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미친놈-216화 (216/265)

제216화

카셀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계다.’

가슴 속의 고리의 울림이 불안정하다.

긴 전투로 인해 고리의 화합이 망가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닌 어느사이엔가 팔과 다리의 관절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허나 여기서 전투를 그만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카셀은 고개를 들어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악한 괴물을 바라보았다.

[달빛… 날 죽일 수 있는 인간들의 무기.]

낮은 하울링을 내뱉은 라 하르칸이 두 어금니를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그 무기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구나, 카셀. 시간이 나의 편이란 거겠지.]

라 하르칸의 말에 카셀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쥔 칼을 새로 고쳐잡았다.

그걸 신호로 바이에른 기사단도 각자의 무기를 다시 치켜들었다.

그 순간 라 하르칸의 주둥이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

눈을 치켜뜬 카셀이 높게 뛰쳐올랐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내려오던 드래곤 브레스가 두갈래로 쪼개졌다.

화악-!

그 중심에 선 카셀의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다행히 무게중심이 완전히 나가기 전 가까스로 제어를 걸어 뒤이어 날아오는 라 하르칸의 꼬리를 막아낼 수 있었다.

챙-!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퍼지며 카셀의 신형이 저멀리 튕겨져 날아갔다.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던 바이에른 기사단이 소리쳤다.

“카셀 브리드! 우리의 동료를 엄호해라!”

그 외침과 함께 바이에른 기사단이 라 하르칸을 향해 뛰쳐들었다.

기사단의 돌격에 라 하르칸이 발작하며 소리쳤다.

[달빛도 두르지 못한 벌레들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이냐!]

그 순간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하트의 시민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세, 세상에… 저게 대체 뭐야?”

긴 전쟁 동안 여러가지 일들을 경험한 그들이었다.

사지가 잘린 시체.

기괴한 괴물들.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친구와 동료 그리고 가족.

하지만 그 끔찍한 경험도 눈앞의 광경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세개의 눈동자를 가진 드래곤과 기사단의 전투.

그 모습은 세기의 종말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장면이었고 그랬기에 하트의 시민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드래곤에 맞서 싸우는 바이에른 기사단이 하나둘 드래곤의 발톱에 찢겨나가기 시작한 순간 당황은 두려움으로 변질되었다.

“크아아아악-!”

전설의 구전.

그 속에서는 사악한 드래곤을 기사단이 잡아냈다.

“치엘리-!”

“날 버리고 가라! 카셀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

“하, 하지만 자네 팔이!”

“어서!”

하지만 눈앞의 현실에서는 드래곤이 기사단을 잡아먹었다.

그들의 사지를 찢고 강력한 마법으로 기사단의 검을 녹여버렸다.

그 모습에 하트의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만약 저 기사단이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우리가 목표가 되는 것인가?

점차 번져나간 그 공포는 곧 하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라 하르칸이 더욱 거칠게 소리쳤다.

[두려움과 공포! 그것이야 말로 이 세상의 진리다!]

그 외침과 함께 더욱 덩치를 키운 라 하르칸이 하늘로 비상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이에른 기사단이 입술을 악물었다.

“드래곤 브레스다!”

“카셀 경은 아직인가!?”

“어쩔 수 없다! 우리의 힘만으로 어떻게 해서건 막아본다!”

죽음을 각오한 결단.

바이에른 기사단은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각자의 고리를 거칠게 진동시켰다.

우우우웅-!

30명 안팎이 채 안 되는 기사들의 울림.

하지만 그 울림이 하나둘 모여 화합을 이룬 순간 거대한 노랫말이 되었다.

그 사이 각자의 검을 치켜든 바이에른 기사단이 거칠게 소리쳤다.

“바이에른에 영광을 위하여!”

그 외침과 함께 바이에른 기사단이 돌격하려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외침이 바이에른 기사단의 돌격도, 라 하르칸의 드래곤 브레스도 멈추었다.

“그만-!!”

그 순간 짧은 정적이 전장에 내려앉았다.

라 하르칸도 바이에른 기사단도 그 침묵 속에서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무언가를 높이 쳐들고 있었다.

“모두 멈춰… 멈추라고.”

이 말에 바이에른 기사단이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엘린… 레버쿠젠 경?”

그와 동시에 라 하르칸의 눈이 커졌다.

두근두근…

엘린의 손에 쥐어진 빛나는 무언가.

그 무언가에서 들려오던 거친 고동.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다려온 그리운 박자에 라 하르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내 심장….]

말을 흐린 라 하르칸이 흥분을 숨기지 않으며 소리쳤다.

[내 심장을 내놔라 계집-!!!]

천지를 떨리게 하는 그 외침에 드래곤 하트를 높이 치켜든 엘린이 중얼거렸다.

“심장을 내놓으라고?”

이 말과 함께 드래곤 하트를 쥔 엘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당장 여기서 꺼져. 그럼 이 심장을 내어줄게.”

* * *

카셀이 몸을 일으켰다.

후드드득-!

그 순간 대리석의 파편들이 후드득 머리 위로 떨어졌다.

카셀은 시야를 가리는 그 파편들을 한손으로 대충 치운 뒤 숨을 헐떡였다.

‘젠장… 몸이 너무 아프군.’

조금 전 라 하르칸의 꼬리에 얻어 맞아 갈비뼈가 3대가 나갔다.

그뿐만이 아닌 골반과 척추 쪽에도 문제가 생겼는지 하반신 쪽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육체의 부상은 그렇다 칠 수 있지만… 진짜로 급한 쪽은 고리다.’

조금 전부터 간신히 울림을 내뱉던 가슴 속의 고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이제부터 검강을 두른 채 싸울 수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검강을 두르지 못한 칼잡이는 드래곤을 죽일 수 없다.

만약 이 상태로 라 하르칸과 다시 맞선다면 이길 수 있는 확률은 0에 수렴했다.

그 탓에 카셀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잠시 망설였다.

허나 곧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할 수 없다 해도 지금은 가야지.”

그 자리에는 아직은 어색하지만 연을 맺은 사람들이있다.

‘바이에른 기사단.’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들이 대신해 라 하르칸과 맞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검강이 아닌 검기를 두른 채 목숨을 바쳐가며 괴물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도 싸우는데, 자신이 포기할 수는 없다.

생각을 끝마친 카셀이 마지막 남은 마나를 억지로 끌어모아 고리를 진동시켰다.

우웅-!

옅은 울림과 함께 부상당한 육체의 고통이 그나마 사라졌다.

그걸 확인한 카셀이 높이 뛰어올랐다.

탁-!

단 한번의 도약으로 무너진 폐허 사이로 빠져나온 카셀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괴물이 보였다.

눈빛을 빛낸 카셀이 그대로 다시 라 하르칸을 향해 뛰쳐가려던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외침이 하트를 뒤흔들었다.

“그럼 당장 여기서 꺼져! 그럼 이 심장을 내어줄테니깐!”

카셀의 눈이 커졌다.

“…엘린 레버쿠젠 양?”

이 성의 지휘관.

그리고 홀란 레버쿠젠이라는 위대한 칼잡이의 손녀딸.

그런 그녀가 무언가를 높이 쳐들며 라 하르칸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 사이 똑같이 엘린을 발견한 하트의 시민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고-! 엘린님!”

“어서 물러서십시오! 안 됩니다!”

“저 괴물에게 맞서시면 안 됩니다! 어서 도망치십시요!”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카셀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엘린의 등장은 그렇다 치고 날뛰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라 하르칸이 갑자기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놈은 마치 넋을 잃은 듯 엘린의 손에 들린 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한 카셀이 눈빛을 번뜩였다.

‘…기회인가?’

잘만 하면 놈을 암습 할 수 있을 지 몰랐다.

그만큼 지금의 라 하르칸은 무방비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카셀이 결국 결심을 하고 기척을 숨겼다.

‘지금은 정면보다는 기습이 낫다. 설령 비겁하다 할지라도.’

생각과 함께 카셀이 조금씩 라 하르칸과의 거리를 좁히던 때였다.

괴물의 주둥이가 갑작스레 열렸다.

[…누가 누구를 협박하는 것이냐?]

이 말과 함께 라 하르칸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물러서면 그 심장을 돌려준다고? 웃기지마라 계집아이야.]

라 하르칸의 입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너희를 죽이고 심장을 가져가겠다. 그 뿐만이 아닌 이 성을 포함해 북부 전체를 불태울 것이다.]

그 울음소리에 담긴 분노에 대기가 옅게 떨렸다.

카셀은 제 솜털이 곤두서는 걸 느끼며 입술을 악물었다.

그사이 라 하르칸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재차 소리쳤다.

[무려 천 년-! 천 년이나 내 심장을 빼앗겼다! 그 시간의 대한 보상으로 이 북부만을 태우는 건 이 나의 자비라고도 볼 수 있다!]

그 외침과 함께 라 하르칸이 엘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선택해라 계집아이야. 그 심장을 내게 주고서 죽을지, 아니면 뺴앗기고 죽을지. 죽음의 자유 정도는 선택하게 해주마.]

엘린이 혀를 꺠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느껴지며 머리가 핑돌았다.

허나 이 정도 아픔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괴물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저게 대체 뭐야 진짜.’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그 종말을 불러올 것 같이 생긴 괴물.

그 괴물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구역질이 밀려왔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여기서 등을 돌리면 도망치면 저 괴물은 성을 파괴할 것이다.

하트는 레버쿠젠이 대대로 지켜온 삶의 터전.

그리고 그 삶의 터전에서 살아가는 하트의 시민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레버쿠젠 혈족들에게는 있었다.

그랬기에 엘린은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쥔 보석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어. 레버쿠젠 가문의 존재의의는 이 보석을 지키는 거라고.’

대대로 내려온 관습과 의무.

그것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고 어떨 때는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다.

하지만 엘린은 그 관습과 의무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다 판단했다.

‘천년 전 레버쿠젠 가문은 이 보석을 지키기 위해 존재했어.’

그러나 지금의 레버쿠젠 가문은 하트와 하트의 시민들을 위해 존재했다.

눈빛을 빛낸 엘린이 드래곤 하트를 높이 쳐들었다.

[…!]

그 동작에 라 하르칸이 움찔 놀라고 지켜보던 기사단과 카셀도 눈을 치켜떴다.

그 속에서 엘린이 중얼거렸다.

“…좋아, 한 번 해보자고.”

이 말과 함께 엘린이 검을 꺼내 들어 높이 쳐든 드래곤 하트에 겨누었다.

“네가 물러서는 게 빠를지, 이 심장이 박살나는 게 빠를지. 어느 쪽을 선택하건 네 자유야 괴물아.”

새로운 제안.

그 순간 라 하르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 *

홀란 레버쿠젠의 부관.

알마레즈의 표정이 황망해졌다.

‘…꿈? 아니면 나도 지옥에 온 건가?’

홀란 레버쿠젠의 절친한 친우.

그리고 바이에른의 전전대 가주였던 남자.

동시에 이 전장에 영웅이 된 남자의 아버지와 똑닮은 사내가 놀랍게도 눈앞에 서 있었다.

‘레오 바이에른.’

그랬기에 알마레즈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레오 바이에른은 몇십 년 전에 알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 이미 죽지 않았던가?

그때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들을 좀 만나 뵙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알마레즈가 홀린 듯이 대답했다.

“그, 그 저기….”

“아, 저기 있었군요, 고맙습니다. 그럼….”

꾸벅 고개를 숙인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알마레즈를 지나쳤다.

그런 그를 알마레즈는 제지하지도 막아서지도 못했다.

그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그 사이 걸음을 옮긴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레버쿠젠 군대에 스며들었다.

“아더 바이에른-!”

역사적인 대결에서 승리한 전장의 영웅.

그 영웅의 이름을 레버쿠젠 군인들이 거칠게 부르짖었다.

그 탓인지 몰라도 그 누구도 검은 머리칼의 사내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손쉽게 전장으로 나아간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눈을 치켜떴다.

“오.”

짧은 탄성을 내지른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저기 있었구나… 내 아들.”

이 말과 함께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손을 흔들었다.

“아들-!”

“…?”

“아버지가 왔단다! 얼굴 좀 보자꾸나!”

난데없는 외침에 환호성으로 뒤덮였던 전장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

그 침묵 속에서 레버쿠젠 군인들이 눈을 끔뻑였다.

뭐지?

아버지가 왔다고?

누구의 아버지가 이런 곳에 왔단 말인가?

의문에 휩싸인 레버쿠젠 군인들이 뒤늦게 검은 머리칼의 사내를 발견했다.

그리고 눈을 치켜떴다.

“어…?”

바이에른을 상징하는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

수많은 인종이 모인 이곳에서도 특출난 그 외형에 모두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 사이 넋을 잃고 있던 아더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떨림에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아버지가 왔는데 언제까지 앉아 있을 것이냐 아들아?”

아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 뒷편에 서 있는 남자를 확인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 아들아. 네 아버지 레오 바이에른이다.”

이 말과 함께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양손을 들어올렸다.

마치 포옹을 기다리는 듯한 자세였다.

그 모습에 아더의 벌어진 입을 점차 다물어졌다.

“….”

아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른 손에 쥔 진실이가 보였다.

동시에 진실이의 검면에 새겨진 글귀도 시선에 들어왔다.

[진실을 목도한 순간 흔들리지 마라.]

그 글귀를 지켜보는 아더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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