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위험한 함정
“저, 아버지.”
잠시 당황했지만, 엔도버는 다시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저는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사교 활동도 빼놓지 않고 있고요. 좋은 가문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그건 들어서 알고 있다. 켈빈 공자, 그리고 샤넬 왕녀와 친하게 지낸다지?”
“맞습니다. 클럽도 만들어서 같이 모여 다니고 있고요.”
엔도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아버지가 알아 주시는 건가.
하지만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녀석들과 어울리느라 강준 교수의 임용을 반대하는 청원서에 서명을 했더냐!”
엔도버가 화들짝 놀랐다.
언젠가는 아버지도 알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파급력이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청원서 하나로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자신이 알기로 준은 아버지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니까.
그리고 아버지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왕국의 군무대신. 그런 사람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다.
그런데 왜?
‘대체 뭐지? 그 궁벽한 시골 마을의 치유사가 우리 가문과 얽힐 일이 조금도 없을 텐데?’
하지만 문득 엔도버는 마음 한구석을 찔러 오는 불안감을 인정해야 했다.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젠장! 왕도에 있을 때 어떤 일을 했는지 한번 확인해 봤어야 했나?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 아버지가 이러실 리가…….’
아버지인 아레스 공작은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성정은 불같아도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켈빈의 말에 무조건 따른 것이 후회가 되었다. 동시에 잔머리를 재빨리 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아버지의 문책은 피해야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그 틈을 주지 않고 아레스 공작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네가 지금 어떤 일을 벌인 줄 아느냐?”
“저는 그저 아카데미 학장님께 의견을 표했을 뿐입니다. 아카데미 의학부 학생으로서…… 말입니다.”
“의견? 이런 멍청한 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군. 그래. 좋다. 너는 내 병에 대해 어디까지 들었나?”
“그, 그게. 편찮으시다고만 들었지, 정확히는…….”
쿵!
눈살을 찌푸린 아레스 공작이 테이블을 힘차게 내려쳤다. 쩌적. 유리판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엔도버가 몸을 움찔했다.
“이권 사업에만 관심이 있으니 애비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는 관심도 없었겠지. 적당한 자리를 물려주기만을 바랐겠지? 무심한 놈 같으니라고!”
“아닙니다! 그건 오해십니다!”
“시끄럽다!”
“아버지!”
결국 엔도버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옆에 시종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무래도 네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차근차근 짚어 줘야겠구나. 내 병을 처음 발견한 건 강준 남작이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강준 남작이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아…….”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엔도버는 이를 꽉 깨물었다. 재미 삼아, 그리고 친구들을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이 이렇게 크게 돌아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네놈이 저지른 짓 때문에 그를 부를 수 없게 됐다. 수강 철회까지 했다지? 이런 못난 놈!”
“하, 하지만 왕립 병원에도 우수한 치유사들이 많지 않습니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그에게선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촌뜨기 치유사가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니. 왕립 병원의 베테랑을 능가할 정도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도 안 됩니다! 아카데미도 나오지 않은 시골 마을 치유사 따위가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까?”
“이 멍청한 놈! 아직도 모르겠느냐? 의학부에서 공부한다는 녀석이 이렇게 상황 파악을 못 해서야.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려거든 당장 그만두거라!”
엔도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확실히 의학부 2학년이면 어느 정도 의학에 대한 지식이 쌓여 있어야 했다. 그만큼 공부가 부족해 상황 파악이 덜 된 것이다.
공작이 추궁하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내 초상화를 보는 것만으로 암을 진단했다. 이 점 말이다.”
“그게 암이라구요? 말도 안 됩니다!”
“그게 너의 한계겠지.”
“…….”
“그 누구도 이게 암이라고 나에게 알려 주지 못했지. 왕립 아카데미의 의학부에 다니는 아들놈은 물론이고, 심지어 왕립 병원에 있는 치유사들도 말이야! 그래도 네가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말을 할 수 있느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지…….”
엔도버는 눈시울을 붉혔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엎드렸다.
아레스 공작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분을 이기지 못했지만,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화를 낸다고 몸에 좋을 게 없었으니까.
“아들아.”
“예, 예! 아버지.”
“이미 저지른 일은 돌이킬 수 없다. 네 수강 철회도, 그리고 청원서에 서명을 한 것도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애비를 위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당장 가서 강준 남작을 모셔오너라.”
“제가요?”
“결자해지(結者解之). 모름지기 사내라면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
아레스 공작은 입을 꾹 다물고 몸을 홱 돌렸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선 엔도버가 고개를 숙였다.
“강준 남작께서 절 용서해 주실까요?”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제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밖에서 문제만 일으키고 다니는 놈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으니.”
“아버지!”
아레스 공작이 못 들은 척 턱짓하자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놀렌 경이 뒷짐을 지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움직이십시오. 공자님. 아버님의 병세는 지금 이 시간에도 점점 심해지고 있으니까요.”
“크윽!”
집무실을 나선 엔도버가 달리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고 소란이 정리되었다. 미놀렌 경은 아레스 공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햇빛을 받으며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다루신 게 아닙니까? 아직 어리십니다. 엇나갈까 걱정됩니다만.”
“하아.”
아레스 공작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회한이 넘치는 평범한 노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막내라고 너무 무르게 키웠네. 내 탓이지.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해. 아무리 우리 가문을 등에 업고 있다고 해도, 막내가 켈빈이나 샤넬과 어울리는 급은 아니지. 장남도 아니고 말이네. 이대로라면 이용만 당하다 화를 입을 게 분명해.”
“으음, 역시 복안이 있으신 거군요.”
“이번 일을 해결하다 보면 녀석도 깨닫는 바가 있겠지. 그게 녀석을 어른으로 만들어 줄 거야. 어엿한 아카데미의 학생으로. 안 그런가?”
미놀렌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나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네. 왕국의 평화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쉴 틈 없이 달려왔지. 그러다 보니 주변을 챙기지 못했네. 내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지.”
아레스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날던 새도 떨어트린다는 아비루나 왕국의 군무대신이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은 후회로 가득 찬 평범한 노인에 불과했다.
그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마지막에 가까워지니 내가 놓쳤던 것들이 보이는구만.”
“포기하지 마십시오. 분명 완치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해 두는 게 좋겠지.”
그러다 문득 강준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 강준 경을 만났을 때 말이야. 그에게 내가 이렇게 말했다네. 돈과 권력으로 살 수 없는 건 없다고. 그런데 살 수 없는 게 있었어. 나는 왜 이런 간단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걸까?”
그 질문엔, 미놀렌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친구, 날 비웃겠지?”
“아닙니다. 강준 남작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환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지요.”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미놀렌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했다.
“저는 그분에게 진료를 받은 적 없지만, 제 감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주 인간다운 치유사라고 말입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곧 좋은 소식이 올 겁니다. 같이 기다리시죠.”
아레스 공작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놀렌이 곁에 있어 든든했다.
* * *
알프하이겐 가문의 저택을 도망치듯 벗어난 엔도버는 왕립 아카데미로 마차를 몰게 했다. 정확히는 의학부의 살롱이었다.
오늘은 강의가 있는 날이었기에 살롱 안은 제법 복작거렸다.
몇몇 학생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엔도버가 들어오자 그를 힐끔 보더니 하나둘 자리를 피했다.
그만큼 엔도버의 표정은 험악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표정 작살인데?”
“또 누구 잡으려고 저러나?”
“일단 자리 옮기자. 어서.”
다들 ‘로열 클럽’의 멤버를 두려워했다. 혹시나 괜한 일에 말려들어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특히 청원서가 올라간 이후로는 다들 회원들을 피했다.
“엔도버 님. 마실 거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살롱 직원이 다가오자 엔도버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시원한 거. 그냥 아무거나 줘!”
“예.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후우!”
엔도버는 소파에 몸을 뉘었다. 머리가 멍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께 말씀은 그렇게 드리긴 했는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답은 그도 알고 있었다. 청원서의 서명을 철회하고, 수강 철회한 것을 취소한 다음 준을 찾아가서 정식으로 사과를 하면 된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엔도버에게 있어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로열 클럽’의 목표에 반하는 행동이니까.
‘분명 그렇게 했다간 배신자로 낙인찍힐 게 분명해. 아마 클럽에서 쫓겨나겠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엔도버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클럽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입지는 가장 좁았다. 켈빈과 샤넬에 비해 가문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젠장!’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쌍의 남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로열 클럽’의 핵심인 켈빈과 샤넬 왕녀였다.
켈빈이 엔도버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거기서 혼자 뭐 하냐? 오늘은 저택에 있겠다고 하더니만, 아카데미에 있었네.”
“아, 그게…….”
“흐응? 무슨 일이 있나 본데?”
샤넬은 눈치가 빨랐다. 그녀가 추궁하자 엔도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모든 사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엔도버는 본가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그들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암이라는 사실을 빼고 말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켈빈이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네가 강준 교수에게 가서 무릎 꿇고 빌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진료를 부탁해야 할 것 같아. 어쩌지?”
“어쩌긴. 그럼 우리랑 같이 못 노는 거지.”
뜻하지 않은 말에 엔도버가 눈을 부릅떴다.
“뭐?”
“청원서에서도 이름 빼야 하고, 강의도 다시 들어야 할 테니까. 강준 교수에게 잘 보여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거잖아? 내가 잘못 이해했나?”
켈빈이 묻자 샤넬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랑 같이 못 놀면 너도 난처해지지 않니? 아레스 각하의 일은 안 됐지만 왕립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다잖아? 그럼 미래를 구상해야지.”
고민하는 그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켈빈이 한마디 툭 던졌다.
“엔도버.”
“응?”
“강준 교수에게 찾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제명이야. 우리 클럽에서.”
켈빈은 엄지로 자신의 목을 슥 그었다. 결코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키는 엔도버의 어깨를 다독이곤 몸을 돌렸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 넌 똑똑하니까 잘하겠지. 이봐, 샤넬. 슬슬 가자고. 왠지 시시해졌어.”
“귀염둥이. 우릴 실망시키지 마!”
그렇게 두 사람이 살롱을 나섰다. 어느덧 홀로 남은 엔도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곧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아주 위험한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