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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37화 (137/175)

137화 파멸의 흑점 (1)

저택으로 돌아온 준은 집무실에 앉아 조용히 티타임을 즐겼다.

‘꽤 힘드네. 그래도 즐거웠어.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야.’

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학생들과 논쟁을 하고 돌아오니, 문득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듯한 충만감이 들었다.

강한 적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

비록 손에 무기는 들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쓰러트리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준은 그들을 해치지 않고 보다 바른 방향으로 교화하려는 것이 조금의 차이점이었지만.

그때 노크가 들리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아그네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제가 방해한 거 아니죠?”

“전혀. 마침 잘 왔다. 온 김에 같이 차나 한잔하지.”

“사양하지 않을게요.”

예쁘게 웃은 아그네스는 얌전히 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준은 하녀를 시키지 않고 직접 뜨거운 차를 아그네스의 잔에 따라 주었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뭔가 즐거워 보이시는데요.”

“의학부 학생들을 만나고 왔는데 좀 재미있는 일이 있었지.”

“벌써요? 오늘은 수업 없는 날 아니에요?”

“살롱이 보여서 들어가 봤어. 마침 학생들이 모여 있더군. 아직 강의 배정이 되지 않았지만 인사 정도는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와아. 역시 부지런하시네요.”

준은 자신의 해임을 위한 청원서가 제출되었다는 걸 굳이 아그네스에게 말하지 않았다.

왕립 병원 일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울 것이다. 거기도 아카데미 못지않은 곳이니까. 청원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분명 쓸데없이 걱정만 할 것이다.

“학생들이 부러워요. 저도 강의실에서 선생님 강의 듣고 싶은데.”

“청강한다며?”

“마음이 그렇다는 거죠. 병원에 출근하기 시작하면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고. 또 휴일에는 강의가 없으니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강의를 듣지 않아도 병원에서 배울 게 많을 거야. 당분간은 병원에 적응하는 데 집중하도록 해.”

“그럴게요.”

그때, 열린 문 사이로 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이 혼자 있는 줄 알고 까불까불하던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단정한 자세로 바꾸었다.

“주인님. 좋은 시간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지금 막 왕립 아카데미 학장께서 서한을 보내셨는데요.”

“그래?”

준은 편지를 받아 든 즉시 펴 보았다. 청원서가 들어간 뒤라,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궁금했다.

내용은 짧았다.

연구실이 배정되었다는 것과, 사흘 뒤에 강의를 시작해 달라는 정중한 편지였다. ‘로열 클럽’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었다.

‘학장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군. 생각보다 일이 어렵진 않겠는데?’

준은 편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음 고민을 시작했다.

‘문제는 로열 클럽 녀석들에게 어떻게 참교육을 해 줄까 하는 것.’

사실 그 부분이 가장 어려웠다.

교수직을 보전하는 것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해직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누아 마을로 돌아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바닥부터 배배 꼬인 학생들을 보니 교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인생을 위해서. 그리고 환자들을 위해서. 나아가서는 왕국의 의료 시스템 개혁을 위해서.

준은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또 그들을 돕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복수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편지인지 여쭤봐도 돼요?”

“연구실이 나왔다는구나. 첫 강의는 사흘 후가 될 것 같다. 내 강의를 도와줄 조교도 배정된 것 같고, 내일 한번 연구실에 나가 봐야겠어.”

“나중에 연구실에 놀러 가도 되죠?”

“안 될 게 뭐 있나?”

“저는요?”

릴리가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최근 인간의 몸을 갖게 된 이후로, 인간 사회와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그녀였다.

하지만 준은 단호했다.

“까불지 말고 일이나 해.”

“너무하시네요. 페어리 퀸이 되지 못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무슨 퀸?”

준이 넌지시 눈짓을 주자 그제야 릴리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숙였다. 아그네스가 함께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해요. 제가 요즘 소설에 푹 빠져 있어서. 헤헤헤. 그럼 이만 물러갈게요. 아 참, 아그네스 님. 아까 폴링 행정관께서 찾으시던데요?”

“어머, 그래요? 가 봐야겠네.”

아그네스가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떴다. 릴리도 뒤따라 나갔다. 홀로 남은 준은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며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 * *

다음 날, 준은 아침 일찍 왕립 아카데미로 향했다. 정확히는 의학부 교수 연구실이 모여 있는 연구동이었다.

‘과연. 왕국을 대표하는 아카데미라는 건가.’

연구동은 굉장히 엄숙한 분위기였다. 들어가는 순간, 마치 다른 공간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밝고 쾌활한 외부와는 달리 엄격하고 폐쇄적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한마디라도 떠들면 어디에선가 호통이 날아올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썩 유쾌하진 않군. 그래도 일단 가 봐야겠지?’

준은 3층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의 문고리를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리고 불도 켜져 있었다.

안에는 안경을 쓴 젊은 학생 하나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여기가 내 연구실이라서.”

“혹시 강준 교수님이십니까?”

“그래.”

안경을 한번 고쳐 쓴 남학생이 건성으로 인사했다. 예의가 없다기보다는, 사교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런 타입이었다.

“전 메디브 가문의 브로콜린이라고 합니다. 자연과학부 3학년이고요. 어쩌다 보니 교수님을 도와 조교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혹시나 해서 먼저 말씀드리는 건데 이름 가지고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저도 스트레스거든요.”

준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자신이 즐겨 먹는 채소와 이름이 비슷했다.

“좋아. 이름은 그렇다 치고, 어쩌다 조교 일을 하게 됐지? 어쩌다 보니라는 표현을 쓴 걸 보니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딱히 하고 싶진 않았지만 장학금 혜택이 좋아서요.”

“솔직하군.”

“그게 제 매력이죠.”

준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지나치게 아부하는 타입도 아니고, 실용적인 성격에 할 말은 다 하는 그런 성격인 것 같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일을 맡기기엔 딱이었다.

“그런데 강의는 계속하시게 된 겁니까?”

“질문이 모호한데. 좀 정확히 해 주게.”

“제가 생략을 많이 하는 편이라. 그러니까, 학장님께 교수님의 부임을 반대하는 청원서가 올라갔다는 소문이 전교에 퍼졌거든요. 의학부 학생들 전원이 서명했다던데.”

“그거라면 별문제 없을 거야.”

“다행이네요. 장학금을 받기 전에 잘리면 곤란하니까요.”

장학금?

준은 좀 의아했다. 왕립 아카데미의 등록금이 비싸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귀족 가문의 자제라면, 대부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일 텐데.

그런 준의 눈빛을 읽었는지 브로콜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집안이 좀 어려워져서요. 아버지 사업이 최근에 좀 기울었고, 어머니는 또 병환 중이라 돈이 많이 들어가고. 여러모로 힘들죠.”

“어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신가?”

“그냥 예전부터 안 좋으셨어요. 병약하신 편이라고 할까요.”

브로콜린이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적였다. 퉁명스럽게 이야기는 하지만, 내심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언제 연구실로 한번 모시고 와. 내가 한번 봐 드리지.”

“아마 소용없을 겁니다. 왕립 병원에서도 병명을 찾지 못했거든요. 그냥 체질상 기력이 쇠하신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모든 현상엔 이유가 있는 법이지.”

준의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브로콜린이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그에게 있어 생각할 여지가 있는 한마디였다.

“그러니까 교수님 말씀은…… 뭔가 어머니의 병에 원인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원인이 없는 질병은 없다는 말이지. 다만 그 원인을 찾지 못하거나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야.”

“자신감이 대단하신데요?”

“칭찬으로 들으마.”

준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건 후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작지만 실용적인 책상이었다. 목재로 되어 있는데 오래된 느낌이 좋았다.

준은 가방에서 챙겨온 물건을 꺼냈다.

몇몇 서류와 진찰 도구, 그리고 누아에서 챙겨 온 치유의 여신 엘레나의 조각상도 꺼내 책상 위에 장식했다. 필기도구와 기타 사무 도구는 브로콜린이 미리 준비해서 따로 챙길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교수님. 켈세타 지방 출신이시죠?”

“정확히는 누아 마을이지. 고향은 다른 곳이긴 하지만 그곳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

“그럼 ‘로가리듬의 법칙’을 알고 계시겠네요? 그거 발명한 사람이 켈세타 쪽 학자라고 들었거든요.”

가벼이 웃은 준이 브로콜린에게 다가갔다. 그의 책상은 분리수거가 필요할 정도로 지저분했는데, 노트에 다양한 수와 수식들이 적혀 있었다.

“세부 전공이 수학인가?”

“수학도 하고 천문학도 하고 있죠. 뭐, 우리 학부에선 딱히 구분은 안 지어요. 오히려 여러 분야를 두루 접하는 걸 권하고 있죠.”

“그렇군.”

큰 종이에 행성의 모형도와 그 밑으로 계산식이 들어가 있었다. 길고 투박한 계산법은 사라지고, 로그 계산법이 적용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며 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로그 계산법을 발명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십니까? 아직 왕립학술원에서 정식으로 발표가 되지도 않았고, 그 학자의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요. 저 완전 팬이거든요. 졸업하기 전에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 진짜 이분 덕분에 수명이 두 배는 늘었어요. 큰 수를 계산하느라 머리털이 다 빠지고 있었거든요.”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겠지. 뭐, 열심히 해 봐.”

굳이 지금 그 주인공을 밝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중에 정체가 밝혀졌을 때, 이 퉁명스러운 조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준은 교수로서 첫 업무를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수업과에서 왔는데요.”

강의 시간표와 출석부가 나왔다.

준은 약초학과 기초병리학 두 과목을 맡게 되었다. 보통 의학부 교수들이 세 과목 이상을 담당하지만, 모종의 배려가 있었던 것 같다.

수업과 직원은 연구실을 나서기 전 조심스레 한마디 했다.

“부임하시자마자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합니다만, 두 과목 모두 폐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강 철회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요.”

“잘 알겠습니다. 이틀 후에 다시 상황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교수님.”

수업과 직원은 깍듯이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출석부를 살펴보던 준은 브로콜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브로콜린. 방해해서 미안한데, 여기 아카데미에서 폐강되는 일이 흔하나?”

“아뇨.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런 적 없을걸요. 적어도 제가 입학한 이후로는. 강의 철회자 한두 명 나오는 것도 드물어요. 교수에게 찍힐 수도 있으니까요.”

턱을 괸 브로콜린이 유심히 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왠지 최초의 폐강 사례가 나올 것 같군요.”

동정과 연민의 눈빛이었다. 준은 피식 웃었다.

“의학부의 ‘로열 클럽’에 대해 아는 게 있나?”

“그거 모르면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죠. 명문가 자제와 왕족이 만든 사교 모임입니다. 왕국의 차세대 중역들이기도 하고. 저도 귀족이긴 하지만 그놈들은 사는 세계가 아예 다르죠.”

“그 정도야?”

“뭐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죠. 잘못 걸리면 끝장입니다. 놈들이 무서운 건 합법의 테두리에서 상대를 끝장낸다는 거거든요. 다들 뒷배가 어마어마하니까. 특히 샤넬 양은 왕녀기도 하고.”

브로콜린은 여전히 연민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수강 철회도 놈들의 수작일걸요?”

“뭐 한 학기 정도 노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낚시라도 가시게요?”

“어디 추천해 줄 만한 포인트가 있나?”

“포트 벨리움의 생선이 기가 막히게 맛있던데요. 가서 바다낚시나 한번 하시죠.”

“하하하.”

시답잖은 농담이 오가던 그때, 밖에서 정중한 노크가 들렸다. 조교 브로콜린이 들어오라고 대신 답했다.

문이 열렸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바로 알프하이겐 공작가의 수호기사인 미놀렌 경이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남작님.”

그의 표정은 마치 전쟁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했다. 그래서 준은 그의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아레스 공작의 검은 점.’

사건의 시작은 바로 그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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