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갇힌 새는 울지 않는다-1화 (1/17)

갇힌 새는 울지 않는다 || 한을 作

# 01

[과몰입공금]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돌아왔다.

이 단순한 사실에 왕궁 안팎이 한동안 떠들썩했다. 살육의 신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이번 전쟁도 그 때문에 한층 참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무리 그래도 신이라니.’

유하르는 맞은편에 앉은 라이너스 왕자를 슬쩍 곁눈질로 살폈다. 궁금했다. 별명이라지만 공공연히 ‘신’이라는 칭호가 붙는 안드레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왕좌의 주인은 바뀌어도 왕좌를 지키는 칼리드나스의 검은 영원하다는 세인들의 말들에 대해서도.

그러나 그런 민감한 주제를 묻기에 유하르는 이제 겨우 기사 작위를 받은 애송이였다. 아무리 라이너스 페를레티가 유약해 보인다 해도 말이다. 유하르가 다시금 왕자를 흘깃 보았다.

금발에 옅은 갈색 눈동자, 호리호리한 체격 때문에 라이너스가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여러모로 유하르의 상관과는 대조적이었다.

유하르는 안드레아의 새카만 흑발과 차갑게 느껴지는 짙푸른 눈동자를 떠올렸다. 멀찍이서도 위압감을 주는 큰 키와 단단한 체격은 또 어떤가. 유하르는 전쟁터에서도 가졌던 의문을 다시 한번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몸에도 검이 들어갈까.’

무장한 안드레아를 볼 때마다 갑옷의 쓸모에 대해 회의가 들었더랬다. 불충한 생각이었으나,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르는 안드레아 칼리드나스를 보면 누구나 유하르와 비슷한 생각을 하리라. 아무리 날고 기는 상대라도 그 앞에 서면 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으로 보였으니.

“오래 걸리는군.”

유하르의 상념을 깬 건 라이너스의 나른한 음성이었다. 유하르는 재빨리 시계를 확인했다. 제가 이곳에 온 지 어느 덧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라이너스 왕자는 그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졸음기가 몰려올 만도 했다.

“죄송합니다.”

자기 잘못도 아니면서 유하르가 대신 사과하자, 라이너스가 너그럽게 미소 지었다.

“괜찮다. 미리 약속도 안 하고 찾아온 내 잘못이지. 한데, 자네는 무슨 일이지?”

“마침 적당한 약초를 구했기에.”

“호오, 나도 구경해도 될까.”

“별 건 아니지만, 그럼.”

유하르는 품속에서 말린 약초를 꺼냈다. 불면에 특효가 있다는 약초였다. 약초를 바친 이의 호언장담대로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의 상관을 재우기보다는 한 번 쓰이고 버려질 확률이 더 높았다. 라이너스도 비슷한 생각인지 곧 흥미를 잃고 유하르에게 약초를 돌려주었다.

“비슷한 걸 수도 없이 봐왔지만, 글쎄.”

안드레아의 지독한 불면증은 그의 눈에 띄는 외모만큼이나 유명했다. 왕자와 유하르가 이렇게 시간을 죽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안드레아는 지금….

“라이너스 왕자님을 뵙습니다.”

무심코 문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공교롭게도 닫혔던 문이 열리더니 올리비아 트랑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누가 봐도 막 안드레아의 침실에서 나온 모습이었다. 상기된 뺨과 쾌락의 여운이 남아 붉게 젖은 눈이 아니더라도 안드레아가 불면의 해소를 위해 침실에 여자를 들인다는 건 이미 다 아는 사실이었다.

올리비아의 인사를 가벼운 눈짓으로 화답한 라이너스가 일어섰다. 유하르도 왕자를 따라 일어서 안드레아의 침실로 향했다. 라이너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주 보이는데, 이제는 정착한 건가.”

올리비아 얘기였다. 이전에도 몇 번 마주쳤던 듯했다. 그건 그만큼 안드레아가 여자를 자주 불러들인다는 뜻이었다. 자주라니. 유하르는 부정했다. 매일같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라고 해야 옳았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바로 어젯밤만 해도 여자 너덧이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의 침실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걸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 속에 올리비아가 있었나? 모르겠다. 민망해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으니까. 아직 총각인 그로서는 여자 여럿과 남자 하나가 어떻게 뒹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꽤 난잡한 모양새 아닐까.

모른다면서도 꽤 구체적인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질 무렵, 침실에 당도했다.

“좋은 시간 보냈나.”

라이너스의 짓궂은 안부에 안드레아도 여상하게 대답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물론 하나도 죄송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죄송했다면 초저녁부터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여자 따위는 진작 내치고 응접실로 나왔겠지. 뻔뻔스런 응대에 라이너스가 콧등을 살짝 찡그렸다.

“이래서야 우리 벨리오나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나.”

“정 걱정된다면 혼담을 무르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기엔 내 동생이 자네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알잖나?”

“모르겠습니다만.”

두 남자 모두 편안히 대화를 주고받는데, 중간에 낀 유하르만 가시방석이었다. 태연한 낯으로 왕녀와의 혼담을 무르다니, 안드레아의 도가 지나친 오만함에 괜히 유하르의 눈앞이 노래졌다. 역시 제 상관은 제정신이 아니다. 아니면 대책 없는 안하무인이거나.

‘대책이 없지는 않겠지.’

누가 뭐래도 칼리드나스다. 사병만으로도 페를레티 왕가의 군대와 비등하다는.

“유하르. 무슨 일이지?”

엇! 날카로운 지적에 정신을 차린 유하르가 서둘러 약초를 꺼내 들었다. 유하르가 바친 것을 열어보지도 않은 안드레아가 그만 나가보라는 표시로 문을 고갯짓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유하르는 구원받은 기분으로 서둘러 문을 나섰다.

“착실한 녀석이야.”

라이너스가 내내 긴장을 풀지 않고 정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유하르를 칭찬했다.

‘소심한 거겠지.’

유하르는 숫기가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굳이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왕자가 유하르 따위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관심 밖이었다. 쓸데없는 주제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 따윈 없었다.

“결혼 얘기나 꺼내러 온 건 아닐 테고.”

안드레아가 몸을 일으키자 잘 짜인 복근의 음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밧줄처럼 팽팽해졌다가 느슨해지는 모양새가 가히 일품이었다. 살육의 신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상처 하나 없는 몸을 감탄하며 바라보던 라이너스가 술병을 집어 드는 안드레아에게 얼른 주문했다.

“얼음 두 조각, 아니 세 조각만.”

얼음이 잔에 담기는 경쾌한 소리에 이어 호박색 액체가 차올랐다. 이리저리 잔을 굴려 얼음이 녹는 모양을 잠시 구경하던 라이너스가 반박했다.

“정말이야. 벨라가 걱정되는 건.”

물론 걱정만 할 뿐 별 도움은 되지 않으리라.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수없이 안드레아의 침실로 드나들 여자들을 참는 건 벨리오나의 몫이지 라이너스의 몫은 아니었다.

“아!”

라이너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끼리 마주쳤다.

“폐하께 자주 전쟁을 일으켜 달라 청해볼까.”

전쟁터에서만큼은 안드레아도 여자를 안지 않았다. 귀족 영애만 잠자리에 들여서라는 이들도 있었다. 험지까지 걸음 할 숙녀는 없을 테니 안드레아가 어쩔 수 없이 참는 거라고.

하지만 라이너스의 생각은 달랐다. 안드레아가 부르기만 하면 아무리 궂은 날씨와 험한 지형에도 치마를 걷고 달려갈 여자가 줄을 섰다. 붉은 피와 뚝뚝 떨어진 살점 사이에서도 기꺼이 다리를 벌릴 여자들이.

요컨대 전쟁터에서의 금욕은 순전히 안드레아의 선택이라는 뜻이었다. 덕분에 귀환 때마다 안드레아의 몸값은 더더욱 높아졌다. 뼛속까지 귀족인 칼리드나스에게 몸값이라는 표현도 웃기지만, 여하튼 그랬다. 안드레아에게 처녀를 떼고 싶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오는 지경이니 더 말해 무엇 하나.

“자네는 금욕적인 게 더 어울려.”

생각하다 보니 불쑥, 성질이 난 라이너스가 심술궂게 던졌다. 무슨 소리냐는 듯 흘긋 눈길을 던진 안드레아가 무심하게 잔을 기울였다.

“본론부터 얘기하시지.”

“우리가 꼭 볼일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였나.”

금세 얼굴을 푼 라이너스가 싱글싱글 웃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보아온 사이인지라 둘 사이에는 격의가 없었다. 때문에 왕자를 대하는 안드레아의 무례한 태도에도 라이너스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안드레아가 막 대할수록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며 더 좋아했다. 그만큼 성품이 유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실은 테를로가한테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지.”

테를로가 누엘 얘기라면 그다지 안드레아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테를로가의 부친인 누엘 후작은 개와 같았다. 페를레티 국왕에게는 열렬히 꼬리를 흔들면서 칼리드나스 가를 향해서는 이를 드러내고 짖어대는, 하찮고 우스운 개. 하물며 개의 새끼야.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안드레아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라이너스가 애를 썼다.

“암시장 얘기는 자네도 들어봤겠지. 거기서 이제 노예를 팔기 시작했다네.”

페를레티 왕조 하에서 노예매매는 원칙적으로 금지였다. 거리의 거지조차도 함부로 구속하거나 부릴 수 없으며, 이동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허용했다. 이런 마당에 노예가 등장했다. 그것도 암시장에. 굳이 노예가 아니라도 온갖 음침하고 금지된 물건을 파는 암시장이었다.

“가뜩이나 골치였는데, 이러다 걷잡을 수 없어지는 거 아닌가 몰라.”

“걷잡을 생각은 있었고?”

안드레아의 날카로운 지적에 라이너스가 씩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 그러고 보니 안드레아, 놀라지 않는군. 이미 알고 있었나?”

“저하의 소식통이 영 쓸모없는 것 같습니다만.”

갑작스런 경어는 명백한 조롱이었으나, 라이너스는 쾌활하게 웃었다.

“소식통은 쓸만해. 내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걸 어떻게 잡나? 사람이 숨 쉴 틈은 줘야지.”

암시장을 두고 숨 쉴 틈이라는 다소 너그러운 해석을 내린 라이너스가 안드레아를 살살 꼬여냈다.

“구경이나 해보자고. 또 누가 알아? 불면을 한 방에 날려버릴 특효약을 만날지.”

특효약에 대한 기대 따위는 없었다. 그래도 안드레아가 묵묵히 라이너스를 따라 나섰던 건, 왕자이면서도 세상 물정에 어두운 친우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암시장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 은밀하게 입장권을 거래하고, 입장권이 없는 자는 신분 고하와 재력의 여부를 막론하고 입장 불가였다. 덕분에 입장권 값은 나날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럼에도 입장권을 구하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이런 사정이니 입장권이 없는 라이너스와 안드레아는 입구에서 퇴짜를 맞을 것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라이너스가 안드레아의 로브를 깊숙이 씌우며 중얼거렸다.

“이봐, 안드레아. 암시장에 갔다가 아는 얼굴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야?”

“글쎄. 반갑게 인사나 건넬까.”

“큰일 날 소리!”

입장권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만큼, 암시장 이용객에 대한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왕궁에서는 누구보다 입바른 소리를 해대면서 뒤로는 비겁한 수나 쓰는 테를로가 누엘 같은 귀족들. 그중에는 오늘 그의 침대를 데운 올리비아도 있었다. 올리비아가 젊은 노예들을 죽여 그 피로 목욕을 한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노예들을 사서 어디에 쓰는 걸까?”

라이너스가 다시 중얼거렸다. 빨간 핏물에 잠겨 즐거워하는 올리비아를 상상하며 안드레아가 대충 대답했다.

“좋은 일에 쓰진 않겠지.”

죽을 때까지 채찍질을 하는 이도, 독약의 치사량을 확인하는 이도 있다고 했다. 자기는 한 번에 깔끔하게 죽인다며 스스로를 자비롭다 평가하던 올리비아가 해준 얘기였다.

“테를로가가 뭐라고 했는데?”

때늦은 질문에 라이너스가 성실히 답했다.

“음, 나한테 온갖 죄악의 근원인 암시장을 없애 달라 하더라고.”

가식적인 놈. 안드레아가 비웃었다. 믿을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테를로가 녀석도 노예를 적지 않게 두고 있었다. 노예들은 모두 남성으로 항문에 부지런히 연고를 바르고 있다는 걸로 보아, 놈의 취향을 알만했다.

그와 별개로 라이너스가 암시장을 숨 쉴 틈 정도로 여기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나마나 특유의 떨떠름한 표정과 과장된 손짓으로 무어라 개소리를 지껄일 게 뻔했다. 불유쾌한 상상은 집어치우고, 안드레아는 정면을 응시했다.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여관이지만, 끝없는 지하와 연결된 곳. 암시장의 입구 중 하나였다.

“이곳이군.”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챈 라이너스가 중얼거리며 큰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로브를 뒤집어써서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굳은 입매로 짐작건대 긴장한 게 분명했다.

당연히, 둘은 암시장에 발도 들여보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보여줄 입장권이 없으니 문지기는 끝까지 여관주인 행세를 하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박박 우기던 라이너스가 급기야는 칼리드나스의 정체까지 드러냈으나 상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공작이 아니라 국왕 폐하가 와도 입장권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요지였다.

“하하하! 아주 호되게 당했네.”

라이너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는데도 몹시 즐거워 보였다.

“이거, 이렇게 된 이상 꼭 그 입장권이란 것을 구해봐야지. 진심으로 궁금해졌어.”

자신을 향해 눈을 빛내며 은근히 입장권을 구해보라 압박하는 라이너스에게 안드레아가 꿈도 꾸지 말라고 못 박았다. 단호한 태도에 어떤 회유도 통하지 않을 것을 눈치챈 라이너스가 이번엔 색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협박이었다.

“좋아. 곧 다가올 사냥 대회에 테를로가와 자네를 한 팀으로 엮으라고 특별히 지시하겠네.”

안드레아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쏘아보았지만 라이너스는 이미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자네와 테를로가가 사이좋게 토끼몰이 하는 모습을 보면,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군.”

사냥 대회는 나흘 동안 진행됐다. 그 뜻은 테를로가와 나흘을 밤낮없이 붙어 지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테를로가의 활 솜씨는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겁도 많아서 토끼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놀라 자빠지기 일쑤인 주제에 입으로는 호랑이를 호령하는 허풍쟁이였다. 그런 테를로가와 한 팀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일었다. 나흘은커녕 하루도 견디기 힘들었다.

“사냥감이 테를로가인가?”

안드레아가 흘린 냉소를 라이너스가 덥석 주워 물었다.

“테를로가가 쓰레기인 건 나도 인정하지만, 그렇게 되면 누엘 경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얼마나 귀찮은가? 입장권이 싸게 먹힐 걸세. 또, 이 라이너스 왕자님과 함께 사냥도 즐기고 말이야.”

대답 대신 안드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곧 손에 들어오게 될 입장권을 기대하며 라이너스가 흐뭇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

풍만한 가슴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도드라진 자신의 젖꼭지가 침상에 쓸려 빨갛게 부푼 꼴을, 올리비아는 황홀한 눈으로 쳐다봤다. 유륜 주위에 흡사 빨판처럼 남은 자국은 조금 전 남자의 입 속에서 마구 희롱 당했다는 증거였다. 그 사실에 더할 나위 없이 흥분한 올리비아가 엉덩이를 높게 치켜들었다.

“하윽!”

한층 거칠어진 몸짓에 절로 숨이 턱턱 막혔다. 정리되지 않은 상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 남자는 내 거야. 내 거라고!’

바로 나, 올리비아의 남자.

생각만으로도 벅찬 명제가 떠오른 동시에 그녀의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하아앙! 간드러진 신음이 비명처럼 울렸다. 기운이 쭉 빠져 그대로 엎어진 올리비아의 시야에 여전히 건재한 남성이 들어왔다. 더는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있잖아요.”

쾌감의 여운이 어린 올리비아의 나른한 목소리에 안드레아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치기 전에 거두어진 시선이지만, 올리비아는 안드레아의 주의를 끈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어요. 아시죠, 사교계의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올리비아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지난 밤, 라이너스가 일으킨 소동이겠지. 고작 잠자리 상대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하찮은 주제라도. 그래도 라이너스가 엮여 있기에 안드레아는 어쩔 수 없이 잠자코 귀를 열어두었다.

“암시장을 찾으셨다면서요.”

다행히 같이 있던 이에 대한 정보는 드러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드레아는 대답 대신 잔에 담긴 리큐어를 쭉 들이켰다. 목구멍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강한 단맛에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술이건 음식이건 단 건 질색이었다.

“당신이 왜 그곳을 찾았을까 궁금했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깜박하고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지 뭐예요? 아세요? 노예 시장에는 희한한 노예가 많다는 거. 그런 노예는 제가 사들이는 것들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게 비싸답니다.”

올리비아의 육감적인 입술이 불온하게 씰룩였다. 오늘도 따끈하게 데운 핏물로 목욕을 즐긴 참이었다. 만족스러운 목욕이었지만, 전보다 농도가 옅어진 게 마음에 걸렸다.

‘갈수록 비싸진다니까.’

건강하고 싱싱한 노예는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데다가, 미용용 핏물을 빼기에 적절한 젊은 여자 노예는 남자들에게도 인기가 있기에 그만큼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다행히 올리비아는 잦은 방문과 정확한 거래로 일찍이 노예상과 안면을 터둔 탓에 적절한 가격에 쓸 만한 노예들을 공수할 수 있었다. 안드레아에게 꺼낸 특별한 노예 얘기도 노예상에게 들은 것이었다.

“너무 비싸서 처치 곤란인 노예도 있대요. 자장가를 부르면 누구든 깊은 잠에 빠지도록 마법을 부리는 노예라나요? 마법이라니, 우스운 얘기죠. 그래도 잠을 잘 재우는 건 확실해요. 그래서 말인데, 저와 함께 가보시겠어요?”

안드레아 칼리드나스와 암시장에 노예를 고르러 간다니. 그와 나란히 선 상상만으로도 머리털이 비죽 서고 발끝까지 자르르 전율이 흘렀다. 여러모로 그녀에게 이득인 제안이었다. 왕녀와의 혼담이 공공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지금으로서는 더더욱.

안드레아가 올리비아와 동행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특별한 대우를 받으리라. 안드레아가 마법을 부린다는 그 노예 계집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안드레아와 벨리오나 왕녀의 혼인 후에.

노예에게 몰래 돈 몇 푼을 쥐어주면 신이 나서 자장가를 부를 테고, 그럼 깊게 잠든 안드레아의 침실 앞에서 왕녀는 번번이 발길을 돌려야 할 테니. 설마하니 정숙한 왕녀가 잠든 남편의 위를 올라타지는 않겠지.

‘그럴 리가.’

얼토당토않은 가정에 올리비아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벨리오나 페를레티는 기가 약했다. 누가 툭 치기만 해도 울 것처럼 얼굴이 빨개지고 당황하면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체구도 비실비실한 것이, 안드레아의 정력을 당해낼 성싶지 않다. 얌전하게 생긴 얼굴은 나름 봐줄만 하다만, 그 정도 외모는 지천에 널렸다.

여러모로 자신이 훨씬 나았다. 벨리오나가 올리비아에게 내세울만한 건, 왕족이라는 혈통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도 유서 깊은 가문의 딸이었다. 공작과 혼인하기에 결코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단 하나, 과부라는 것만 빼면.

‘그래도 내겐 재력이 있는걸.’

그녀의 남편은 일찍 죽은 대신 많은 유산을 남겨주었다. 왕녀의 지참금 따위는 우스울 정도로. 재가 또한 그다지 흠이 아니었다. 전쟁이 잦았던 왕조 초기에는 백작 부인이었다가, 후작 부인이었다가, 다시 백작 부인이 되었던 여자들이 수두룩했다.

이런 사정이니 올리비아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인정상, 안드레아 칼리드나스가 개혼인 점이 조금 미안할 따름이었다.

“입장권이 있나?”

면사포를 입은 채 안드레아와 마주 바라보는 즐거운 상상을 깬 건, 그의 무뚝뚝한 질문이었다.

“물론이죠.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어떻게 그 많은 노예들을 샀겠어요?”

부러 ‘많은’에 힘주어 말한 올리비아가 콧소리를 섞어 아양을 떨었다.

“역시 관심이 생기신 거죠? 아무래도 불면이 심하니까…. 가요. 제가 그 노예를 선물해드릴게요.”

“아니.”

안드레아가 냉정하게 잘랐다.

“내가 그 입장권을 사도록 하지.”

대번에 올리비아의 눈이 샐쭉해졌다.

“그건 좀….”

곤란하다고 하려다가 겨우 마음을 바꿨다. 어찌 보면 사소한 일로 안드레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그의 침실에 계속 드나드는 게 중요했다. 주도권은 혼인 후에 가져와도 늦지 않으니.

“좋아요. 입장권이 귀하게 거래되는 건 아시죠? 나중에 후하게 갚으셔야 해요.”

금화 대신 다른 것, 이를 테면 침실이 아닌 밖에서 만난다든가, 왕실 연회에서 같이 춤을 춰준다든가 등의 요구를 생각해두었던 올리비아의 희망 사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히 깨졌다.

하인을 불러 금화 주머니를 가져오게 한 안드레아는 그것을 세지도 않고 그녀에게 넘겼다. 두 손으로 들기 버거운 것으로 보아 제대로 계산한다면 족히 입장권 가격의 서너 배는 될 터였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텐데, 어쩐지 화대를 정산 받은 듯한 기분에 올리비아의 속이 쓰렸다.

“이건….”

“적은가?”

“아니요. 오히려 많아요.”

“남는 금액은 입장권을 구하러 다니는 수고 대신으로 치지.”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상한 속내를 미소로 감춘 올리비아가 스스로를 달랬다.

나는 단순히 그의 침대를 데우는 다른 계집들과는 달라. 그저 가랑이만 벌리면 다인 줄 아는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언젠가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올리비아, 바로 그녀 자신일 테니까.

“돌아가자마자 하인을 시켜 바로 보내도록 할게요.”

고맙다는, 형식적이면서도 짤막한 인사말이 되돌아왔다. 안드레아가 욕실로 들어가고 그녀 역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옆방으로 향하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 둘이 들어와 신속하게 침상 주위를 정리했다. 차례차례 지워지는 정사의 흔적들을, 문고리를 잡고 선 올리비아가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곁을 허락하는 법이 없었다. 밤새도록 그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도 관계가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종종 기절한 척, 얕은 수로 그의 침상에 머무르려던 여자들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칼리드나스 가의 침실은 여름철 우거진 느티나무의 나뭇잎 개수만큼이나 많았다. 안드레아는 여자가 널브러져 있지 않은 다른 침실을 택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런 그의 성향을 잘 알기에 올리비아는 언제나 깔끔하게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 신뢰를 쌓고자 했다. 자신만은 그를 이해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신호였다. 때문에 질펀하게 젖은 아랫도리를 하고 자택으로 돌아가는 이 길이 익숙하다.

익숙한데도 이번에는 왠지 화가 났다. 다리 사이로 흐르는 애액에 그의 정액은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다는 게 새삼스럽지도 않건만, 오늘따라 그녀의 기분을 몹시도 상하게 했다.

“안나! 안나!”

자택에 도착한 올리비아가 큰 목소리로 하녀장을 불렀다. 뒤틀린 올리비아의 심사를 눈치챈 하녀장이 잽싸게 노예들을 대령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올리비아가 손을 내밀자, 두꺼운 채찍이 그 위에 얹혔다.

철썩, 철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살점이 튀었다. 뺨에 묻은 뜨뜻미지근한 덩어리를 훔쳐낸 올리비아의 눈빛이 더욱 잔인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진 매질을 견디지 못한 노예 하나가 풀썩 쓰러졌다.

“저거로 준비해줘.”

기분이 얼마간 풀린 올리비아가 쓰러진 노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고통스럽게 죽이진 말고.”

이제 목욕으로 쌓인 피로를 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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