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96화 (96/156)

이게 평가라고? (1)

* * *

한국시가감정협회, 회의실.

붉은색 운용지로 만들어진 아홉 개의 종이 모형.

머리카락, 눈가의 주름까지 표현된 디테일함.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운 종이 모형을 보며, 3명의 감정평가사는 고민에 휩싸였다.

“이걸……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한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고, 옆의 다른 두 남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작품인 것은 분명한데, 국내에서는 너무 생소한 분야라서……. 이런 공예품을 감정 해보는 건 처음입니다.”

“그러니까요. 저도 경력 10년 만에, 종이 모형을 감정해 보는 건…….”

한 남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작품이라도 어설프면 가격 책정에 큰 부담을 안 느끼겠는데……. 이건 그런 작품이 아니잖아요.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죠?”

“맞아요. 이건 갤러리에 내놓으면 분명히 이슈될 작품입니다.”

“아오. 이걸 감정을 어떻게 하냐고요. 비교 가능한 작가군도 없고, 종이 모형이 거래된 옥션 데이터도 없고…… 예술성은 알겠는데, 시장 가치를 측정하기가 도저히…….”

“그러니까요. 이런 형태의 시가 감정은 최초고 어쩌면 이번이 기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기준’이라는 말에 감정사들은 표정이 더 굳어졌다.

‘한국시가감정협회’라는 이름으로 감정서가 발급될 것이다.

국내에 감정협회는 여러 곳이 있다.

분명 이슈가 될 작품이기에 그들의 책정한 감정가 또한 나중에 덩달아 이슈될 게 분명해 보였다.

“아무래도…… 좀 보수적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가장 연배가 높아 보이는 감정사가 말했다.

“…….”

“어차피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종이 모형 작품은 첫 사례이기도 해. 무리해서 가격 책정을 높게 하는 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을 거 같단 말이야.”

“하지만…… 예술성은 수석님도 인정하시잖아요.”

다른 평가사들은 그를 수석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신인 작가 기준으로 높게 줄 수 있는 감정가를 넣자고.”

“신인 작가요? 그 기준으로 가기엔 좀…….”

수석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왜? 신인 작가 맞잖아. 이럴 땐 보수적으로 가는 게 좋아. 차라리 나중에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낫지. 괜히 우리가 높게 평가했다가……. 무슨 말인지 알지?”

다른 두 평가사는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 * *

어제 호프집에서 동영상 댓글 반응을 본 후, 우리는 너무 흥분했었다.

특히, 광고 제안 댓글이 불을 질렀다.

답장을 보낸 후, 우리 세 사람은 맥주에 소주를 타 마시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아오, 속 쓰려. 우욱.”

오 대리는 입을 부여잡고 주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에이~, 주방에서 뭐 하는 거야.”

최경리는 그런 오 대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함께 자리에 있었던 난 뜨끔했고. 오 대리를 저렇게 만든 공범인 변 이사가 그를 두둔해 주었다.

“최 과장~, 주방에 안 흘렸잖아~.”

“출근하자마자 화장실 몇 번째예요. 어제 세 분 일하러 간 거 맞아요?”

“…….”

일하러 호프집에 갔었지.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나와 변 이사는 입을 다물었다.

근데, 변 이사 또한 상태가 좋지 못했다.

계속 바람 빠진 트림하며, 억지로 참고 있는 게 보였다.

어제 변 이사와 오 대리는 정말 미친 듯이 달렸다.

브레이크 좀 밟아가면서 달려야 했는데…….

“휴……. 죽겠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아직 점심 영업은 시작도 안 했다.

오후 3시.

혹시나 해서 이메일을 확인해봤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답장은 없었다.

점심 영업을 무사히 마치긴 했지만.

오 대리는 수분이 다 빠져나간 푸석한 얼굴이었고, 변 이사 또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 또한 속이 안 좋긴 했지만, 두 사람은 정도가 심했다.

하지만, 오늘 중요한 일정이 있다.

시가 감정 확인하러 가야 한다.

“오 대리…… 갈 준비해야지?”

“…….”

오 대리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강 사장님, 정말 죄송한데…… 저 여기서 더 무리했다가는 병원행입니다.”

“…….”

“제가 술 좀 먹는데, 아무래도 어제 뭔가 잘못된 거 같아요. 술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웩―.”

그리고는 갑자기 또 입을 틀어막고 주방 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몇 번째 구토인지…….

툭.

변 이사가 내 어깨를 잡았다.

“강 사장님, 오 대리는 집에 빨리 보내야 할 거 같아. 내가 경험해 봐서 알아. 저거 진짜 병원에 가야 할 수도 있어.

“…….”

“혹시 어제 음식이 잘못된 게 아니었을까. 나도 웬만해선 숙취 때문에 이러진 않는데…….”

“아니요. 많이 드셨어요.”

“하하. 그런가? 우욱.”

순간 변 이사의 볼이 볼록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

하아…… 더럽게.

“허허. 자칫하면 쏟을 뻔했네.”

“……. 입 방향 좀 돌리고 얘기해 주십시오.”

“하하.”

변 이사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한국시가감정협회에 감정서 받으러 가야 하거든요. 오 대리 상태가 저러니…… 변 이사님이 함께.”

우욱.

그는 또 볼이 볼록 나왔다가 들어갔다.

아무래도 목구멍에서 뭔가 나왔다가 들어가는 게 확실해 보이는데.

“아~, 미치겠다. 나도 이제 한계인 듯. 방금 뭐라고 했어?”

“…….”

혼자 가야 하나?

직원 한 명 같이 가주면 좋겠는데.

그때 오 대리가 쓰러질듯한 걸음걸이로 주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두 분 어서 집에 들어가시죠. 점심 영업은 끝났으니까.”

“아…….”

두 사람은 뭐라고 대꾸도 못 하고, 그저 한숨 소리만 지었다.

“이 시간에 반차를 쓰기엔 좀 아까운데…….”

변 이사는 충분히 더 버틸 수 있는 사람이다.

두 딸을 가진 아빠의 힘으로.

“반차 처리 안 할 테니까, 빨리 들어가서 쉬세요. 내일 더 열심히 일하시라고 보내드리는 거니까.”

“아……. 사장님 고마워요.”

변 이사도 정말 한계에 도달했는지.

볼 수축 현상이 잦아졌다. 맹꽁이 같았다.

난 불안해져서 빨리 말했다.

“지금 빨리 가세요. 빨리요.”

변 이사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나갔다.

“오 대리도 어서 가.”

“강 사장님…… 그럼 시가감정협회는…….”

“나 혼자 가야지 뭐. 어차피 네모튜브도 오기로 했으니까. 그건 걱정 말고.”

“아……. 너무 죄송한데. 중요한 일인데, 사장님 혼자 보내기가.”

그때 주방 한쪽에서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스윽―.

손을 드는데…… 최경리였다.

“제가 같이 갈게요.”

“아니야. 괜찮아.”

나 재빨리 대답했다.

최경리와 가느니 혼자 가고 말지.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네모튜브도 온 다면서요. 사업 주체에서 혼자 가는 건 좀 아니죠.”

“그래? 김지안 대리, 갈 준비할래?”

최경리와는 가고 싶지 않다. 그것도 단둘이.

“지안이는 제가 시킨 일 있어요. 어서 갈 채비하십시오.”

최경리는 곧바로 핸드백을 들었고, 그 핸드백을 붙잡았다.

“진짜 괜찮다니까.”

“고마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우린 한 팀이니까요.”

최경리는 쿨하게 말하며 주방 밖을 나섰다.

“하아…….”

가기 싫어지는데.

* * *

한국시가감정협회.

“강 사장님~.”

네모 씨가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고, 그 옆에 네모삼촌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정카도 있었다.

“어라? 정카 씨도 왔어요?”

“하하.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요. 촬영해도 되죠?”

정카의 말에 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오늘 촬영해서 사랑산성 클립에 넣으려고 했는데.”

“엇, 정말요?”

정카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하. 장난이에요. 마음껏 촬영하세요. 상관없어요.”

“얏호~, 감사합니다. 근데…….”

정카는 내 뒤에 서 있는 최경리를 보며 물었다.

“로봇 누나 아니세요?”

정카는 밝은 얼굴로 최경리에게 아는 척했다.

“최경리 과장입니다. 호칭 똑바로 해주세요. 지금은 손님이 아니시니까요.”

싸늘한 말투. 최경리다웠다.

덕분에 분위기는 시작부터 안 좋았고, 네모 씨가 눈치를 보다가 내게 살짝 물었다.

“오늘 왜…….”

“오 대리가 아파서 대신 왔어요.”

“아……. 네.”

근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싫은뎅~. 전 로봇 누나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싸늘한 응대에도 정카는 개의치 않고, 밝게 대답했고.

최경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리고 제가 나이가 훨씬 어립니다. 누나라뇨.”

“그럼 로봇 누이라고 할까요?”

“…….”

최경리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런 일은 처음 봤다.

최경리도…… 천적이 있었던 것인가?

최경리가 듣든 말든 정카는 쉴 새 없이 재잘거렸고.

최경리는 말대꾸를 하다가, 맥락없는 무대뽀식 정카의 화술에 포기해버렸다.

“강 사장님…… 빨리 들어가죠. 피곤해지네요.”

“하하. 그래.”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지만, 최경리가 폭발할 수도 있으니 일단 들어갔다.

터벅. 터벅.

우리는 총무과로 향했다. 한 번 왔던 곳이라 헤매지 않고 바로 찾아왔다.

똑똑.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확!

사무실 안에 있는 전 직원이 우리를 바라봤다.

이틀 전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그때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었는데.

“안녕하세요.”

내가 앞장서서 인사하자, 여 직원은 상냥하게 응대했다.

“어서 오세요~. 감정 발급서 받으러 오셨죠?”

여 직원의 태도도 이틀 전과는 너무 다른데?

사람 눈도 안 쳐다보고, 기계처럼 입력된 말만 하던 그 여 직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를 기억하는 건가?

발급서 받으러 왔다는 것도 알고 있고…….

“아, 네. 맞습니다. 오늘 나온다고 했는데. 맞나요?”

“네~, 발급서 나왔습니다. 저희 수석님께서 직접 뵙고 전달 드린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수석님이요?”

“네~, 저희 감정평가사 중 최선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음……. 대략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구나. 근데, 그냥 주면 되지……. 뭘 굳이.

“아. 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녀는 우리를 이틀 전에 정민수 주임과 대화를 나눴던 VIP 룸으로 안내했다.

찰칵.

여 직원은 문을 연 후, 손으로 룸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들어가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감정수수료는 이따 돌아가실 때 결제해주시면 됩니다.”

“수수료가 얼만데요?”

“아……. 그건 수석님께 감정가 들으시면, 바로 알게 되실 겁니다.”

시가 감정가액에 따라서 수수료가 달랐었지.

“그렇겠네요.”

“네, 그럼 대화 나누세요.”

저벅. 저벅.

우리 다섯 사람은 VIP 룸에 들어섰고, 머리가 새하얀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앉아 있었다.

“어이쿠. 오셨군요.”

그는 날 향해 손을 내밀며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감정평가사 김석봉 수석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강태평입니다.”

“하하. 역시, 작가님이실 줄 알았습니다.”

확실히 그는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나만을 향해 걸어왔었다.

신청서에 내가 사진을 부착했던가?

아닌 거 같은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요. 작가님들은 작가님다운 느낌이 있거든요. 하하.”

난 네모삼촌을 돌아봤고.

그는 날 향해 어깨를 으쓱하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네, 뭐, 어쨌든 반갑습니다. 감정 발급서 받으러 왔는데, 수석님께서 뵙자고 하셨다고.”

“아……. 네.”

그는 살짝 입맛을 다시고는.

“오랜만에 대작을 만나서요. 작가님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더욱이 신인 작가라고 들었는데.”

“아……. 네.”

그리고 그는 작품에 대한 찬양을 쏟아내었다. 예술성 가치가 어쩌고, 인물 간 모형이 어떠며……. 현대 공예의 지평을 마련했다는 등…….

고맙긴 하지만 적당히 해야 하는데, 얘기가 10분이 넘게 지속되고 있었다.

“수석님, 그래서 감정가가 어떻게 됩니까?”

듣다 못한 네모삼촌이 중간에 잘랐고. 그 말에 김석봉 살짝 표정이 굳어졌다.

“네……. 그 예술적 가치라는 게, 경제적 가치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감정가가 낮다는 건가?

혹시 그래서 밑밥을 깔았던 건가?

“그래서, 감정가가…….”

네모 씨도 답답한지 물었고.

김석봉 수석은 눈치를 보다가 살며시 말했다.

“5,000만 원…… 입니다.”

5,000만 원?!

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려 하는데.

네모삼촌은 화난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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