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과 의지 사이 (1)
* * *
“뭘 나만 몰라…….”
표정은 감추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했지만.
난 사실 놀랐다.
마음속 한구석에 스스로도 들고 있었던 의구심.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에 답을 알기에, 이런 생각이 들어도 넘어갈 수 있었다.
“이용……. 이용이라.”
하지만 3자의 입으로, 아주 노골적인 단어를 통해 들으니 좀 더 크게 와닿았다.
“…….”
앤더슨과 최경리도 가만히 내 쪽을 보고 있었고.
김지안의 말에 대한 무언의 동의로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 또한 동의하는 의구심이라는 건 무게가 달라진다.
“그렇게 보였단 말이지?”
“보여요? 그냥 그런 거 아니에요?”
김지안은 무슨 의도일까?
그렇게까지 취한 거로 보이지는 않는데.
왜 굳이 할 필요 없는 얘기를 하는 걸까.
“아니, 그렇게 보인 거야. 그걸 네 말대로 이용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나 또한 변 사장님을 이용하고 있는 거고.”
“…….”
“하지만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용이라는 말 대신 ‘의지’라고도 할 수 있지.”
‘이용’이라는 단어에 약간은 당황했었지만, 변 사장에 대한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호오……. 서로에게라.”
내 말에 김지안은 잔을 비우며 웃었다.
“태평 오빠.”
“…….”
“훗.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죠?”
얘가…….
왜 이렇게 자꾸 건드리지.
안 되겠다 싶어서,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그래요. 저는 태평 오빠를 잘 몰라요. 이제 같이 일한 지 한 달도 안 됐는걸요.”
김지안은 내가 말하려던 타이밍을 뺏었다.
“하지만 제 시선에서는 다르게 보이네요. 아, 우리 술자리에서는 각자의 의견은 존중하자고요? 호호. 강 대리님은 의지라고 생각하세요. 전 이용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김지안……. 너 자꾸.”
그녀는 두 손을 들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요. 이제, 그만할게요. 다만…… 전 태평 오빠가 누구 아래 있기에 너무 아까운 사람 같아서 그러는 거예요. 지금처럼 일하고 있는 게 솔직히 이해도 안 되고요.”
“…….”
“어차피 제게 월급 주는 사람은 변 사장님인데, 제가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이런 얘기를 하겠어요. 그냥…….”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또 술잔을 들었다.
“술김에 하는 얘기죠. 호호.”
나이도 어린 게 아주…… 백여시가 따로 없네.
내가 21살 때는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덜컹.
그때 소고깃집 현관문으로 누군가 급하게 들어왔다.
“어이쿠~, 미안하네. 하하.”
변 사장이었다.
“많이 늦었지? 미안. 미안.”
그가 오자마자 최경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셨군요. 이제 2차 가시면 됩니다.”
“2차가 어딘데?”
“봉규비어.”
“…….”
그녀의 싸늘한 대답에 변 사장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최경리~, 나 저녁도 안 먹었어.”
“…….”
“나도 소고기 맛 좀 보면 안 될까?”
“우리는 다 먹었는데요?”
이 말에 변 사장은 우리 눈치를 봤다.
“늦게 오시는 거 여태 기다렸는데, 밥 먹는 것도 기다리라는 말입니까?”
“에이~, 그래도 회식인데.”
최경리는 카운터로 가면서 말했다.
“고기는 포장해서 드릴 테니까, 집에서 구워 드십시오. 지금은 2차로 갑니다.”
역시…… 최경리답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은 하나도 없었기에, 변 사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최경리는 진짜로 고기를 포장해서 변 사장에게 건네었다.
“여기요. 사모님이랑 애들까지 생각해서, 넉넉하게 샀습니다.”
“그래……. 졸라게 고맙다.”
“뭘요.”
그래도 최경리가 잔정은 있구나.
변 사장은 포기한 듯 앞장서며 말했다.
“가자~, 가! 맥주로 배 채워야지. 하하. 어쨌든 늦게 와서 미안~. 아, 김지안 씨?”
“네, 사장님.”
음?! 김지안은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좀 전에 나와 대화하던 건방질 정도의 당돌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첫 회식인데, 많이 먹었나?”
“네, 사장님. 덕분에 많이 먹었습니다. 소고기 몇 년 만에 먹어보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하. 그래. 앞으로 많이 사줄게. 2차 가서 한잔하자고~. 자기 보면 딸 같아서 좀 어려웠거든. 빨리 친해지고 싶어~. 하하.”
실제로도 김지안의 아버지가 변 사장보다 젊은 거로 알고 있다.
“에이~, 딸은요 무슨. 막내 누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호호.”
보면 볼수록 김지안 치는 멘트는 21살의 것이 아닌 것 같다.
확실히 경력자는 다른 것일까.
그때, 앤더슨이 말했다.
“사장님, 저도 오늘 첫 회식이에요.”
변 사장은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최경리, 봉규비어 많이 걸어가야 해?”
* * *
그날 회식 자리는 길어졌었다.
늦게 온 사람 덕에 회식은 2차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이미 취해있는데, 맨정신인 변 사장의 페이스 맞추느라 다시 많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
변 사장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봉규비어에 있는 감자튀김은 혼자 다 먹은 것 같다.
혹시 김지안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다른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1차 회식은 각자 놀았다면, 2차 회식은 변 사장의 이야기를 듣는 위주로 진행되었다.
나중에 술 취한 변 사장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강 대리, 고마워.]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 빚진 사람처럼 계속 이 말을 되풀이하는데,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정말 고마워, 강 대리.]
변 사장에게 그런 소리 말라는 말을 계속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고맙다’라는 말을 들을수록 1차 때 김지안에게 들었던 ‘이용’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올랐다.
일주일이 지났다.
제로백 컴퍼니가 런칭한 후 세 번째 월급날.
띠링!
월급과 성과급이 들어왔다.
‘성과급 : 2,500만 원’
인원수가 한 명 더 늘어나서, 성과급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난달과 동일했다.
이런 큰 금액도 연속으로 받으니 덤덤해진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그때, 주방 한쪽에서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오! 마이 갓!”
“어머! 대박!”
첫 월급을 받은 앤더슨 오와 김지안은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최경리~, 설명은 자기가 좀 해줘.”
그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변 사장이 말했다.
항상 손님은 많고.
매출도 좋고, 이익도 좋고.
새로운 직원들은 적응 잘하고 있고.
프랜차이즈도 잘되고.
좋은 기업으로 칭송받고 있고.
심지어 주변에 경쟁자도 없어서, 아무리 장사가 잘돼도 주변 상권을 해치지도 않는다.
정말…… 모든 게 순탄하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들이 말도 안 되게 좋다.
“강 대리.”
변 사장은 내 옆으로 살며시 다가와 말했다.
“네?”
“안전벨트 꽉 매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아.”
“…….”
“너무 잘 되니까. 좀 불안하다.”
난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불안할 게 뭐가 있어요.”
변 사장은 갑자기 내 손을 꼭 잡았다.
“혹시나 말이야. 나 예전과 달라진 게 있나?”
“네?”
뜬금없는 질문에 무슨 소린가 싶어서 반문했다.
“…….”
변 사장은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아니요. 달라지신 것 없어요.”
“거만해졌다거나, 고마워할 줄 모른다거나…… 그런 거 정말 없어?”
“네. 그런 거 없어요. 다만…….”
“다만, 뭐?”
변 사장의 물음에 난 살며시 웃으며 답했다.
“간혹 비즈니스 하실 때보면, 내가 알던 변 사장님이 맞나 싶을 때가 있긴 해요. 그건 사업이 잘돼서 변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 같긴 하지만요. 하하.”
“음……. 혹시 나쁜 의미?”
“아니요. 좋은 의미입니다.”
변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다행이네. 강 대리…….”
“네.”
“혹시라도 내가 길을 잃거든, 옆에서 꼭 말 해줘야 해. 풍랑 속을 항해하는 선장은 항로만 보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일등항해사는 좀 더 먼 시야에서 바다를 살피거든.”
난 이렇게 잘되는 상황에서도 불안해하는 변 사장의 말이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걱정 마십시오, 변 선장님. 하하.”
“그리고 만약 나에게 서운한 게 있거나, 의구심이 들면…….”
의구심?
“꼭 내게 허심탄회하게 말해주고.”
“…….”
“심각하게 들어야 해. 우리는 잘되고 있기 때문에, 분명 많은 시험이 찾아올 거라고.”
시험이라……. 성당에서 많은 들었던 표현인데.
아, 변 사장은 교회 다닌다고 했었지.
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그만 걱정하시고, 일 보시죠. 근심, 걱정 말라는 주님 말씀…… 잊으셨습니까?”
“엇?”
내 말에 변 사장은 환하게 웃었다.
“역시~ 뿌리가 같으니까, 통하는 게 있구만? 하하.”
변 사장은 손을 흔들고는 주방 밖으로 나갔다.
난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변 사장은 제로백 컴퍼니의 수장이다.
항상 평온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지만, 난 직원 중 유일하게 그의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가 팀장일 때는 그의 위에 또 책임져줄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사장인 지금은 다르다.
그래서 시험, 불안을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며,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장이기에 느끼는 책임감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뒤.
이상한 조짐은 찾아오고 있었다.
* * *
점심 영업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
복도에서 설수민을 마주쳤다.
“어머, 강 대리님.”
“엇,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근무 시간이 다르다 보니, 마주칠 일이 잘 없다.
여전히 아름다운데, 분위기는 좀 달라졌다.
얼굴이 좀 더 밝아졌고, 활기찬 느낌이랄까.
“가끔 식사하러 오시지. 오픈 끝나니까, 바로 너무 모른 척하시는 거 아니에요?”
컨설팅할 때는 매일 보던 사이였으니까.
“에이~, 바쁘실 텐데, 귀찮게 해드리면 안 되죠. 아, 맞다.”
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즘 너튜브 잘 보고 있습니다. 인기가 장난 아니시던데요?”
“어머, 호호.”
설수민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강 대리님도 보셨어요? 옷 좀 더 야한 거 입고 나와야겠네?”
“하하.”
설수민의 농담에 난 기대하는 마음으로 웃고 말았다.
“농담이고요~. 그거 제가 하는 것도 아닌데요. 아시죠? 좋아해 주시고, 성원해 주시는 고객님들에게 감사할 뿐이죠.”
요즘 설수민은 정말 잘 나간다.
눈부신 외모 덕에 방송 출연 제안도 받고 있는 거로 알고 있다.
“그럼 수고하세요~. 담에 또 뵐게요.”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치려 하는데.
“아, 맞다.”
설수민은 가려던 날 불러세웠다.
“네?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설수민은 주변을 빠르게 살핀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만나셨어요?”
“네?”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서 되물어 보자, 설수민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 안 만난 거예요?”
“네? 누구를요?”
“이 사장님, 뭐야. 아직까지도 얘기 안 한 거였어?”
설수민은 인상을 쓰며 투덜댔다.
“흠……. 아니에요. 알았어요. 얘기 끝나면 저한테도 살짝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설수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고.
뭔가 싶어서 갸우뚱하고 있는데.
위이잉―.
그때,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민경원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