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레온 같은 사람 (2)
* * *
“네? 누구시라고요?”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말을 걸자, 직원 한 명이 놀라서 물었다.
“하하. 안녕하세요. ‘할아버지의 일생’ 만든 사람인 강태평입니다.”
“아…….”
그제야 뭔지 알겠다는 듯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그러다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내 입으로 ‘듣보잡’이라고 소개하며 말을 걸었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생각 때문일까. 세 사람은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대화하시는 데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난 불편한 분위기를 없애려고 일부러 밝게 말을 했다.
“이정수 팀장님을 뵈러 왔는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이정수 팀장님이요?”
그의 이름을 듣자, 한 직원의 얼굴이 하얘졌다.
꿀꺽.
목울대가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좀 전에 그들의 대화를 들어서일까.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짐작이 된다.
난 그들을 안심시키려 말했다.
“경매 위탁한 작품 좀 보려고 왔거든요~.”
“아……. 네, 약속은 하고 오셨어요?”
“아니요. 올 거라고 전화만 드리고, 시간 약속은 안 했어요.”
“그럼 팀장님께 전화 드려서 이쪽으로 오시라고 하겠습니다.”
난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니요. 제가 찾아뵙고 싶어요. 바쁘실 텐데, 왔다 갔다 하게 해드리기도 미안하고……. 여기는 사무 공간이 개방되어 있는 것 같아서 어떻게 일하시나 궁금하기도 하고요. 하하.”
“뭐가 궁금하시다는 거죠?”
“그냥 여러 가지요. 제 작품을 맡긴 곳이니까.”
나와 대화를 나눈 직원은 옆의 직원과 시선을 마주친 후 말했다.
“탕비실 나가셔서 복도 따라서 앞으로 쭉 가시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경매사업부 보이실 겁니다. 들어가셔서 미술경매 2팀 섹션 찾아가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불편한 시선을 뒤로하고, 탕비실을 나섰다.
드르륵.
경매사업부를 들어서자, 바로 사무 공간이 보였다.
“어떻게 된 게 여기는 사무 공간이 너무 개방되어 있네요.”
“그래? 이상한 건가?”
예전에 진일상사는 여기보다 더 개방되어 있었다.
동내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다가, 숨으러 사무실에 들어온 적이 몇 차례 있을 정도.
그래서일까. 난 이게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많이 이상하죠. 보안 유지를 어떻게 하려고…….”
그런데 사무 공간 중간중간에 접견 테이블도 있고, 철문으로 된 곳도 보였다.
“금고 같아 보이는 곳도 있구만. 적어도 보안에 있어서는 시스템이 확실히 되어 있겠지.”
오 대리가 앞장섰고.
미술경매 2팀 섹션은 사무공간 대각선 끝쪽에 있었다.
근데 가까이 갈수록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양도세 부과를 왜 안 했냐고.”
“…….”
“작품 작가님이 생존해계셔? 아니, 왜 고객님께 양도세 부과를 왜 안 해?! 자기가 세금 감면해주는 거야?”
이정수 팀장은 얼굴이 붉어져서는 흥분하여 말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 앞에 직원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 대리는 내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아는 척할까요?”
“아니야. 업무 중이신 거 같은데. 좀 기다리자.”
* * *
“왜 말이 없어?”
이정수는 계속 다그쳤고. 직원은 말이 없다.
“대꾸 안 해? 그게 자네가 책임지는 방식인가?
“죄송합니다.”
“어떻게 할 거야?”
“…….”
“아오~, 돈을 더 받았다면 돌려주면 그만이지만. 낙찰대금 지불까지 다 끝났잖아. 양도세 누락되었으니 돈 더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
“죄송합니다…….”
“2억짜리 작품이잖아. 그러면 양도소득세가…… 4,000만 원! 아오! 그 돈 돌려받을 수 있겠어?”
금액 규모를 듣고서 직원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자기 연봉보다도 높잖아! 진짜, 환장하겠네.”
옆에서 들어보니, 직원이 너무 기본적인 실수를 한 것 같았다.
낙찰 대금까지 완납 받은 고객 입장에서는 이 정도 큰 금액을 돌려주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마지못해 돌려주더라도, 그 사람에게 영웅옥션의 이미지는 어떻게 될지…….
“휴우…….”
이정수의 눈빛이 더욱 독사처럼 빛났다.
“영웅옥션 약관 10조 읊어봐.”
“…….”
직원은 손만 꼼지락대며 아무 말도 못 했다.
“고객에게 알려줘야 할 사람이, 약관도 못 외워?”
“죄송합니다.
약관을 외우는 게 정상인 건가? 보통은 필요할 때 찾아서 보지 않나?
이정수 팀장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있어서, 문득 궁금해졌다.
“오 대리, 보통 기업에서는 약관이나 회사 정책 같은 걸 다 외워야 하는 거야?”
“하하. 아니요. 그걸 왜 외워요.”
“그치?”
진일상사에 있을 때는 그런 게 있다는 걸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이정수는 외우고 있었다.
“영웅옥션 약관 10조 양도세 부과. 2013년도부터 양도가액 6,000만 원 이상인 것을 대상으로 하며, 단, 양도일 현재 생존해 있는 국내 작가의 작품은 제외하며…….”
이정수 팀장은 쭉 읊어가기 시작했다. 내용이 꽤 길었음에도 막힘이 없었다.
“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난 절로 탄성 소리가 나왔고.
“대박이다.”
김지안은 웃으며 말했다.
“호호. 아래 직원은 숨 막히겠어요.”
이정수의 약관 암송이 끝나자.
직원의 얼굴은 더 굳어졌다.
“다 외워와. 내일 시험 볼 거야.”
“네…….”
직원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이정수 팀장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가서 일 봐.”
그래도 직원은 할 말이 있는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저…… 그럼 고객 양도세 건은.”
“그거 뭐? 자기가 해결할 수 있어?”
“…….”
이정수 팀장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앞으로 같은 실수 하지 않도록 해. 고객님 연락처 나한테 톡으로 보내주고.”
번쩍!
직원은 고개를 들었고. 살았다는 표정이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시끄럽고. 어서 가서 일 봐.”
“네!”
“내일 진짜 시험 본다. 약관 못 외워오기만 해봐!”
“하하! 달달 외워오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직원의 뒷모습을 보며.
이정수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혼자 일하는 게 낫지. 아주 빅 똥을 선사하는구나.”
“그래도 받아는 주시네요.”
“뭐?”
이정수 팀장은 뒤를 돌아보았고.
난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엇! 작가님!”
후다닥.
이정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자세로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언제 오셨습니까?”
“하하. 좀 전에요. 바빠 보이셔서 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게, 도착 시간 알려주시면 제가 로비로 나간다니까요.”
“아니에요~. 겸사겸사 사무실 구경하고 좋네요.”
완전 딴판이다. 좀 전에 직원 혼낼 때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 같다.
“직원분들도 함께 오셨군요.”
이정수 팀장은 오 대리, 김지안에게도 깍듯하게 인사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미술경매 2팀 섹션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다.
* * *
“근데 어쩐 일로…….”
이정수 팀장의 물음에 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온다고 전화했을 때 목적은 얘기하지 않았었다.
“제 아이 좀 보러 왔습니다~.”
“아, 그래요? 그거야 뭐, 얼마든지요~. 연락 안 하시고 찾아오셔도 됩니다. 하하.”
이정수 팀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고.
“그럼 지금 당장 보실래요?”
“아, 그 전에 한 가지 더 양해를 구할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촬영을 좀 해도 됩니까?”
“네에?”
촬영이라는 단어에 이정수 팀장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난 대답 대신 김지안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가요.”
사랑산성의 영상 촬영 계획과 경매 과정을 담고 싶다는 얘기를 하였다.
“아…….”
“출연을 원치 않으시면, 얼굴 모자이크 처리 가능합니다.”
“…….”
이정수 팀장은 고민하는 듯했다.
촬영이 내키지 않나?
하지만 우리로서는 이걸 반드시 해내야 한다.
아무래도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설득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운을 띄었다.
“혹시 싫으신가요? 신원은 확실하게 나오지 않도록 해드릴 수 있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고객님이 원하시는데, 당연히 해드려야죠. 얼굴 나와도 좋고, 모자이크 처리되어도 좋습니다. 원하시면 저희 집을 촬영 장소로 쓰셔도 되고…….”
역시…… 또 부담이 확 느껴지네.
“다만, 저희 회사가 촬영에 좀 보수적입니다. 아무래도 다른 고객님들 여러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온라인 경매 때문에 자체적으로도 영상과 사진을 많이 활용하거든요. 그렇다 보니, 회사 내부 촬영에 대해서는 좀…….”
그의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다.
“제가 직접 만나 뵐까요? 허락받아야 할 분을 알려주시면…….”
“아닙니다. 저한테 맡겨주세요.”
이정수 팀장은 재킷을 들고 말했다.
“아무래도 급하신 거 같은데, 지금 본부장님께 말씀드려보고 오겠습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 이거 너무 죄송한데.”
정말 고맙긴 하다. 근데 너무 적극적이고, 헌신적이다 보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정수 팀장은 망설임 없이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오 대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평범한 분은 아닌 거 같아요.”
김지안 대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신념이 확실하신 듯.”
그래……. 좋게 말하면 그렇지.
잘해줘도 너무 잘해준다.
나중에 다른 작품으로 이정수 팀장과 거래 안 했다가는 칼 맞을 것 같다.
약 15분 후.
이정수 팀장이 돌아왔다.
겨우 15분 만에…… 사람이 늙어졌다.
얼굴에 수분기가 사라졌고,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짙어졌다.
“허허.”
우리를 보고 웃는데, 영혼이 없어 보였다.
얼마나 탈탈 털렸길래.
“허락받았습니다…….”
목적은 성공했는데, 이상하게 목소리는 슬퍼 보였다.
“아……. 네, 감사합니다.”
이정수 팀장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만드시는 영상 반드시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이번에 경매 출품작도요.”
“…….”
“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빌듯이 말했다.
도대체 본부장과 어떤 얘기까지 했길래…….
“따라오시죠. 맡기신 작품 보실 수 있도록 안내하겠습니다.”
“그럼~ 허락하셨으니깐.”
오 대리는 바로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고.
켠 상태로 이정수 팀장의 뒤를 따랐다.
커다란 철문 앞에 도착했고.
이정수 팀장은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하지만, 철문 내부 촬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오 대리는 촬영을 멈추었고.
철컥. 철컥.
이정수 팀장은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철문 안에 쇠창살이 있고. 쇠창살 안에 네모난 금고 여러 개가 있었다.
크기가 제각각인데, 작품 사이즈에 따라서 사용하는 게 다른 듯싶었다.
“이쪽입니다.”
어느 금고 앞에 서서, 이정수 팀장은 키패드를 눌렀고.
철컹! 띠리리리~.
기계음과 함께 금고가 열렸다.
확―.
‘할아버지의 일생’이 나타났다.
뭉클!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가웠다.
마치 숨이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오 대리가 말했다.
“군대 갔다가 저 첫 휴가 나왔을 때 부모님 기분이 이랬을까요? 너무 반갑고, 기분 묘하네요.”
항상 옆에 두고 보다가 오랜만에 만나니 정말 기분이 묘했다.
시집보낸 딸 같은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정말…… 자식 같다.
“들고 나오면 됩니까?”
한참을 멍하니 서서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정수 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네.”
‘할아버지의 일생’을 든 이정수 팀장을 따라 나가며, 오 대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오랜만에 창조물을 만난…… 신님? 혹은 조물주로서의 기분이 어때요?”
“뭔 소리야.”
“네모의 신이시잖아요. 언제든지 창조할 수 있는.”
그때 이정수 팀장이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네모의 신?!”
민망해도 가야 한다
* * *
설마…….
“네모의 신?! 네모의 신님 이시라고요?”
이정수 팀장은 흥분해서 눈깔이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알아보는 거야?
“어쩐지! 어쩐지이~! 다르다 했어! 하하하.”
이정수 팀장은 뭐가 그렇게 안심되는지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기뻐했다.
“미치겠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고.
옆에서 오 대리가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생각보다 많이 유명하시네요.”
“이런 유명 인사를 우리 사장님으로 모시고 있다니…….”
김지안 또한 이정수 팀장의 반응을 보고 놀리듯 중얼거렸다.
“하하하.”
이정수 팀장의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역시! 그냥 신인이 아니실 줄 알았어요! 어떻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작품을 단번에 만들겠어요! 하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이정수 팀장은 연신 중얼거렸다.
“실체를 알면 다들 깜짝 놀라겠는데요? 거봐. 내가 맞다고 했잖아. 내가!”
그리고 허공에 어퍼컷을 여러 번 날렸다.
저번에 계약서 사인할 때도 어퍼컷 날리더니.
흥분했을 때 하는 이정수 팀장의 버릇인가?
그는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어퍼컷 수십 방을 날렸다.
우리는 그가 흥분을 가라앉히길 기다렸다.
“음?”
이정수 팀장은 이마로 떨어진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긴 후.
멋쩍은 미소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기뻐서 그만.”
“뭐가 그렇게 기쁘신지 이해는 잘 안 됩니다만……. 어쨌든 제 정체를 반가워 해주시니 고맙네요.”
“하하. 그래서 말인데요.”
우리는 다시 이동했고, 걸어가면서 이정수 팀장은 내게 물었다.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네모의 신인 걸?”
“네?”
말을 안 했다? 일부러 안 한 건 아닌데.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냥 할 필요를 못 느꼈어요. 그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하하!”
내 말을 듣자마자, 이정수 팀장은 또 큰 소리로 웃었다.
“큰 영향을 미치죠~. 아마 강남옥션에도 네모의 신으로 서면 심의 신청하셨다면 무조건 합격하셨을걸요?”
“아……. 그래요?”
“그럼요! 듣보잡 신인이냐. 아니면 이미 명성이 있는 신인이냐는 하늘과 땅 차이죠.”
“…….”
“예를 들어, 가수 나열이 가수로서의 유명세 없이 미술작품 활동을 했다면 작가로서 금세 유명세를 얻었을까요?”
음……. 비유가 좀 황송하긴 하지만. 뭘 설명하려는 지는 알 것 같았다.
“네모의 신은 100백만 너튜브 채널의 최고 스타잖아요. 게다가, 어린이들의 열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어서…… 자녀를 둔 중년이라면 네모의 신을 잘 알고 있죠. 아마 번개맨에 버금갈걸요?”
“번개맨이요?”
“아~, 하하. 저도 5살 아들이 있어서. 하긴 번개맨보다는 네모의 신이 좀 더 연령대가 높긴 하겠네요.”
번개맨…….
나열에 비교할 때는 기분 괜찮았는데.
번개맨은 좀…….
“번개맨이 강 사장님 경쟁자였어요?”
오 대리는 웃음을 참으며 내게 물었고.
“조용히 해.”
나도 모르게 어금니 깨물고 이정수 팀장에게 말했다.
“번개맨과는 많이 다르죠. 제 팬들은 최소 초등학생은 넘습니다.”
“아. 하하. 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번개맨 비유에 살짝 짜증 나기는 했지만.
네모의 신의 영향력. 새삼 느낀다.
* * *
할아버지의 일생을 접견 테이블로 가져와서.
나와 이정수 팀장 사이에 놓은 후, 대화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았다.
출품가를 정하여 계약했던 단계는 이미 끝났기에 영상에 담을 수 없지만.
협의하는 과정을 촬영하여, 자료 화면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내 정면에 캠코더가 있고.
그 캠코더는 내 눈을 또렷이 응시했다.
카메라가 낯설지는 않다. 네모튜브에서 매주 2번씩 녹화했으니까.
근데,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카메라 앞에 벌거벗겨진 기분이었고, 약간 겁도 났다.
조금도 가리는 거 없이 내 얼굴이 정면으로 나간다는 게.
“컷! 됐습니다.”
오 대리는 제대로 찍혔는지 영상을 보면서 내게 물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영상에 표정이 좀 굳어 있는데.”
“아……. 그래?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려 했는데. 그럼 다시 찍어야 해?”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사장님이 배우도 아니고……. 날것의 표현이 너튜브 영상의 장점이기도 하니까요.”
“…….”
“아마 독자님들도 네모의 신님이 얼굴 보이고 촬영하는 게 어색해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주실 겁니다. 아마 더 좋아하실지도 모르죠.”
“더 좋아한다고?”
“네, 초창기에만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니까요.”
그때 김지안이 다가왔다.
“사장님, 손 내미세요.”
“손은 왜?”
“매니큐어 바르셔야죠.”
“매니큐어?”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묻자, 김지안은 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예요? 이 영상 왜 찍는지 잊으셨어요?”
“아니~, 아는데. 근데 매니큐어를 발라? 내 손에?”
“당연하죠.”
“그냥 자막이나 말로 광고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세요. 그런 식으로 대충하면 안 되죠. 돈을 얼마 받고 하는데.”
꿀꺽.
상상만 해도 등에 소름이 돋는다.
내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른다고?
그리고 영상을 찍는다?
목표는 300만 뷰인데?
“작가님, 광고 찍으세요? 남자가 매니큐어요? 흐흐.”
이정수 팀장이 어색하게 입만 웃으며 말했다.
하아……. 지금이라도 광고 무를까.
이건 좀 아닌데.
계약할 때 가슴 한구석에 들었던 의구심은 다른 게 아니라…… 이거였나?
김지안은 가방에서 매니큐어를 꺼내는데.
젠장. 민트색이었다.
“야! 너무 튀잖아!”
“가장 튀는 거로 해야죠.”
“아니야! 그건 아니야!”
“빨간색으로 해요?”
“됐고. 가방 줘 봐.”
난 기다리지 않고, 김지안이 방금 매니큐어를 꺼낸 가방을 뒤졌다.
붉은색, 파란색, 검은색…….
정말 하나같이 튀는 색깔밖에 없었다.
한참을 뒤지다가, 다행히 그나마 나은 걸 발견했다.
“이걸로 해.”
내가 집어 든 건 핑크 베이지색. 그나마 손톱 색깔과 유사했다.
“이건 좀…….”
“아니야! 그걸로 해! 그거 아니면 나 안 찍어.”
오 대리는 이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하. 사장님이 은근 수줍음이 많으시네.”
“오 대리, 그러지 말고, 같이 할래?”
“…….”
오 대리는 곧바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휴우―.”
김지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쉬고는 연출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잠시 후. 이정수 팀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팀장님, 이해하셨죠?”
“아……. 이해는 했습니다만, 그냥 협조해달라는 거 아니었습니까? 이건 너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거 같은데.”
이정수 팀장은 난감해하는 표정이었으나, 내 얼굴을 살피고는 바로 수락했다.
김지안은 내 손에 꼼꼼히 매니큐어를 발라주었고.
준비가 끝나자, 오 대리는 캠코더를 들었다.
“자, 그럼 두 분 스탠바이하시죠.”
* * *
하이~, 큐!
남자 손 치고는 가늘고 긴 강태평의 손이 나타났다.
‘할아버지의 일생’을 더듬는데.
그의 가늘고 긴 손끝에 유난히 광택이 반짝이는 핑크빛 손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제 작품……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네모의 신님. 그런데…….”
‘할아버지의 일생’을 주시하고 있던 이정수 팀장의 초점이 강태평의 손톱으로 바뀌고 있었다.
“작품만큼이나 손톱이 멋지시네요.”
“아~, 이거요?”
강태평은 허공을 보며 뭔가 읽어가는 것 같았지만, 더듬거리거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이번에 웰시페니에서 한국에 런칭한 비건 네일 매니큐어인데요. 제가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이 매니큐어 덕분에 손톱을 지킬 수 있었어요. 아, 물론 팀장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도 있고요. 후훗.”
말 뒤의 웃음소리는 많이 어색했다.
“아, 그래요?”
“그럼요~. 비건 매니큐어라서인지, 진짜 신기한 건, 냄새가 안 난다는 거예요. 매니큐어 바를 때 창문부터 다 여시는 분이나 역해서 못 바르시는 분들에게, 강력추천!”
“아~, 냄새가 안 나는구나. 저도 우리 마누라 매니큐어 바를 때는 다른 방으로 피해 있거든요.”
두 사람의 어색한 대사는 계속되었다.
“또 좋은 점이 있는데요. 그건 바로 아세톤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지우고 싶을 때는 그냥 스티커처럼 떼어내세요. 저는 매니큐어 바르고 지저분해져도 아세톤으로 지우는 게 귀찮아서 그냥 둔 적이 많았는데. 이건 아무 데서나 그냥 떼어내기만 하면 돼서 너무 편해요~.”
“평소에 자주 바르시나 봐요?”
“네?”
대본에 없는 이정수 팀장의 말에 강태평은 당황했고.
이정수 팀장 또한 무심결에 튀어나온 본인 말에 당황했다.
“흠! 자~, 팀장님도 한번 발라보시죠. 좋아하실 거예요.”
“하하. 그럴까요?”
두 사람은 사이좋게 웃었고.
이정수 팀장의 새끼손가락에 강태평은 매니큐어를 발라주었다.
“우와~, 진짜 냄새가 안 나네~.”
“컷!”
이정수 팀장의 마지막 대사로 영상 촬영은 끝났다.
“하아~ 젠장.”
컷 소리와 동시에 강태평은 민망함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토닥. 토닥.
“사장님, 돈 벌어먹는 게 그런 거죠. 잠깐이에요. 괜찮아요.”
“이거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그 말에 김지안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사장님. 협찬 광고는 광고임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게 좋아요. 그래야 논란이 안 생겨요.”
“…….”
“광고임에도 마치 광고가 아닌 것처럼 나오면, 구독자를 기만하는 거 거든요. 특히나 PPL은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커서 조심해야 돼요.”
“알았어. 알았어~!”
강태평은 이정수 팀장한테 말했다.
“아까 애드리브예요, 뭐에요? 왜 갑자기 매니큐어 평소에 많이 바르냐고……. 대사에도 없던 말씀을…….”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몰입했습니다.”
오 대리는 웃으며 말했다.
“그 부분은 제가 적절히 편집할 테니까. 염려 마세요. 사장님.”
“확실하게 해. 오해받기 싫어. 나 평소에 매니큐어 안 발라.”
“하하. 네.”
그때 옆 섹션에서 걸걸한 남성 목소리가 들렸다.
“이 팀장~.”
얼굴이 길쭉하고, 눈썹에 새치가 많은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아, 성 팀장님.”
이정수 팀장은 성 팀장이라고 불린 사람에게 인사했다.
“그렇게 고집부려서 듣보잡 작품을 심의 통과시킨 것도 모자라서 first zone에 위치시키고. 후달려?”
“…….”
“왜 회사에서 알바를 뛰고 그래?”
풉.
이 말에 칸막이 너머에서 다른 직원의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렸다.
이정수 팀장의 얼굴은 썩어들어갔고.
강태평은 궁금하여 이정수 팀장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미술경매 1팀, 성 팀장님이세요.”
강태평은 이 건물에 들어왔을 때, 탕비실에서 직원들이 하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저 양반이 1팀장이구나. 직원들이 또라이라고 부르던.’
성 팀장은 이정수 팀장에게 물었다.
“옆에 손님은 누구셔? 저 장난감은 왜 꺼내 놓은 거고?”
그가 말한 장난감은 ‘할아버지의 일생’을 지칭한 듯했다.
이정수 팀장은 대답했다.
“이 작품의 작가님이세요.”
“아~, 그래? 아이고~,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옆에 계신 줄도 모르고.”
강태평은 성 팀장의 인사를 마지못해 받았다.
“반갑습니다. 성민식 팀장이라고 합니다.”
강태평은 그가 건넨 손을 맞잡으며 같이 인사했다.
“네, 반갑습니다. 전 강…….”
강태평은 본인 이름으로 소개하려다가.
피식 웃고는 다시 말했다.
“전 네모의 신이라고 합니다.”
‘네모의 신’이라는 소개에.
성 팀장의 동공은 대번에 커졌다.
“뭐,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