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24/25)

부드럽고 어린 목소리가 엄격하게 말했다.

“맘마.”

엄중한 말에 용아가 박수를 쳤다.

“우리 윤조 잘했어.”

“으우웅.”

윤조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뜻 같았다.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눈짓을 하자, 어린 얼굴이 용아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는 무척이나 작았다.

황친은 물론, 대소신료까지 나서서 황족의 힘을 지닌 공주와 백화로 태어난 왕자를 분리하여 양육해야 한다고 했으나 용아는 개의치 않았다. 황제와 윤제도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기색이었지만, 용아는 딱 잘라 함께 키울 것이라 알렸다.

황제는 그리하라 하셨다. 윤제는 문제없는 것이냐 묻고, 용아에게 문제없다는 답을 듣고 그러면 그러자고 했다.

“뭐가 잘못되었어?”

용아가 웃으며 물었다. 윤조가 꺄하,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누나아.”

“우리 윤조 누나예요?”

“웅.”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아이는 신비하기까지 했다. 용아가 밥 먹는 윤조의 머리에 입술을 촉촉, 내렸다. 윤조가 아름다운 법랑을 탁탁 두드리며 맘마, 다시 엄숙히 말했다.

“나는? 나는 뭔 줄 알아?”

용아가 보채듯 말했다. 짧고 귀여운 손가락이 용아를 가리켰다.

“융아!”

용아를 부른 윤조의 얼굴은 당당하였다. 용아라는 이름을 융아라고 발음한 것 같았다.

아니야.

―라고 말하려던 용아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용아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윤조가 그를 그리 부를 순 없었다. 누가 애한테 이런 걸 가르쳤나 불만을 떠올릴 때, 문이 열렸다. 윤제였다. 안으로 들어오는 윤제를 본 윤조가 반가운 얼굴로 팔을 휘저으며 외쳤다.

“혀엉!”

범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

용아는 자신과 태자의 호칭을 윤조가 따라 하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윤제가 웃음을 터트리며 윤조를 안아 들었다.

“형, 아니야.”

“아이야?”

윤조는 윤제의 품에서 슬그머니 나와 아비 다리 위에 의자에 앉는 것처럼 오도카니 앉았다. 윤제는 윤조의 그릇을 챙겨 들었다.

윤조가 제 그릇을 윤제가 쥐는 걸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한술 떠 건네자, 들썩이던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받아먹었다.

“냠냠해.”

윤제가 귀여운 말을 잘도 내뱉었다.

“맘마아.”

윤조는 존재만으로 귀여웠다.

“다들 다녀가셨느냐.”

윤제가 용아 품에서 잠을 청하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예.”

이번에도 아기의 이름은 다툼거리였다. 둘째는 예상치 못한 이를 닮았다.

‘주, 주아?’

황제께서 처음으로 둘째를 보던 날, 황제와 총관태감 좌첨은 한참을 아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 서로를 바라보고 다시 아이를 오랫동안 보았다.

오른쪽 눈 아래에 눈물점이 있는 아기는 돌아가신 공후를 닮았다. 눈물점의 위치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눈매를 그대로 빼닮았다고 했다.

작고 작은 아이가 연약한 것은 당연한데, 유독 더 여려 보이는 것 역시 공후를 닮아서라고 하였다.

황제는 작은 아이의 곁에 감히 다가오지 못하겠다는 듯 지켜만 보다 가셨다. 좌첨 또한 감상에 빠진 얼굴로 작은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황제와 좌첨은 매일 찾아와 기꺼운 얼굴로 아이를 보고, 서로를 위로하며 돌아섰다.

황제와 제관부 대신들은 공후를 닮은 왕자에게 공후의 이름자 중 하나를 물려주고자 했고, 황족과 신료들은 반대했다.

공후의 이름자 중 하나를 물려줄 경우, 공후와 왕자의 이름이 너무 비슷해진다는 게 황족과 신료들의 반대 이유였다.

“애기.”

윤제 품으로 파고든 윤조가 용아에게 안겨 있는 아기 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또박또박 말했다.

용아는 알 수 없지만, 아기에게서 독특한 체향이 난다고 했다. 윤제의 설명에 따르면 백화가 개화 이후 주기에 퍼트리는 향과 다르면서도, 완전히 관계없다고 할 순 없는 체향이라 했다.

용아가 그저 아이 얼굴만 보고 백화인 것을 안 것처럼, 황족 사내는 아이를 마주하면 부드러운 향을 맡을 수 있다 하였다.

후족 출신인 자신의 짝이 퍼트리는 기척 외에 백화의 체향과 무관한 황제와 윤제 역시 아이의 체향을 감지할 수 있었고, 두 사람은 그래서 무척 신기해했다.

윤조 역시 아기 냄새를 맡을 수 있는지 이따금 다급히 달려와 어린 짐승처럼 코를 울리며 좋아했다.

“둘째는 민조가 될 것 같다.”

“부황께서 양보하셨나 봅니다. 민조야. 우리 민조 이름은 민조구나. 윤조야, 애기 이름 민조래. 민조야, 불러 봐.”

용아의 권유에 윤조가 긴장한 얼굴을 했다.

“애기.”

비장한 얼굴이 엄격하게 말했다. 윤제와 용아는 순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윤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웃는 얼굴을 보다가 웃는 얼굴을 따라서 배시시 웃었다.

아이의 웃음을 본 용아와 윤제의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살그머니 미소하던 얼굴에 웃음이 가득 퍼졌다.

다정한 웃음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황제는 태자의 2자를 항왕으로 봉하셨다. 태자의 2자, 단혜항왕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황족과 제북 일족은 갓난쟁이에게 봉작이 내려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일부 대신들은 황가에 자손이 귀하다 하지만 너무 이르게 봉작을 내리는 게 저어했다.

공주와 왕자가 동궁에 전각을 하사받고 큼에 따라 후사에 대한 말이 조심스레 오갔다.

황제와 태자, 황족들은 공주와 왕자 중 다음 제좌를 잇는 것은 진민 공주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와 달리, 조정은 단혜항왕이 제좌를 잇는 것에 무게를 실었다.

제북은 양손에 떡을 쥔 양 너그러운 얼굴로 어느 분이 제좌에 올라도 잘하실 것이라 덕담을 건넸다.

조정의 대내신들은 여자가 제좌에 오르는 것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여겼다. 반면, 황족들은 황족의 힘이 없는 백화가 제좌에 오르는 것을 땅이 꺼지는 것이라 여겼다.

모든 황족들은 어떤 대내신보다 항왕을 어여뻐 했기에 조정 관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분을 좋아하지 않으시는가? 라는 조정의 물음에, 황친들은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너무나 좋아한다 답하며, 이어 공주께서 발을 한번 구르시면 왕자께서 울음을 터트리며 도망가실 것이라는 고약한 말을 덧붙였다.

조정은 그것이 황족의 힘을 과신하는 황친들의 오만함이라 지적했다. 황족들은 자신들의 말에 그른 게 없고, 거짓도 없다 거만을 떨어 댔다.

용아는 한 살과 두 살밖에 안 된 꼬맹이들을 두고 할 말이 아니라 여겼다. 한심한 작자들이었다.

“부황.”

태자와 태자비는 저녁 문안을 온 차였다.

“이 아비에게 할 말이 있느냐.”

황족과 조정의 유치한 싸움이 은근히 격해지는 중이었다.

“셋째는 한…… 2, 3년 후에 보고 싶습니다. 부황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용아의 말에 고심한 흔적이 묻어났다. 옆에 앉아 있는 윤제가 시선만 옮겨 용아를 재빠르게 돌아봤다. 상석에 있던 황제가 친히 예를 올리고 있는 용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용아야. 셋째를 낳을 계획이 있다는 것만으로…… 이 아비는 황가의 승리자로다! 제좌를 잇는 게 중요하다지만, 공주가 있으니 너에게 따로 부담 줄 것 없지 싶었는데. 이미 다복한 가족을 이루었다만, 더더 다복해지면 좋은 것이지. 암, 그렇지. 그리 생각해 주어 고맙다, 용아야. 이 아비는 너무 설레는구나.”

첫째 윤조와 다르게, 둘째 민조는 긴 시간 아무도 모르게 복중에서 홀로 자랐기에 순탄한 임신과 출산이었다. 예민했던 처음에 비하면 두 번째는 평온하였다.

그러나 연년생을 낳은 용아는 알게 모르게 분노했다.

연이은 임신과 출산으로 시간이 쏜살 같이 지나갔다. 거기다 겨우 말문을 뗀 윤조와 신생아인 민조를 함께 돌보니 이따금 하늘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었다.

윤조만 돌볼 때도 정신이 없었는데, 더 어린 민조를 보느라 윤조에게 소홀할까 미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한편으론 처음이라 모든 게 조심스럽도 윤조에 비해 비교적 수월하게 민조를 돌보기에 제대로 못해 주는 것이 아닐까 또한 미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분노한 용아는 밤마다 철벽 방어를 쳤다.

한동안 용아는 윤제에게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최근에 들어서야 온갖 가련한 체하는 미인계에 속아 넘어가 손도 얽고, 입술도 얽고, 다리도 얽었다.

윤제가 잔뜩 낮춘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나도 설렌다.”

용아가 옆으로 긴 눈으로 힐끗 곁을 살피고 듣지 못한 척했다. 지난밤 실수를 할 뻔했던 것은 잊어 달라는 듯한 수줍은 미소를 건넸다.

용아는 딴 곳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3년 뒤라니까요.”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언제면 어때.”

황제의 물러가 보라는 명에 윤제가 기쁘게 용아의 손을 붙잡았다. 손깍지를 껴 오려는 커다란 손을 용아가 밀어내려 했고, 윤제가 울적한 체하며 버텼다.

용아는 피식 웃으며 단단히 얽은 손을 붙잡고 함복궁을 나섰다. 정천궁으로 가야 할 윤제는 용아의 손을 잡은 채 금죽헌으로 향했다.

자연스레 저녁을 함께했다.

차를 마시던 윤제가 식사 내내 붙잡고 있었던 용아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모호하게 흐려지는 분위기에 용아가 손을 빼려 하자, 셋째 가지는 연습을 미리 해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걱정 가득하면서 웃음 어린 말이 울렸다. 용아가 기겁하며 아저씨처럼 왜 그러냐고 했고, 한바탕 술래잡기를 했다.

결국 술래는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

깊은 밤이었다. 윤제는 어설피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품에 잠들어 있는 얼굴을 보고 기분 좋은 웃음을 퍼트렸다. 잠든 뺨에 도둑 입맞춤을 하려던 남자가 멈칫했다.

“…….”

윤제는 기척 없이 몸을 일으켰다. 잠든 이를 내려다보던 윤제가 사방을 유심히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용아를 돌아봤다.

윤제가 인상을 쓰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태동.

남자의 후회는 복중 아이보다 느렸다.

태동이었다.

아주 강력하고, 세상에 제 존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알리는 성격 급한 태동이었다. 어찌할 바 몰라 숨죽인 채 눈치를 보고 있던 윤제는 우선 침의를 챙겨 입었다. 잠들어 있는 용아에게도 능란한 움직임으로 침의를 챙겨 입혔다.

“있느냐.”

문을 향해 윤제가 최대한 조용히 말했다.

“명을 받드옵니다.”

문밖에서 착 깔린 음성이 들려왔다.

“태의를 들여라.”

“따르옵니다.”

확인할 것도 없지만, 확인하기 전까지 믿고 싶지 않았다. 조마조마한 시간이 흘렀다. 등우가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태의가 왔음을 알렸다.

윤제는 손수 문을 열어 고태의를 황족의 힘으로 제압한 후 손짓으로 진맥하는 시늉을 해 보이고, 잠든 용아를 가리켰다.

고태의는 눈치가 제법 있는 자였다.

태자께 무엄하게도 머리를 끄덕여 보인 고태의는 그림자처럼 움직여 용아의 맥을 짚었다. 고태의가 진맥을 완료하고 태자의 곁으로 다가왔다. 윤제는 모두를 데리고 내실에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문이 닫힌 걸 거듭 확인한 후에야 윤제가 말했다.

“어떠하냐.”

고태의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답했다.

“경하드리옵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태동이 이만한데 예상이 틀릴 리 없었다. 틀리기 바라는 것이 헛댄 기대였다.

“수고하였다. 당분간 태자비에게는 알리지 마라. 황궁 안에 이에 대해 아는 이가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알겠느냐.”

“신, 명을 따르옵니다.”

잔뜩 굳은 얼굴로 예를 보이는 태의를 향해 윤제가 그만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등우가 고태의를 배웅하고 윤제의 곁으로 돌아왔다.

“…….”

윤제는 마지막으로 본 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등우는 윗몸은 낮추고 있었으나, 태자를 향해 뚫어져라 올려다보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윤제가 말없는 시선에 대고 말했다.

“왜.”

등우가 눈을 내리깔며 아뢨다.

“일찍 이실직고하시는 게 그나마 낫지 않을까요.”

“닥쳐.”

윤제의 자르는 말에 등우가 움칫했다.

“예…….”

한동안 멍하니 넋 놓고 서 있던 윤제가 주저앉으며 팔로 머리를 감쌌다. 윤제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흠칫했던 등우가 웅크려 앉은 반듯하고 너른 등을 보고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나, 어떡하지.”

“서로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말로 잘…… ……잘하실 수 있겠어요? 세상엔 하얀 거짓말이라는 좋은 것이 있잖습니까. 고태의는 노복이 확실하게 해 두었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중경에 머무는 황친 모두를 정전에 들라 해라.”

“명을 따르옵니다.”

“앞으로 황족이 황성에 입도하면 태자비와 격리하고 내게 무조건 먼저 데려오도록 해라. 용아가 3년 뒤라고 그리 강조했는데…… 나, 어떡하지. 한겨울에 석고대죄 할까. 그러면 좀 불쌍해 보이지 않을까.”

윤제의 다급한 말에 등우가 구긴 얼굴을 쓸쓸히 내저었다.

“그런 걸로 되겠습니까. 비전하가 기분이 엄청, 엄청 좋을 때 그때를…….”

등우가 부정적인 말에 실망하는 윤제에게 혼신을 다해 말하는 중이었다. 윤제가 떠드는 등우의 입을 다물게 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둠 저편에서 정결한 목소리가 울렸다.

“전하?”

윤제가 등우를 내팽개치듯 밀치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방으로 돌아간 윤제가 문을 열며 무심함을 가장했다.

“깼느냐.”

용아는 깨어나 침상에 앉아 있었다.

“어디에 계셨어요. 이거 전하가 입혀 두신 겁니까.”

묻는 얼굴에 웃음이 감돌았다.

“잠깐…… 응. 내가 입혀 두었는데…….”

윤제는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시선과 떨리는 눈으로 용아를 바라봤다. 용아가 침상 끝에 앉아 있는 남자를 안으로 끌어당기며 감사를 표했다.

“송구합니다.”

“뭐얼…….”

용아는 묘하게 의뭉스레 구는 윤제를 의아하게 봤지만 잠결인 탓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용아가 끌어당기는 대로 끌려간 남자가 살며시 기대 오는 이를 주춤거리다 단단히 끌어안았다. 서로 웃는 얼굴로 보려는 순간, 윤제가 움칫 어깨를 굳혔다.

태동이었다.

“윤제 형?”

용아가 잠시 꼼짝 않는 윤제를 걱정 가득한 얼굴로 불렀다. 심장이라도 걷어차인 것처럼 크게 움칫했다가 일순 숨조차 쉬지 않은 윤제는 다시 숨을 내쉬며 아무렇지 않은 체하려 했다.

“……!”

억지로 웃으려던 윤제가 흡, 숨을 굳혔다. 강한 충격이 연이어졌다. 아주 강력한 태동이었다. 윤제가 힘겹게 숨을 쉬었다. 태동의 근원을 품은 이가 힘겹게 숨을 내쉬는 윤제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다.”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태의를 부르는 게 어떠세요.”

용아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괜, 괜찮아.”

“걱정돼.”

용아가 연신 남자의 굳어드는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태동은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윤제는 찬물을 기습적으로 순간순간 뒤집어쓰는 듯하고, 가슴이 치이는 고통을 예고 없이 받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그는 자신을 다정히 쓸어 주는 손에 흠뻑 기댔다.

“용아, 사랑해.”

윤제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용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뭡니까. 저한테 뭐 잘못하셨습니까. 태자 전하가 응석 부리시는 겁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잠시 머뭇거렸던 윤제는 막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용아를 단단히 안고 더욱 가련한 체하였다.

“좀 아파.”

용아는 하얗게 언 잘생긴 미인에게 약했다.

“여기요?”

따듯한 손이 등을 어루만져줬다. 용아와 닿아 있으니 한결 나았다. 용아가 태동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인지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고통을 완전히 막아 주지는 못했다.

“…….”

힘들어하는 윤제를 보며 용아가 안타까워했다.

“괜찮으세요? 윤제 형, 태의를…….”

“용아.”

“말씀하십시오.”

윤제가 용아를 단단히 안은 채로 고백했다.

“우리 셋째 생겼다.”

용아가 벌떡 일어났다. 용맹한 몸짓이 홍문의 사내다웠다. 윤제는 웅크리고 있던 몸을 적당히 더 구기고 무릎을 꿇어 예의를 힘껏 차렸다. 처분만을 기다리겠다는 몸짓이었다.

“뭐!?”

용아가 왈칵 소리쳤다.

우르르.

바깥에서 거센 소낙비가 오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도망을 치는 겁에 질린 발소리들이었다. 용아도 윤제도 멈칫했다. 윤제가 얼어붙은 얼굴로 느릿느릿 말했다.

“나 아니야…….”

용아가 황망한 표정으로 제 몸을 내려다봤다.

“……저인가…… 봐요…….”

당황으로 띄엄띄엄 말하는 용아를 윤제가 가만히 올려다봤다. 둘은 서로를 응시했다. 바라보는 얼굴 사이로 소리 없는 말이 오갔다.

이거 뭐예요? 모르지.

용아는 셋째를 임신한 것보다 이 상황에 더 놀랐다.

“사랑해.”

윤제가 최대한 예쁘고 잘생기게 웃으며 고백했다.

“나도, 사랑…… 잠깐. 지금 이게 무슨…….”

용아가 혼란하여 얼결에 마주 고백을 하려다 멈췄다. 윤제는 경험해 본 바 없는 낯선 상황에 얼떨떨해하는 얼굴의 빈틈을 유려하게 파고들었다. 놀란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다정히 쓸어 주며 고백하고, 고백했다.

“사랑해.”

용아는 이 괴이한 상황에 대해 비답을 내려 줄 이를 찾는 모양이지만, 윤제가 예상컨대 이러한 상황을 경험해 본 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용아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퍽 미안했지만, 윤제는 이 모든 것이 좋기만 했다. 고백을 쉴 새 없이 내뱉으며 놀라 굳어 든 입술과 뺨에 입을 맞췄다.

“하지 마십시오.”

용아가 맥없이 거절했다.

“사랑해.”

윤제가 힘센 셋째의 태동에 움칫 놀라고 힘겨워 하면서도 고백을 멈추지 않았다. 용아는 힘들어하는 등을 보듬어 주며 웃음 어린 고백을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고백이 넘쳐흐르는 좋은 밤이었다.

창천(蒼天)

숲이 시작되는 소로 앞에 선 작은 발이 오른쪽 왼쪽 차례로 쿵쿵, 가볍게 발 구름을 했다. 그러자 나뭇가지 끝이 파르르 잘게 떨렸다. 연이어 나뭇잎들이 거세게 들끓었다.

푸드득, 푸드득. 파르라니 흔들리는 나뭇잎을 뚫고 새들이 쉴 새 없이 날아올랐다. 수 마리의 새가 떼 지어 날아가는 건 장관이었다. 거친 날갯짓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와아.”

일제히 날아가는 새들을 활짝 웃으며 보던 어린 얼굴이 뒤를 뿌듯하게 돌아보았다.

봤어?

말을 하려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등 뒤에 줄지어 있던 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뒤는 텅 비어 있었다.

“응? ……다들 어디에 갔어요? 숨바꼭질하는 거야……?”

휑하니 빈 뒤를 본 의아한 얼굴이 나무 뒤와 석등 뒤를 살피며 말했다. 이리저리 뛰는 발길이 분주했다. 아이는 또래에 비해 말이 빨랐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키가 머리 하나는 컸고, 키에 비해 다리가 길쭉하니 길어 걸음도 빨랐다. 호화로운 머리 장식이 아이가 뛸 때마다 짤랑짤랑 울렸다.

허하니 빈 곳에 울리는 짤랑임이 유독 크고 선명했다.

“묵현! 유모모! 여기 있어?”

또래 보다 한두 살쯤 많아 보이는 아이는 겁이 많았다. 텅 빈 주위에 의아해하던 얼굴이 곧 울먹울먹 흐려졌다.

“윤조만 두고 다 어디 갔어요……?”

커다란 울음을 터트리며 윤조가 동궁을 가로질렀다. 아이는 울면서 텅 빈 금당대를 빠져나와, 이원을 넘어, 금죽헌으로 뛰어들었다.

금당대도, 이원도 금죽헌도 윤조가 내달려 오는 걸음걸음에 소낙비 내리는 것 같은 소리를 뿌리며 겁에 질린 발걸음들이 달아났다.

“아버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사하게 단장한 아이가 울며 전각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도 아무도 없어서 아이는 무척 서러웠다. 우아앙, 터트린 울음에 당혹과 쓸쓸함이 가득했다.

아이는 황궁 안 모든 곳을 갈 수 있고, 황궁의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전에 외조로 건너갔다 단단히 혼이 났기에 금죽헌에서 인적을 찾을 수 없으면 거슬러 올라가 함복궁으로 가야 했다.

“윤조야?”

울고 있는 작은 아이의 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전각문을 손수 열고 나온 용아를 향해 작은 아이가 힘껏 달려갔다. 용아는 품에 안겨드는 아이의 눈물 가득한 얼굴을 쓸어 주며 몸을 낮추어 우는 얼굴과 시선을 맞추었다.

“우리 윤조, 왜 울고 있어?”

용아의 물음에 새삼 서러워진 얼굴이 울먹울먹 씰룩댔다. 아이는 제 얼굴을 쓰는 손에 뺨을 비비며 토로했다.

“다들 윤조만 두고 가 버렸습니다.”

울음 가득한 얼굴이 윤조 혼자 남겨져 무척 무서웠고, 서글펐고, 쓸쓸하였다고 소곤거렸다. 눈물이 맺힌 눈이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용아는 우는 아이의 얼굴을 부지런히 닦아 주었다. 울음으로 뜨거워진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던 용아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윤조야, 황족의 힘을 썼느냐.”

다정한 손에 뺨을 기대고 있던 작은 얼굴이 순간 움칫했다. 퐁퐁 솟아오르던 눈물도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었다. 딸꾹, 눈물이 멈춘 얼굴이 당혹한 소리를 토해 냈다.

“……아버…… 지…….”

조그만 손이 어물어물한 움직임으로 용아를 붙들려 했다.

“윤조가 약속을 안 지켰다, 그렇지?”

작은 소녀의 내원 아버지는 특별한 이였다. 홍문에서 온 내원 아버지에게서는 윤조의 가족만 알 수 있는 특별한 기척이 흘러나왔다. 기척은 때로 향기로, 때로 바람과 같은 형태로 와 닿았다. 따듯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기척은 가까이 있으면 웃음을 절로 나오게 했다.

내원 아버지의 특별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윤조의 작은 장난에 모두가 도망갈 때 아무렇지 않게 받아 주었다.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주는 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엄격한 이이기도 했다.

아버지께 굳게 다짐했으나 아이에게 약속이란,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윤조가……”

아이는 말이 빨랐고, 더불어 영특하였다. 얼른 무어라 말하려는 작은 얼굴을 향해 용아가 무심한 시선을 건네며 덤덤히 말했다.

“윤조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하냐, 아니 그러하냐. 정확히 답해야지.”

꾸짖음을 내릴 때 내원 아버지는 더없이 차가운 이였다. 아이의 얼굴이 서러움으로 순식간에 움츠러들었다. 훌쩍훌쩍 울음이 섞인 어린 목소리가 인정하기 어려운 말을 웅얼댔다.

“그, 그러합니다…….”

“벌 받아야지?”

용아가 가볍게 윤조를 안아 올렸다. 체온이 닿도록 서로의 몸을 밀착한 형태가 아니었다. 윤조는 단단한 손에 달랑 올려져 후전 앞 반성의 의자에 앉혀졌다. 의자에 앉히기 전 작은 몸이 바둥거리며 용아의 품으로 파고들려 했다.

“아버지, 윤조가 잘못했습…….”

가련한 몸짓에도 용아는 곁을 주지 않고 훌쩍 물러났다.

“벌 받을 때 어떻게 하기로 했더라?”

단호한 목소리에 의자에 앉은 작은 몸이 웅크러 들었다. 벌을 받을 땐 소리를 내거나, 울거나, 떼를 쓰거나, 팔다리를 움직여 소음을 내어선 안 되었다. 반듯하게 앉아야 했지만, 윤조는 그럴 수 없었다. 너무도 서러워서 움츠린 몸을 풀기 어려웠다.

그 웅크린 작은 등이 무척 귀여워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였지만 용아는 입가와 눈가를 억눌러 무심함을 유지했다. 윤조는 웅크려 앉은 채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우물댔다.

“반성의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야 합니다.”

서러움 가득한 목소리가 용아의 웃음을 힘껏 자극했다.

“벌 받고 있거라.”

용아는 얼른 한마디 던지고 웃음이 터지기 전에 재빨리 돌아서서 전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버지…….”

윤조는 이 반성의 의자가 너무도 미웠다. 반성의 의자는 무엇도 아니기에, 혼이 날 때 여러 날 반항을 하기도 했다.

황족의 힘을 온 사방으로 퍼트려 심술을 부려 보기도 했고,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울고불고 떼를 쓰기도 했다. 반성의 의자 따위 무시하고 도망친 적도 있었다.

황족의 힘을 분별없이 내질렀을 때 항상 온후하고 따스하기만 하던 할아버지와 황친들께 불려가 엄중한 얼굴들 앞에서 죄를 청해야 했다.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울고불고 떼를 썼을 땐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다. 반성의 의자를 무시하고 도망쳤을 땐 번번이 뒷덜미가 달랑 잡혀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내졌다.

내원 안에선 아버지의 손에 붙들렸고, 운 좋게 외조로 가면 붙들 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다. 탈주는 매번 실패했다.

외조에서 윤조를 가장 많이 붙든 손은 부왕이었다. 부왕은 윤조를 붙잡아다 내원 아버지에게 건네며 늘 면목 없어 하였고, 붙든 윤조에게 ‘우리 윤조는…….’까지만 말해 아이의 궁금증과 의아함을 증폭시켰다.

불퉁하니 ‘윤조가 무어요?’라고 물었을 때, 부왕의 험악하게 기운 눈썹을 마주해야 했다. 부왕은 ‘아니다’라고 하였지만 표정은 여전했다.

서러웠다.

황족의 힘을 쓰는 게 무엇이 그리 잘못이라고, 혼자 외롭고 쓸쓸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모든 게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이가 서러운 울음을 쏟아 내는 사이, 궁인들이 돌아와 제자리에 섰다. 다들 반성의 의자에 앉은 윤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서러워졌다.

금죽헌의 앞마당에 금당대 궁인들도 시립했다. 퐁퐁 눈물을 쏟던 얼굴에서 조금씩 서러움이 물러갔다.

해가 질 즈음이었다.

금죽헌 안으로 태자 일행이 들었다. 반성의 의자는 후전 앞에 놓여 있었다. 방만하게 앉아 석계 아래를 지켜보던 조그만 몸이 힘껏 팔을 휘저었다. 반성의 의자에 앉아 소리를 낼 수 없는 탓이었다.

“…….”

윤제는 물론, 정천궁 일행 모두가 전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반성의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어린 얼굴을 봤지만 억지로 보이지 않는 체하였다.

윤제는 그대로 전각 안으로 들려 했다.

“부왕!”

의자에 앉은 몸을 앞으로 쭈욱 뺀 윤조가 한껏 낮춘 목소리로 부친을 불렀다. 윤제가 이제야 아이를 보았다는 듯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는 얼굴을 향해 윤조가 쭉 뻗은 팔을 열심히 버둥댔다.

“윤조가 아니냐.”

부왕의 아는 척에 윤조가 반갑게 웃으며 의자에서 내려와 예를 올렸다. 여전히 무척 작은 목소리였다.

“부왕을 뵙습니다. 부왕, 낮 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부왕, 안아 주세요.”

예를 다 올린 윤조가 부친의 곁으로 가 팔을 휘저으며 속삭였다. 윤제는 간절한 몸짓에 웃으며 그냥 안아 주려다 겨우 멈추었다.

“이 녀석. 윤조, 너 혼나는 중 아니냐.”

윤제의 말에 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푹 수그러든 얼굴이 우물우물 답했다.

“……맞습니다…….”

“제대로 앉거라.”

“예, 부왕.”

풀 죽은 얼굴이 반성의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힘이 하나도 없는 조그만 어깨가 말도 못하게 사랑스러웠다. 윤제가 아이의 곁으로 다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또 잡혀 왔느냐.”

작은 얼굴이 힘껏 도리질 쳤다.

“아닙니다.”

윤제가 어여쁜 정수리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아니기는. 황궁 안에서 황족의 힘을 써서 벌 받고 있는 것 아니냐.”

윤조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부왕을 올려다봤다. 어떻게 알았지? 라는 외침이 담긴 어린 얼굴에 윤제가 웃으며 인상을 썼다.

윤제는 할 말이 무척 많았지만 왜인지 말을 할 입장이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문 채 웃음과 한숨을 흘렸다. 어린 얼굴이 하는 행동과 말이 무섭도록 그의 어린 시절과 같았다.

“……어, 어떻게 아셨…… 습니까…….”

놀라는 얼굴의 표정마저 닮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대체 어떻게 알았지? 놀라워하는 게 어린 날의 자신과 아주 똑같았다.

“어떻게 모르겠느냐.”

윤제가 침중하게 말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윤조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울먹이며 물었다. 이럴 리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온 황궁이 떠나가도록 그리 힘을 쓰는데 어떻게 모르겠느냐. 이 부왕이 책 보다 놀라서 밖으로 나설 정도였다. 이리 빈번히 지키지 않으면서 매번 굳게 약속은 왜 하는 거냐.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야 윤조가 약속을 하면 아버지가 기뻐하시지 않습니까. 부왕도 기뻐하시고, 할아버지도 기뻐하시고요.”

아이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윤조 효녀네. 그런데 윤조야, 약속을 지켜야 할아버지도, 이 부왕도, 아버지도 기뻐하지 않겠느냐.”

부왕의 말에 아이가 새삼 깨달았다는 얼굴을 하다 시무룩하니 답했다.

“……지키는 것은 어렵사옵니다.”

윤제가 고개를 끄덕여가며 동조해 주었다.

“그렇지.”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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