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품격이라는 것이 절절 흐르는 옷맵시.
길게 기른 콧수염.
오른쪽 눈 전체를 가로지르는 흉터.
겉모습만 보아도,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지 않은 사내는 아더의 기억 속에 있는 그 남자와 똑같았다.
‘뒷세계의 거물 브로커 윌렛.’
그 탓에 아케인에 돌아왔다는 것을 아더가 다시 한번 실감할 때, 윌렛이 질문한다.
“정장을 맞출 거면 가면을 벗으시오. 여기는 무도회가 아니니깐.”
아더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가면을 벗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정장을 맞추러 온 게 아니라서.”
“양복점에 와서 정장을 안 맞춘다고? 그럼 뭐 하러 여기 온 거요?”
“일거리를 소개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윌렛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일거리? 미안하지만, 점원은 뽑지 않소. 다른 곳을 알아보시오.”
축객령을 내린 윌렛이 시선을 돌린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윌렛 어르신은 경계심이 많았지?’
낮에는 양복점을.
밤에는 뒷세계의 브로커를.
두 개의 삶을 사는 그는 매우 조심성이 많았고,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대신 한 번 제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면,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생각과 함께 아더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윌렛의 경계심을 풀 수 있을까?
턱을 쓰다듬던 아더는 곧 눈빛을 빛냈다.
‘이런 상황일수록···. 정공법으로 가는 게 좋겠지?’
중얼거림과 함께 아더가 허리춤에 차고 온 운철검을 뽑아 든다.
날카로운 쇳소리에 윌렛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무어라 소리치려는 순간, 아더가 바이에른의 피를 일깨운다.
“…혈통 능력?”
윌렛의 중얼거림과 함께 아더가, 파충류 껍질로 뒤덮인 제 손등을 들어 올린다.
“이거 말고도 정령과도 계약한 상태입니다.”
“정령? 혈통 능력자인데, 정령까지 다룰 줄 안다고?”
“네. 어… 운디네, 노움 씨? 잠깐 능력 좀 보여주실래요?”
아더의 부탁에 두 정령이 쪼르르 날아가 윌렛의 콧등과 어깨에 걸터앉았다.
그 순간 허공에서 물보라가 일어나고, 윌렛이 앉아있던 의자가 옅은 진동을 일으켰다.
그 기이한 변화에 윌렛이 눈을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정령인가 보군. 주문도 외우지 않고 이런 변화를 일으키다니.”
“네. 그리고···. 검도 어느 정도 씁니다. 이 정도면 꽤 쓸 만한 실력이지 않나요?”
질문에 윌렛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는다.
아더의 말대로, 혈통 능력과 정령.
거기다 검까지 쓸 줄 안다면 이 바닥에 있는 놈들 중에서도 많이 독특한 편이었다.
허나 재주가 있다 하여,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신뢰와 믿음.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껏 일해 왔고,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능력을 가진 자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고민 끝에 윌렛은 아더를 조금 더 떠보기로 했다.
“이런 재주가 있는 사람이, 왜 나한테 일을 소개받으려 하는 거요?”
아더가 대답했다.
“제가 유일하게 아는 브로커가 윌렛 어르신이거든요.”
“…난 자네를 모르는데?”
아더가 웃었다.
“음… 뭐, 이런 이유도 있고 윌렛 어르신이 예전에 절 살려 준 적도 있고.”
“…내가 그쪽을 살려 줬다고?”
“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저를 거두어 주셨어요. 음… [아테나] 고아원이라 하면 알아듣기 편하실까요?”
윌렛의 눈이 커졌다.
아테나 고아원.
그건 윌렛 본인이 운영 중인 아주 비밀스러운 고아원이었다.
‘그곳을 안다고? 하지만···. 그곳 출신이라면 내가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는데?’
아테나 고아원은 이 삭막한 도시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지은 일종의 천사의 집이었다.
그리고 그 아테나 고아원을 자신이 운영한다는 것은, 그곳의 원장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그 탓에 윌렛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다른 사무소에서 보낸 놈인가?’
그런 것치고는 뭔가 매우 엉성하지만, 경계의 대상임은 분명했다.
윌렛이 감정을 숨긴 채 물었다.
“내가 일거리를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요?”
“어···. 매일 같이 이곳에 와서 조르지 않을까요?”
윌렛이 눈을 끔뻑였다.
황당한 대답이었다.
“진심이요?”
“진심입니다.”
윌렛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딘가 맥락이 어긋난 대화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때 윌렛의 뒤편에서 복면을 뒤집어쓴 칼잡이 한 명이 나타났다.
“처리할까요, 어르신?”
“…아니. 일단 상황을 좀 봐주게.”
칼잡이가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그 속에서 윌렛은 미간에 진 주름을 매만지다 질문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자네를 고용할 마음이 없네. 무명의 신인은 받지 않거든.”
“음···. 곤란하네요.”
“하지만 어떻게 아테나 고아원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궁금하군.”
아더가 눈빛을 반짝였다.
그 사이 윌렛이 제안한다.
“시험으로 일거리를 하나 주겠네. 그걸 해결하면, 자네를 정식으로 고용하겠네. 하지만 실패하면 아테나 고아원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대답해주게나. 어떤가? 이 정도면 서로가 만족할 제안이라고 생각되는데.”
* * *
100년 전.
대륙에서는 큰 전쟁이 일어났다.
그 피해가 어찌나 막심한지, 전쟁이 끝난 10년 후에도 제국을 포함해 모든 나라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그 빈곤을 타파하기 위해 제국와 연합왕국은 하나의 도시를 세우게 된다.
신 프로젝트 아케인.
멈춰 버린 대륙의 시간을 움직일 거대한 경제 도시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그 도시를 향해 쓸모없어진 수많은 용병들이 스며들었다.
다행히 용병들의 일거리는 넘쳐났다.
연합 도시답게 아케인은 여러 권력층이 분산되어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였다.
그 덕에 힘이 필요했고, 그 부족한 힘을 용병들이 메꾸어주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용병이란 직업은 아케인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가장 성공할 기회가 많은 직업으로 말이다.
그래서 아더, 자신의 목적과 매우 적합했다.
‘내가 아케인에 온 이유는 혈통을 모으기 위해서지. 그리고 그 혈통을 모으기 가장 좋은 곳은 돈과 힘이 모이는 곳이고.’
힘이 필요하기에 돈이 모여들고, 돈이 모여들기에 능력자들이 꼬이는 이 뒷거리에는, 아더 자신이 원하는 혈통을 지닌 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애초에 아케인에 왔다고 해서 혈통 능력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니깐… 그렇다면 그 혈통 능력자들이 모이는 장소로 향해야지.’
그리고 윌렛 같은 유능한 브로커는 그 기회를 많이 만들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아더는 다음 날이 되고서 받은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 D-11 구역, 통칭 ‘버려진 거리’라 불리는 빈민가로 향했다.
아케인은 그 크기에 걸맞게 구역도 총 4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 D 구역은 이 도시의 최하위 계급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 탓에 A 구역에서는 볼 수 없던 거지들이 보였으며 정리되지 않은 도로와 다 쓰러져 가는 폐건물, 그 밖의 여러 불법 상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나 이곳이 버려진 거리라 불리는 가장 큰 이유는 분위기였다.
삶과 희망 따위는 보이지 않은 사람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약과 술에 취해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꿈과 희망의 도시라 불리는 아케인과는) 대변되는 모습.
그래서 D 구역의 별명이 버려진 거리였다.
‘여기도 익숙하네···. 여전히 더럽고 음습해.’
생각과 함께 아더가 쓰고 있던 가면을 추켜올렸다.
윌렛이 말한 일거리는 이곳 D-11 구역을 지배하는 갱단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이 바닥의 규율을 어기고 멋대로 전쟁을 일으킨 <아레스 패밀리>.
그 패밀리를 지원하는 마법사를 무력화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의뢰 방식 자체는 매우 단순했지만, 패밀리에 속한 마법사를 처리하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경지가 낮더라도 마법사는 마법사. 거기다 갱단에 속한 마법사라면 호위도 받고 있을 테고···. 보기보다 까다로운 의뢰네.’
그 탓에 아더는 고민했다.
어떤 식으로 일해야 간편하면서도 빠르게 끝낼 수 있을까.
시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테스트 자체에 발목이 묶이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서 아더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졌을 때였다.
대머리에 장미 문양 문신을 새긴 한 사내가 불쑥 다가와 속삭였다.
“…윌렛 어르신이 보낸 자요?”
질문에 정신을 차린 아더가 대답했다.
“누구세요?”
“윌렛 어르신에게 의뢰를 부탁한 <레스터 패밀리> 소속이요.”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마중을 나올 거란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요?”
“이런 명품을 입고 D 구역을 나돌아 댕기는 인간들은 두 종류지. 하나는 미친놈이거나 하나는 실력에 자신이 있던가. 그런데 우리는 때마침 윌렛 어르신에게 의뢰를 부탁했고, 그 양반은 성질은 더럽지만 아주 뛰어난 용병들하고만 일하지.”
아더가 탄성을 내질렀다.
“오···. 꽤 그럴싸하네요?”
“…칭찬을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군. 그래서, 윌렛 어르신이 보낸 자가 아니요?”
“맞습니다.”
“뭐라 부르면 돼요?”
아더가 제 이름을 밝히려다 멈칫했다.
‘음···. 이름을 말해서 좋은 건 없겠지?’
생각과 함께 아더가 제 이름을 활용해 적당한 가명 하나를 만들어냈다.
“던이에요.”
“던…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 이곳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됐나?”
“그럴걸요?”
“실력에는 자신 있고?”
“일단은 그렇습니다.”
대답에 대머리 사내가 잠시 침묵하다 질문한다.
“그런데 이 의뢰는 왜 받아들인 거요? 마법사, 더군다나 패밀리에 속한 자를 처리하는 일인데?”
“음···. 사정이 있어서요.”
“사정? 그게 무슨 사정이오?”
“일단 윌렛 어르신의 테스트…? 이기도 하고, 아레스 패밀리에 속한 마법사가 나쁜 분이시더라고요.”
대머리 사내가 걸음을 멈춘다.
“나쁜 분이라고?”
“네. 거리의 규율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거리의 아이들을 잡아다 장기 매매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오?”
“그건 아닌데 이왕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게 속이 편하잖아요.”
대머리 사내가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대답이군!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소!”
외침에 아더가 시선을 돌렸다.
어느 사이엔가 다 무너져 가는 폐건물 근처로 들어와 있었다.
도망칠 구석 따위는 없었고, 다르게 보자면 소란이 일어나도 몰려올 사람이 없는 장소였다.
‘좋은 곳으로 유인했네. 그런데 어디서 정보가 빠져나간 거지?’
그때 저 멀리서 수십 명의 사내가 아더를 향해 다가왔다.
연장을 든 그들의 모습에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대머리 사내가 다시 입을 연다.
“무명의 용병은 딱 두 종류지. 실력이 좋거나, 어중이떠중이거나. 그쪽은 어디에 속하오?”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음… 적어도 당신을 죽일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대머리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부터 눈치챘소?”
“처음 접근했을 때부터요.”
“그런데도 날 따라왔다고?”
“당신을 죽여야 하는데,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요?”
대머리 사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고작 1서클로? 뭐 다른 재주가 있는 거요?”
“글쎄요… 음. 그런데 대머리 씨?”
“하제스요.”
“네 하제스 씨. 대화는 이쯤 해도 될까요?”
제안과 함께 아더가 칼을 뽑아 든다.
“죽여야 할 분하고 그리 오래 대화하고 싶지 않아서요. 대신 마지막 유언 정도는 들어 드릴게요.”
하제스가 침묵한다.
그 후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미친놈이었군.”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대답과 함께 아더가 칼을 휘두른다.
예고 없이 휘둘러진 그 일격에 하제스의 눈이 치켜떠진다.
쾅!
다행히 미리 시전해 두었던 베리어가 기습을 막아냈다.
허나 안심할 수 없었다.
뒤이어 날아오는 일격이 첫 일격보다 배는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그 탓에 하제스는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뭐 해! 저놈 잡아다 족쳐!”
외침과 함께 아더의 주위로 몰려오던 <아레스 패밀리>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낸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권총을 꺼내 든 자들도 있었다.
‘역시 갱단. 까다로운 무기를 들고 있네.’
생각과 함께 아더가 고리를 회전시킨다.
그 순간 육체가 강화되고, 힘과 활기가 넘쳐흐른다.
허나 1서클로 강화된 육체의 피부만으로는 총을 막지 못한다.
그 탓에 아더는 강화시킨 육체 위에 프라킬에게서 빼앗은 혈통의 힘을 덮어씌웠다.
우드득-!
기이한 소리와 함께 입고 있던 정장이 찢긴다.
동시에 얼굴을 덮고 있던 가면도 부서지고, 그 위를 파충류의 갑각질이 뒤덮었다.
마법과는 전혀 다른 기적에, 하제스가 놀라 중얼거렸다.
“뭐···? 혈통 능력자였다고?”
그사이 변화를 끝마친 아더가 경고한다.
“앞길을 막으면 죽여야 하는데, 비켜주시는 건 안 되겠죠?”
아레스 패밀리가 대답하는 대신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갱단. 화끈해서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