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갇힌 새는 울지 않는다-3화 (3/17)

# 03

[과몰입공금]

노예의 주인은 크게 두 부류라 했다. 노예에게 손대는 자와 대지 않는 자. 간신히 도망쳤다가 다시 붙잡혀온 어느 노예의 입을 빌리면 후자가 더 나았다. 그 노예는 적어도 험한 꼴은 당하지 않고 깔끔하게 죽을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어느 쪽일까.

라티시아는 깃펜에 반투명하게 말라붙어 있는 자신의 체액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생각했다. 이건 손을 댄 걸까, 아닌 걸까? 엄밀히 따지면 손이 직접적으로 닿은 적은 없으니 더 나은 쪽에 속하려나. 어쨌거나 남자가 자신의 침상 위로 그녀를 부를 일은 없어 보이니 그건 다행이었다. 라티시아는 아까 목격한 장면을 떠올리며 눈썹을 모았다.

남자의 그곳은 심각하게 컸다. 남성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그럼에도 그게 아주 크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는 보편적인 기준이라는 게 있으니까, 절대 일반적이진 않았다. 그 증거로 그에게 깔려 고통에 신음하던 여자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그게 들락거릴 수 있다니,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테오도 그런 짓을….’

테오도 여자와 관계를 가져본 경험이 있을까? 이리저리 뒤엉키던 세 육신 위로 그리운 얼굴이 겹쳐졌다. 망측한 일이었다. 하필 이런 때 테오를 떠올리다니. 그 순수하고 다정한 테오도르 뷔테르를.

‘그럴 리 없잖아.’

라티시아는 굳게 확신했다. 테오도르는 육욕만을 위해 움직이는 남자가 아니라고. 사랑하는 이와 교감하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라티시아가 알기로 테오도르가 다른 여자와 사귄 적은 없었다. 테오도르도 그러지 않았나. 태어나서 처음 마음에 둔 건 라티시아 하나뿐이라고. 그러니까, 테오도르는 아직이었다. 그렇게 결론짓자 안도감이 들었다.

마음이 놓이자 희망도 새록새록 솟았다. 새 주인의 불면을 고치면 로카디의 약속대로 이 새장에서 풀려날 수 있을 거다. 그녀가 노래를 잘하면 잘할수록 훨훨 나는 새처럼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가까워질 거고, 그럼 그만큼 테오도르와 함께할 날도 빨리 다가오겠지.

‘그렇다면….’

어서 노래해야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라티시아는 침대에 미동도 않고 누워 있는 남자를 보았다.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깨어 있는 게 분명했다.

후, 후우우.

막상 시작하려니 떨려, 라티시아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그녀의 주인은 예리한 청각의 소유자였다. 안드레아의 인영이 살짝 움직인 순간, 라티시아는 더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달이 눈을 뜬다. 별빛과 춤추는 어둠의 향연. 구름 속 피어오른 꿈 그대에게 손짓하네. 달콤한 밤의 축복, 그대를 부르리.

기교 없이 단순한 노래였다. 담담하면서도 가슴의 어느 한구석을 파고드는 구석이 있는 묘한 노래. 어딘지 구슬프게 느껴지는 건 노래 때문이 아니라 노예 계집의 청아한 목소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갇힌 새는 울지 않는다더니.”

안드레아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창살 뒤의 그녀를 쳐다봤다.

“울진 않아도 노래는 부르나보군.”

비아냥거림에도 라티시아는 멈추지 않았다. 고집 센 새가 들어왔다고 한마디 덧붙이려는 순간, 안드레아는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머리를 두드리던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두통은 사라졌지만, 기분은 썩 달갑지 않았다.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볼까, 아님 여기서 멈춰야 할까.

‘왜 그러지?’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라티시아는 자기를 쳐다보는 안드레아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심히 당황했다. 불면이 심하다더니 쉬이 잠들지 않는 모습에 초조해졌다. ‘밤의 찬미’가 끝나도록 잠들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떡하지?’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안드레아의 집요한 눈빛에 다음 노래를 부를 자신이 사라졌다. 그래도 불러야 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집중하기 위해 살며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눈을 뜨면 그가 잠들어 있길 기도하면서.

천사의 날개 하늘을 뒤덮어 밤이 온다네. 고요한 날갯짓에 부서진 햇살, 아름다운 별이 되어 반짝인다네. 그대의 입가에 스며 다정한 미소가 된다네.

어느 때보다도 혼신을 다한 라티시아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눈을 떴다. 비스듬히 앉아 있던 인영이 반듯하게 누워 있는 모습에 우선 안도했다. 여기에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안정된 호흡에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드레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잠든 모습을 확인하자 그녀의 눈꺼풀에도 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피로한 하루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씻고, 머리카락을 다듬고, 장신구며 화장으로 치장하느라 이리저리 끌려 다닌 것도 모자라, 불편한 새장에 갇혀 적지 않은 시간 흔들리며 이동했다. 거기서 난생처음 보는 장면까지….

‘그래도 다행이다.’

그녀의 새로운 주인이 잠들었으니 희미하게나마 빛이 보이는 듯했다. 찬란한 희망의 빛이. 며칠 더 노력해 공작이 자신의 노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 비치면, 테오도르에게 초상화를 맡겨달라고 청해볼 요량이었다.

주제 넘는다 해도, 설령 그로 인해 모진 매질을 당한다 해도 테오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내할 생각이었다. 테오는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한 사람이니까.

‘테오….’

라티시아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단꿈에 점차 젖어들었다.

***

라티시아의 희망과 달리 안드레아의 불면이 나아졌다고 해서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의 침실에는 끊임없이 여자들이 드나들었고, 라티시아는 꼼짝없이 새장에 갇혀 그녀들의 교태 섞인 웃음과 자지러지는 신음을 빠짐없이 들어야 했다. 셀 수 없이 정사를 목격하면서, 라티시아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녀의 주인은 그녀의 눈을 필요로 한다.

확실히, 라티시아가 쳐다볼 때와 아닐 때가 달랐다. 그녀가 시선을 돌리면 어김없이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잡티 하나 없던 영애의 몸에 남은 잇자국이나, 세게 들이박은 탓에 발갛게 부어오른 음부가 라티시아의 추측이 착각이 아님을 알렸다.

어쨌거나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아파지는 건 싫었다. 라티시아는 뚫어져라, 침대를 바라봤다. 지금 침대에 오른 영애는 처음부터 어딘지 모르게 힘겨워 보였다.

“아, 악! 공작님. 흑, 죄송해요.”

안드레아는 눈물을 훔치는 여자를 탐탁잖은 눈길로 노려봤다. 침대에서 질질 짜는 여자는 성가시고 재수 없다. 우는 여자를 달래가며 안는 취미 또한 없었다. 결국 안드레아는 몸을 빼냈다. 사타구니에 어지러이 묻은 핏자국을 대강 시트로 훔쳐내는 그에게 여자가 염치도 없이 매달렸다.

“참아볼게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우는 와중에 드문드문 약혼자가 있다는 얘기를 흘렸던 것 같은데, 상대가 어지간히 모자란 놈인가 보다. 뭐가 됐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안드레아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강 쓸어 넘기며 침대 밖으로 한 발 내디뎠을 때, 애원하던 여자가 그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처박았다.

귀족으로서의 품위 같은 건 완전히 내던진 행위에 안드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이렇게 나온다면 똑같이 대해주면 될 일이다. 귀찮게 구는 상대를 떼어내기 위해 머리채를 잡았을 때, 새장 속의 보랏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런 건 또 처음인지 왕방울만큼 커진 눈에 안드레아는 마음을 바꿔 틀어쥔 머리채를 앞뒤로 흔들었다.

웁, 웁, 우읍….

목 막힌 소리가 신음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동그랗게 뜬 눈 못지않게 라티시아의 입술 또한 멍하니 벌어졌다. 고른 치아 안쪽에 놓인 분홍 혀가 살짝 보인 순간, 안드레아는 제 것을 물고 있는 여인의 턱을 강하게 쥐어 벌렸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혀에 끄트머리를 대고 강하게 비볐다. 끈끈하고 하얀 사출액이 혀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안드레아가 정중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한 손짓으로 허벅지에 매달린 여자를 떼어냈다. 여지없이 밀려난 영애가 가만히 옷을 꿰어 입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자꾸만 후들거리던 영애가 안드레아에게 부탁했다.

“공작님, 제 하녀를 불러도 될까요.”

끝까지 번거롭게 구는 여자다. 안드레아가 침실 곁에 딸린 방을 눈짓하며 종을 울렸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걸음을 옮기던 여자가 문득 새장을 바라보았다. 낭패감, 굴욕감이 섞인 눈빛이 일견 사납게 빛나 라티시아가 움츠러들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어딘지 차게 느껴지는 안드레아의 물음에 영애는 라티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도 인사만큼은 예의 바르게 했다. 헐벗은 모양새가 우스꽝스럽다는 걸 아는지 귓불을 발갛게 물들인 채.

“아니에요, 공작님. 저, 오늘 함께해서 정말 영광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안드레아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피곤한 여자와의 만남을 끝냈다. 개운치 않은 뒷맛을 털어내기 위해 욕실로 향하는 공작의 뒷모습에, 이쯤에서 라티시아도 한숨 돌렸다.

방 안에 홀로 남은 라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귀족 영애도 저런 취급을 당하는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같은 상황을 제외하고 안드레아는 철저히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하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라티시아는 며칠째 입에 아무것도 넣지 못했다. 들어가는 게 없으니 나오는 것도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용변 보는 모습마저도 보여야 할 판이니.

암시장의 지하에 갇혀 있을 때에도 이 정도로 굶어본 적은 없었다. 이제는 허기지는 감각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그저 배 속이 먹먹했다. 그래도 라티시아는 밤이 깊어지면 술잔을 기울이는 안드레아를 위해 열심히 노래했다. 온 힘을 쥐어짜내서.

서늘한 바람결에 꽃이 폈다오. 달밤에 외로이 피어난 하얀 꽃. 가녀린 웃음 꽃받침에 감추었네.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안드레아는 새장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눈치가 빠른 노예였다. 착실히 그의 기분을 맞추는 걸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되지 않는 존재의 모호함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카나리아를 들이고 난 후 지난 며칠간 안드레아는 잘 잤다. 씻은 듯 사라진 불면이 저 계집 때문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과연, 독일까. 약일까.

가치도 없는 노예 계집을 두고 쓸모를 가늠하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웠다. 이런 이유로 안드레아는 차라리 은발머리 노예 계집이 죽어버렸음 했다. 그대로 놔두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나날이 가늘어지는 목소리를 보면 남은 명이 그리 긴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일이 마지막일지도.’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카나리아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날이 저물면 어김없이 그를 재우기 위한 노래가 들려왔다. 어느 날, 안드레아는 그를 찾아오는 여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아무리 무념무상으로 허리 아래의 감각에만 집중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정 후에 찾아오는 나른한 만족감도 없었다. 갈증에 바닷물을 퍼마시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이유는 스스로도 잘 알았다.

저 빌어먹을 카나리아 탓이다.

차츰, 사교계에 괴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칼리드나스 공작이 몹쓸 병에 걸렸다는 소문은 점차 종기가 수백인 괴질이라는 둥, 특히 성기의 그 부분이 말도 못할 정도라 사실상 불능이라는 둥, 점점 흉흉하게 살을 붙여갔다.

라이너스가 칼리드나스 공작저를 찾아온 건 그즈음이었다.

“세상에, 자네 침대에 여자가 끊길 날도 다 있다니!”

죽을병에 걸리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쌩쌩해 실망했다는 농담을 던진 라이너스는 못 보던 새장에 관심을 보이다가 그 속의 인물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저렇게 죽일 거면 차라리 날 주지 그래.”

라이너스의 호들갑에 안드레아가 새장을 흘긋 바라보았다.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이 창백한 얼굴에 보랏빛 눈동자만이 짙었다. 하얀 눈밭에 핀 제비꽃 두 송이를 언뜻 떠올린 안드레아가 라이너스를 향해 비스듬히 웃어 보였다.

“폐하께선 노예를 금지하시지 않았나?”

그러니 왕자인 라이너스가 노예를 데리고 있는 건 부친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완곡한 거절이었는데 라이너스는 눈치 없이 떠들어댔다.

“사냥에 나갔다 길 잃은 여자를 주워왔다고 하면 되지. 어때?”

제 것을 서슴없이 내어달라는 라이너스에게 희미한 짜증이 일었지만, 안드레아는 그저 웃기만 했다. 기실 못 줄 것도 없지 않나. 본래 계획은 하룻밤이 지나면 라이너스에게 저걸 보내는 거였으니. 한데 보름이 지나도록 계집은 여전히 그의 방에 있다.

“아깝잖아. 이대로 죽이기엔 재주가 많은데. 차라리 나에게 넘기라고.”

라이너스가 다시 한번 졸랐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티시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순수한 호기심과 탈출에의 기대가 섞인 보랏빛 희망. 순간 안드레아는 저 희고 가녀린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화마처럼 타오르는 충동을 억누름과 동시에 자각했다.

저 노예, 라티시아는 그의 것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의 소유여야 했다. 죽일지언정 제 손으로 죽여야 옳았다. 그렇다면 라이너스에게 들려줄 대답은 하나였다.

“관심 꺼.”

일말의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안드레아가 라이너스의 제안을 잘라냈다. 이것으로써 희망의 싹도, 라이너스의 흥미도 단박에 꺾였으리라 생각했는데 라이너스는 오히려 의외라는 듯 눈을 빛냈다.

“설마, 우리 카나리아를 건드린 건 아니겠지?”

“그럼 수간인가.”

대놓고 짐승 취급이었다. 얼토당토않다는 반응에 금세 흥미를 잃은 라이너스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사냥 대회에 자네와 함께 출전할 명마 좀 구경시켜주겠나? 나도 못지않은 명마를 준비해야지. 명색이 왕자인데 칼리드나스 공작보다 못한 말을 탈 수는 없으니.”

꽤 시시한 용건이었지만, 안드레아는 흔쾌히 라이너스를 인도했다. 은근슬쩍 새장 속을 훔쳐보는 라이너스의 곁눈질을 지적하느니 가지고 있는 말 몇 필을 내어주는 게 나았다.

“원한다면 몇 마리 골라 가져도 좋아.”

“역시.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릴 것이니!”

내심 바랐던 듯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는 라이너스와 함께 막 문을 나섰을 때, 새장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났다. 줄곧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라티시아가 바닥에 길게 쓰러져 있었다.

“주인님….”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라티시아가 헐떡이며 그를 불렀다. 그야말로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듯 크게 경련한 라티시아가 울먹였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보나 마나 살려달라고 빌겠지.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을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새장 앞으로 다가간 안드레아는 대수롭지 않게 라티시아의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러나 노예 계집의 청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테오, 테오도르에게 그림을…!”

채 소원을 맺지 못한 라티시아의 고개가 그대로 기운을 잃고 떨어졌다. 성가신 노예 계집이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기를 원하지 않았었나. 바라왔던 순간인데도 막상 닥치고 나니 안드레아는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이대로 죽도록 내버려둘지, 조금 더 살려둘지. 단순한 선택지에 불순물이 끼어 본질을 흐렸다.

테오, 테오도르 뷔테르.

죽음을 목전에 둔 노예가 구걸한 건 목숨이 아니라 발칙하게도 젊은 화가 녀석의 기회였다. 그게 안드레아의 신경을 긁었다.

감히.

무모한 노예 계집을 향해 비웃음을 터트린 안드레아가 라티시아의 작은 턱을 들어 올려 호흡을 확인했다. 끊어졌다고 착각이 들 만큼 느리지만 가늘게나마 숨이 붙어 있었다. 이어 맥까지 짚은 후, 종을 울려 하녀를 불렀다.

“정신을 차릴 때까지 돌봐주어라.”

그러곤 매몰차게 걸음을 돌렸다. 문가에 서서 이 모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라이너스가 코끝을 찡그리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닦게나.”

노예매매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따라서 노예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선 안 될 것들. 때문에 노예는 가축에 갈음했다. 언제든 죽여 없애도 이상하지 않은, 짐승.

즉, 더럽고 냄새나는 짐승을 만졌으니 닦으라는 의미였다.

안드레아는 별 이의 없이 손수건을 받아 천한 몸에 닿았던 손가락을 꼼꼼히 닦아냈다. 그러나 아무리 닦아내도 손끝에 남아 있는 얕은 맥박의 느낌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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