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22/25)

남은 일정 동안 태자는 만량궁 안에만 머물렀다. 태자비 또한 그랬다. 주위를 물리고, 닫힌 전각 안에 두 사람만 있었다. 사이가 나쁜데 문 걸어 잠그고 둘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닐 터였다.

태자와 태자비의 사이가 좋다니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만량궁 안, 궁인들의 얼굴은 허옇게 들떠 있었다. 피로와 걱정 탓이었다. 태자가 닷새가 다 되어 가도록 전각 안으로 한 발도 들이지 못하게 황족의 위세를 부리니 서럽기까지 했다.

“여쭈어 보셨소?”

윤제는 다 늦은 아침에 나태한 차림으로 잠시 청방으로 들어 태감에게 하명했다. 옆방에 탕조를 들여 두라거나, 식사를 준비해 두라거나, 찻상이 부서졌으니 가져가라거나 하는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었다.

중경이나 국경에 대한 물음이나 궁금해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등우는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찻상은 어쩌다 왜 세 등분으로 박살 났는가 몹시 궁금하기는 했지만 따로 묻지 않았다.

그와 다르게 용아는 머리칼 한 올 볼 수 없었다. 식사도 둘이 하는 것 같고, 씻는 것도 둘이고, 세탁물도 두 명분이 나오니 분명 안에 있는데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등우가 청방으로 불려가 태자의 하명을 받을 때마다 혹여 태자비가 찾지 않을까 모장도 청방 앞에서 서성였다. 얼쩡거리는 모장을 닫히는 문틈으로 윤제도 보았을 텐데 작은 언질조차 없었다.

“비전하께서는 잘 계신답니까.”

모장이 애타는 얼굴로 다그쳐 물었다.

“뭐어…….”

등우가 어물댔다. 모장이 손까지 파닥여가며 말했다.

“뭐, 뭡니까.”

“모르겠으이.”

결심을 내린 등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고백했다. 모장의 애타던 얼굴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무능한 것을 보는 시선에 등우가 코를 씰룩댔다. 방금 전까지 숨넘어갈 것처럼 굴던 온후한 인상의 여인이 딱딱한 상궁마마님처럼 말하였다.

“모르겠다니요.”

“미안하오. 물을 틈이 없었네.”

“……그럴 수 있지요.”

모장이 한심한 인사를 보는 시선으로 담담히 말했다.

“예정대로 이틀 뒤에 떠날 거요. 비록 비전하와 대면은 못하였지만 그분이 음식 비우고 물린 빈 그릇, 옷가지, 욕탕 물 등이 있는 걸 보아 별일은 없는 게 아니겠나. 너무 걱정 마시오.”

“별일 없으시겠지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천하에 폐하 외에 거스를 이가 없는 전하와 함께 계시는데 비전하께서 위험한 일이 무엇이겠습니다. 벌써 며칠째 얼굴을 못 보고 있지 않습니까. 비전하께서 이 사람을, 이 모장을 찾는다는 말 같은 게 없었는가 그것이 궁금하옵니다.”

등우는 상궁의 울분에 찬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태감이 고운 수가 놓인 소매를 손으로 만지작대며 생각한 바를 점잖게 말했다.

“그야 전하께서 그럴 틈을 주지 않을 것이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까?”

“그런가…….”

내내 걱정으로 구겨져 있던 얼굴이 풀렸다.

“아마 그렇지…….”

등우가 먼 곳을 보며 말했다. 말을 한 후에 쑥스러운지 목을 울렸다. 모장이 반대편 먼 곳을 보며 손가락을 하나둘 혼자 꼽아 보고는 온화한 웃음을 살풋 흘렸다.

“그러면 걱정할 거 없네요.”

모장의 너그러운 말에 등우가 힘차게 끄덕였다.

“둘째 아기씨는 왕자님일까.”

“공주님이면 어떻고, 왕자님이면 어떻습니까. 아직 비전하께서 한참 어리시고, 이 추세면 넷? 다섯? 최소한 아기씨 세 분은 거뜬하겠습니다. 황가가 아주 다복하겠습니다.”

모장이 은근한 몸짓으로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이며 말했다. 어전태감의 소환에게 전해 들은 바가 있는 등우는 수줍게 손가락을 네 개 펴며 이게 더 낫다는 듯 내보이면서 말했다.

“환궁할 때 비전하 드실 탕약을 미리 준비해 놓는 게 어떻겠습니까.”

“훌륭하십니다.”

“필요한 약재가 있으면 말씀하시오.”

두 사람은 일상적인 말을 덕담처럼 주고받았다. 등우는 언준에게로, 모장은 전전긍긍하고 있을 영화대 궁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짧은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만량궁에서의 강제 휴식이 평온히 끝났다. 태자와 태자비는 약속한 날이 밝자마자 중경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은 나설 때보다 한결 가벼웠다.

황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황제를 알현했다.

정천궁에 들었던 둘은 초조반에 조반까지 황제와 든 후에야 전각 밖으로 나섰다. 황제가 특별히 늑장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둘의 마음이 조금 급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뵙는 부황께서 내리는 온정을 기껍게 받으면서도 물러가 보란 말에 황공하다 힘차게 예를 올리고 동시에 물러났다.

“어바!”

정수궁에 한 발 들이자마자 그리운 목소리가 울렸다.

“윤―.”

아이의 웃음에 아는 체를 하려던 용아와 윤제가 한 몸인 것처럼 동시에 굳어 들었다. 두 사람이 내뱉은 소리를 들은 진양군 역시 돌아서다 멈칫했다.

유모가 아이를 데리고 있을 때는 아이 웃는 얼굴만 보였었다. 그때와 달리 진양군이 윤조를 안고 있는 걸 보자, 괴상한 위기감이 훅 끼쳤다. 용아는 귀여운 딸이 험상궂은 사위를 데려오는 기분이 이럴까 생각하며 진양군의 앞으로 다가갔다.

“뭘 이리 빨리 왔냐.”

진양군이 다가오는 용아의 손을 피해 윤조를 어르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윤조 아비들이 와 버렸다, 하고 어린 귓가에 대고 진양군이 다정하게 속살거렸다.

윤조가 진양군의 말에 반응하듯 꺄르르 웃었다.

“윤조야, 이리 와.”

윤제가 은근히 피하는 몸짓을 하는 진양군의 곁에 바싹 다가서며 손을 내어 아이의 관심을 바랐다. 진양군의 품에 편안히 안겨 있던 작은 몸이 약하게 바동거렸다. 제 아비에게 가려는 몸짓이었다.

윤제가 득의만만한 얼굴을 했다.

아비에게 가고자 하는 작은 몸을 넘겨준 진양군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애인을 잃은 사내보다는, 바람둥이 부군에게 버림받은 가련한 처 같은 얼굴이었다.

윤제에게 옮겨 가 진양군을 본 윤조가 꺄아! 소리를 퍼트리며 아는 체를 했다. 조금 울적하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돌았다.

그것을 보며 용아는 다시 괴이한 위기감을 느꼈다. 동궁 어떤 후궁을 마주했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게, 지금 이 순간의 진양군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진양군은 아이의 작은 손을 붙잡고 흔들며 공주에게 일별했다.

“아비들이 왔으니 본 공자는 이만 물러가 보겠다. 전하, 비전하, 공주전하 물러가옵니다. 나중에 올게, 윤조야.”

진양군이 짧게 예를 올리고 돌아섰다. 아이가 떠나는 진양군을 말간 얼굴로 보다 다리를 동당거렸다. 앙증맞은 몸짓을 본 윤제와 용아가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본 게 좋기도 하고, 겨울치고 날이 좋은 날이라 세 식구는 정수궁을 여유롭게 거닐었다. 두 사람과 잘 놀고, 잘 웃던 아이가 발을 다시 동당거리다 소리를 높였다.

“우옹!”

무언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사방을 둘러보던 아이는 다가오는 이가 없자, 눈이 울망울망해졌다. 용아가 두리번거리는 아이의 손을 붙들어 흔들며 말했다.

“윤조야, 왜 그래?”

용아를 보고 잠시 울먹임을 지우던 아이가 서러운 짜증을 흩뿌렸다. 윤제가 아이의 등을 열심히 도닥여 봤지만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윤조는 울기만 했다.

용아와 윤조는 번갈아 아이를 안고 달랬다.

한동안 울음이 계속돼 시립해 있던 궁인과 유모가 다가왔다.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에 울음을 잠시 그쳤던 윤조는 다가온 이를 보고 더 크게 울다가, 유모모가 쥐여 주는 흔들면 소리 나는 장난감에 겨우 울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여전히 입가는 서럽고, 눈가에는 가여운 눈물이 동글동글하게 붙어 있었다.

“물러가옵니다.”

유모모가 눈치껏 유모들을 물렸다.

“고맙네.”

용아가 웃는 얼굴로 유모들에게 말했다. 아이에게 새 소리를 들려주고 있던 윤제가 불현듯 멈칫했다. 손에 든 장난감을 무뚝뚝하게 흔들며 제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아이와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의혹이 일었다. 윤제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말했다.

“용아.”

“네. 저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윤제 형?”

윤제가 아이와 눈싸움을 하듯 눈을 떼지 않았다. 윤조 역시 아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윤제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 녀석 환아 기다리는 거였다.”

용아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안 돼.”

“안 되지.”

윤제가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진공자 형님이 우리 딸 뺏어 가는 거예요?”

“그 자식 아이들을 좋아하는데 너무 긴장해 표정이고 태도고 뻣뻣해서 애들이 항상 무서워하였거늘…… 어떻게 윤조를 꼬드겼지?”

“우리 딸 뺏기는 거예요?!”

용아가 드물게 호들갑을 떨듯 과하게 굴었다. 윤제 또한 못지않았다.

“진공자 입궐 금지 시킬까.”

윤제의 말에 용아가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돼요?”

“아니.”

고민 끝에 건넨 말에 허무한 말이 돌아왔다.

“뭡니까.”

용아가 투덜대며 윤제의 품에서 윤조를 데려갔다. 윤제가 재빨리 용아의 곁을 따라붙었다. 딸랑이 때문에 기분이 풀렸는지 윤조가 부드러운 소리를 내뱉었다.

“꺄아!”

윤조의 웃음에 윤제와 용아가 동시에 웃음을 퍼트렸다.

“아이 예뻐요.”

용아와 윤제가 동시에 윤조의 옆머리를 쓸었다. 그래서 또 웃음이 났다. 두 사람이 웃자 윤조가 따라 웃었다. 셋이서 함께 웃자, 훨씬 더 즐거웠다. 잠시 머리를 스쳤던 아주 사소한 불길함은 없었던 일인 양 사라졌다.

좋은 날이었다.

매해 진사과의 방이 붙는 전후로 앵두가 익어 갔다. 때문에 앵두연은 진사에 급제한 축하연의 형태를 띠었다.

앵두 외에도 갓 따 온 죽순도 내놓았기에, 앵두연은 앵순주라고도 불리었다. 올해는 앵순주는 진사과 방이 붙은 사흘 후로 결정되었다.

앵두연의 아침이 밝았다.

휘익, 착!

정전 앞으로 나선 태감이 명편을 휘둘렀다. 한백옥을 내려치는 사나운 소리가 한 번, 다시 한 번, 또다시 한 번 이어졌다. 방으로 퍼져 나가는 날카로운 소리가 먼 곳까지 가 닿은 후에야, 황궁의 문이 열렸다.

황족을 시작으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황궁 안으로 들었다. 황실 종친들은 거대한 광장의 둘레 길을 몸을 낮춘 걸음으로 걸어 올랐다. 이어 조정의 대소신료도 각자 정해진 문을 통과해, 종친들과 마찬가지로 낮춘 몸으로 안으로 걸어 들었다.

황친들은 정전 안으로 들어서, 고관들은 정전 앞에, 여타의 관원들은 줄지어 늘어서서 넓은 세 면의 앞마당을 빼곡히 채웠다.

“황제시다!”

어전태감의 목소리가 정전 앞에서 울렸다. 정전 안과 밖, 월대 아래 앞마당의 외곽 경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선 태감들이 소리를 드높였다. 모든 태감들의 소리가 하나가 되어 울리는 순간, 등청한 모든 관원들이 소리를 높였다.

“황제 폐하!”

정전 앞에 선 좌첨이 하답하듯 외쳤다.

“꿇으시오!”

끝이 보이지 않도록 늘어선 관원들이 태감의 외침에 따라 몸을 낮췄다. 무릎을 꿇고 기다리는 이들을 향해 태감이 다시 소리쳤다.

“일배!”

모든 이가 일제히 상체를 숙여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예를 올렸다. 앞으로 내려졌던 얼굴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태감이 소리쳤다.

“이배!”

모두의 머리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삼배!”

끝이 보이지 않도록 아득하게 늘어선 이들이 일제히 예를 올리는 것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예를 마치고 상체를 일으켰다가 법도에 맞게 살짝 숙인 채 다음 소리가 있기를 기다렸다.

정전 안, 가장 앞쪽에 위치한 태자가 소리 높여 황제께 문안을 올렸다.

“부황을 뵙습니다. 부황, 강녕하소서!”

태자의 외침에 이어 황친들이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정전 안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리자, 이어 정전 앞의 대내신들이 예를 다했다. 이어서 황궁 전체가 울리도록 세 면의 앞마당에 대기하고 있던 관원들이 소리를 높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태감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일어나시오!”

거대한 소리로 땅이 울리는 듯한 공간에 정적이 내렸다. 짧은 정적을 지켜보던 황제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올해도 진시를 무사히 치러 뜻 깊은 시작을 맞은 이들이 있으니 축하할 일이로다. 앵순주는 이제 시작의 길에 들어선 이들과 그보다 앞서서 같은 길을 지나온 이들을 모두 축하하는 자리이니 흥겹게 즐기도록 하라.”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정전 안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안에 모인 이들이 힘껏 소리를 높인 탓에 전각 전체가 웅웅 울리는 착각이 일었다. 상석의 황제는 까마득히 먼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모두는 들으라. 최근 황가에 다복한 일이 많으니 짐의 기쁨이 끝이 없도다. 그는 모두 태자와 태자비의 노력이요, 덕일 터. 태자와 태자비 둘 모두 황궁을 이끄는 웃전으로 부족함이 없음이다. 이 또한 짐의 기쁨이며, 황가의 복이며, 나아가 이 나라 강산 모두의 홍복일 것이다. 태자의 이립이 가까워오니 짐은 태자에게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맡기고자 한다. 태자는 황족의 책무를 다하고, 황가의 만복을 만백성에게 고루 내려 주도록 하여라. 이후로 편전 회의와 모든 정례는 태자가 주관토록 하라. 정전 회의는 짐을 맡을 것이나, 그 또한 태자가 맡아 줄 날을 고대하고 있겠다. 만조백관은 성심을 다해 태자를 보필토록 하라.”

초봄인데도, 기이하도록 볕이 따스한 날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좋은 날 황제가 친히 내리는 하명을 모든 이가 예를 다해 받들었다. 세상 끝까지 퍼져 나갈 것처럼 커다랗게 울리는 복종의 말에 상석의 황제가 만족한 웃음을 퍼트렸다.

반면, 정전의 호화로운 금전 위에 엎드린 태자의 얼굴은 의아하게 굳어 들었다.

“황제시다!”

황제의 보좌 곁에서 드높은 소리가 울렸다. 한 번 더 예가 되풀이 되었다. 끝도 없이 길게 늘어선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 예복이 황제를 향해 머리를 숙이며 일제히 소리를 내질렀다.

“황제 폐하, 강건하소서!”

태감들 역시 예를 올리며 황제께 소리 높여 외쳤다. 황제가 보좌에서 일어섰다. 황제는 당신의 아들 곁으로 다가가 태자를 특별히 챙겨 함께 교헌재로 향했다. 태감이 끝을 알리는 명편(鳴鞭)을 휘둘렀다.

본격적인 앵두연의 시작이었다.

당연하지만, 황실의 앵두연은 앵두만 먹는 행복한 날은 아니었다.

장엄한 전각에 상석엔 황제와 태자, 태자비, 공주가 들고, 아래에는 융을 깔았다. 융이 깔린 곳으로 황족과 사신, 만조백관이 일일이 나서서 예를 올렸다. 태감의 위엄 가득한 알림과 이어 머리를 깊이 낮추고 예를 올리는 소리가 끝없이 반복되었다. 온종일 법도가 이루어지는 착각이 일었다.

커다란 소리들에 머리가 다 울렸다.

황제께서 앉은 상석 가운데의 금빛 보좌도, 보좌 뒤에 호화로운 용으로 장식된 황금 병풍도, 금으로 조각된 용들이 휘감고 있는 거대한 금 기둥들이 신비롭고 시선을 끈 것은 잠시 잠깐이었다.

익히 아는 황족 종친 일가가 앞으로 나서 예를 서너 번 올리고 나면 그만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정오를 기점으로 조용한 곳에서 편히 누워서 앵두 먹는 게 크나큰 사치처럼 느껴졌다. 황가에 대한 예가 끝난 것은 해가 다 질 무렵이었다.

태감은 이제부터 진짜 본격적인 앵두연이라고 했다.

용아는 몇 번이나 도망가고 싶어 한 공주를 핑계로 대고 연회에서 빠져나왔다. 유모가 곤하실 터인데 공주님을 이리 달라는 것을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있었지만, 함께 있었던 것 같지 않았다.

용아는 따뜻한 물 한 병을 청해 아이를 안고 봄이 되면 찾아가는 곳으로 향했다. 화우전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용아의 입에서 얼떨떨한 소리가 새어 나갔다.

“어.”

용아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이도 반가움을 표했다.

“어바!”

함월전에서 다락원으로 드는 시작점에 윤제가 서 있었다.

“늦었다.”

용아의 곁으로 다가온 사내가 아이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꺄아!”

간질간질하고 보송보송한 느낌의 보드라운 소리와 다르게 윤제에게 안긴 아이는 황족의 힘을 펑펑 터트리듯 표했다. 윤제가 아이와 황족의 힘을 가지고 노는 법을 깨친 후부터 윤조는 태자가 나타나면 제 가족 외의 이는 다가오는 불허하는 존재가 되었다.

윤제가 다락원 안으로 향했다. 용아는 얼결에 남자를 따라 걸었다.

“여기 계셔도 됩니까.”

“이후로는 별로 태자가 필요한 일은 없으니까 괜찮다. 온종일 같이 있었는데 말 한마디 못 나누고, 벌 서는 것 같고, 벌세우는 것 같아. 너는 괜찮으냐.”

“저야 한 게 있습니까.”

용아의 선선한 말에 윤제가 웃었다.

“나도 한 게 없기는 마찬가지다.”

한참을 화우전에 혼자서 찾았었다. 그러다 둘이 되었고, 이제는 셋이 되어 있었다. 기묘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 낯선 기분이 용아를 어지럽게 했다.

긴 바람이 불었다.

“우오!”

아이의 놀란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좋아요.”

용아가 놀란 아이를 품으로 데리고 오며 불쑥 말했다.

“나도, 좋다.”

둘은 마주 본 채로 잠시 웃었다. 말로 할 수 없는 쑥스러움이 번졌지만 좋은 순간임을 알 수 있었다. 화우전은 여전한 아름다움으로 세 사람을 맞았다.

“벌써 새순이 났습니다.”

성격 급하게 하나둘 돋아 있는 꽃과 나뭇가지 끝 곳곳에 자리한 연두색 물을 머금은 새순을 보며 떠드는 용아의 얼굴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울지 마라.”

“……안 울어요.”

“울고 있어.”

윤제가 눈물이 번진 눈가를 쓸어 주며 웃었다.

“이건, 아니에요.”

용아가 억지를 썼다. 윤제가 다시 웃었다.

“자꾸 울면 못 오게 할 거다.”

“그러지 마요.”

“여기는 왜 온 거냐.”

윤제가 우는 용아에게서 윤조를 데려가려 했다. 화우전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던 용아가 아이를 품에 단단히 안으며 전각 앞에 놓인 익숙하고도 낯선 보좌로 다가섰다.

가지고 온 따듯한 물을 보좌에 쏟은 용아가 윤조야, 부르며 아이의 손을 온기가 흐르는 물 위에 겹쳤다.

“마아!”

예상대로 아이의 손이 닿자, 물을 통해 보좌의 문양을 따라 빛이 퍼져 나왔다. 아이의 손에 묻은 물을 닦아 주고 기분 좋게 웃던 용아가 문득 웃음을 지웠다.

“…….”

용아가 안고 있던 공주를 두어 번 도닥이고 윤제에게 떠넘기듯 안겨 주었다. 스윽, 쏟았던 물을 손으로 쓸어 닦고, 모장이 살뜰히 챙겨 준 수건으로 꼼꼼히 훔쳐 낸 후 보좌에 정중한 움직임으로 앉았다.

“어바!”

공주가 귀여운 소리를 내었다. 아이를 따라 웃던 용아가 마주 웃으려는 윤제를 보고 표정을 바꾸었다. 그 엄격한 편애에 윤제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용아?”

꺄아, 꺄아, 소리를 내는 아이를 윤제가 연신 얼렀다.

“전하. 저한테 거짓말하셨죠?”

“응?”

“예전에 나한테 조모께서 새해 첫 축언을 내려 주셨을 때 그거 팔아 준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루어졌잖아요. 보세요. ‘빛나는 소중한 이여. 빛나는 짝과 옥 같은 아이를 낳고 천수를, 만수를 누리려무나.’ 옥 같은 아이라는 건 앞으로 아이가 더 태어날 가능성이 있고, 그중 백화가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기억하시죠? 그때 나한테 왜 거짓말 했습니까.”

용아가 진지하게 따져 물었다.

“기억 안 나는데.”

윤제가 다 기억하는 얼굴로 뻔뻔하게 말했다. 꺄아! 웃음을 퍼트리는 자신과 꼭 닮은 아이 뒤에 모르는 척 숨은 잘생긴 미인이 퍽 가증스러웠다.

“왜 기억이 안 나! 나한테 시켰잖아요. ‘윤공자 형님, 존경합니다.’ 거짓말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그런 부끄러운 말을 하도록 시키시다니. 그것도 한두 번 시켰어요? 하루에 열 번씩, 몇 날 며칠을 시켰죠. 가끔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두 번 시킨 적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심지어 사기였다니. 윤공자 형님, 나빠.”

“기억 안 나.”

윤제가 거듭 사기를 쳤다.

“오아!”

두 사람 사이에서 공주가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전하.”

해묵은 투덜거림이었다.

“사랑해, 용아.”

용아도 깊이 따질 생각은 없었다. 잘생긴 미인이 아름다운 얼굴과 고백으로 무마하려는 것에 용아가 눈썹을 구기다 피식 웃고 말았다. 윤제가 거듭 고백하려 할 때 윤조가 용아에게 머리를 들이밀 것처럼 다가가려 바동거리며 다시 소리쳤다.

“오아!”

“윤조도 사랑한대.”

“뭐, 저도요.”

윤제가 바동대는 윤조를 앞세워 용아 곁에 앉았다. 용아는 옆으로 물러서며 고백에 오만하게 답했다. 용아에게 건너오려나 했던 윤조는 용아에게 가는 것은 거부했다.

그렇다고 용아와 멀어지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아이는 새삼스럽게 낯선 것을 보는 양 커다랗게 뜬 눈으로 보며 소리 높였다.

“오아!”

용아의 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 포동포동 살이 오르는 뺨을 조심히 만졌다. 윤제와 용아는 윤조가 하려는 말을 해독코자 애썼다.

“뭐라는 거죠? 제 이름 부르는 걸까요.”

“그럴 리가…….”

용아의 말에 윤제가 쑥스러운 팔불출을 보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 알려 주려는 거 같지 않아요?”

“그런가.”

아이는 아직 말할 수 없었기에 둘은 답답했다. 둘만큼이나 윤조도 애타는 얼굴이었다. 간절한 소리가 화우전을 가득 채웠다. 머지않아 태어날 아우에 대해 알려 주는 다정한 외침이 깊어가는 밤으로 퍼져 나갔다.

“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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