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23/25)

황제는 점잖게 말씀하였다.

‘용아. 윤조 아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바가 있느냐?’

황제가 말씀하실 때 곁에 앉은 윤제는 차를 마시고 있었고,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 공주는 간지러운 소리를 퍼트리고 있었다. 찻주전자를 내리고 있던 용아는 아무런 생각도 않았다.

황제의 말에 답한 것은 윤제였다.

‘부황.’

정확히 답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윤제는 부친에게 탓하는 부름을 건넸다. 그가 윤조를 황제의 품에서 빼앗아 데려가려 하자, 황제가 찻잔을 드는 체하며 교묘하게 몸을 틀어 당신 아들의 손을 외면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소리 없는 움직임을 보던 용아는 싱긋 웃고 말았다.

제 아비의 뻗어 온 손을 본 아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반겼다. 황제께서 조금 섭섭해하였고, 윤제는 승리자의 미소를 슬쩍 흘렸다.

윤제에게 오려는 윤조를 본 용아가 팔을 펼치고 손을 내어 보였다. 요즘 윤조는 다소 극단적이었다. 용아에게 가고 싶어 온몸을 사방으로 펼쳐 심하게 떼를 쓰거나, 용아를 보고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며 외친 후 슬금슬금 피하는 것처럼 용아를 외면하며 몸을 웅크렸다.

‘오아!’

소리를 외친 윤조가 평소와 달리 멀뚱하니 용아를 바라봤다. 황제는 당신 아들에게는 손녀를 순순히 내주지 않지만, 용아에게는 흔쾌히 건네주었다. 용아에게 옮겨 온 윤조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기분이 좋은가?’

용아가 의아해했고, 태자와 황제는 아이와 마찬가지로 마냥 즐거워했다. 웃으며 차를 마시던 황제가 다시 은근하고 점잖게 용아를 불렀다.

‘용아야.’

황제의 근엄한 얼굴은 고요했다.

‘예, 부황.’

‘윤조 아우에 대해서 가끔 생각해 봐 주겠느냐.’

다시금 윤제가 부친을 탓하듯 불렀다.

‘부황.’

용아는 미소를 짓다가,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몹시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아닌 척하는 황제의 얼굴을 보며 답했다.

‘일 년 뒤쯤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황제가 불분명한 약속에 아이처럼 활짝 웃으셨다.

‘고맙다, 용아. 이 아비가 잘하마.’

용아는 윤제의 입버릇 같은 말을 당신께 맞는 형태로 하는 황제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윤제가 따라하지 말라고 아이처럼 투덜댔고, 황제께서 따라할 거라며, 따라하면 네가 어쩔 테냐고 더 아이 같은 말을 내뱉으셨다.

둘의 시시덕거리는 싸움이 흥미로운지 윤조는 크게 뜬 눈으로 조부와 아비의 별것 없는 대화를 듣다가, 불쑥 소리쳤다.

‘오아!’

그리고 용아에게 웃음 가득한 뺨을 기대었다.

최근 용아는 부쩍 잠이 많아졌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고, 신경 쓰일 일도 없는데 자주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오늘도 중반을 들고, 잠시 산책하고 돌아와 책 몇 줄 본 게 다였다. 졸렸던 기억과 잠을 청한 기억이 날듯 말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급해 침상으로 파고든 것 같았다.

“……내가 또 잠이 들었나?”

정신없이 잠든 탓인지 뜬금없이 어제 있었던 일을 꿈으로 꾼 것 같았다. 딱히 피곤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잠을 자는지 통 알 수 없었다.

“마아!”

잠든 용아 곁에서 유모와 놀던 윤조가 깨어난 얼굴을 보고 소리쳐왔다. 용아가 자는 동안 내내 떨어져 있으면 함께할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해 유모들에게 특별히 부탁한 사항이었다.

유모모가 뒤숭숭한 얼굴을 향해 웃음을 건넸다.

“기침하셨습니까.”

용아가 머쓱함을 숨기지 못했다.

“……응. 윤조는 잘 있소?”

“잘 계시옵니다.”

유모모가 다시 웃음 지었다. 웃음이 그저 고마웠다. 용아가 웃는 아이와 유모를 따라 웃음 지으려 할 때, 문이 열리고 모장이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오던 모장이 깨어 앉아 있는 용아를 보고 반갑게 다가왔다.

“깨셨습니까.”

“응. 나, 언제 잠들었지?”

“한 시진 조금 못 되옵니다. 차를 올릴까요.”

침상 곁으로 다가온 모장이 잠든 사이 흐트러진 용아의 머리칼을 살뜰히 살펴 주었다. 한쪽으로 모아 넘겨 정리된 머리칼은, 더욱 잠들기 편한 모양새가 되었다.

“차가운 것으로.”

“마침 냉침해 둔 것이 있습니다.”

모장은 곧장 미리 준비해 둔 달고 시원한 차를 담아 가지고 왔다. 찻잔을 받으며 용아가 주먹 쥔 손으로 뒷목을 툭툭 두드렸다. 찻잔을 건넨 모장이 서툰 손을 물리게 하고 어깨며 목이며 등을 정성껏 어루만져 주었다. 넉넉한 손에 시원하게 만져지니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이상해.”

용아가 달콤한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요즘 잠이 잦은 것 말씀이십니까.”

모장이 다정하게 말했고, 용아가 말없이 끄덕였다. 말을 하면서도 등이며 팔을 만져 주는 여인의 손은 쉬지 않았다. 모장은 다시 잠들고 싶어 하는 뒷머리를 조심스레 매만지며 강권했다.

“고태의를 부르겠습니다.”

용아가 다시 한 번 끄덕였다.

동궁에 태의가 드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용아는 또 잠이 들었다. 고태의가 영화대에 들 때 윤제도 영화대를 방문했다. 용아가 잠에서 깰 때까지, 고태의는 얼결에 태자와 독대를 하게 되었다.

고태의가 평온하고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용아가 느릿느릿 눈을 떴다.

용아는 고태의의 묘하게 열렬한 환영 속에서 깨어나 진맥을 청했다. 고태의가 냉큼 용아의 손목을 짚었다. 한참 손목을 짚던 손가락들이 부드럽게 물러갔다.

침상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던 고태의가 더욱 몸을 낮추며 말을 올렸다.

“비전하, 감축 드리옵니다.”

“응?”

찻잔을 받으려던 용아가 맹한 소리를 흘렸다.

“회임하셨사옵니다.”

고태의가 태자와 태자비에게 차례로 예를 올리며 웃음 가득한 얼굴로 고했다. 용아가 받아 들려고 하던 찻잔을 그대로 물렸다. 윤제가 들고 있던 찻잔을 가만히 내렸다.

“전하, 비전하. 경하 드리옵니다.”

모장과 등우, 유모모가 황급히 예를 올렸다. 예를 올리는 얼굴들에 웃음이 넘쳤다. 방 안의 모두가 기뻐하는데, 용아와 윤제만 멍했다.

고맙다, 일어나라, 명한 것은 윤제였다. 그나마 멍한 것을 조금 떨쳐 낸 윤제가 모두를 물러가게 했다. 정적을 깬 것도 윤제였다.

“그땐가.”

남자의 말에 용아가 굳힌 표정을 구겼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어, 어떡해요…….”

용아는 흡사 울 것 같았다. 용아의 눈치를 보며 윤제가 말을 이었다.

“어떡하…… 하다니요. 낳아야…… 하지요. 제발, 낳아 주십시오, 비전하. 이 형이 정말 잘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곧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할 태세였다. 윤제의 간곡한 말에 용아가 짧은 폭력을 사내의 어깨에 휘둘렀다. 윤제가 유난히 아파하며 용아의 곁으로 붙어 앉았다.

“저는 둘째는 무섭단 말입니다……!”

진솔하고 걱정 가득하여 더 애틋하고 귀여운 말이 울렸다. 윤제가 울상 지은 얼굴을 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남자에게 갑자기 품어진 얼굴이 벗어나려 몸부림치다 이내 넉넉한 품에 기대었다. 윤제가 안고 있는 용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이 진짜 잘할게.”

“형이 뭘 잘해…….”

“형이 잘해 준다니까. 정말이다, 용아. 사랑해. 그런데, 왜 이번엔 입덧이 없지?”

용아를 꼭 끌어안은 채 윤제가 속살거렸다. 귓가에 번지는 입에 발린 달콤한 말에 웃는 듯 마는 듯하던 용아가 남자의 의문에 팔꿈치를 휙 휘둘렀다.

윤제는 다급히 아니, 없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라고 했지만 말하는 얼굴에 미묘한 섭섭함이 잔뜩 묻어났다.

“윤제 형, 소제한테서 떨어지십시오.”

“용아.”

“스무 걸음은 너무 많으니까 열 아니, 다섯 걸음 떨어져 있으세요. 떨어져 있다가 이 소제가 이것이 필요하다 하면 바로 대령하십시오.”

“꼭 그래야 돼?”

“꼭 그래야 돼요.”

용아가 옆에 바싹 붙어 있는 남자를 휙 밀쳤다. 윤제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게걸음으로 다가왔다.

용아는 애잔하고 귀여운 모습에 픽 웃고는, 발끝으로 부군을 단호히 원래 자리로 밀쳐 냈다.

둘째가 온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지만, 황망하고, 기묘하게 화도 나고, 우울하면서도 좋은데,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만 가지 감정이 뒤섞여 무언가 토로하고 싶었으나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격렬한 잠이 몰아쳐 왔다.

용아는 멀찍이 밀어 두었던 윤제를 가까이로 불러 따듯한 무릎을 베고 잠을 청했다. 잠으로 파고들던 용아는 문득 윤조가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의 앞에서 황족의 힘을 보이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작은 아이의 무언가 간절히 알려 주려던 외침이 뜻하는 바가 혹 동생이 있음을 알려 준 것은 아닐까 싶었다.

용아는 잠에 들며 윤조가 어서 곁으로 와 놀아 주었으면 좋겠다 속삭였다.

용아는 내처 잠만 잤다. 둘째에 대한 두려움, 두 번째 임신에 대한 걱정, 황망함, 온갖 감정이 다 솟는 복잡함을 토로하거나 떠올릴 새가 없었다.

용아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그때.

“폐하는?”

정수궁으로 태자가 들이닥쳤다. 황족의 위엄에 놀란 어린 태감이 문을 열어젖혔다. 정수궁 안에는 황제와 공주, 진양군과 좌첨이 있었다.

윤제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딸아이와 놀고 있는 부친을 쳐다보았다. 천자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기에 불온한 구석이 많았다. 무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황제는 태자의 불충과 불효를 탓하지 않고 반가이 맞아 주셨다.

“오, 왔느냐.”

“어바!”

좌첨과 진양군은 가벼운 몸짓으로 예를 대신했다.

“강녕하십니까.”

윤제는 예를 턱짓으로 받고, 진양군과 황제 사이에 있는 윤조를 빼앗아 안으며 벌러덩 누웠다. 그가 누운 채 팔을 쭉 뻗어 올리자, 윤조가 행복한 소리를 내질렀다.

문밖에서 전하, 잔뜩 낮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우였다. 눈치를 보는 음성을 윤제는 모르는 체했다.

웃는 아이를 따라 웃은 윤제가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듯, 윤조를 품에 안고 옆으로 세워 누운 몸을 웅크렸다. 윤조는 코앞으로 온 아비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아무 곳이나 찔러 대려 했다. 윤제는 자신과 꼭 닮은 얼굴의 귀여운 행패에 키득키득 웃으며 당해 주었다.

태자가 공주와 어울려 주는 방종한 순간을 세 사람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황제가 목을 울려 윤제를 일으키려 했다. 윤제는 코코코귀! 따위를 하며 딸과 노느라 정신없었다. 진양군과 좌첨이 나서려고 했고, 황제가 말렸다.

“모두 물러가라.”

황명에 두 사람이 표정을 가라앉히며 물러났다.

“……전하…….”

진양군과 좌첨이 나서기 위하여 문을 열자, 열린 문틈으로 등우의 조심스럽고 다급한 부름이 스며들었다.

“전하 없다, 전해라.”

윤제가 불퉁하니 말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전히 방종한 모양새였다. 제 아비 무릎에 앉아 등을 널찍하게 기대앉은 공주가 다가온 황제의 알은체에 코를 구기며 웃었다.

“아범아.”

황제가 진지하게 윤제를 불렀다.

“아범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그러면 태자 전하라 불러드릴까.”

윤제가 반항기 소년처럼 요구했다.

“소자도 이름 불러 주십시오.”

“윤조 아범을 아범이라 부르는 게 무어가 나빠. 윤아, 너 딸내미 질투하는 거니? 공주야, 너희 아범 보아라. 유치하십니다, 철이 덜 드셨습니다, 혼내드리세요.”

윤제는 팔을 교묘히 움직여 황제가 윤조와 노는 것을 방해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부황.”

“무슨 짓이냐니. 윤아 너야말로 아비에게 말버릇이 그게 무어냐. 공주가 듣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느냐. 윤조야, 너희 아비 못났어요. 자식까지 보았는데 이리 철이 없어서 어쩐답니까. 부왕, 그러면 아니 되십니다, 하고 우리 윤조가 똑똑하게 알려 주세요.”

윤제가 대놓고 몸을 홱 돌려 황제와 윤조를 단절시켰다. 황제가 버럭 하려 했다.

“공주가 듣고 있습니다, 부황.”

윤제가 선수를 치듯 말했다.

“짐이 무어라 하였는가.”

황제가 분노를 억누르는 게 선명한 얼굴로 대꾸했다.

“정전 회의는 어찌 안 나오셨습니까.”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하거라.”

“부황.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정전회의, 편전회의와 정례 전부를 소자에게 맡기시다니요. 국경과 군사까지 모두 소자의 소관인데. 허면, 부황께서는 무엇을 하십니까. 황친회와 금군을 제외하면 전부 소자의 일이옵니까. 지지난 밤에 금군마저 소자에게 일부 권한을 넘겨주지 않으셨습니까.”

윤제가 조용한 얼굴로 진지하게 화를 내었다.

“태자도 이제 다 컸다. 배울 것도 다 배웠지. 네가 스스로 할 때가 되었어.”

황제가 의뭉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윤제가 더욱 다잡아 앉으며 부친을 다그쳤다.

“소자를 불효자로 만들려 하십니까. 이것이 양위와 무엇이 다르옵니까.”

“불효라니요, 태자. 윤아 네가 할 일을 제대로 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 효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계속 힘 써다오. 네가 하는 거 거개 다 괜찮았다. 짐이 바빠서 말이다.”

“바쁘시다니요.”

윤제의 물음에 황제가 아들의 품에 안긴 손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부황, 소리 없는 외침이 울리는 듯했다. 황제가 날랜 몸짓으로 공주를 품으로 옮겨 오며 담담히 말했다.

“오늘부터 네가 황제라고 생각해라.”

황제가 선언했다. 황제의 고백은 갑작스러웠다. 윤제가 오만상을 썼다.

“부황.”

“왜. 선위해드릴까. 그러면 되겠니?”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윤제가 재빨리 태도를 바꾸었다.

“선위해 주마.”

황제가 다시 권했다.

“소자가 진정 잘못하였습니다.”

황제의 거듭된 선위 협박에 윤제가 방탕하던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무릎을 꿇는 윤제를 본 황제가 오만하게 웃었다.

“그저 조용히 물려주면 감사히 받을 일이지 말이다. 응? 짐이 선위한다고 해, 불효자를 청하다 피를 토혈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말이야. 잘하리라 믿는다. 오늘부터 태자 너의 천하다.”

황제가 쐐기를 박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윤제는 밀실에서 비공식적인 선위를 받았다.

“어바!”

윤조가 무엇을 아는 것처럼 온몸을 들썩여 부친의 비공식 황제 즉위를 축하해 주었다. 황제가 이것 보라며 윤조가 좋아하니까 다 좋은 거란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윤제를 웃게 했다.

황제가 웃는 아들을 향해 마주 웃었고, 윤조가 웃는 부친과 조부를 따라 격하게 웃었다.

세 사람의 웃음이 한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황제와 태자의 배려로 태자비는 황가의 일정에서 모두 빠졌다. 대신 일주대에서 홍문의 일족을 따로 보았고, 황족 역시 개별적으로 요청이 있을 때 선별하여 마주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황제의 정무를 보는 것과 다름없는 윤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용아는 막달이 가까워올 때까지 윤조와 노는 시간 외에는 내내 잠만 잤다.

서로 깨어 있는 시간이 다르니 다소 소원해졌다. 윤제는 윤제대로 바빠서, 용아는 용아대로 힘들고 고민이 많아 모호한 어색함이 쌓여 갈 때.

황제께서 정천궁 침전과 정수궁을 비우고, 비교적 동궁과 가까운 함복궁으로 옮기겠다 천명하셨다. 더불어 태자에게 금당대를 비우고 정천궁 침전을 쓸 것을 명하셨다.

금당대는 진민 공주에게 하사되었다.

황친들과 대신들은 황가의 대대적인 이동에 난색을 표했다. 태자 또한 동궁에서 정천궁으로 옮겨 가는 것을 어려워했다. 황제는 모두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문안을 온 태자비에게만 특별히 내조에 머물고 싶은 곳을 골라 보라 권했다.

황제는 친히 태자에게 사흘간 정무를 쉴 것을 명하고, 태자비에게 내조를 보여 주라 명했다. 황친들은 제법 배가 나온 것이 티 나는 태자비께 어려운 하명이시라 말리려 했으나, 황제는 모르쇠를 다시 실천해 보였다.

윤제는 내조의 소개를 위해 새벽부터 영화대로 찾아와 기다렸다. 잠에서 깨어난 용아에게 남자가 불쑥 고백했다.

“사실, 이 형이 황제다.”

실로 엄청난 고백이었다. 용아가 잠기운이 덜 가신 얼굴에 활짝 웃음을 퍼트렸다. 그리고 깨달은 소리를 내뱉었다.

“……아…….”

한순간에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알았느냐.”

한동안 조금 어색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둘은 붙어 앉아 체온을 주고받았다. 윤제의 말에 용아는 다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조금 끄덕이다가 저었다.

“그런 것인가 잠시 의심한 적도 있습니다만, 생각할 여력이 없고, 설마 그럴까 해서 잊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황상이 되셨습니까.”

뒷말은 잔뜩 낮춘 목소리로 건넸다.

“다섯 달도 넘었다.”

윤제가 힘이 다 빠진 저음으로 답하며 옆몸을 붙이고 있는 용아에게 더 깊이 기댔다. 용아가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내처 일만 했을 가여운 이를 다정히 쓸어 주었다. 윤제가 더욱 가련한 체하였다.

거의 반년 만에 드디어 사흘 쉬게 되었다고 모두 너의 은덕이라고, 존경이 흠뻑 묻어나는 목소리가 속닥였다.

“내조는 안 봐도 됩니다.”

“보러 가자.”

용아가 고개를 젓다가 느닷없이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속삭인 입술에 다음 순간 남자의 입술이 깊이 내렸다.

“나도 보고 싶었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입술이 떼어지고, 용아가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부황께서 금죽헌이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이원 옆에 있으니 조용할 것이고, 정천궁과도 그리 멀지 않고, 동궁과도 가까운 편이라 저도 그곳이 좋은 것 같습니다.”

“네게 금죽헌을 주신다던?”

윤제가 무언가 커다란 배신을 당한 얼굴로 물었다. 의아하고 의심 드는 게 있었지만, 용아는 가만히 끄덕여 답했다.

“예.”

“너를 정말 아끼시는구나. 내가 달라고 할 땐 백 년은 멀었다 했는데, 절대 안 된다던 곳을 네게 주셔. 용아, 이 형 말이다. 황제가 되긴 했는데, 우리 집안 최하 순위야. 그렇지 않느냐?”

윤제의 투덜거림에 용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 짓던 입술이 투덜대는 입술을 깊이 머금었다가 물러났다. 윤제가 멍한 얼굴로 입맞춤을 받다가, 떨어져 나가는 입술을 따라가 더 깊이 입술을 얽었다. 한참 동안 젖은 살 뒤섞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보고 싶었습니다.”

용아가 다시 고백했다. 윤제는 고백하는 얼굴이 달콤한 무엇이라도 되는 양 매만지고 연이어 입술을 내려 머금고, 입술 도장을 찍어 댔다. 간지러움에 키득대는 용아를 남자가 단단히 안아 왔다. 귓가로 고요한 저음이 다시금 내렸다.

“나도 보고 싶었다.”

용아가 불러온 배를 팔로 안으며 속삭였다.

“아기도 보고 싶습니다. 공주 때와 이번에 똑같은 게 있다면 이것 같습니다. 누구 얼굴이 이토록 궁금한 것은 태어나 처음입니다. 둘째도 윤공자 형님 닮았을까. 아니면 둘 다 닮았을까.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볼 수 없는 게 너무 이상합니다.”

“…….”

흐뭇한 얼굴로 속닥이는 용아를 보던 윤제가 불현듯 표정을 달리했다.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이를 너그럽게 응시하던 시선은 빤히 바라보는 모양으로 바뀌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은 집요하기까지 했다.

“왜 그리 보십니까.”

“아니다.”

윤제가 덤덤히 말했다.

“빤히 봤잖아요?”

“응, 봤다.”

용아의 따져 묻는 말에 윤제의 표정이 묘하게 흩어졌다.

“뭡니까.”

대답을 청하는 얼굴을 본 윤제가 표정을 다잡았다. 윤제의 시선이 용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용아는 집요한 시선에 괜히 부끄러워지는 듯했다.

“세상에 태어나 누구 얼굴이 엄청나게 궁금했던 적이 나한테 한 번 더 있었다.”

“왜 저를 그리 보세요.”

“이렇게 생겼구나. 나의 정혼자이고, 나의 신부이고, 나의 모든 것이 된 존재. 예쁘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를 거다.”

윤제가 용아를 깊이 당겨 안았다. 남자의 난데없는 말에, 용아는 긴 시간을 돌고 돌아서 그와 마주한 순간을 떠올렸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애틋함이 오르려 할 때, 윤제와 함께 단단히 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배 전체가 꿀렁, 울었다.

용아는 윤제가 옆얼굴을 따라 입 맞추는 걸 다 받고, 그가 웃음을 가라앉히는 것을 지켜본 후에 말했다.

“윤제 형.”

“응.”

“저, 아이 낳으러 가야겠습니다.”

용아는 말을 건네고서야 잠시 후회했다.

“……!”

자신이야 한 번 경험이 있고, 아기가 나오려는 진통의 전조를 몸으로 느끼며 가늠하고 있지만 마주하고 있는 이는 아니었다. 윤제가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을 본 것처럼 당황하여 용아를 다독이려 했다. 다독임이 필요한 것은 남자였다.

“괜찮습니다.”

용아가 차분히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안아 주…….”

윤제가 어찌할 바 몰라 하며, 곧장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한 급박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용아는 안고 이동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호사는 누려도 괜찮지 싶어 무심히 말했다.

“안아 주실 것은 없는데, 그러고 싶으면 안아 주십시오. 어디로 가셔야 되는지 아시죠? 뛰지 마시고, 천천히 가 주십시오.”

윤제가 재빠르고도 조심스럽게 용아를 안아 올렸다. 용아는 태자에게 안겨 이동하며 상궁과 태감을 불러 명을 내렸다. 고태의를 들이고, 하후가 산파들에게 출산 준비를 명하고, 여의원에게 기미를 끝내 둔 하후가의 약제를 들이게 하라는 명도 침착하게 덧붙였다.

산실에 들 수 없어 문 앞에서 용아를 내린 윤제는 안타까움에 쩔쩔 매었다. 용아는 아직 괜찮다, 이따 뵙겠다 인사를 건네고, 열린 문 안으로 차분히 걸어 들었다.

산실의 문이 닫혔다.

새로운 얼굴을 만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산실을 채우는 아이의 가녀린 울음이 점점 커져 갔다. 탈력하여 뒤로 넘어갔던 용아가 가누지 못하던 목을 겨우 움직여 아이를 찾았다. 아이를 찾는 귀로 문밖에서 거세게 우는 윤조의 소리가 들렸다. 윤조를 달래는 윤제의 속닥임과 황제의 애타는 부탁이 울리는 형체로만 귀에 닿았다.

“왕자님이십니다.”

여의원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빨갛고 조글조글한 아이를 용아의 품에 누여 줬다. 싸개에 싸인 아이는 몹시 자그마했다. 아이를 본 용아가 웃음을 퍼트리며 말했다.

“백화.”

“예?”

“백화 아들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용아는 그냥 알 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동족인 백화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을 한 번도 특별하다 여겨 본 적이 없는데, 지금 이 순간 어느 때보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용아는 잠들어 있는 아이를 향해 속삭였다.

“아가는 누구를 닮았느냐.”

잠든 아이는 답해 주지 않았다. 윤조 때와는 달리 아이 얼굴에서 누구의 얼굴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윤제를 닮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닮은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 아가 얼굴이 낯이 선대.”

용아는 궁금해하다 품에 안긴 존재의 숨소리에 깊은 웃음을 흘렸다. 품에 안은 존재는 말도 못하게 사랑스러웠으므로 분명 사랑스러운 누군가를 닮았을 터였다.

“누구를 닮으셨을까.”

아이를 향해 소곤거리던 용아 역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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