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역사 속의 칼잡이.
할리버가 놀람을 숨기지 못한 채 혀를 내둘렀다.
‘저런 상태로 여기까지 걸어오다니… 실로 놀랍군.’
제 앞을 막아 선 남자.
카셀이란 이름을 가진 소드마스터는 피투성이였다.
조금 과장되기 말하면 피를 뒤집어 쓴 시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가슴 팍에는 제 대검에 의해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의 온 몸은 악마들에게 난 상처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해도 저 정도의 부상은 즉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 앞에 서 있었다.
조금 전 대결을 펼친 성문에서 저 상태로 이곳까지 걸어온 것이다.
이는 기적이라는 말로도 설명 못할 놀라운 일이었고 그랬기에 할리버는 질문 할 수밖에 없었다.
“뭐, 때문에 또다시 죽으러 왔는가?”
이 말에 카셀이 끊어지려는 숨을 애써 부여잡으며 대답했다.
“…뭐 때문에 죽으러 왔냐고?”
“그래. 기껏 나와의 결투에서 살아남았는데 왜 이곳에 온 건가?”
할리버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두 눈을 반짝였다.
“그 부상을 입고도 살아남았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다시 내앞에 나타난 거지? 소드마스터 카셀?”
카셀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내가 살아남은 이유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할리버의 두 눈이 커졌다.
“살아남은 이유가 이곳에 있다고?”
“그래. 그러니 내가 향할 곳도 있어야 할 곳도 이곳이다.”
할리버가 커진 두 눈을 스르륵 움직였다.
그 순간 카셀의 뒤편에 선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보였다.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채 피투성이가 된 남자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할리버는 카셀이 일으킨 기적의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진 기사의 기사도… 뭐 그런 거라 말인가?’
물론 알아차리기만 했을 뿐, 이해는 하지 못했다.
그는 조소를 터트리며 카셀을 향해 말했다.
“고작 계집 하나 때문에 자네의 인생을 걸었단 말인가?”
카셀이 천천히 대답했다.
“고작 계집이 아니다. 내 주인이다.”
“그래. 그 계집이건 주인이건… 저 멍청한 년 하나 때문에 자네의 인생을 걸었냐 말이야.”
할리버의 목소리에 은근한 노기가 끼기 시작했다.
“자네가 이륙한 경지는 저 계집 열 명… 아니 수백 명을 데려다 놔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야.”
“….”
“그런데 그 경지를 이룬 자네의 피땀 어린 시간과 노력. 그리고 재능을 포기하고 이곳에 왔단 말인가? 내 추측이 맞다면 자넨 멍청이군! 500년이란 시간을 살면서 내가 본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멍청이!”
할리버의 비난에 카셀이 입을 열었다.
“칼잡이 할리버.”
“…?”
“그렇게 안 봤는데 혀가 길군… 아니면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성격인가?”
할리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한 박자 늦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렇군. 나답지 않게 오지랖을 부렸군. 사과하지 소드마스터 카셀.”
이 말과 함께 할리버가 제 대도를 치켜들었다.
“그 보답으로 이번에는 확실히 죽여주지. 다시는 살지 못하게 목을 자르는 것으로.”
치켜든 할리버의 대도가 움직였다.
아니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그 미세한 차이를 카셀의 등 뒤에 서 있던 아이린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할리버의 대도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카셀의 몸에서 핏줄기가 튀었을 때였다.
“카셀-!!”
아이린이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다.
허나 카셀은 제 가슴팍에 새겨진 새로운 상처가 새겨졌음에도 웃어 보였다.
“…슬슬 보이기 시작하군. 적응이 되었단 건가.”
이 말과 함께 카셀이 검을 들었다.
그 모습에 할리버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몸뚱이로 내 검을 보았다고?”
“놀랍게도 그래. 당신의 검이 보이기 시작했어.”
“죽을 때가 되니 헛것이 보이는가 보군.”
할리버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진심을 담아 휘두른 검이었다.
목표는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시체의 목.
그는 이번 일격으로 저 시체의 목이 잘려 나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500년 동안 검을 휘두르면서 쌓은 경험.
그 경험이 이번 일격은 반드시 들어간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경험이 말하는 순간은 단 한번도 틀리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말이다.
탕-!
할리버의 대검이 튕겨 나갔다.
그 순간 500년 된 소드마스터의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그 속에서 카셀이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보이기 시작했어. 당신의 검… 은 이제 더이상 무적이 아니야.”
이 말에 할리버가 정신을 차리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예측을 해서 내 검을 튕겨낸 건가?”
“아니… 보이기 시작했어.”
“헛소리하지 말게. 내 검을 지금의 자네가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어.”
할리버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카셀의 검도 움직였다.
허공을 가른 두 검이 약속이라도 하듯 허공에서 부딪쳤다.
챙-!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할리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속에서 카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해볼 만하겠군…. 소드마스터 할리버.”
이 말과 함께 카셀이 가슴 속의 불을 지폈다.
한 칼잡이의 인생이 담긴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자네를 쓰러트릴 거야. 이건 허언도 예언도 아닌 확신이 담긴 미래라네.”
* * *
전황은 어지러웠다.
하늘 위에서는 여전히 괴물과 드래곤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고 지상에는 악마와 인간들이 서로를 향해 괴성을 내뱉었다.
“물러서면 죽는다-!”
“성벽 위를 죽어도 사수해라!”
“성벽 위가 점령당했다면 몸으로라도 막아라! 우리 뒤에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아이가 있다!”
그 속에서 엘린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기사가 된 뒤로 이렇게 몸을 혹사시킨 적은 처음이었다.
팔과 다리에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으며 타고 있던 말은 진작에 생기를 잃은 상태였다.
이 총명한 녀석이 그럼에도 움직이는 것은 주인을 향한 마지막 충성심 때문이었다.
그런 제 애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엘린이 부탁했다.
“마지막이야. 날 저곳에 데려다줘.”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엘린의 애마는 긴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다시 말발굽을 움직였다.
그 마지막 질주 속에서 순식간에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평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늘 위에서 떨어진 드래곤이 있었다.
그 순간 엘린의 애마는 숨을 다하고 쓰러졌다.
엘린은 눈물을 왈칵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왜 다들 제 곁을 떠나는 거죠?”
엘린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제 애마도 그렇고… 왜 존재께서도 절 떠나시려 하는 겁니까.”
이 말에 가느다란 숨을 간신히 이어가던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대답했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나의 기사야. 그건 나도 예외는 아니지.]
“…그 죽음이 왜 하필 이 순간인 것입니까.”
[적은 강하다. 그리고 전장은 혼란스럽지. 이 와중에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날개를 움직였다.
그 순간 엘린의 귓가로 들리던 전장의 소음이 차단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 고요함 속에서 엘린의 두 눈이 움직였다.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의 가슴이 보였다.
그 가슴팍에는 짐승의 발톱에 집어뜯긴 것 마냥 끔찍한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엘린은 그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낮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심장을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놈의 독기에 온몸이 중독되었다. 이대로면 나는 얼마 안 있어 대지로 돌아가겠지.]
엘린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절 지켜주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해버렸구나.]
“드래곤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 배웠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한 말을 지키십시오, 존재시여.”
엘린이 결국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드래곤답게…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 굳게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저를 이 성을 위해 다시 한번 싸워주십시오.”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침묵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터트리는 엘린을 말없이 지켜보다 중얼거렸다.
[운명이란 때로는 가혹하구나.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는 법이지만, 이렇게 짧은 만남만을 허락하다니….]
말을 흐린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고개를 숙였다.
[기사야 고개를 들거라.]
엘린이 고개를 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은 그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용언을 일으켜 엘린을 강제로 일으켰다.
그리고 마지막 생기를 끌어모아 두 눈빛을 반짝였다.
[전장의 균형은 이미 무너졌다.]
엘린의 눈이 커졌다.
“균형이… 무너졌단 말은 저희가 패배한다는 뜻입니까?”
[이대로 흘러간다면 그렇게 되겠지.]
이 말과 함께 엘린의 시야가 바뀌었다.
그 변화에 깜짝 놀란 엘린이 몸을 떤 그때 괴성이 울려 퍼졌다.
[크하하하하-!]
푸른 창공 위.
그곳에서 여섯 마리의 드래곤에 맞서 불과 마법을 부리는 괴물이 보였다.
그리고 그 괴물을 막기 위해 상처 입은 여섯 마리의 드래곤도 보였다.
그 장엄한 광경에 엘린이 잠시 넋을 잃었을 때,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속삭였다.
[내 친구들은 저 괴물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쓰러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테지.]
이 말과 함께 또다시 시야가 바뀌었다.
[끼에에엑-!]
괴성을 지르고 있는 악마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악마들 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레버쿠젠 기사단이 보였다.
“가주님이 오실 때까지만 참아라-!”
“그 분이 오실 때까지는 죽어서도 쓰러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무너지면 전쟁의 패배다! 조금이라도 놈들을 더 교란시켜라!”
똘똘 뭉친 레버쿠젠 기사단은 용맹했다.
그리고 빈틈이 없었다.
지금의 그들은 대륙의 그 어떤 기사단을 상대로 승리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끼에에엑-!]
괴성을 지르는 악마들이 기사단을 압박한다.
레버쿠젠의 기사들이 그에 맞서 기세를 드높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죽음을 모르는 괴물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육체에 상처를 입혔다.
결국 단단하던 레버쿠젠 기사단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에 엘린이 비명을 지르려던 순간, 또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막아라-!”
“성벽 위를 점령한 놈들을 어떻게든 몰아내!”
“성문이 뚫린 곳으로 향해 악마들이 몰려옵니다!”
“놈들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이미 민간에까지 침범한 상태입니다!”
레버쿠젠의 심장이자 성인 하트.
그곳에서 악마들과 맞서 싸우는 병사들이 이번에는 등장했다.
그들은 피범벅이 된 상태로 악마들을 향해 창을 내지르고 있었다.
허나 끊임없이 몰려오는 악마들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뜨거운 물과 기름.
심지어 악마들의 단단한 피부에는 흠집도 나지 않을 돌맹이까지 든 시민들이 그들을 지원했다.
물론 그럼에도 악마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로지 앞만 보고 전진하는 악마들이 점점 하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고 부녀자와 노인이 악마들에게 살점을 뜯어먹혔다.
그 지옥과도 같은 광경에 엘린이 두 주먹을 쥐고서 소리쳤다.
“그만! 그만하십시오!”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엘린이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제게 이런 광경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패배가 예견된 싸움이니 도망이라도 치라는 소리입니까!”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내가 도망치라고 한들, 너는 도망치지 않을 거 아니냐?]
엘린이 한 점 물러섬 없이 대답했다.
“예. 죽어서도 이곳에서 죽을 것이고, 살아서도 이곳에서 살 겁니다. 이곳이 제가 있을 마지막 장소입니다.”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침묵했다.
그 사이 엘린은 몸 안쪽에서부터 차오르는 열기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전까지 슬픔에 빠져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완벽한 전사의 모습이 된 그녀의 상태에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균형은 무너졌지만 아직 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의 기사야.]
이 말과 함께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돌연 제 가슴을 찔렀다.
그 돌발행동에 경악한 엘린이 소리쳤다.
“존재시여!”
[균형의 추가 무너진 것은 라 하르칸… 놈을 막지 못해서다. 하지만 놈을 막을 수 있을 수단이 존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제 가슴팍에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찬란히 빛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자 심장이라 알려진 [드래곤 하트]였다.
그 드래곤 하트를 천천히 엘린에게 건네주며 푸른 빛 비늘의 드래곤이 속삭였다.
[나의 기사야. 네가 막아야 한다.]
엘린의 두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의 심장을 막고 라 하르칸을 네 손을 죽이거라. 그것이 이번 전쟁에서 유일하게 승리할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