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72화 (72/156)

이용과 의지 사이 (2)

* * *

위이잉―.

[민경원 사장]

민 사장에게 전화 오는 경우는 잘 없다.

아니, 그냥 없다.

몇 달 전 퇴사한다고 했을 때, 날 붙잡기 위한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그때 일이 떠올라서일까.

핸드폰 창에 뜨는 ‘민경원 사장’이라는 표시에 거부감이 확 들었다.

위이잉―.

전화를 안 받을까 하다가.

그래도 사장님이니까. 받기는 해야겠지.

[네, 강태평입니다.]

[여어~. 강 대리~, 오랜만이야.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끊으려고 했잖아. 하하.]

[아, 죄송합니다.]

[그래~, 잘 지내고 있지?]

[……. 네.]

단순히 안부 전화할 사람은 아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난 신중히 전화를 받았다.

[강 대리?]

[네.]

[뭐야, 전화 받자마자 끊을 줄 알았잖아.]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거참 딱딱 하구만.]

[…….]

잠시간 아무 말도 않다가, 민 사장은 살며시 말을 꺼냈다.

[통화로 할 얘기는 아니고, 우리 잠깐 보지?]

[제가 좀 바빠서요. 죄송하지만, 전화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에이~, 왜 그래. 오랜만에 얼굴도 좀 보고 사는 얘기도 좀 하면서.]

별로…… 만나고 싶지 않다.

[이번 주에 사무실 들어오나?]

[아니요. 이번 주는 안 들어갑니다.]

[다음 주는?]

[다음 주도요.]

이렇게 대놓고 노골적으로 피하는데도, 민 사장은 끈질겼다.

실제로 난 사무실을 잘 들어가지 않는다. 촬영장과 사랑산성만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민 사장이 보자고 하니, 당분간은 더 안 갈 생각이다.

‘하아, 씨바.’

수화기 멀리 민 사장이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 대리~, 많이 바쁘구나?]

그는 화를 억누르며 말을 했다.

[그럼 우리 저녁이나 같이하지? 밥은 먹을 거 아니야?]

요즘 1일 1식 한다고 말할까 하다가…… 그건 좀 오바인 것 같아서 참았다.

[회사 근처에서 어때?]

[당분간 회사 갈 일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강남역에서 볼까?]

[저 집이 강북입니다.]

‘하아……. 두 놈이 아주 쌍으로…….’

민 사장의 혼잣말이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사장님, 흥분하지 마시고요. 그러니까, 전화로 얘기하자니까요.]

[휴우……. 나 흥분 안 했어. 강 대리 집에서 가까운 역이 어디지?]

[가까운 역 없습니다. 역세권에 안 살아서요.]

[그럼 회사에 걸어 다녀?]

민 사장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느껴졌다.

[…….]

[출근할 때 어디서 전철 타나?]

집요하다.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수유역에서 탑니다.]

[그래, 그럼 오늘 저녁 수유역에서 좀 보지.]

[오늘 저녁에 약속 있는데요?]

[그럼…….]

민 사장은 언제 시간 되냐고 물으려다가 멈추는 것 같았다. 아마도 대화가 도돌이표가 될 거라고 짐작한 거겠지.

[수유역 근처에서 기다릴게.]

[…….]

[강 대리가 올 때까지.]

도대체 뭔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끈질기게.

확실히 사장다운 면모가 있긴 하네.

목표한 게 있으니, 아주 집요하다.

[혹시 외박하게 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가 집요하게 나올수록,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적당히 좀 하자……. 나 강 대리 다니는 회사 사장이야.]

[…….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민 사장은 전화를 끊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얘가 낫지.”

휴우―.

그는 한숨을 쉬고, 며칠 전 설수민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 * *

양재역의 한 카페.

환한 오후에 화려한 호피 무늬 원피스 차림에 카페로 들어오는 미모의 여성.

만난 적은 없지만, 민 사장은 그녀가 설수민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설수민 사장님?”

민 사장의 부름에 설수민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민 사장을 내려다봤다.

“민경원 사장님이세요?”

“하하. 네, 맞습니다. 앉으시죠.”

설수민이 앉은 뒤 민 사장은 명함을 건네며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진일그룹 대표 민경원이라고 합니다.”

“아, 네. 전 설수민이라고 해요. 죄송한데, 전 명함이 없어서.”

“하하. 괜찮습니다.”

설수민은 명함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물었다.

“진일 그룹 대표님께서 절 어인 일로……. 진일상사가 제로백 컴퍼니의 모회사 맞죠?”

“하하. 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요, 저와 식구들의 운명을 건 회사인데, 그 정도는 알아야죠.”

“그래요? 그렇다면 사장님께서도 관계자들에 대한 어느 정도 파악을 하셨겠네요.”

민 사장의 의미심장한 말에 설수민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파악이요?”

설수민의 물음에 대답 대신 민 사장은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변성준 사장을 어떻게 보십니까?”

“…….”

갑자기 변 사장의 이름을 거론하자, 설수민은 당황했다.

“어떻게 보다뇨? 그냥 사업 파트너로 보고 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보시나요?”

“…….”

“음흉해 보이지 않습니까?

설수민은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차라리 이럴 때는 돌직구가 낫다고 판단했다.

“혹시 부하직원 뒷담화하고 싶어서 저 만나자고 하신 건 아니죠?”

“하하. 아닙니다.”

“그럼 떠보지 마시고, 하고 싶은 말 하세요.”

“제가 이렇게 물어보는 이유는…….”

민 사장은 눈을 빛내었다.

“설 사장님이 사리 분별이 명확한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계신지…… 확인하고자 여쭤봤습니다.”

“그걸 제가 왜 확인시켜드려야 하죠?”

“그래야 앞으로 함께 일할 수 있을지 판단이 되니까요.”

설수민은 잠자코 있다가 한마디 던졌다.

“글쎄요. 뜬금없는 말씀을 하셔서 좀 혼란스럽긴 한데……. 어쨌든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민 사장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딱히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말을 마치고 설수민은 생각했다.

‘변성준 사장이 음흉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 어쨌든 속을 모를 사람이니까.’

민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설 사장님과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전 제로백 컴퍼니 사장을 바꿀 생각입니다.”

“…….”

“제로백 컴퍼니는 자회사이지, 독립회사가 아닙니다. 모회사와 협의 없는 독단적인 경영 방침을 더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설수민은 놀랐지만, 일단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변 사장은 지금 성공의 영예를 독차지하고 있죠. 사실 내막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강태평 대리가 주축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

“하지만 변 사장은 강 대리를 드러내지 않고, 꼭꼭 숨기며 이용만 하고 있죠. 언론 인터뷰도 본인이 다 하는 거…… 보셨잖아요.”

이 말에는 설 사장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글쎄요……. 강 대리님 오픈되는 걸 번거롭고 싫어할 수도 있는 건데.”

민 사장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내 바로 아래 직원은 아니지만, 저도 강 대리를 오래 봐왔습니다.”

“…….”

“강 대리는 기본 성향은 그렇지 않습니다. 변 사장에게 세뇌당하고 있는 거라고요.”

“세뇌요?”

“네,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인식 못 할 정도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설수민은 민 사장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그의 말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이게…… 본인이 원하는 삶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거죠.”

“…….”

설수민은 혼란스러워지려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고민하지 말자, 어차피 내 회사 일도 아니잖아?’

“글쎄요. 전 모르겠고요. 대표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적절한 조치를 취하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래서 설 사장님을 뵙자고 했습니다.”

설수민은 이제 민 사장이 무슨 말을 할지, 약간 두려워졌다.

“첫째, 제로백 컴퍼니의 주인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사전에 고지 드리는 거고요. 흔들리지 마시라고…….”

꿀꺽.

설수민은 침을 삼켰다.

“둘째로는 새로운 주인은 설수민 사장님과 사랑산성의 직원들이 신망하는 인물이 될 테니, 이 일에 적극적으로 지지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자 함입니다.”

설수민의 그의 두 번째 말을 곰곰히 생각했다.

‘그런 사람은 딱 한 한 명밖에 없는데……. 설마 그 사람을?!’

“제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면…….”

듣는 귀가 있을지 모르지, 그 인물의 이름을 두 사람 다 거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서로가 짐작하고 있다.

설수민은 민 사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분이라면 도와야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 * *

수유역 도착.

민 사장이 만나자고 한 저녁.

그에게 저녁 약속이 있다는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늘은 네모튜브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어느덧 저녁 9시가 다 되었다.

전철역 출구 앞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는 민 사장이 보였다.

‘9시 10분.’

지금 시간을 보았다.

9시 15분에는 일어나야지.

덜컹.

커피숍 안으로 들어서자, 민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날 맞이했다.

“여어~, 강 대리. 하하.”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참 신기하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게 느껴졌다.

이래서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하는 건가?

“그래~ 정말 오랜만이야.”

그는 웃으며 계속 서 있었다.

내가 앉은 뒤에 앉을 셈인가? 왜 이렇게 얼어 있지? 민 사장답지 않게.

“앉으시죠?”

“응? 어어.”

테이블 위에 바닥을 드러낸 커피잔을 보았다.

오래 기다렸나 보네.

“식사는 하셨어요?”

“응~, 대충 때웠어~.”

“오래 기다리신 거 같은데……. 왜 그러셨어요. 담에 보면 될걸.”

“아니야~. 말 나온 김에 한번 봐야지.”

아직 3분도 안 지났다.

지금까지 기다린 걸 생각해서, 관심은 없으나 조금은 잡다한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좀 사회성을 키워볼 생각이다.

“사장님 집이 어디시죠?”

“응~, 저기~ 강동구.”

머네?

“빨리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그러지 마. 이제껏 기다렸는데, 만나자마자 자꾸 왜 보내려 그래.”

“아……. 이번엔 그런 뜻 아니었는데.”

“…….”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약간 미안한 감정이 생겼다.

뭐 때문에 이렇게 애를 쓰는 걸까?

너무 저자세로 나오니, 업체 사장님 만난 기분이다. 그룹 회장이자, 모회사 사장님이 아니라.

“사장님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으시죠?”

“…….”

“열심히 들어 드릴 테니까, 말씀해 보세요. 제가 미안해서 그래요.”

“음……. 자네 변 사장과 사이좋나?”

“네?!”

“…….”

“사이요? 나쁠 게 없으니 좋은 거겠죠?”

“아~, 그래?! 그렇구나~.”

그리고 또 한참을 뜸 들였다.

아니, 이 아저씨가 방문 판매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안 어울리게 왜 이럴까.

“민 사장님,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

변 사장을 대할 때보다, 나를 대하는 모습이 더 어려워 보인다.

‘9시 15분.’

5분 지났다.

이 상태로 있다가는, 목표했던 시간을 훌쩍 지날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진도를 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얘기할까요?”

“…….”

“변 사장님 내치시려는 거 아니에요?”

“으…… 으응?! 뭐?!”

눈알이 빠질 듯, 크게 눈을 뜨고 날 바라보았다.

“그, 그걸 어떻게.”

“뻔하죠, 뭐…….”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아니길 바랐는데, 역시네요.”

“가, 강 대리…….”

난 인상을 쓰고 민 사장을 보며 물었다.

“왜 내치시려고요? 배 아프셨어요? 아니면 수익 20%가 성에 안 차셨어요? 아……. 둘 다겠네요.”

“…….”

민 사장은 벙어리가 되어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후임자로 누구 세우시려고요? 설마 저 강태평일 거라는…… 그런 뻔한 전개는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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