 행복하기만 집은 없는 건가? 누군가는 아프고, 또 누군가는 돌아가시고. 뭐, 강형식이나 나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신 게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 심정이 어땠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터다. 사람의 생로병사라는 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거겠느냐마는. 그래도 그렇지. 무슨 신파도 아니고. 하아, 진짜 인간X극장을 찍자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난 끙하는 소리와 함께 하던 말을 돌돌 말아 입속으로 쏙 감추곤 한숨과 함께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눈 하난 진짜 크네. 안 그래도 큰 눈으로 날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괜히 머쓱해지잖아.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눈길을 피하며 대충 그녀랑 밥이나 한 끼 먹고 헤어지자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금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 아버지를 닮은 그녀는 장이 무척 약하다. 요즘 속이 거북하고 자꾸만 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맛있고 영양가가 높은 음식이 아니다. 요 며칠 속이 안 좋아서 거의 굶다시피 한 그녀에겐 소화가 잘되고 속을 편하게 해줄 음식이 필요하다. 특히 장을 튼튼하게 해줄 발효음식이 좋을 것이다. 그와 함께 죽이나 누룽지처럼 부드러운 음식을 곁들이면……. 그래, 그래. 이래야지. 슬슬 음식 얘기가 나올 때가 되지 싶었다. 후우, 그럼 음식은 결정된 거고. 문제는 이걸 어떻게 권하는가인데…….
“밥 먹으러…….”
“밥은 좀 그렇…….”
“아, 먼저 말씀하시죠.”
“아뇨. 전 별거 아니에요. 그쪽부터 먼저 얘기해도 돼요.”
따라라라라, 라라……. 쓸데없는 데서 BGM 좀 깔지 마라. 안 그래도 뭔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서 쪽팔리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구만. 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얘기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하자 싶어서. 연애할 사이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떻게 보면 이것도 인연이니까.
“요즘 속이 불편하지 않으세요?”
불쑥 물은 내 질문에 놀란 듯,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는 이하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