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바이에른의 작은 천사요?”
“그쪽 핏줄을 타고 올라가면 천사가 있지. 혹시 몰랐는가?”
아더가 고민하다 대답했다.
“아뇨.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설 아닌가요?”
“전설이 때로 맞을 때도 있지. 하지만 나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니네. 워낙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하고, 천사라는 건 기본적으로 인간과 결혼할 수 없거든.”
설명에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흰 수염 이 사람… 천사에 관해 알고 있는 건가?’
눈앞의 노인이 하늘섬 소속이 맞다면 정말 알지도 몰랐다.
그만큼 하늘섬이란 단체는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단체였으니깐.
그 때 흰 수염이 다시 입을 연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 내가 자네를 죽일 거라 생각하는가?”
정신을 차린 아더가 대답했다.
“음···. 보통은 그러지 않을까요?”
“왜?”
아더는 솔직히 대답했다.
“제자를 죽였으니깐요?”
흰 수염이 웃음을 터트렸다.
“프라킬 그놈은 내 제자가 아니야.”
“네?”
“제법 독특한 피를 가져 거두어들인 놈 중 한 명이지. 음···. 그래. 그냥 물건이야. 희귀한 수집품 같은 거지.”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귀한 골동품을 모으는 사람은 들어봤어도, 희귀한 피를 가진 인간을 수집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허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절 죽이지 않을 건가요?”
흰 수염이 차를 들이켰다.
“글쎄···. 고민 중이야. 이 자리에서 자네를 죽여야 할지, 아니면 살려야 할지. 죽이자니 뒷감당이 귀찮아질 테고, 살리자니 뭔가 찝찝하거든···. 난 여태 내 물건을 건든 놈들을 용서한 적이 없어서 말이야.”
대답과 함께 침묵이 내려앉는다.
흰 수염은 아더를 살피며 차를 들이켰고, 아더는 운철검을 만지작거렸다.
‘죽인다는 대답이 나오면 반격을 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곧바로 경동맥을 찌른다면 승산이 있을까?
아니면 마법을 쓰지 못하게 일단 두 팔부터 잘라 놓고 시작해야 하나?
거듭되는 고민에 아더는 고개를 저었다.
그 어떤 가정도 눈앞의 노인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강하단 소린데 곤란하네···. 하필 이럴 때에 마주치다니.’
아더가 계속해서 최선의 수를 찾을 때였다.
흰 수염이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결정했네. 살려 주지.”
“…오. 진짜요?”
“애초에 자네를 죽이러 온 게 아니거든. 아무리 나라도 바이에른 가문의 아이를 죽이는 건 리스크가 크거든.”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왜 찾아오신 건데요?”
“궁금하잖아. 나도 찾기 힘들게 꽁꽁 숨은 프라킬을 찾아 죽인 놈의 얼굴이.”
흰 수염의 대답에 아더가 이해했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하긴 그렇긴 하겠네요. 궁금한 건 해결해야죠.”
“오… 궁금함의 미학을 아는군. 그럼 한 가지 질문을 좀 해도 되나?”
“어떤 건데요?”
“프라킬은 왜 죽였나? 딱히 죽일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아더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쪽이 절 먼저 죽이려 했거든요. 그래서 먼저 선수를 좀 쳤어요.”
흰 수염이 눈을 끔뻑였다.
“프라킬이? 그놈이 아무리 정신머리가 나갔어도, 바이에른 쪽 사람을 건들 머저리는 아닌데?”
아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은 아닌데, 나중에 절 죽이실 거였거든요.”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건드릴 예정이라 죽였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건가?”
“네.”
“그것참 독특하군···.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았나?”
“그건 비밀입니다.”
흰 수염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비밀? 허허…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로군.”
그 후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흰 수염이 제 수염을 매만졌다.
그렇게 가슴팍까지 기른 수염을 한참이나 매만지던 그는 벗어두었던 중절모를 불쑥 집어 들었다.
그 모습에 아더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가시는 건가요?”
“그럼 가야지. 5서클 기사를 잠재워 놓는 것도 한계가 있고, 다음 정차역이 내 목적지거든.”
“이런···. 이별이군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흰 수염.”
“표정은 안 그래 보이는데?”
“아니에요. 흑마법사하고는 대화가 안 통할 줄 알았는데, 흰 수염 님은 대화가 통해서 신기했거든요.”
“이런, 흑마법사에 너무 편견을 가지고 보지 말게나. 나도 재밌었네. 귀족하고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건 꽤 오랜만이거든.”
흰 수염이 지팡이를 두들긴다.
그 순간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눈을 뜬 채로 기절한 안나가 보였다.
흰 수염이 다시 한번 입을 연다.
“잠재워 놓은 것뿐이네.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건 그렇고···. 자네 아케인으로 갈 건가?”
아더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네.”
“귀족가의 자제가 아케인으로 가는 거면 대학에 입학하려는 모양이군.”
“맞아요.”
흰 수염이 검은 카드 한 장을 불쑥 내민다.
“날 다시 보고 싶거든. 검은 종탑으로 가서 이 카드를 내밀게. 안내인이 마중 나갈 거야."
카드를 받아든 아더는 눈을 끔뻑였다.
“어···. 선물인가요?”
“선물이네. 오랜만에 재밌는 대화를 나눈 값이지.”
흰 수염이 몸을 돌린다.
“그럼 진짜 이별이군. 아케인, 이 미친 도시에 온 걸 환영하네. 공자.”
* * *
흑마법사 흰 수염.
그와의 예상치 못한 만남 덕에 아더는 실감할 수 있었다.
‘아케인으로 돌아오기는 한 모양이네. 그런 사람들도 다 만나고.’
범죄자, 영웅, 기사, 마법사.
다양한 직종의 가지각색의 사연을 가진 이들이 모여드는 도시 아케인.
그 탓에 아케인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고, 어떤 일이든 이뤄낼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하늘섬의 조직원.
흰 수염과의 만남도 오로지 아케인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다.
‘역시 이곳으로 돌아오길 잘했어. 첫 만남부터 전설로만 전해지는 흑마법사와의 만남이라···.’
그사이 내달리던 기차가 멈췄다.
길고 긴 여행이 끝나고 마침내 아케인에 도착한 것이다.
아더를 따라 기차에서 내린 안나가, 그런 아케인의 정경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와아···. 아니 건물이 어떻게 저렇게 높을 수가 있죠? 진짜 신기하네요···.”
그때 일당의 무리가 깃발을 치켜든 채 다가왔다.
시선을 돌린 아더는 오… 라는 탄성을 내질렀다.
깃발을 치켜든 채 다가오는 무리가, 아케인의 고위 공무원들이었기 때문이다.
“바이에른의 소가주를 뵙습니다. 지금부터 저희가 모실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예의를 갖춘 고위 공무원들이 답을 기다린다.
30명의 시종도 아더를 바라보았다.
아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한테 미리 들었습니다.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 이쪽으로.”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인 공무원들이 걸음을 옮긴다.
동시에 앞을 가로막던 인파가 두 갈래로 찢어져 길을 터주었다.
“아니 누구길래 아케인의 공무원이 직접 마중을 나와?”
“왕의 후손이 와도 마중 나가지 않은 게 저놈들인데?”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안나가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분들 엄청 대단한 분들인 것 같아요, 공자님!”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긴 하죠. 이곳 아케인의 권력자들이니깐.”
“이분들이요?”
“네. 아케인의 공무원을 방해하는 건 제국으로 따지면 황실 근위대에게 반기를 드는 것과 비슷해요.”
설명에 안나가 감탄한다.
그 후 세련된 정장을 입은 공무원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때였다.
고급스러운 외관을 자랑하는 리무진이 나타나 일행의 앞에 멈추어 섰다.
공무원들의 안내를 받아, 그 리무진에 올라탄 아더는 매우 편안하게 거대한 도심 한복판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요넬 바이에른 공작 각하의 서한을 받고서, 머무르실 저택과 호텔 중 몇 군데를 추려 놓았습니다. 그 추려 놓은 곳 중에서 다시 내부 심사를 통해 아더 바이에른 님의 통학과 안전. 이 두 가지가 가장 우선시 된 장소를 선별하였고, 그중 선택된 곳이 바로 이 저택입니다.”
설명과 함께 리무진이 멈추어 서고, 거대한 저택이 아더와 일행들을 반겼다.
“대학에서 10분 떨어진 거리. 자체 수영장을 비롯한 여러 개인 시설. 크기는 다소 작을지 모르지만, 주변 인프라까지 고려하면 현재 구할 수 있는 매물 중 가장 좋은 저택입니다.”
크기가 작다는 말에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이에른 저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눈앞에 있는 저택의 크기도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아케인에서 이런 집을 구하려면… 금화를 몇 개나 줘야 할까?’
평범한 농부가 한평생.
아니 수백 년을 일해도 아마 사지 못할 가격일 것이다.
그 탓에 아더는 실감할 수 있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 시작하네. 길바닥이 아니라 집에서. 머저리 아더 바이에른이 아니라, 공작가의 아더 바이에른으로.’
그리고 이 사실은 아더에게 있어 꽤나 큰 감회를 주었다.
그 기분을 남몰래 즐길 때, 옆에 선 고위 공무원이 조심스레 질문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집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뇨. 여기로 할게요.”
공무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최고의 선택은 아니지만, 최선의 선택이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공자.”
“그래 보이네요. 그런데 그쪽 이름은 뭐죠?”
“…제 이름 말씀입니까?”
“네. 대화를 나누었는데, 지금까지 이름도 못 들은 것 같아서요.”
멈춤이 없던 공무원의 입이 처음으로 다물어졌다.
허나 곧 표정을 갈무리한 채 아더의 질문에 공손히 대답했다.
“3급 공무원 에반 크리스쳐라고합니다. 편하게 에반이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에반. 혹시 제가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나요?”
“먼 곳에서 오신 만큼, 오늘 일정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굵직한 사안은 제가 내일 다시 자택에 방문해 직접 말씀드릴 건데, 이거 하나만큼은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금 전보다 부드러워진 말투와 함께 에반이 명함 한 장을 내민다.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한다.
“뭐죠, 이게?”
“아케인의 시장.”
에반이 자부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안젤리나 시장님의 명함입니다. 짐이 정리되시는 대로, 차나 한잔하자는 말씀을 전해오셨습니다.”
* * *
예상치 못한 명함과 카드를 얻은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이런 거물들과의 연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운이 좋다 해야 하나?’
아케인의 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흰 수염과의 만남은 더더욱 그랬다.
두 사람 모두, 이 도시는 물론이고 어쩌면 대륙을 뒤흔들 수 있는 권력자들.
그런 자들과의 만남은 억천만 금을 줘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 만남을 아케인에 방문한 지 고작 이틀 만에 이뤄냈다.
‘물론 이 만남이 인연이 될지는 봐야겠지만···. 뭐 나쁘진 않네.’
그렇게 시간은 다시 흘러갔다.
그 속에서 아더를 따라나선 바이에른 가신들은 분주히 새 삶의 터전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선 것은 안나.
그녀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공무원들에게서 받은 저택을 아더 바이에른 것으로 꾸며 나갔다.
“공자님이 좋아하는 색상은 무채색이에요. 타일은 대리석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구는 아케인에서 가장 유명한 가구점인 타쿠아에다 문의할 거예요!”
이미 아케인이란 거대한 도시에 적응한 안나는 오로지 아더.
한 사람만을 위한 거주 공간을 꾸미는 데 더없이 열을 올렸다.
어찌나 열의에 가득 차 있는지 같이 따라온 시종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 속에서 아더는 바이에른 저택의 일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냈다.
가끔 산책을 나가, 아케인의 도시 정경을 구경하는 것 외에는 크게 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슬슬 준비를 해야지. 앞으로 2주 뒤에 시장님도 만나야 하고···. 입학도 하게 되니깐… 시간이 별로 없어.’
그 전에 할 수 있는 일들은 최대한 마무리 짓는 게 좋았다.
그 탓에 짧은 휴식을 끝낸 아더는 외출에 나섰다.
“어 공자님? 외출하시는 건가요?”
“응 안나.”
“지금 준비해 올게요.”
아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혼자 나갔다 올게. 도시 구경도 좀 하고, 앞으로 지내게 될 곳도 혼자서 둘러보고 싶거든.”
대답에 안나가 망설인다.
허나 곧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네 알겠습니다. 대신 저녁 식사 전까지는 꼭 돌아와 주세요.”
아더가 미소를 입가에 띠우며 중얼거렸다.
‘바이에른 저택을 떠나니, 이거 하나는 좋네. 내 행보를 설명할 필요도,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다는 것.’
그렇게 상념을 정리한 아더는 곧바로 시가지로 향했다.
우웅-!
아케인의 중심부라 부를 수 있는 A-1 구역.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명품과 그 외 가장 값비싼 음식점들.
모든 것들이 최고로만 꾸며진 사치와 향락의 거리였다.
그 탓에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도 아케인의 상위 계급들 뿐이었다.
그 특권층의 거리를 느긋이 거닐던 아더는 한 양복점 앞에 멈추어 섰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독특하기 짝이 없는 간판 이름에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잘 계실지 모르겠네. 윌렛 어르신은.”
중얼거림과 함께 아더가 양복점의 문을 열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양복점 특유의 향내가 아더의 코끝을 찔러 왔다.
그 속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누구시오?”
인사치고 다소 거친 톤에 아더가 눈빛을 빛낸다.
‘정정해 보이시네. 내가 알던 그 시절보다 더.’
상념을 끝마친 아더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의 주인.
동시에 뒷세계의 거물 브로커이기도 한 윌렛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일거리를 받으러 왔습니다, 윌렛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