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아더는 눈을 끔뻑였다.
[아케인 종합대학 추천장.]
요넬이 건네준 것은 서류였다.
여러 직인이 찍힌 아주 복잡한 서류.
허나 그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 추천서를 왜 건네주신 거지?’
생각과 함께 아더가 머뭇거릴 때였다.
요넬이 바이에른 가신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나요, 다들? 아더와···. 긴히 할 말이 있네요.”
고개를 기웃거리던 바이에른 가신들이 놀라 허리를 숙였다.
그 후 칭얼거리는 아이린을 억지로 안아 들고서 후다닥 식당을 빠져나갔다.
주변의 시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요넬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더를 바라보며 방긋 미소 짓는다.
“우리 아들이 이제 열일곱 살이던가?”
“네 어머니.”
“많이 컸구나···. 네가 말을 더듬지 않게 된 지 1년···. 그 이후로도 시간이 제법 흘렀지?”
“어···.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그래. 그래서 나도 잘 안 믿기는구나. 널 바라본 17년이란 시간보다, 최근 1년 사이에 너무 훌쩍 커 버려서.”
요넬이 턱을 괸다.
조금 전까지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던 표정도 약간은 어두워졌다.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챈 아더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요넬이 먼저 입을 열며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앞으로 3년. 난 널 공작가의 정식 후계자로 앉힐 생각이란다.”
“…네?”
“그 1년 뒤에는 네게 이 자리를 물려줄 의향도 있단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니, 아더?”
아더가 넋을 놓고 있다, 간신히 대답한다.
“어… 네. 그런데 왜 갑자기….”
“갑자기 결정을 내린 건 아니란다. 아더. 너의 재능을 확인하고서 며칠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지.”
요넬이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준비되지 않았다면···. 그 준비가 끝마칠 때까지 어미가 대신 이 자리에 있을 거란다. 하지만 아더. 너는 이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란다.”
웃음을 멈춘 요넬이 눈빛을 번뜩인다.
“결국, 좋든 싫든···. 네 핏줄과 이 가문을 탐내는 자들이 몰려올 것이고, 그때 가서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공작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주 좋은 선택지가 될 거야.”
좋은 선택지?
요넬의 말을 따라 중얼거린 아더는 숨을 참았다.
‘공작가의 주인… 이건 전혀 생각 못 했는데.’
한 번도 바란 적이 없는 자리고,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자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번 삶의 자신은 공작가의 주인은커녕 그 후계자 자리도 지켜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런 와중에 공작가의 주인 자리를 논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
그 탓에 아더가 입을 열지 못하자, 요넬이 끊어진 설명을 다시 이어 나갔다.
“이것 또한 마찬가지란다. 아케인 종합대학···. 제국에서 난다긴다하는 대학들조차, 아케인 대학과 비교하면 한 수 접어줘야 하지."
“….”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 왕족, 귀족. 그들 모두가 모이는 곳이 이 종합대학이니깐 말이야.”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케인 종합대학은 아더도 잘 아는 곳이었다.
제국을 비롯한 연합왕국.
더 나아가 교회와 수많은 이민 왕국이 힘을 합쳐 만든 신新도시 아케인.
그 도시의 하나뿐인 교육기관인 아케인 대학은 그 재능과 천재성은 물론이고 자격마저 갖추어야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학교를 졸업하면 당당히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겠지. 거기다 홀란 오라버니가 말씀하신 네 재능도 학교에 들어간다면 충분히 만개할 수 있을 거란다. 그곳은 최고라 불리는 교수들이 학생을 가르치니 말이야.”
아더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즉… 아케인 대학교 졸업장을 따서, 공작가의 주인 자격을 증명해라 이건가.’
생각과 함께 아더가 탄성을 터트릴 때였다.
요넬이 다시 한번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건네온다.
“그리고 나는 아더, 네가 아케인 대학에 가 있는 동안 무너져 가는 공작 가문을 재건할 생각이란다.”
“…재건이요?”
“그래. 아더, 너도 알다시피, 현재 공작가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단다. 그 이유가 뭔지 아니?”
질문에 아더가 고민했다.
그러다 요넬과 케인의 대화를 생각해내고서 탄성을 터트렸다.
“그 광물 철산인가요?”
“맞아. 광물 철산도 그중 하나지. 원래는 바이에른의 것이었던 것들이, 지금은 도르문트 백작을 비롯한 탐욕스러운 사업가 귀족들의 손아귀에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단다.”
“어째서 그렇게 된 거죠?”
“방심한 탓이지. 바이에른은 너무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에 있었어. 그래서 모든 것들이 당연하고, 익숙해져 버렸어.”
요넬이 씁쓸히 중얼거린다.
“반면 도르문트 백작과 새로이 떠오르는 신흥 귀족들은 도전과 혁신을 했지. 거기서 차이가 벌어졌고,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바이에른 이름 자체를 빼앗길지도 모른단다.”
아더의 눈이 커졌다.
바이에른의 이름.
그것을 빼앗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죽음. 이름을 빼앗긴 귀족들에게 남겨진 것은···. 죽음뿐.’
그리고 지금.
요넬은 그 이름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탓에 아더는 또 한 번 놀라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변했네? 내가 아는 어머니는 이런 분이 아닌데?’
그때 요넬이 다시 아더의 손을 잡는다.
따뜻한 온기에 아더가 정신을 차린다.
“나는 그걸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단다. 그래서 네가 이 학교에 간다는 전제하에 흔들리는 재정을 다시 바로잡고, 빼앗겼던 바이에른의 정당한 권리들을 다시 찾아올 생각이란다."
“….”
“그리고 그것을 3년 뒤, 너에게 물려줄 것이고.”
아더가 침묵한다.
동시에 머릿속을 점령한 상념과 고민이 정리된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왜 아케인 대학 추천서를 건네주면서 이 자리를 만들었는지.
‘어머니가 가문을 재건할 동안 나보고 대학교에 가서 가문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자격을 증명하라는 거구나.’
만약 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아주 거대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듯했다.
케인 도르문트와 2황자 칸 마드리드.
그 두 남자와 맞서 싸울 때 아주 커다란 힘을 쥘 수 있는 기회가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며칠간 고민하던 문제도 동시에 해결할 수가 있었다.
‘저택을 떠나 아케인으로 가서 혈통을 수집할 기회… 그 기회도 자연스레 얻을 수 있어.’
그 탓에 아더는 벅차오르는 기대감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번 생에 많은 변화와 놀라운 일들이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을 끝마친 아더가 고개를 든다.
확고한 결심이 선 요넬의 표정이 보였다.
그런 어머니를 향해 아더도 결심을 굳힌 채 대답했다.
“고마워요, 어머니.”
요넬이 방긋 웃는다.
“제게 있어 최고의 생일 선물이네요. 이런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 * *
솔직히 말해 마음 한구석에서는 조금 더 바이에른 저택에 머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이제야 친해진 집안의 사람들.
미소를 되찾은 어머니와 여동생.
그들과 조금 더 함께 호흡하고 싶었다.
허나 아더는 이 마음을 뒤로하고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머니가 결심을 섰을 때···. 응원해 줘야 좋은 아들이지.’
자신이 남아있다면, 요넬이 흔들릴지 모른다.
그건 아더 자신에게도, 요넬에게도 별로 좋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요넬의 결심이 확고히 섰을 때 바이에른 저택을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아더가 결정을 내리자, 준비는 곧바로 되었다.
아케인 종합대학.
제국의 수도로부터 수백 킬로 떨어진 기회의 도시로 향할 준비가 말이다.
먼 곳으로 향하는 만큼 많은 짐이 필요했지만, 아더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누었다.
친했던 요리사.
매일 같이 눈인사를 했던 호위 기사.
그 밖의 여러 시종들.
아더는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찾아가 인사했고, 바이에른의 시종들은 그 인사를 눈물로 화답했다.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도련님.”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밝은 미래만 함께하시기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더는 가슴 한구석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 고통은 생각보다 아팠고, 그 탓에 아더는 몹시 놀랐다.
가족을 제외한 타인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 본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택을 떠난다는 결정을 내린 것에 더욱 진한 아쉬움이 들 때였다.
기회와 자유가 보장된 신도시.
아케인으로 떠나는 열차 앞에 바이에른의 대가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식적으로, 제국에서 두 번째로 고귀한 핏줄을 지닌 공작가의 등장에 역무원을 비롯한 모든 승객이 예를 갖추어 허리를 굽혔다.
그 속에서 아케인으로 향하는 기차를 모는 기관사가 직접 걸어 나와 요넬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공자를 모실 기회를 얻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 각하.”
고개를 끄덕인 요넬이 고개를 돌렸다.
칭얼거리다 잠이든 아이린을 안고 있던 아더가 그런 요넬을 마주 본다.
그 시선에 요넬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아더가 방긋 웃는다.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어머니.”
“….”
“잠들 때도 연락할게요. 뭘 했는지 매일 같이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방학이 되면 놀러 올게요.”
그의 대답에 요넬의 달싹이던 입술이 다물어진다.
그 후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아더를 껴안았다.
“기다리고 있으마. 이번 이별이 마지막은 아니니깐.”
“네.”
“보내주는 영약들 잘 먹고, 공부 열심히 하고.”
“그럼요. 좋은 영약 많이 보내주세요.”
“어련히 내가 안 좋을 거 보내줄까? 걱정 말거라.”
아더가 참지 않고서 미소 지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걸로 보내주세요, 어머니.”
이 말과 함께 요넬이 아이린을 건네받았고, 바이에른 가신들이 눈물을 훔치며 아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인사와 함께 아더는 vip석으로 올라섰다.
뿌우우우-!!!
울려 퍼지는 경적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기차가 출발한다는 신호였다.
창가에 기대어 꿈쩍도 하지 않는 요넬과 바이에른 가신들을 바라보던 아더가 속삭였다.
‘금방 만나러 올게요, 어머니.’
그 후 기차가 출발하고 요넬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안나가 조심스레 질문해 왔다.
“저 공자님?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응? 왜?”
“…그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실 것 같아서···.”
말을 흐리는 그녀의 모습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커피나 한 잔 가져다줄래?”
“샷 다섯 개 추가해서 말이죠?”
“오늘은 특별히 세 개 더 추가해 줘.”
안나가 작게 입을 벌린다.
‘커피에 샷 8개를 넣어서 마실 수가···. 있나?’
의문도 잠시 안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지금은 최대한 소공자님을 배려해야 했다.
가족을 떠나 타지로 향하는 것은 귀족이건 평민이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니깐.
여기까지 생각한 안나가 종종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고, 혼자 남게 된 아더가 상념에 빠졌다.
상념 속에서 아더는 아케인으로 가는 목적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일단 아케인으로 가면···. 양복점에 들러야겠네. 그다음에 뒷세계에 들어선 뒤,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이게 좋은 혈통들을 수집해야겠어.’
아케인으로 향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공작가의 주인이 되기 위한 자격 증명도 있지만, 역시나 혈통 수집이 가장 컸으니까.
비정상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아케인은 온갖 능력자들이 있었고, 희귀한 혈통을 지닌 자들도 대륙에서 가장 많이 모여 있었다.
좋은 혈통을 원하는 아더에게는 메리트가 가장 큰 장소.
그 기회를 아더는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아케인에 거주 중인 원수들의 목도 잘라내고.’
물론 복수에 나서기까지는 아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아케인은 단축시켜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아더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흰 수염을 가슴팍까지 기른 노인 한 명이 앞에 앉아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안녕하세요?”
당돌한 인사에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당황하지 않는군? 허락 없이 들어왔는데. 혹시 날 아시오?”
“아뇨? 오늘 처음 뵙는 것 같네요.”
“그런데 왜 그리 친숙하게 인사를 건네시오?”
질문에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음···. 당황해서 좋을 게 없어서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대답에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사이 감각을 일깨운 아더가 중얼거렸다.
‘뭐지? 안나하고 밖의 기사분들이 잠들어 있네?’
안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밖을 지키는 기사의 수준은 5서클.
검기를 방출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기사였다.
그런 기사가 갑자기 잠이 와서 쓰러질 리는 없었고, 아더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려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음···. 실례가 안 된다면 누군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 말이오?”
“네.”
“난 흰 수염이라고 하오.”
“흰 수염이요?”
“별칭이지. 들어보셨소?”
아더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처음 들어보네요. 그것보다 정말 이름이 흰 수염이에요?”
“별칭이라 하지 않았소? 흠···. 그럼 이건 어떻소. 난 [하늘섬] 소속이오.”
아더가 또 한 번 고개를 저으려다 멈칫한다.
하늘섬.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조직의 이름이었다.
‘아니 들어 본 게 아니라, 알고 있네. 최악의 범죄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조직. 그래서 괴담이라고 불리는 비밀스러운 단체.’
그들의 정체도 정확한 숫자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설이라 불렸고, 괴담으로만 전해지는 비밀스러운 단체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눈을 치켜떴다.
“범죄자신가요?”
“범죄자? 흐음···. 뭐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 죄를 좀 짓긴 했으니깐.”
“왜 절 찾아오신 거죠?”
이 말에 하늘섬 소속 흑마법사.
흰 수염이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혹시 프라킬이라고 아시오?”
질문에 아더가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뒤늦은 탄성을 내질렀다.
“흑마법사 프라킬 씨를 말하는 건가요?”
“맞소. 흑마법사라 불리기 애매한 녀석이긴 하지만, 그 문턱은 걸쳐 있던 놈이지.”
“그분은 왜요?”
흰 수염이 쓰고 있던 중절모를 들어 올린다.
동시에 아더의 눈이 치켜떠졌다.
놀랍게도 눈앞의 노인의 안구에는 눈이 없었다.
그 탓에 아더가 눈을 끔뻑이는 사이, 흰 수염이 중얼거린다.
“날 피해서 수도로 도망친 놈이 갑자기 죽어 있더군. 어디 가서 칼 맞고 죽을 놈이 아니라 궁금해서 흔적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쪽으로 이어지지 뭐겠소?”
이 말과 함께 텅 빈 안구에서 불꽃이 일렁인다.
그 기이한 변화를 지켜보던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안 죽였다 하면 믿어 주시나요?”
흰 수염이 웃음을 터트린다.
“퍽이나 믿어주겠소. 바이에른의 작은 천사여天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