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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진료소-136화 (136/175)

136화 로열 클럽 (2)

준은 대답을 보류한 채 여유롭게 와인을 홀짝이며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적대감을 보이던 학생들의 시선이 다소 누그러졌다.

켈빈이 그를 교수로 칭했기 때문이다. 강준이라는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모두 청원서에 서명을 했으니까.

준이 다시 시선을 켈빈 쪽으로 돌렸다.

그 젊은 친구는 자신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이 늦어서 미안하군. 학교를 둘러보고 있었어. 그러다 의학부 살롱이 눈에 들어왔지. 불이 켜져 있기에 학생들과 인사나 해 볼까 해서 왔네.”

“그러셨군요. 어떻습니까? 왕립 아카데미의 위용이.”

켈빈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동시에 엔도버와 샤넬 등 로열 클럽 멤버들이 옆에서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켈빈의 말투가 비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준을 촌뜨기로 비하하려는 의도였다.

준은 그저 회의감이 들었다.

왕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의학부였다. 그런데 수재는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가문만 믿고 설치는 아이들뿐이었으니.

“건물이나 시설이 중요한 건 아니겠지. 아카데미는 학문의 경연장이니.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학문에 임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

“그럴듯한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때론 드러내는 것도 중요한 법입니다.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고.”

“정론이군.”

“교수님은 어느 아카데미 출신이십니까?”

“나는 아카데미를 나오지 않았어.”

켈빈은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머뭇거리거나 학력을 위조할 줄 알았는데, 준은 당당히 자신의 배경을 밝힌 것이다. 켈빈은 이미 준에 대한 조사를 끝낸 뒤였다.

켈빈이 확인하듯 물었다.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잘도 교수를 하시려는 거군요. 대체 페르디낭 각하께 어떻게 추천을 받으신 겁니까?”

“후작 각하와 나는 뜻이 잘 맞는 편이지. 서로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이야.”

“모종의 거래가 오갔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자네가 말하는 모종의 거래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의기투합한 것은 사실이지.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 준다면 대답해 줄 용의가 있네.”

뇌물을 바친 게 아니냐고 은근히 물었지만, 준은 오히려 그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더욱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는 클럽 멤버들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뇌물 이야기를 하게 되면 준에게만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페르디낭 후작이 뇌물을 챙겼다는 이야기가 되니 조심해야 했다.

켈빈은 다른 패를 꺼내 들었다.

“실력이 좋다곤 해도, 아카데미 학생을 가르치려면 적어도 아카데미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계셔야 하는 게 아닌가 싶군요. 의학은 임상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연구도 필요하지요.”

“그 말은, 아카데미 출신도 아닌 나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지 않다는 그런 말인가?”

“굳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말리진 않겠습니다.”

그 한마디로 살롱의 내부가 얼어붙었다.

상당히 강력한 도발이었다.

깝죽거리던 귀족 클럽의 멤버들도 좀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켈빈과 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건 살롱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빈 다과 그릇을 새롭게 채우는 그들은 보이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중 유일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한 사람.

준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가르침과 배움은 등가 관계에 있다. 누가 몰라서 배우는 것도, 누가 더 잘 알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도 아니지. 가르치는 사람도 학생들과 함께하며 깨닫는 게 많으니까.”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준은 손에 두꺼운 전공서를 들고 있었다. 초급 치유사 개론서로, 의학부 학생이라면 누구나 일독을 하는 도서였다.

그는 마치 강연하듯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교수자의 출신 배경과 학벌은 필요가 없다. 너희들과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지. 쉽게 말해 너희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가, 이게 핵심이다.”

“그것도 수준이 맞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게 켈빈 자네의 생각인가?”

켈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리고 동료들을 바라보며 그렇지 않냐고 동의를 구했다. 다른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긴 했지만.

준이 물었다.

“수준. 좋은 지적이군. 하나 확인하지. 너희들은 몇 학년이지?”

“2학년입니다.”

“그렇다면 초급 치유사 개론서 정도는 머릿속에 꿰고 있겠네.”

준이 전공서를 펼쳤다.

촤르륵.

시원하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일순간 움직임이 멈췄다. 준은 자신이 원하는 내용이 담긴 페이지를 단번에 펼쳤다.

“쉬운 퀴즈를 하나 내볼까? 우리가 흔하게 앓는 감기에 쓰이는 대표적인 약초가 있다. 뭐지?”

“싱거운 문제군요. 푸이푸이죠.”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여기에 라자이아라는 약초를 섞으면?”

준은 누아 마을에서 아그네스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질문을 던졌다.

뜻밖의 질문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준은 뒷짐을 진 채 살롱을 거닐며 학생들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준이 되돌아올 때까지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독작용(毒作用)이 나타난다. 흔한 약초는 아니지만, 두 약초는 따로 분류를 해서 보관해야 하지. 모르고 투약을 하면 복통이나 설사를 유발한다.”

“그건 약초학 분야가 아닙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지? 병증을 파악하고 약을 처방하는 건 자네들이야. 약의 길항작용이나 부작용에 대해서는 충분히 숙지해야 하겠지. 하나 더 내볼까? 고블린 독을 이롭게 사용하는 방법은? 그리고 그 효과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준이 빙긋 웃었다. 상대를 자극하듯이.

“애석한 일이야. 참고로 지금 내가 낸 퀴즈는 아카데미는 구경도 못 한 어느 시골 마을의 소녀도 알고 있는 쉬운 문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계속해 보자고. 너희들이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는 아카데미 의학부의 자존심을 걸고 말이야.”

준이 명분을 세우자 학생들은 반발을 할 수 없었다.

이후로도 준은 퀴즈를 계속 냈다.

모든 문제를 전공서에서 한 번씩 꼬아서 냈기에 대답하지 못한 문제가 수두룩했다. 대답을 하더라도 오답이 많았다. 준은 그때마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방금 환자가 한 명 더 사망했다. 이러다 왕국 사람들이 모조리 의료사고로 목숨을 잃겠군.”

“크윽!”

듣다 못 한 켈빈이 결국 불쾌감을 표했다.

“이런 쓸모없는 퀴즈는 그만두시죠? 시간 낭비입니다. 시험 시간도 아니고 말이죠. 의도가 뭡니까?”

“자네들은 쓸모없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퀴즈야. 자네들의 수준을 짐작해야 하거든. 그래야 내 교육 방침을 세우지.”

“재미있네요. 우리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물론.”

준은 태연히 웃었다. 그 모습에 다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다.

“뭐, 됐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환자들에게 관심이 있어서 의학부에 들어온 게 아니니까요. 교육 방침을 세우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켈빈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나머지 자제들도 하나둘 따라 일어났다.

“환자들에게 관심이 없다면 왜 의학부에 입학한 거지?”

“어느 학부든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아카데미만 졸업하면 되는 건데. 좋은 학부 나와서 좋은 자리에 앉으면 그만인 거라구요.”

조용히 있던 엔도버가 끼어들었다. 준은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언젠가 봤던 귀족과 꽤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은 의견 고맙군. 자네의 이름은?”

“하, 질문 참 많으시네. 엔도버입니다.”

“자네도 졸업 후 치유사로 활동하지 않을 계획인가?”

“당연하죠. 가업을 이을 겁니다. 시시한 치유사 놀이는 딱 질색이죠. 왕국에 치유사가 부족하다지만, 뭐 다른 애들이 빈자리를 채워 줄 겁니다. 갈 곳 없는 어린양들이?”

그때 옆에 있던 샤넬이 덧붙였다.

“이 친구한테 실례되는 말씀은 삼가는 게 좋을걸요? 엔도버의 아버지는 우리 왕국의 군무대신이라고요.”

그제야 준은 언젠가 봤던 그 귀족의 모습이 엔도버의 얼굴 위로 또렷이 겹쳐졌다.

“군무대신이라면…… 아레스 각하?”

“잘 아시는군요? 하긴. 아무리 하급 귀족이라고 해도 자기 왕국의 대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엄청난 실례겠죠.”

기묘한 인연이었다.

얼마 전 왕도에서 만났던 그 고위 귀족의 아들일 줄이야.

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당연히 네 클럽 회원들은 그 미소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쯤 아레스 공작은 어떻게 됐을까?’

만약 자신의 진단이 맞다면, 그 점은 악성 흑색종이었을 테고, 전신으로 암세포가 퍼져 나갔을 것이다.

물론 준은 그 상황을 막기 위해 미놀렌 경에게 귀띔을 했었다. 공작의 목숨을 구할 기회를 주겠다고.

자신의 말을 새겨들었다면, 미놀렌 경은 무슨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뒤늦게 알게 된 아레스 공작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미놀렌 경은?

문득 궁금해졌다.

“왠지 조만간 밖에서 한번 볼 것 같군. 엔도버 학생.”

“아마 그럴 일 없을걸요? 제가 교수님을 찾아갈 일은 없을 테니까요.”

엔도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피식 웃어넘긴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충고했다.

“의학에 흥미가 없다면 하루빨리 그만두길 권한다. 아니면 전과를 하던가. 너희들 말고도 진심으로 치유사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가득해. 괜히 재능 있는 사람들 앞길 막지 말고. 알았나?”

준이 먼저 살롱을 떠났다.

그가 나가고 나자 살롱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폭발 직전이 되었다. 특히 마지막 충고가 모두의 자존심에 불을 붙였다.

“제기랄!”

쨍그랑!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켈빈이 들고 있던 잔을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천박하게 입을 놀리는군. 듣도 보도 못한 남작 따위가!”

“워워. 위험해. 진정하라고. 켈빈.”

그나마 절친인 엔도버가 켈빈을 말렸다. 다른 회원들까지 나서자 켈빈은 씩씩거리다 겨우 분을 삭였다.

엔도버가 잘 타일렀다.

“화낼 필요가 뭐 있어? 우리 식으로 처리하면 그만이지. 일단 지켜보자고. 청원서를 제출했으니 아카데미 본부에서도 뭔가 조치를 하지 않겠어?”

그럴듯한 말에 켈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아까의 대화를 떠올리곤 엔도버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 저 교수랑 밖에서 볼 일 있냐?”

“아니? 오늘 처음 본 사이야. 아까 봤잖아. 교수인 거 못 알아봤는데.”

“근데 왜 저래? 조만간 밖에서 한번 볼 것 같다고 하던데.”

“모르지, 나야. 괜히 허세 부리는 걸 거야. 우리 아버지 이름을 빌려서.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어.”

엔도버는 준이 방문했던 그때 왕도에 없었다. 그래서 준이 가문의 저택에 들른 사실도 알지 못했다.

직원들이 말없이 깨진 유리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직원 하나가 손을 베였지만, 의학부 학생들은 붕대 한 번 감아줄 생각 없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저 교수를 내보낼 더욱 확실한 방법을 찾아야겠어.”

“맞아! 의학부를 그만두라고? 흥. 완전 미쳤더군.”

“내가 나설까? 아바마마께 애교 좀 떨면 한 방에 보낼 수 있을 텐데?”

동료들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은 켈빈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우리 힘으로 해 보자고. 마침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오른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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