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후두둑…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그 하늘에서 벼락과 함께 내려지는 폭우에 세상이 어그러졌다.
얇은 천막 아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더는 중얼거렸다.
‘과거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고인 물웅덩이로 비춰진 제 모습 때문이었다.
앙상한 두 볼에 턱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지푸라기 같은 검은 머리칼에 삐쩍 말라비틀어진 육체.
지금의 이 모습은 현재가 아닌 과거 아더 바이에른의 모습이었다.
‘도르문트에게 쫓겨나, 대륙 각지를 떠돌던 시절이지.’
문제는 갑자기 왜 이런 모습이 되었냐는 것이다.
아더가 자연스레 고민에 빠져들려는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첨벙-!
깜짝 놀란 아더가 고개를 들기 위해 힘을 줬다.
허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턱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황한 아더가 중얼거렸다.
‘…설마 이 시절 나는 고개를 들 힘도 없었나?’
놀랍게도 그래 보였다.
그 탓에 아더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독약에 중독되어, 몸상태가 안 좋은 건 알았지만 설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을 줄이야.
그 사이 귓가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졌다.
첨벙첨벙-!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런 폭우 속에서 다 죽어가는 남자를 향해 걸어올 목적이 뭘까.
좋게 봐야, 술에 취한 취객.
나쁘게 보면 인신매매.
아더는 경각심을 일꺠우며 중얼거렸다.
‘다가오면 죽일 수 있나?’
던져진 가정에 고개가 저어졌다.
고개를 들 힘도 없는 육체로 죽이기는커녕,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 탓에 입술을 달싹이던 그 때였다.
아더의 두 눈빛이 반짝였다.
‘오. 입은 움직이네?’
그렇다면 나쁘지 않다.
상대방이 접근한 순간, 기습적으로 목덜미를 물어 뜯는다면 이쪽이 당하기 전에 처리 할 수 있을 것이다.
씩, 입꼬리를 올린 아더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기절한 연기를 펼친 것이다.
그 사이 사이, 폭우를 뚫고 이쪽으로 다가오던 남자의 걸음을 멈췄다.
자연스레 아더의 경각심이 커진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살아있나?”
깜짝 놀란 아더가 자신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 순간 자신이 아는 윌렛 크레스톨 보다 조금 더 젊어보이는 노신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놀란 아더가 입을 벌린 사이, 윌렛이 중얼거렸다.
“…깨어있군. 갈 곳이 없나?”
윌렛의 질문에 아더가 입술을 달싹였다.
목소리를 내고 싶은 데, 새된 숨소리만 내뱉어졌다.
그 상태를 아는 것일까.
윌렛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불쑥 손을 내밀었다.
“함께 가겠나?”
“…!”
“나쁜 사람은 아니다. 오늘 비만 피할 곳을 제공해주지. 어떤가?”
그의 말에 아더의 멍하니 넋고 있다 중얼거렸다.
‘설마 여기는….’
윌렛 크레스톨.
자신의 은사와 처음 만난 그 시간 그곳인 것 같았다.
‘그래 맞아… 비가 내리는 날. 윌렛 어르신과 처음 만났어.’
잊고 있던 추억에 아더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윌렛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맞잡은 윌렛의 손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빙그레 미소지은 아더가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윌렛 어르신.”
이 말과 함께 세상이 어그러졌다.
옛 추억이 사라지고 다시 시간이 현재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 * *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 순간 새하얀 공간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아더는 생각했다.
흰 수염의 저주에 갇혔을 때랑 비슷한 공간이라고.
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
느껴지는 기운이 따스했다.
그리고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물방울도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그 탓에 턱을 쓰다듬던 그때, 누군가 나타났다.
[아더…!]
푸른 머릿결.
푸른 눈동자.
자신이 아는 모습을 간직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여인이었다.
아더가 그 여인을 향해 중얼거렸다.
“운디네.”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운디네 아니라고요 아더….]
“아. 엘퀴네스인가요?”
아더의 말에 엘퀴네스가 미소지었다.
[네. 당신이 아는 운디네가, 엘퀴네스가 됐어요.]
그녀의 대답에 아더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놀랍네요… 엘퀴네스면 물의 정령왕 아니에요?”
[그렇죠. 어색한가요?]
이 말과 함께 엘퀴네스가 제 치맛자락을 살며시 붙잡았다.
어색해 보이는 그 모습에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흠… 어울리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치. 이럴 때 어울린다고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거짓말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하지만 뭐….”
말을 흐린 아더가 씩 미소지었다.
“어떻게 변하건 운디네네요.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운디네.”
아더의 말에 엘퀴네스가 잠시 멈칫하다, 눈물을 글썽였다.
[…….]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려는 모양인지, 엘퀴네스가 호흡을 골랐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더가 걸음을 옮겨 가벼운 포옹을 했다.
아더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엘퀴네스가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갔던 거에요… 설명 좀 해줘요.]
그녀의 말에 아더가 대답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괜찮아요?”
[네. 시간이 많은 건 아니지만, 이 이야기는 꼭 들어야겠어요.]
방긋 미소지은 아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흰수염과의 격전.
죽어가던 흰수염이 건 천 년의 저주.
7년이라는 시간의 공백.
그 모든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던 엘퀴네스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랬던 거였군요. 그래서 아더의 존재가….]
상황을 이해한 엘퀴네스가 손을 뻗어 아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많이… 힘들었겠군요, 아더.]
그 손길에 아더가 고개를 저었다.
“힘들었지만, 나름 버틸만했어요. 얻은 것도 있고.”
엘퀴네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듣기 좋은 그 웃음소리에 아더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린 그때였다.
머릿속으로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운디네는 어떻게 엘퀴네스가 된 거지?’
물의 상급 정령도 엄청난 존재지만, 물의 정령왕은 차원이 다른 영역이었다.
정령왕은 현세에 있는 모든 물을 다스리는 존재.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신'과 같았다.
‘그래서 물의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술사는 당대 최고의 마법사에 비교되는 데….’
그 탓에 아더가 고민하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엘퀴네스가 솔직히 대답했다.
[아더와 사라지고 정령계로 소환 된 저는…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렀어요.]
아더의 눈이 커졌다.
“죽을 뻔했다는 소리에요 운디네?”
[네. 그 사악한 흑마법사의 마법은 그만큼 강했고… 이대로 가다간 영혼 자체가 부서질 위기에 처해 있었죠.]
이 말과 함꼐 엘퀴네스가 추억에 잠겼다.
[그 때, 전대 엘퀴네스 님께서 저를 살려주셨어요.]
엘퀴네스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죽어가던 제가 살아날 방법은, 더 격이 높은 존재가 되는 것. 그 분께서는 저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왕위를 내려놓았죠.]
아더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령왕의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다니….”
정령들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큰 결심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왕도, 스스로의 의지로 보좌에서 내려오지 않으니.
그때 엘퀴네스가 해맑게 웃었다.
[후후… 그렇게 큰일은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운디네?”
[전대 엘퀴네스 님께서 큰 결심은 한 건 맞지만, 순리대로 흘러간 거기도 하거든요.]
엘퀴네스가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거대한 물결이 새하얀 공간에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변에 아더의 눈이 커진 순간, 엘퀴네스가 설명했다.
[모든 강과 바다는 흐르죠. 그것이 자연의 진리. 그리고 저희 물의 정령들은 그 진리에 가장 가까운 존재죠.]
엘퀴네스가 손가락을 톡 두들겼다.
거대한 물결이 아더의 주위를 감쌌다.
[시기가 이르든 빠르든… 결국 언젠가 일어날 일. 그래서 전대 엘퀴네스 님께서는 흔쾌히 자리에서 내려오셨어요.]
아더의 주위를 맴돌던 물결이 이 말과 함께 사라졌다.
아직 남아있는 물방울들을 바라보던 아더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대단한 분이시네요. 언제 한 번 꼭 인사드리고 싶어요.”
[기회가 있을 거예요, 아더.]
이 말과 함께 엘퀴네스가 웃었고, 아더도 웃었다.
그 순간 새하얀 공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쾅-!
그 이변에 엘퀴네스의 표정에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다시 웃어보였다.
[아더. 이번에는 헤어짐이 아니라 잠시 이별을 하게 될 거예요.]
그녀의 말에 아더가 질문했다.
“이유가 뭐죠?”
[아직 아더의 힘으로는 절 소환하기에는 벅찬 상태에요.]
엘퀴네스의 설명에 아더의 눈빛이 반짝였다.
‘소환하기 벅차다… 그렇구나.’
그래서 엘퀴네스를 소환할 때, 새까만 피를 토한 모양이었다.
‘허용범위를 넘어선 힘. 그 힘을 사용한 대가를 치른 거겠지….’
그런 와중에 엘퀴네스를 소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고민하던 아더는 어렵지 않게 답을 떠올렸다.
호수 밑바닥에 마주쳤던 유골들.
칼과 방패.
그리고 갑옷을 껴입은 아케인의 수호자들이 건네준 작은 기적.
‘윌렛 어르신에게 전해주게. 아직 올때가 아니라고.’
그들이 남긴 유언을 떠올린 아더가 씩 미소지었다.
“엘퀴네스. 다음에 또 보죠.”
아더의 말에 엘퀴네스도 미소지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더.]
인사는 거기서 끝이 났다.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한 정령과 한 남자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이번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니깐.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지금은 서로를 웃으며 보내줘야 하니깐.
그래서 엘퀴네스와 아더는 웃었다.
동시에 새하얀 공간이 무너져내렸다.
파앗-!
터져나오는 빛과 함께 엘퀴네스가 속삭였다.
[꼭 다시 절 소환해줘요. 아더.]
아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새하얀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감겨 있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오….”
탄성을 흘린 아더가 새하얀 천장을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으로, 따뜻한 비쳐오는 따뜻한 햇살이 얼굴을 감쌌다.
그 따스한 기온에 아더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을 때, 누군가 소리쳤다.
“공자님-!”
그 외침에 아더가 고개를 돌리니, 지니가 보였다.
그 뒤로는 쥴리와 아케인의 두 노교수 안젤리나가 보였다.
그런 그들을 잠시 지켜보던 아더가 천천히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깨어났나.”
아더의 눈이 커지고, 누군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쥴리와 지니가 그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침대에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더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몸은 좀 어때요, 어르신?”
“그건 내가 묻고 싶군.”
아더의 침대 앞에 걸터앉은 윌렛이 입가에 미소를 건 채 질문했다.
“자네 몸이야 말로 괜찮나?”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윌렛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는 진짜… 예상이 안 되는군. 그래서….”
말을 흐린 윌렛이 눈빛을 반짝였다.
“이번에는 대체 무슨 기적을 일으킨 건가? 아더 바이에른.”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기적이 아니예요, 어르신.”
“…내가 살아난 게 기적이 아니라고?”
“네. 이건….”
아더가 씩 미소지었다.
“아케인의 축복이에요. 그러니 기적이 아니라, 은총이라 불러야 하죠.”
아더의 대답에 윌렛이 눈을 끔뻑이다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 통쾌한 웃음속에서 윌렛은 생각했다.
‘역시 재밌는 친구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미친놈.
하지만 밉지 않은 미친놈.
그래서 무척이나 기뻤다.
아케인 전설의 용병 던.
그 미친놈이 다시 돌아왔다.
* * *
새파란 하늘 아래 코스모스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국화 한 송이를 든 소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을 지키던 7서클의 기사.
하루덴 피니스가 중얼거렸다.
“이제야 가셔야 합니다 공녀.”
그의 말에 칠흑 같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대답했다.
“조금 더 있으면 안 되나요 하루덴.”
“…시간을 지체했다간, 오늘 파티에 늦을 수 있습니다.”
하루덴의 설명에 소녀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챈 하루덴이었지만, 차마 조금 전 말을 번복하지 못했다.
오늘 파티는 아주 중요한 자리였고, 소녀의 운명을 바꿔줄 중요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하루덴은 묵묵히 대답을 기다렸다.
그 불편한 배려 속에서, 소녀는 누군가의 묘비 앞에 손에 들린 국화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아더 바이에른]
[누구보다 상냥했던 공작가의 후계자를 기리며….]
묘비 앞에 새겨진 글귀를 쓰다듬은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덴… 결심이 섰어요.”
그녀의 말에 하루덴의 눈이 커졌다.
그 사이 몸을 돌린 검은 머리칼의 소녀.
바이에른 공작가의 후계자.
아이린 바이에른이 눈빛을 빛냈다.
“저는 오빠를 대신해서 공작가의 주인이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