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파멸의 흑점 (2)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벌리며 환대했다.
“뜻밖이군요.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연구실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미놀렌 경은 고개를 숙였다.
준은 이제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 시골 남작에서 완전히 환골탈태한 것이다. 그래서 그에 맞는 예우가 따랐다.
물론 그의 사회적인 지위가 변해서 태도도 변한 게 아니었다. 첫 만남 이후, 미놀렌은 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뒤늦게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먼저 교수 부임을 감축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좀 경황이 없었군요. 자, 그만 서 계시고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준은 한옆에 놓인 간이 테이블로 손님을 안내했다.
준이 배정받은 연구실은 가장 낙후된 곳이었다. 아무리 페르디낭 후작의 추천이 있었다고 해도, 그의 경력과 나이를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좋은 연구실엔 응접실 등 손님을 접대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다. 귀한 손님들이 자주 들르니까. 하지만 이곳에선 차 한잔 마시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브로콜린. 연구실에 뭔가 마실 게 없나?”
“아직 없어요. 교무과에서 비품이 다 안 왔거든요. 교수님께서 쓰고 계신 종이와 펜도 제가 따로 준비한 겁니다.”
“그래? 고맙군.”
준이 대신 미놀렌 경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오늘 첫 출근이라 제대로 준비가 안 되어 있군요.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옮길까요?”
“아닙니다. 금방 일어나 봐야 해서. 간단히 용건만 말씀드리고 돌아가 볼까 합니다.”
“그러시다면야.”
준은 여유롭게 앉아 미놀렌 경을 바라보았다. 미놀렌 경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브로콜린을 돌아보았다.
“이봐, 조교.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지.”
“알겠습니다.”
나가려던 브로콜린이 다시 돌아와 책과 필기도구를 잔뜩 품에 들었다. 그리고 준에게 한마디 했다.
“교수님. 저 도서관에서 책 좀 보고 있어도 되죠?”
“마음대로 해.”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요.”
준은 웃으며 손을 휘저어 보였다. 브로콜린은 신난 표정으로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미놀렌 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버릇없는 친구로군요.”
“글쎄요. 제 눈엔 학구열이 가득 찬 멋진 학생처럼 보입니다만.”
“그렇습니까?”
준은 흡족하게 웃었다. 미놀렌 경의 평가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학문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테니까.
하지만 준의 눈은 달랐다.
세상의 진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이었다. 반신의 지위에 올랐던 남자였으니까.
그런 그의 눈엔 브로콜린은 누구보다도 성실한 학생이었다.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그래서. 하실 말씀이라는 건?”
“으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주군이신 아레스 각하의 일입니다. 예전에 귀띔해 주신 게 맞았습니다. 악성 흑색종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늦게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좀 더 일찍 움직이실 줄 알았는데요.”
“아뇨. 아닙니다. 말씀하신 직후 각하를 설득해서 간신히 진료를 받았지요. 그래서 확진이 나왔습니다.”
“그 사이엔 무얼 하셨습니까?”
“왕도의 실력 있는 치유사들을 비밀리에 초빙해서 추가 진료를 받았습니다. 군무대신을 맡고 계신 분이기에,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니까 말입니다. 뭐, 이미 어느 정도 소문은 난 것 같습니다만.”
“아마 완벽히 숨기기는 어려울 겁니다. 중병인 데다가 치유사들도 이해관계가 있을 테니까요.”
아무리 평화시라고 해도 전쟁은 뜻하지 않을 때 일어나곤 한다. 내분이나 반란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런 왕정 국가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한 국가의 군사력을 총괄하는 군무대신이 중병으로 쓰러졌다면 국가적인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아레스 공작과 그의 측근인 미놀렌 경은 그것이 걱정되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심각한 병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냥 점인 줄 알았던 게 흉측한 암세포라니.”
“잘 알려지지 않은 병이기도 합니다. 특히 나이가 든 사람이면, 단순히 피부 노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각하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지요.”
“그래도 제 조언을 흘려듣지 않고 잘해 주셨군요.”
“왠지 믿음이 갔습니다. 직감이라는 게 있는데, 그게 움직이더군요. 물론 오브라이언 경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주셔서 그런 것도 있고.”
농담을 하긴 했지만 미놀렌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깊은 한숨을 연발했다.
‘공작의 병세가 심각한 모양이네.’
준의 예상은 정확했다. 실제로 미놀렌은 그렇다고 실토했다.
“온몸에 암이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연로하신 터라 전이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위험한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발견이 그만큼 늦었으니까요. 여러모로 아쉬운 일입니다.”
“남작님이라면 완치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작은 희망을 담아 미놀렌이 물었다. 그는 기사로서의 자존심 같은 걸 모두 내려놓고 진심으로 나섰다.
준이 신중히 응답했다.
“암이 전신으로 퍼졌다면 저라고 해도 손을 쓸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 누아 마을에서 말기 암을 치료하셨다고 하던데요.”
“그사이에 조사를 하신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숨길 일은 아니니까. 누아 마을 카누 씨의 경우는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운도 많이 따랐지요.”
사실 카이엔이 재배한 암영초를 쓴다면 아레스 공작의 암도 치료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쉽게 나설 만한 일이 아니었다. 누아 마을의 주민을 치료하는 것과, 왕국의 군무대신을 치료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
어떤 약초를 쓰고 어떤 방법으로 치료를 하는지 일일이 보고해야 할 게 분명했다. 암살의 위협을 느끼고 사람을 붙일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암영초라는 물건을 어떻게 구했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마계의 물건이니까.
그래서 준은 쉽게 나서지 못했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진료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진료 자체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런데 저를 부르시는 건 아레스 공작 각하의 의지입니까? 아니면 미놀렌 경의 개인적인 바람입니까?”
“각하께서 직접 보내셨습니다. 남작님을 정중히 모셔오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공작과 만났던 그때가 선했다. 분명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고, 다시는 만날 것 같지 않게 행동했다.
돈과 권력으로 살 수 있는 건 없다고.
다시 찾아가 되묻고 싶었다. 돈과 권력으로 완치라는 기적을 사 보라고.
“저를 별로 신뢰하시지 않는 것 같아 보였는데.”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이제 남작님이 얼마나 대단한 치유사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아레스 공작은 준이 얼마나 대단한 치유사인지 뒤늦게 알았다.
그림에서 단서를 찾아 악성 흑색종을 판별해 낸 건 보통의 경험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암을 확진한 왕립 병원의 치유사도 하늘이 도왔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물론, 암이 전신에 퍼졌다는 것을 알고는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못했지만.
준은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미놀렌은 점점 조급해졌다.
“남작님…….”
“잘 알겠습니다. 미놀렌 경의 입장도 잘 알겠고요. 그런데 조금 곤란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말씀만 하시면 모두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좀 어려울 텐데요. 아무래도 직접 보여 드리는 게 좋겠지요?”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 수업과 직원이 놓고 간 출석부를 집었다. 그 출석부에는 엔도버의 이름이 있었고,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준은 출석부를 미놀렌 경에게 보여 주며 엔도버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것을 본 미놀렌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빨간 줄은 수강을 철회했다는 의미입니다.”
“저희 막내 공자님이 말입니까?”
그제야 미놀렌이 상황을 파악하고 깜짝 놀랐다.
“애석하게도 각하의 막내 아드님께서 저를 치유사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수강 철회는 물론, 교수직을 박탈하는 청원서에 앞장서서 서명했죠.”
청원서 이야기가 나오자 미놀렌이 더욱 놀랐다. 아카데미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으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아카데미 내에선 꽤 유명한 일입니다. 믿기지 않으시면 돌아가시는 길에 학장님께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것도 좋겠군요.”
“어떻게 이런 일이…….”
미놀렌은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준은 씁쓸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진찰을 한번 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공자께서 이렇게 나오시는 이상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이해합니다. 우리 가문은 물론 막내 공자님의 입장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다른 치유사를 찾아보시는 게 어떨는지요. 원하시면 실력 좋은 치유사를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누아 마을에 있는 루치아 선생도 꽤 실력이 좋습니다.”
“아닙니다. 일단 각하께 보고드리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미놀렌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절도 있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준은 밖까지 그를 배웅하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릴리가 어떤 마음으로 팝콘을 튀겼는지 이제 이해가 가는군. 어떻게 될지 여유롭게 기다려 볼까?’
준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미소를 지었다.
* * *
아레스 공작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병명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의견은 일치했다.
왕국은 그 소문으로 들썩였다.
알프하이겐 가문의 막내 엔도버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갔다. 그는 가문의 집사를 통해 진위를 확인했고, 맞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본가에서 전령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날 찾으신다고?”
“그렇습니다. 공자님. 최대한 빨리 저택으로 오라는 명령이십니다.”
“그래야지. 빨리 가야지. 혹시 아버지의 병세가 위급해진 거냐?”
“그런 건 아닙니다. 아직 정정하십니다.”
“다행이군.”
그렇게 말을 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엔도버는 내심 아쉬웠다.
아버지가 정정하다는 한마디가.
오래도록 가문을 이끌고 부와 명예를 누린 아버지였다.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가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기를 원했다.
첫째가 아니기 때문에 가문을 통째로 이어받지는 못하지만, 핏줄이니 몇몇 이권 사업은 챙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상단이라도 하나 던져 주시겠지? 기왕이면 돈이 좀 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역시 아카데미에 들어가길 잘했다니까. 후후후.’
사실 엔도버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머리는 좋은 편이지만, 잔머리 쪽으로 발달했고 학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가문의 후광이 컸다.
엔도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공자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시지요!”
집사에게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인 엔도버가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아버지인 아레스 공작을 알현했다.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요즘 아카데미에서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말이다.”
“……예?”
그제야 엔도버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버지의 눈이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