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레버쿠젠의 영지.
동시에 제국의 북부를 막는 최요충지인 하트에 옅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
그 침묵 속에서 모두가 붉은 머리칼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소녀의 손에 들린 보석을 바라보는 거였다.
화악-!
반투명한 구에서 눈이 멀 것 같은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북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따스함, 그리고 온기도 옅게나마 느껴졌다.
그 탓에 모두가 상황을 잊고서 중얼거렸다.
‘대체 저 보석이 뭘까?’
저 빛나는 보석이 뭐길래 눈을 땔 수가 없는 걸까?
그때 라 하르칸이 천천히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계집아이야… 계집아이야… 지금 네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 중얼거림은 낮고 중후했다.
[무려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난 드래곤의 심장이다. 그리고 최고로 강한 드래곤의 심장이기도 하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란 거다.]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점차 분노로 바뀌었다.
[그런 심장을 네까짓 게 지금 깨부수겠다고 협박을 해!? 제 정신인 것이냐!]
그 순간 하트에 내려앉은 침묵이 깨지며 광풍이 불었다.
“……!”
하트에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리칼이 그 광풍에 휘날렸다.
어떤 이들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 기이한 현상 속에서 붉은 머리칼의 소녀.
엘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랄.”
[……?]
“드래곤 하트니, 최초니…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이 말과 함께 엘린이 손에 들린 검을 라 하르칸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
깜짝 놀란 라 하르칸이 주춤 물러섰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엘린이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결국 죽은 자의 심장이야. 산 자의 심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
“망령은 망령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고, 산자는 산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어. 그리고 너는….”
말을 흐린 엘린이 검의 방향을 돌려 라 하르칸을 가리켰다.
“죽은 자. 아니 죽은 괴물이지.’
[….]
“그러니 썩 꺼져라 이 망자야. 만약 이 심장을 가지고 싶다면 여기서 등을 돌려 다시는 나타나지마.”
라 하르칸이 주둥이를 덜덜 떨었다.
[천 년을 기다렸는데, 더 기다려야 한다 말이냐?]
“죽을 때가 한참이나 지났네.”
[난… 죽지 않았다… 아니… 앞으로 죽을 생각이 없다.]
“그래? 그럼 한 번 실험해볼까?”
엘린이 다시 검의 방향을 돌렸다.
툭.
검기가 둘린 검이 드래곤 하트의 겉면에 닿았다.
그 순간 뿜어져 나오던 빛이 작게 갈라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라 하르칸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
라 하르칸이 절규하며 속삭였다.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이든 들어주마, 계집아이야… 그러니 제발… 그 위험한 것 좀 내 심장에서 치우거라.]
라 하르칸의 애원에 엘린이 심호흡을 내쉬었다.
‘후우….’
그 순간 거칠게 뛰던 심장이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었다.
그 속에서 엘린이 현 상황을 판단했다.
‘계획대로… 아니 계획 그 이상이야.’
예상대로 저 괴물에게 있어 이 심장은 매우 중요한 물건인 듯했다.
‘아니… 중요한 것 그 이상이야. 정말로 이 하트가 놈의 심장일지도 모르겠어.’
천 년이나 심장이 바깥에 나와 있는데 살아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반응을 보니 영 거짓은 아닌 듯했다.
중요한 정보를 얻은 엘린이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여기서 협상을 해야 하나?’
이 심장을 돌려주는 대가로 다시는 하트로 찾아오지 말라는 조건으로?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심장을 찾는 즉시, 놈이 태세를 바꾸어 다시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이라면 곱게 물러서는 것보다 이쪽의 확률이 더 높았다.
그 탓에 엘린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할 때였다.
[…끼엑.]
무너진 파편.
그 속에서 숨어 있던 악마가 눈을 번뜩였다.
[끼엑 끼엑….]
괴상한 울음소리를 최대한 죽인 악마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라 하르칸을 바라보았다.
엘린을 주시하던 라 하르칸이 그 시선과 마주치고서 세 개의 눈을 치켜떴다.
[….]
잠시 침묵한 라 하르칸이 거대한 육체를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행운의 여신이 나의 편이구나.’
쓸모없던 괴물이 마지막 순간 결정적인 역활을 할 줄이야.
라 하르칸이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그래서 칸 마드리드. 그 자가 이 괴물들을 보고 악마라 불렀던 건가.’
인간을 배신하고 나락으로 빠트리는 존재 악마.
그 이명 그대로 놈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랬기에 라 하르칸은 동요를 지웠다.
대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서 말하거라 계집아이야. 네가 너에게 뭘 해주면 그 심장을 건네줄 것이냐?]
이 말에 엘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야.”
[그게 뭐지?]
“이 심장을 가져간다면 다시는 하트로 돌아오지 않는 것.”
라 하르칸이 주둥이를 열어 혀를 내밀었다.
솨악…
동시에 떨어져 내린 정체 모를 액체가 지면을 녹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 때, 라 하르칸이 중얼거렸다.
[드래곤의 전유물인 용언에는 한 가지 약점이있다.]
“……?”
[그것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약조나 맹세를 어겨서는 안 된다는 거지. 이것이 용언을 사용하는 드래곤의 대가.]
라 하르칸의 설명에 엘린의 눈이 치켜떠졌다.
그 속에서 라 하르칸이 설명을 이었다.
[만약 여기서 너와 내가 약속을 하고, 맹세를 한다면 나는 절대로 그것을 어길 수 없다. 제아무리 나라 할지라도 용언을 잃어버리기는 싫거든.]
“…….”
[그러니 계잡아이야. 다시 한번 묻겠다.]
라 하르칸의 주둥이가 호선을 그렸다.
동시에 엘린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내 심장을 내어주는 대가로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이 내가 그 소원을 들어주마.]
달콤한 속삭임.
그 달콤이 너무나도 과해 엘린은 대답을 망설였다.
‘저 말이 진짜라고?’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또 그럴 싸하기도 했다.
옛날 동화나 구전을 보면 조금 전 설명이 놀랍게도 기록되어 있었다.
‘드래곤의 용언은 맹세의 증거…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 하트를 내어주는 조건으로 라 하르칸.
저 괴물을 물러나게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게 되면 위기에 빠진 하트를 자신의 손으로 구하는 것이다.
그 사실에 엘린이 자신도 모르게 약간의 흥분을 했을 때였다.
[…끼에에에엑-!]
귀를 찢는 듯한 괴성과 함께 무언가가 등을 덮쳤다.
깜짝 놀란 엘린이 손에 들린 검을 반사적으로 뒤를 향해 휘둘렀다.
서걱-!
검은 피가 터져 나오며 악마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엘린의 눈이 점차 커졌다.
“어…?”
허공을 난 것은 악마의 목뿐만이 아니었다.
오른손에 들려 있던 드래곤 하트까지 허공을 날고 있었다.
‘…내가 목적이 아니라, 저 하트가 목적이었다고?’
그 생각과 함께 어둠이 드리워졌다.
엘린의 고개가 그 어둠에 따라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어느사이엔가 접근해온 라 하르칸이 거대한 주둥이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둥이 사이로 빠져나온 기다란 혀가 드래곤 하트를 낼름 삼켜버렸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엘린이 한 박자 늦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그 순간 거친 빛이 터져나왔다.
화악-!
어둠을 집어삼키는 빛이 아닌 빛을 집어삼키는 어두운 빛.
그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포효했다.
-…!
세상이 그 포효에 뒤흔들리고 시간이 정지했다.
동시에 거친 박동이 세상을 흔들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의 고동소리.
천 년을 기다려 마침내 제 주인을 찾은 심장의 고동소리였다.
* * *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
그것은 바이에른의 상징이었다.
대륙의 수많은 인종 중,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이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바이에른의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가 특별했다.
한눈에 보면 바이에른의 머리칼과 눈동자라고 인식 할 수밖에 없는 독특한 검은색.
그랬기에 전장에 선 이들의 눈이 커졌다.
“저건… 바이에른의 머리칼?”
갑작스레 튀어나온 한 남자.
그 남자의 머리칼의 색이 놀랍게도 전장의 영웅.
아더 바이에른의 머리색과 똑같았다.
그렇다는 말은 지금 저 사내는 바이에른 혈족이란 소리였다.
그리고 그 바이에른 혈족이 소리치고 있었다.
“아들아! 아버지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너무나도 가벼운 외침.
허나 그 외침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저 사내가 아더 바이에른 경의… 아버지라고?”
중얼거림과 함께 레버쿠젠 병사들이 놀람을 삼켰다.
연륜이 쌓인 레버쿠젠 장군들은 눈을 치켜떴다.
“정말이다….”
“레오 바이에른… 그분과 똑같이 생겼어.”
“하, 하지만… 레오 바이에른 그분은 일찍이 돌아가시지 않았던가?”
쏟아지는 웅성거림과 함께 아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과 똑 닮은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더는 그 사내를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어 질문했다.
“아버지 맞아요?”
이 말에 레오가 방긋 웃었다.
“어허. 아무리 우리가 어릴 적에 생이별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도 못 알아보는 거냐?”
아더가 턱을 긁적였다.
“알아야 보긴 하죠. 그런데 아버지, 죽은 거 아니었어요?”
“예끼 이 놈아! 왜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그치만 다들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로 알던데요?”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내 죽음을 봤느냐?”
“……?”
“누가 내 시체를 봤느냐? 아니,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저 앓아누운 내 모습만 봤을 뿐이야.”
아더의 눈이 커졌다.
그 속에서 레오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정체를 드러낼 수 없었다.”
“….”
“도르문트… 네가 죽인 케인 그 남자가 날 노리고 있었어. 그리고 칸 마드리드. 그 미쳐버린 황자도 마찬가였지. 목적은….”
말을 흐린 레오가 아더와 자신을 가리켰다.
“우리의 혈통.”
“….”
“무슨 목적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의 혈통을 노리고 있단다. 그러니 아들아.”
레오가 손을 내밀었다.
“일단 나와 함께 가자꾸자. 이대로 있으면 우리 둘 모두 위험해.”
아더가 천천히 입을 열어 질문했다.
“왜죠? 이곳엔 더 이상 적이 없는데?”
“그 남자, 칸 마드리드.”
“…칸 마드리드요?”
“그래. 그 남자는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이곳이라도 방심 할 수 없어.”
설명과 함께 레오가 아더를 재촉했다.
“그러니 어서 빨리 내 손을 잡거라. 아직 그 자와 맞붙어서는 안 돼. 우리는 조금 더 힘을 길러야 한다.”
아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제 검을 바라보았다.
[진실을 목도한 순간, 흔들리지 마라.]
검면에 새겨진 글귀가 요사하게 빛이났다.
아더는 그 글귀를 한참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참 나쁜 분이네요….”
말을 흐린 아더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런 진실을 보고도 흔들리지 말라니.’
이 말과 함께 아더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환상과 과거.
그리고 미래에서 보았던 제 아버지와 똑닮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 사내를 한참을 바라보던 아더가 방긋 웃었다.
“좋아요 가죠.”
이 말에 레오의 눈이 커졌다.
허나 곧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일단 날 따라오너라. 너에게 해줄 이야기가 아주 많이….”
탕-!
“…?”
레오 바이에른이 눈을 끔뻑였다.
그 순간 그의 이마를 타고 무언가 흘러내렸다.
레오 바이에른이 검은 눈동자를 움직였다.
구멍이 뚫린 미간으로 부터 빨간색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에 레오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동시에 상황을 지켜보던 레버쿠젠 군인들도 입을 벌렸다.
“뭐야… 지금?”
그들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 아더 바이에른이, 아버지를 자기 총으로 쐈다고?”
이 말과 함께 레버쿠젠 군인들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을 때였다.
침묵하던 아더가 중얼거렸다.
“연기가 좀 어설프네요 아버지… 아니.”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은 칸 마드리드라 불러야 하나요?”
이 말에 아더의 총에 맞은 레오가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들아. 내가 칸 마드리드라니….”
아더가 제 눈을 톡톡 두들겼다.
“연기 좀 그만 하세요. 이 눈이 있는 한 저를 속일 수 없으니깐.”
레오의 입이 벌어졌다.
“그 눈이… 뭐길래?”
“아케인 시장님의 혈통.”
“…?”
“듣기로 그 분의 혈통은 어떤 거짓이건 진실이건 파악 할 수 있다 하더라고요. 그리고 지금….”
말을 흐린 아더가 사납게 웃었다.
“이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칸 마드리드가 보여요.”
“….”
“자, 그럼 여기서 문제네요.”
아더가 다시 비스트를 재장전했다.
“당신은 칸 마드리드에요? 아니면….”
그 총구를 지켜보던 레오가 표정이 뒤바뀐다.
웃음을 참는 광대.
아니, 광대를 떠올리게 하는 아주 기괴한 무언가의 표정으로.
그 속에서 아더가 질문했다.
“레오 바이에른. 제 아버지예요?”
광대가 천천히 대답했다.
“둘 다다. 아더 바이에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