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갇힌 새는 울지 않는다-2화 (2/17)

# 02

[과몰입공금]

라이너스는 의기양양했다. 안드레아가 생각보다 빨리 입장권을 구해주었을 뿐 아니라, 다시금 암시장에 동행하겠다는 뜻을 밝히니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라이너스 본인의 생각일 뿐, 안드레아의 입장에서는 끌려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국의 왕자가 호위를 모두 물리고 홀로 금지된 암굴로 들어가겠다는데 따라나서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그거 알아? 이게 꼭 나의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야. 실은 안드레아 자네를 위한 거라고.”

“퍽이나.”

“진짜라니까? 거기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부르는 카나리아가 있대.”

새라면 왕궁에도 넘쳐났다. 특별히 새장을 두어 관리인까지 여럿 두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애초에 언제부터 라이너스가 새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특히 자장가를 잘 부른다지. 카나리아의 자장가를 들으면 누구나 잠에 빠진대.”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얘기였다. 안드레아는 어렵지 않게 올리비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자장가를 부르면 누구든 깊은 잠에 빠지도록 마법을 부리는 노예라나요?’

올리비아의 얘기를 귓등으로 넘겼듯, 안드레아는 이번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얘기를 믿지도 않았지만, 사실이라 해도 잠드는 데 미천한 노예 따위의 성대를 빌릴 마음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안드레아, 노예 매매 제도에 반대했었지?”

“아마도.”

“왜? 노예들이 측은해서?”

“글쎄.”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대꾸였지만 들뜬 라이너스의 귀에는 달콤한 밀어처럼 들리는 듯했다. 자기 예상이 맞았다며 기뻐하질 않나. 덕분에 귀찮은 추궁을 피할 수 있으니 안드레아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노예 매매에 반대한 건 그게 페를레티 국왕이 원하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부친의 유언이기도 했다.

‘폐하의 뜻을 거스르지 마라.’

사자끼리 맞붙어서 가장 이득을 보는 건 승리한 사자가 아니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여우다. 교활한 여우에게 틈을 주지 않고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 칼리드나스 가의 권세를 오랜 세월 견고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다. 노예 매매 제도를 반대한 건 순전히 이런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라이너스의 추측은 완전히 틀렸다. 안드레아는 노예니 뭐니 하는 것들에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개나 돼지를 볼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천하고 더러웠다.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저번의 여관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굳이 암시장이니, 노예니를 입에 올릴 필요도 없었다. 입장권을 확인한 문지기는 손수 그들을 안내했다. 지하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을 끝없이 내려가는 것도 지겹게 느껴질 즈음, 마치 야외처럼 탁 트인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여긴 또 하나의 왕국이군.”

암시장의 규모에 놀란 라이너스가 중얼거렸다.

“그럼 편히 구경하쇼.”

대강 어느 골목에 무엇이 있는지 일러주고 소임을 마친 문지기가 되돌아 나갔다. 라이너스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활개를 치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가장 인기가 좋은 곳은 역시 노예 시장이었다.

“날을 잘 맞춰왔네.”

라이너스가 씩 웃으며 앞장섰다. 그에 따르면 웃돈을 얹어야 살 수 있는 질 좋은 노예는 상시에 팔지 않고 때를 정해 파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라는 설명이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두 남자가 얼쩡거리자, 근처에서 이들을 살피던 상인이 따라붙어 철창 안을 손짓했다.

“새로 들어온 노예들이 있는데 구경 한번 해보시렵니까. 살성이 꽤 좋습니다. 숫처녀도 있고, 어린 사내아이들도 있습니다만.”

“아니.”

살성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몸서리를 친 라이너스가 계속되는 상인의 말허리를 끊었다.

“카나리아를 사러 왔는데. 어디 가야 볼 수 있지?”

“카나리아라면 사기 힘들 텐데. 노래를 잘 부르는 계집이라면 얼마든지 구해주리다.”

끈질긴 상인이었다. 말이 안 통할 것 같아 라이너스는 딴청을 피웠다. 대놓고 다른 노예상을 물색하는 티를 내자, 퉤, 침을 뱉은 상인이 노예 시장 안쪽의 모자 쓴 남자를 가리켰다.

“저기, 로카디에게 가시오.”

긴 콧수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쥐새끼같이 조그마한 눈에 매부리코를 가진 로카디는 라이너스와 안드레아가 가까이 오기도 전에 얄팍한 입술을 놀렸다.

“안 팔아.”

“우리가 뭘 사러 온 줄 알고?”

“보나마나 그 골칫덩어리 계집이겠지. 카나리아를 찾아온 것 아니오?”

“있긴 있고?”

“있다마다.”

오만불손한 로카디의 태도에도 라이너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친근한 태도로 구경만이라도 하고 싶다고 졸라댔다. 라이너스도 막무가내긴 했지만, 로카디도 완강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라이너스가 구경 값을 치르겠다며 상당한 액수의 금화를 보이자, 긴 콧수염이 간사하게 씰룩였다.

“그냥 구경만 해야 하오. 말도 걸지 말라, 이 뜻이오. 아시겠소?”

이동하는 동안에도 로카디는 깐깐하게 굴었다.

“노래 한 곡 정도는 들려줘도 되지 않나?”

라이너스가 투덜대자, 그러다 잠들면 어떻게 빠져나갈 거냐는 반문이 되돌아왔다. 한번 실험해보고 싶었는데, 노래 듣기는 글렀다고 안드레아에게 속삭인 라이너스가 새삼 놀란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암시장도 이미 지하였는데, 노예 시장 뒤쪽 으슥한 곳에 있는 문을 열자 또 다른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굴을 움푹하게 파고 철창을 마구잡이로 박아 넣은 모양이 감옥을 방불케 했다. 로카디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가끔 주제를 모르는 노예가 있어서.”

감옥으로 치면 독방이라는 뜻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멈춰 선 로카디가 등불로 안을 비췄다. 구석에, 작게 웅크린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은발이네.”

안드레아는 카나리아라기에 알록달록할 것 같았다는 얼토당토않은 라이너스의 수다를 무심히 넘기며 내부를 살폈다. 대충 깎아낸 벽면은 거칠지만, 쇠창살의 이음새는 견고했다. 누군가 자신의 원수를 가둔다면, 여기만 한 곳도 없으리라.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안드레아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낡은 깃펜이 들어왔다. 창살 안에는 얼마 전까지 누가 머무르고 있었던 듯 자질구레한 소품들이 늘어져 있었다.

모서리가 닳은 책, 휘어진 안경다리, 형체만 남은 가죽 끈.

모두 형편없는 모양새지만 한때 값나가는 물건이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흥미가 생겨 깃펜을 주워들자, 가느다랗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제게 주세요.”

줄곧 구석에 웅크려 있던 카나리아였다. 머리카락이 덮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카나리아라는 별명에 걸맞게 듣기 좋았다. 동시에 지하의 퀴퀴하고 눅눅한 냄새와는 다른,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누군가 포도를 쥐어짠 것 같은 상큼한 냄새는 카나리아에게서 풍겨오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는 풍성한 은발은 전쟁터의 설원을 떠올리게 했다. 광활한 눈밭을 새빨갛게 물들였던 피도. 불현듯, 안드레아는 이 계집의 목을 베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은발에 피가 뿌려지면 전쟁터의 설원과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피에서도 포도향이 날까?

비정상적인 충동은 어이없는 결과를 불러왔다.

“…….”

안드레아는 뚜렷하게 부푼 앞섶을 의식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도 모르는 천한 노예를 상대로 냄새와 목소리만으로 발정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를 향해 카나리아가 팔을 뻗었다.

“주세요, 네?”

창살 밖으로 내민 작은 손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쥐락펴락하는 꼴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라이너스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안드레아, 별것도 아닌데 주지 그래.”

별안간 튀어나온 제 이름에 안드레아가 이마를 구겼다. 밝혀져도 상관은 없지만 이런 곳에서 굳이 신분을 알려서 좋을 게 없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떨어져 서 있던 로카디가 이쪽을 면밀히 살피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만 가지.”

“응.”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라이너스가 순순히 뒤를 따랐다.

“미안.”

암시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즉각 사과를 건넨 라이너스에게 안드레아가 가볍게 응수했다.

“왕자께서 잘도 그런 말씀을.”

“뭐 어때. 미안한 건 미안한 거지.”

“이만한 일로 신경 쓸 것 없어.”

실로 안드레아는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철창 밖으로 나왔던 야윈 팔이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손가락으로 툭 튕기면 그대로 꺾어질 것 같은 가냘픈 손목이었다. 손을 오므렸다 펼 때 깃펜으로 손바닥을 간질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더랬다.

‘장난이라니.’

어릴 적에도 또래들의 흔한 장난질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로서는 우스운 일이었다. 전에 없던 충동은 아무래도 손님들의 이지를 흐트러트리기 위해 암시장의 상인들이 몰래몰래 공기 중에 살포한다는 미약 때문인 것 같다. 갑작스런 발기도 그 때문일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라이너스를 무사히 바래다준 뒤 공작저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 덧 하늘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취하지도 않는 술로 잠을 청하려 애썼지만, 그에게 찾아온 건 극심한 편두통이었다.

***

눈알이 뽑힐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시야가 일그러졌다. 좌측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안드레아에게 누군가 찾아왔다는 전언이 들었다.

“누구라고?”

“로카디 뷔테르라는 자입니다. 어제 뵈었다고 말씀드리면 공작님께서 아실 거라고 했습니다.”

“로카디 뷔테르? 로카디….”

귀에 익숙지 않은 이름에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쥐새끼를 연상시키는 상인의 낯짝을 떠올렸다. 무슨 볼일이지. 라이너스가 보낸 선물인가. 카나리아를 사주겠다고 큰소리 쳤다가 무산됐으니, 라이너스의 성격상 다른 노예라도 사서 보냈을 확률이 컸다.

‘성가시군.’

번거로운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면서도 왕자의 선물을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고 해라.”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가운을 걸치고 응접실로 나아갔다. 일개 장사치를 만나는데 의복을 갖춰 입고 만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처음 보는 얼굴과 동행한 올리비아와 맞닥뜨렸다.

“어디 가셔요? 모처럼 즐거운 시간 보내러 왔는데. 아, 여기는 로즈 지오비토예요. 지오비토 남작의 둘째 따님이죠.”

올리비아가 말하는 즐거운 시간이라면 이틀 전에도 가졌으니, ‘모처럼’이란 새로운 인물에게 적용되는 말이리라. 로즈는 금발에 초록 눈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안드레아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내리 깐 로즈의 볼이 삽시간에 발갛게 물들었다. 그로서는 늘 겪는 일이었다.

“자세한 소개는 안에서.”

안드레아가 침실을 가리키자 올리비아가 기쁜 낯으로 로즈의 팔을 당겼다. 상대가 둘이라, 오늘 밤은 쉬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두통조차 조금은 물러간 것 같은 착각에, 안드레아는 한결 기분 좋게 응접실로 들어섰다.

“칼리드나스 공작님을 뵙습니다.”

장소가 달라져서인지 로카디의 뾰족했던 분위기는 한풀 꺾여 있었다. 어제는 음험한 쥐새끼 같았다면 오늘은 겁먹은 쥐새끼 같달까. 기가 질리도록 높은 응접실의 천장 때문에 주눅이 든 것 같기도 했다.

“어제는 제가 공작님을 몰라 뵙고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라이너스가 보냈을 거라는 안드레아의 예상과 다르게 로카디는 독자적인 판단으로 그를 찾아왔다고 했다. 불면증이 심한 그를 위해 카나리아를 바치겠다고.

“꽤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제법 노래를 잘하거든요. 숫처녀기도 하고.”

능글맞게 웃음을 지은 로카디가 비굴하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두 손을 마주 비볐다.

“대신에,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사 하고….”

말이 부탁이지, 조건이나 다름없었다. 원치도 않는 선물에 조건이라니, 여러모로 괘씸한 짓거리였다. 로카디도 그걸 아는지 납죽 엎드렸다. 누가 쫓아내러 오기라도 할까, 눈치를 살피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공작님께는 조금의 손해도 나는 일이 아닙니다! 제게 아들 녀석이 하나 있는데, 화가입지요. 카나리아의 자장가로 숙면을 취하시면, 아들놈에게 공작님의 초상화 한 점만 그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로카디의 말대로 안드레아에게 손해날 일은 조금도 없었다. 아무에게나 내어주지 않는다는 카나리아에 초상화까지. 그래도 로카디의 아들이라는 화가에게 돌아갈 이익이 더욱 컸다.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름값이 올라가는 건 물론이고, 운이 좋으면 궁정화가까지 노려볼 수 있을 테니. 암시장에서 굴러먹는 상인의 신분을 생각하면 과한 행운이었다.

“팔지 않겠다더니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는?”

그래서 팔지 않고 이렇게 바치는 것 아닌가. 상대가 웬만한 귀족이었다면 로카디도 능글맞게 뭉개고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사내는 살육의 신이라는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였다. 잘못 놀린 혀를 뽑는 것쯤이야 그에게 일도 아니리라.

“실은, 안 파는 게 아니라 못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 망할 년이, 아니, 카나리아가 아무에게나 노래를 들려주지는 않아서요. 하지만!”

쓸모없어진 쓰레기를 처분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로카디가 잽싸게 덧붙였다.

“공작님께는 틀림없이 노래를 불러드릴 겁니다. 약속합니다, 네. 단단히 주의를 주고, 또 그러겠다고 약속해서 데리고 왔습지요.”

이유를 물으면 어쩌지. 로카디는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히 안드레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알았다. 숙면을 취하면 네 아들에게 초상화 그릴 기회를 주지.”

옳다구나! 좋았어! 로카디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동안 은발머리 계집을 꼭꼭 숨겨두고 아껴놓은 보람이 있다. 최근에 말썽을 좀 부리긴 했지만, 그래봤자 늙은 노예 하나가 죽은 것뿐이니 따지고 보면 그리 손해를 본 건 아니었다.

“그럼 당장 카나리아를 대령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무어 대단한 거라고 당장, 대령씩이나 하는지.

비웃음을 흘린 안드레아가 자리를 떨쳤다. 로카디의 요구를 들어줄 마음은 없었다. 오늘 밤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넘어가고 날이 밝으면 로카디가 바친 노예를 라이너스에게 보낼 예정이었다.

그토록 카나리아인지 앵무새인지를 궁금해하지 않았나. 노예의 노래를 들을 생각 따윈 없었고 그럼 노래로 인해 불면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을 테니 엄밀히 따지면 로카디의 조건을 어긴 것도 아니다.

이같이 결론지은 안드레아는 침실로 들어가기 전 가볍게 권련을 피워 물었다. 마지막 한 모금을 머금었다 내보낼 무렵엔 연기와 함께 암시장의 노예상도, 하잘것없는 노예도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때문에 침실에 새로이 생긴 거대한 구조물을 봤을 땐 잠시 장소를 잘못 찾았나 싶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두 여인이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리 여겼을 터였다.

“저게 뭐죠? 우리를 위한 선물인가요, 안드레아?”

올리비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입 밖에 내어 묻지 않았을 뿐, 로즈의 초록색 눈에도 호기심 가득한 건 마찬가지였다.

“글쎄.”

안드레아는 로카디의 지나치게 신속한 행동력에 나름 높은 점수를 매기며 구조물을 덮고 있는 흰색 천을 벗겨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커다란 새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창의 이음새마다 보석이 큼직하게 박혀 있는 황금색 새장이었다. 지나치게 화려해서 오히려 조악해 보이는 새장 속에는 웅크린 은발머리 여자가 있었다.

카나리아였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를 곱게 땋아 넘겨 잘 보이는 얼굴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 커다랗고 맑은 보라색 눈동자, 도톰한 입술, 오뚝하고 날렵한 콧날이 부드러운 턱선 안에서 신비로우면서도 청순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마디로 예쁜 계집이었다.

“귀여운 노예네요.”

로즈가 중얼거렸다.

“좋은 냄새가 나요.”

익히 카나리아의 명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올리비아가 기쁜 듯 설명했다.

“스윗 카나리아라고 한다지요. 달콤한 향이 나서…. 그런데 정말 몸에서 향이 난다니. 안드레아, 진귀한 걸 얻었군요. 축하해요.”

이미 맡아본 적 있는 달콤한 향이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청포도 비슷한 체향. 단 건 질색인 그였으나, 이 계집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맡을 만했다. 하나, 그게 전부였다.

안드레아는 이렇다 할 평가를 내리지 않고 등을 돌려 두 여인에게 향했다. 그가 가운의 매듭에 손을 댄 것을 신호로 올리비아가 걸치고 있던 한 겹의 얇은 옷마저 벗어버렸다. 로즈도 마찬가지였다.

개나 말 따위의 짐승이 지켜본다 해서 벗지 못할 이유가 없듯이, 노예 앞에서 발가벗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두 여인 모두 나신이 되는 데 주저가 없었다. 그건 안드레아도 마찬가지였다.

가려져 있던 맨살이 드러날수록 은발이 움찔거리며 물결치는 걸 알아챈 그는 한결 느긋하게 거추장스러운 것을 벗어던졌다. 마침내 완전한 나신이 됨과 동시에 안드레아는 카나리아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의 중심부에 꽂힌 두 눈이 활짝 핀 제비꽃처럼 동그래진 걸 보곤 피식 웃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고정된 시선엔 경악과 동시에 호기심이 잔뜩 묻어났다. 난생처음 남성을 접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시선이었다. 너무 노골적인 게 흠이긴 했지만 여흥을 돋우기에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이것도 색다르네요.”

유난히 바짝 일어선 음경에 그의 속내를 짐작한 올리비아가 평소보다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아무리 뜨거운 순간이라도 안드레아는 절대 질 안에 사정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제 안에 안드레아의 씨물을 담을 수 있을지 모른다.

올리비아에게 선수를 빼앗긴 로즈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어내곤 이내 제 역할을 찾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응, 아응!”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간드러진 교성에 카나리아가 얼른 고개를 숙이는 게 느껴졌다.

누구 마음대로.

번거롭게 이쪽을 보라 명령하는 대신, 안드레아는 성기가 반쯤 박혀있는 비부를 향해 하체를 거칠게 움직였다.

“꺄흣! 안드레아!”

새된 비명에 카나리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다시 이쪽을 바라봤다. 교접 중인 밀부로 쏟아진 시선에 안드레아는 전에 없던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다 이내, 카나리아의 두 눈이 다른 것에 사로잡힌 것을 깨닫고 심히 언짢아졌다. 애타는 눈길로 보고 있는 그건, 깃펜이었다. 암시장에서 주워와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그 깃펜.

순간 때 탄 깃펜만큼이나 기분이 더러워졌다. 잡친 기분만큼 올리비아의 엉덩이를 좌우로 벌려 단단히 부여잡은 안드레아가 일부러 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꺄앗! 앙, 앙!”

높은 소리가 나자 깃펜에 팔려 있던 카나리아의 주의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이처럼 카나리아의 시선에 따라 강약이 오래도록 되풀이된 덕에 정사는 평소보다 길게 이어졌다. 로즈는 말할 것도 없고 체력이 좋은 올리비아마저도 후들거리며 침실을 나섰을 때는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잠시 술로 입술을 축이며 시간을 보낸 안드레아는 술잔이 바닥을 보이자 새 잔을 채워 곧장 새장으로 향했다. 카나리아가 웅크리며 뒤로 몸을 물리는 게 재미있었다. 그래봤자 새장을 빙 돌아가면 끝인 것을.

카나리아가 피하면 그는 놀리듯이 새장을 돌았다. 몇 번이고 안에서 뱅글뱅글 돌던 카나리아가 이윽고 도망을 포기하고 그 앞에 얌전히 몸을 사렸다.

“줄까?”

찰랑이는 맑은 호박색 액체에 카나리아가 도리질 쳤다.

“‘네’, ‘아니오’로 답해야지.”

“…….”

벙어리는 아닐 텐데, 이상해서 바라보니 카나리아의 입 안쪽이 둥글었다. 아, 해보라는 시늉을 하자 카나리아가 순순히 입술을 벌렸다. 혀를 누르고 있는 큼직한 쇠구슬은 로카디의 세심한 배려였다. 그의 말마따나 아무 때나 노래를 불러대 잠에 빠지면 곤란해지니까.

이 은빛 새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안드레아가 쇠구슬을 빼기 위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구슬을 물고 있는 게 꽤 고통스러웠던 듯 입 안쪽이 뜨거웠다. 체온만큼 달궈진 쇠구슬 밑으로 빨갛게 짓눌린 혀가 드러났다.

“아픈가?”

확인이라도 하듯이 안드레아의 손가락이 부드러운 혀를 문질렀다. 그게 자극이 된 듯 카나리아가 급하게 침을 삼켰다. 그대로 입에 물린 채 목구멍 언저리까지 손가락이 닿았다 밀려났다. 나쁘지 않은 느낌에 안드레아가 엷게 웃었다.

보드라운 점막이 단단한 손가락 마디에 눌린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어딘가 괴롭히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입술에서 손을 뗀 안드레아가 깃펜을 가리켰다.

“저걸 갖고 싶나.”

“네.”

작지만 또렷하게, 카나리아가 대답했다. 그가 ‘네’, ‘아니오’로 답하라고 했던 걸 기억한 거라면 꽤 순종적인 태도였다. 비록 답변의 내용은 맘에 들지 않지만. 짓궂게 웃은 안드레아가 턱짓했다.

“그럼 벗어봐.”

“…….”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주문이었다. 자꾸만 가학적 충동이 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조금 전 정사에 지나치게 흥분했거나, 장시간의 불면 때문에 신경이 뒤틀어졌거나. 이유야 뭐가 됐든 이 자그마한 계집의 속살이 궁금해졌다.

잠시 눈을 깜박인 카나리아가 네, 조용히 대답한 후 가슴을 조이고 있는 매듭을 풀었다. 망설임 없는 손짓이 의외였다. 생각처럼 순진한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 무렵, 카나리아의 몸에서 마지막 천 조각이 떨어졌다.

“원래 부끄러움이 없나?”

아무리 그래도 계집인데 남자 앞에서 훌렁훌렁 잘도 벗는구나 싶다. 로카디는 숫처녀라 자부했지만, 뚫어보기 전엔 모를 일 아닌가. 이미 누군가의 손을 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심히 불쾌해졌다.

어차피 손끝 하나 댈 마음 없는 노예 따위, 누구 밑에서 얼마나 굴러먹었든 그가 알 바 아닌데도 그랬다. 안드레아의 의심에 노예의 보랏빛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옳은 말인데, 썩 듣기 좋진 않았다. 의도야 그게 아니겠지만 안드레아가 노예인 그녀를 사람 취급하지 않듯, 그녀도 그를 저와 같은 사람 취급하지 않겠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어차피 무슨 상관인가. 하찮은 노예 계집의 생각 따위.

안드레아는 손에 든 술을 천천히 음미하며 눈앞의 나신을 감상했다. 지하에만 갇혀 있었다더니, 해를 보지 못한 꽃처럼 계집의 몸에선 색소가 빠져버린 듯했다. 우유처럼 하얀 살결이 그랬고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이 그랬다. 계집을 벗겨놓으니 조악한 새장도 새삼 호화롭게 보일 정도였다.

“치워.”

문득 눈썹을 찌푸린 안드레아가 발칙하게도 머리카락으로 중요 부위를 가리고 있는 카나리아에게 명령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카나리아가 이내 포기하곤 양손에 쥐었던 긴 머리카락을 놓았다. 마른 몸인데도 제법 큼직하면서 모양이 둥글고 예쁜 젖가슴이 먼저 그의 시선을 끌었다. 이쪽도 색이 빠져버린 건 마찬가지인지 젖꼭지가 연분홍색이었다.

이윽고 아래로 눈을 내린 안드레아의 눈이 가늘어지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설마 이곳까지 은발일 줄은 몰랐다. 가느다랗고 존재감 없는 은색 음모 때문에 아래의 둔덕은 마치 맨살처럼 보였다.

“신기하게 생긴 새네.”

안드레아의 농에 카나리아가 작게 대꾸했다.

“제 이름은 라티시아예요….”

묻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지껄인 말에 안드레아의 눈빛이 일견 포식자처럼 날카로워졌다. 당황한 라티시아는 또다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얼른 손을 내밀며 깃펜을 요구한 게 그것이었다.

“이제 주세요….”

옷도 벗고 충분히 감상할 시간도 줬으니 이제는 깃펜을 받고 싶었다. 귀족들에게는 쓰레기 이상의 가치가 없는 별 볼일 없는 물건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은인의 유품이었다. 어서 깃펜을 받고 이제 그만 그가 관심을 거둬주었음 하는 바람도 있었다.

눈앞의 남자에게서는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강렬한 냄새가 났다. 위험하면서도 도발적인, 수컷의 냄새.

그 정체가 그가 수차례 쏟아낸 정액의 냄새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순한 후각의 자극으로 치기엔 어쩐지 두렵게 느껴지는, 그래서 그녀를 자꾸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그래봤자 새장에 갇힌 새인 그녀가 도망칠 곳은 없었지만.

그를 증명하듯, 어느새 깃펜은 들고 온 안드레아가 애완용 새를 부르듯 손에 쥔 것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리 온.”

이토록 다정한 부름이라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흘렀다.

이건 변덕이다.

안드레아는 노예에게 솟은 호기심을 이렇게 정의 내렸다. 누적된 불면과 섹스 후의 나른함이 독주에 섞여 빚어낸 변덕. 그러니 그답지 않게 이런 시시한 장난질이지. 그렇다 해도 지금만큼은 꽤 즐거운 여흥이 될 터였다.

안드레아는 머뭇거리며 가까이 다가온 라티시아의 옅은 젖꼭지를 깃털로 살살 간질였다. 볼록 솟아오른 제 젖꼭지에 라티시아가 입술을 앙 물었다. 동시에 청포도향이 더욱 짙어졌다. 이렇게 달콤하니 분명 즙도 많을 테지.

깃펜을 아래로 내려 가랑이 사이를 툭툭 건드리며 안드레아가 명령했다.

“벌려.”

라티시아가 주먹을 작게 쥐었다가 폈다. 반항인가, 생각한 찰나 라티시아가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갈라진 틈에 대었다 떼자 깃펜의 끝부분이 젖어 슬쩍 휘어졌다. 휘어진 부분의 색이 짙어진 모양을 눈앞에 흔들어 보여주자 부끄러움에 라티시아의 고개가 푹 꺾였다. 안드레아는 그제야 깃펜을 넘겨주었다.

“가져도 좋다. 옷도 입고.”

라티시아가 덤덤하게 옷을 입는 동안, 안드레아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사타구니 안쪽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아마, 젖꼭지를 희롱할 즈음부터.

겨우 나른해졌나 싶었는데 잠이 확 달아난 것 같아 아쉬웠다. 물론 저 은발머리 노예에게 아래를 물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태생적으로 고귀한 그는 천한 것을 혐오했다. 암시장에 그동안 발 들이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저 천박한 새장이 그의 침실에 들어와 있는 것만도 라이너스를 생각해 많이 참아준 거였다. 언제나 예외란 존재하는 법이니까. 단, 예외는 일회에 그쳐야 했다.

라이너스에게 따로 전갈을 보낼까, 보낸다면 언제쯤이 좋을까, 궁리하는 안드레아의 귀에 작은 부름이 들렸다.

“주인님.”

저 노예는 자꾸 선을 넘는다. 주제도 모르고 제멋대로 자신을 불러대다니. 안드레아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덕분에 작게 웅크린 라티시아의 어깨가 더욱 동글게 말렸다.

“뭐지?”

“노래를 부르면 테오를 불러주신다고 들었어요.”

“테오?”

“아, 테오도르 뷔테르요. 제가 노래를 부르면, 주인님께서….”

“화가 말인가?”

“네. 테오도르는 그림을 정말 잘 그려요. 분명 주인님께서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라티시아의 모습에 안드레아는 근원 모를 불쾌함을 느꼈다. 동시에 그럴듯한 가정이 떠올랐다. 저 노예 계집과 노예상의 아들이 연인이 아닐까 하는.

테오, 라고 친숙하게 불렀으니 영 헛다리 짚은 건 아닐 거다. 그게 사실이라면 로카디는 꽤 수지맞는 짓을 벌였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아들이 노예를 임신이라도 시키면 곤란할 테니까.

설마 로카디가 일부러 그랬을까. 안드레아는 아니라는 답을 내렸다. 숫처녀라고 장담한 만큼 노예의 순결을 믿고 있을 테니, 일을 치르기 전에 둘을 떨어뜨려 놓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하에 가둬놓은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닳도록 드나들었을 테오도르 뷔테르를 떠올린 안드레아의 시선이 문득 아직도 라티시아가 소중히 쥐고 있는 깃펜에 닿았다.

“그 깃펜이 테오도르 뷔테르의 것인가?”

안드레아가 턱짓하자 라티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건….”

아니라니, 뒤는 더 궁금하지 않았다. 노예의 너저분한 사연 따위, 관심도 없을뿐더러 들을 이유가 없었다. 대신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소문의 실체나 확인하기로 했다. 불면을 치유한다는 카나리아의 노래. 어차피 오늘밤이 마지막이니 한 번쯤 들어둬서 나쁠 것도 없지 않나. 그러나 그의 주문에 노예는 당돌하게 고개를 저었다.

“갇힌 새는 울지 않아요.”

황당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안드레아에게 라티시아가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새장 밖으로 풀려난 후에야, 그러니까, 자유로운 새만이 진정으로 울 수 있다고 들었어요.”

요지는 우스꽝스러운 새장에서 꺼내달란 소리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개수작이었다.

“내가 왜.”

안드레아가 조소했다. 저 흉물스러운 새장을 덩그러니 남겨놓고 도망이라도 가면 낭패였다. 벗겨놓은 계집이 들어 있으니 나름 호화스러운 감옥 같아 보이기도 했던 새장 아니었나.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어요. 약속했으니까요. 주인님도, 약속하셨잖아요?”

“내가 뭘 약속했지?”

“제가 노래를 불러 주인님의 불면을 치유하면, 테오를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해주시고 저도 자유롭게 해주신다고 들었어요.”

전자는 로카디에게 들어 알고 있지만, 후자는 금시초문이었다. 로카디에게 속은 줄도 모르고, 라티시아는 간절히 손을 맞잡고 있었다.

멍청한 것.

눈살을 찌푸림과 동시에 기껏 물리쳐놓은 두통이 몰려왔다. 목 하나에 머리통이 여럿 달린 괴물처럼 주의가 흐트러졌다. 안드레아는 머리맡의 등을 끄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노래는 필요 없다는, 명백한 의사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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