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2화 (12/300)

#012. 용사가 삼키는 것 (3)

[HP 3,401/3401]

모두가 나를 ‘흙 먹는 7번 방장’이라며 딱지를 붙이고 관심이 식어가던 일주일째.

나는 화룡도의 모든 죄수들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수치의 HP를 갖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다이몬 키리스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7번 방장, 내게 상담할 것이 있다고?”

“응. 정확히는 부탁할 게 있어.”

“뭐지?”

상태창의 스탯을 오랫동안 연구해봤을 때 HP가 의미하는 것은 일반적인 수명치만은 아니었다.

성실히 노역하는 다른 죄수들을 관찰해보면 그들의 체력이 조금씩 깎여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임 속에서는 누군가 공격해야만 소모되는 HP가 이곳에서는 스태미나의 의미도 겸비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내 상태창의 항목에는 ‘공격력’과 ‘방어력’ 스탯이 없었다. 추측해보건대 근력이 공격력에 영향을 줄 것이고, HP가 방어력에 영향을 줄 것 같았다.

물론 이런 가정을 확인하려면 실험이 필요하다.

164의 근력 스탯을 가진 다이몬은 내게 아주 좋은 실험 도우미였다.

“있는 힘껏 나를 한 번 때려줘.”

“……왜 그런 부탁을 하는 거지? 흙을 먹는 거로는 자해 효과가 부족했나. 물리력만으로 이 층에서 나를 꺾을 사내는 층장뿐이야. 온 힘을 해방해서 너를 때리면 죽을 텐데. 100년의 형량을 추가로 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고지식한 사내답게 역시 명분을 줘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외쳤다.

“이봐, 교도관! 이건 분명히 내가 먼저 요청해서 일어나는 일이야. 다이몬의 공격으로 죽어도 전혀 불만이 없으니 그에게도 책임이 없는 거야. 맞지?”

곧바로 음성이 들려왔다.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그는 삵’이 7번 방장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교도관이란 존재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지만 분명 음흉하게 내가 하는 짓을 다 훔쳐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음침한 족속이라면 르팔타커스의 축복을 받은 내가 어떤 속셈으로 흙을 계속 퍼먹었는지 궁금해 하고 있지 않을까? 고민도 없이 죄수의 건의를 바로 수락해준 걸 보니 추측이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던 다이몬은 어깨를 몇 번 풀더니 내게 다가왔다.

“교도관이 담보해 준다면 좋아.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 한 번 어울려 주지, 슈바인.”

그가 다리를 들어 진각을 내밟았다.

다음 순간.

나는 사바나 초원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코뿔소 앞 영양의 심정이 되었다.

“그럼 전력으로 간다.”

주먹을 뒤로 당긴 채 짓쳐들어오는 다이몬의 풍모는 그야말로 역발산기개세. 그가 내딛는 지면이 움푹움푹 패이고 있었다.

다이몬이 가까이 오자 그의 육신에 내재돼 있는 파괴력이 간접적으로 느껴져 솜털이 일어서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만전불패의 체술’을 발동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그의 주먹을 피해내서는 안 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몬의 전력을 다한 펀치가 나를 후려갈겼을 때는 좀 만만한 놈한테 부탁할 걸 하고 후회가 되긴 했다.

뻐어어어억!

다이몬의 주먹에 가슴을 맞은 나는 벽을 1미터 정도 파고들어 간 다음 축 처졌다.

“이런. 역시 힘을 좀 뺄 것 그랬나. 7번 방의 녀석들은 또 새 방장을 뽑아야겠…… 응?”

다이몬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걸어 나오는 나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기분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HP 2,894/3,401]

한 방에 500이 넘게 깎였다.

실로 대단한 파괴력.

그러나 분명 차카의 무릎에 얻어맞았을 때보다 몸이 느끼는 고통은 훨씬 덜했다. 내 추측대로 맷집 역시 말도 안 되게 강해진 것이다.

“이럴 수가. 힘을 감춰뒀었던 건가, 슈바인? 차카와의 싸움에서 그런 기미는 없었는데.”

그에게 실험을 부탁한 이유는 단순히 물리 공격력이 강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의 입 또한 무거울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이몬의 어깨를 툭 치며 7번 방의 죄수들에게 돌아갔다.

“이건 비밀로 해줘, 다이몬.”

물론 이쯤에서 HP 스탯 업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다이몬이 강력한 죄수 군에 속한다 쳐도 그 역시 최하층인 화룡도의 죄수일 뿐이니까.

‘나는 계속 강해질 거야.’

물론 화룡도에서 물리 공격력이 가장 강한 죄수가 전력으로 때려도 단번에 즉사하지 않을 체력과 맷집이 생겼다는 것에 기뻐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입술이 씰룩이는 걸 멈추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웃음이 멈추지 않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지.’

누구도 보는 이가 없는 한적한 공터.

나는 몰래 인벤토리를 열었다.

시선이 가 닿은 곳은 무기창이 아니라 소모성 아이템을 넣어놓는 칸이었다. 거기엔 사용하기에 따라서 내가 강해지는 데 굉장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아이템이 있었다.

“이걸로 스탯업 속도를 세 배로 올린다.”

나는 동그랗고 탐스러운 그것에 손을 뻗었다.

*

화룡도에 흙의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분명 나를 흉악한 사역마라고 낙인찍었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흙을 퍼먹으면서 토양을 고갈시켰으니.

하지만 나의 그런 짓거리는 곧 벽에 부딪, 아니 땅에 부딪히고 말았다.

“슈바인!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로 서 있는 거냐? 켈켈.”

스켈레톤 비르카가 저 멀리서 내게 발을 흔들었다. 어째서 손이 아니라 발이냐면, 무릎 아래가 빠진 오른쪽 발을 왼손으로 들고 흔들었기 때문이다.

“없어. 다 바닥났어.”

“뭐가 없는데?”

“내 스탯 업 식량…… 아니, 흙이 바닥났어.”

그 말대로였다.

7번 방의 채석장에는 이제 더 내가 씹어먹을 만한 고운 토양이 남아 있질 않았다. 딱딱한 암석층만이 헐벗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

“비르카, 우리 7번 방은 왜 이런 구석탱이에 자리를 잡은 거야?”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약해서군. 그렇지?”

“켈켈켈켈.”

녀석은 민망한지 고개를 젖혀 웃었다.

어차피 나도 인정하는 바다. 모든 방의 죄수들이 우리를 멸시하는 눈으로 본다는 것도 눈치 못 챌 바보는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건 내가 방장을 맡기 전에 쌓인 7번 방의 위상이다. 이 차별과 무시를 곧 내 손으로 박살내고 말겠다.

“다른 방의 작업 구역에 대해서 알려줘. 되도록이면 암석이 많은 곳 말고 토양이 풍부한 곳으로 말이지.”

잠시 후.

나는 12번 방장 이자나르의 앞에 서 있었다.

머리카락과 눈썹이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는 오크였다.

“우리 12번 방의 작업 구역과 너희 작업 구역을 바꿔 달라고?”

“응. 야불타에게 물어봤더니 방장끼리 합의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던걸.”

이자나르가 콧김을 내뿜자 화염방사기에서 분출될 법한 거대한 불길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불의 정령이 오크를 범해 낳은 혼혈답게 이자나르가 내뿜는 기운은 굉장했다. 아마 디멜 같은 잭 프로스트는 이 12번 방장의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리라.

“합의라. 웃기는 말이군. 이 화룡도에 그런 보송보송한 단어는 빙수 과자만큼이나 안 어울리는 단어라고.”

“너희가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아?”

“이득 볼 일도 없지. 그리고 열여섯 개의 방마다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있는 건 알고 있나? 참고로 내가 있는 12번 방은 세 번째야.”

기억을 되짚어 보자.

보안관 역할을 하고 있는 다이몬의 2번 방, 그리고 좀비 죄수들의 두목인 레이스 오르콰이움의 4번 방 다음이란 얘기다.

이자나르에게 있어 화룡도라는 환경은 상어에게 있어 대양처럼 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12번 방장의 서열이 높은 것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상황이다.

비르카의 이야기대로다. 뭐, 나머지 방장의 서열이야 까먹었지만 꼴지가 우리 7번 방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자나르는 여전히 거드름을 피웠다.

“그런 이 몸이 너희 낙오자 집단과 작업 구역을 바꾼다? 내게는 손해가 막심한 이야기지. 다른 녀석들이 내가 7번 방장 놈에게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할 테니까. 맨입으론 안 되는 이야기야.”

녀석의 마지막 말을 난 놓치지 않았다.

‘맨입’으론 안 된다.

“오호. 그 말인즉슨 뇌물을 주면 불가능할 것도 없단 이야기군.”

대화는 내가 생각했던 방향대로 흐르고 있었다.

이자나르는 팔짱을 끼며 조소를 날렸지만 분명 흥미가 생긴 얼굴이었다.

“하룻밤 사이 화룡도에 장터라도 열렸나 보지? 내가 좋아할 만한 뇌물이 뭔지 네깟 녀석이 무슨 수로 알 것이며, 설사 알아냈다 해도 이 감옥 안에서 그걸 어떻게 구한단 말이냐.”

나는 씨익 웃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미리 다 알아보고 너에게 접근했단다, 불로 트림하는 혼혈오크야.

직거래할 물건이 있고 구매자가 있다면 우주 어디든 장터가 열릴 수 있는 거지.

“있어. 네가 보기만 해도 환장할 만한 물건이. 하지만 그걸 꺼내기 전에 너희 방 죄수들을 잠깐 치워주지 않을래? 방장 대 방장. 단둘이서만 협상하고 싶거든.”

그러자 이자나르 뒤를 지키고 있던 덩치 큰 죄수가 이빨을 드러냈다.

“방장! 집어치우쇼. 이 새끼 하는 짓이 뭔가 수상해.”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이 화룡도의 방장이란 족속들은 소위 ‘가오’로 먹고 사는 녀석들일 것이다. 그런 부류는 나 같은 약골의 독대 신청을 함부로 거부할 수 없다.

퍼억.

예상대로 이자나르는 그 말을 꺼낸 죄수의 복부를 걷어찬 다음 으르렁거렸다.

“누가 너에게 감히 충고 따위를 하라고 했나.”

“아, 아니. 나는 방장이 걱정돼서…… 끄아악!”

쯧쯧. 저거 영 눈치가 없는 놈일세.

그 죄수는 더욱 화가 난 이자나르의 발길질에 두 번 더 얻어맞아야 했다.

“걱정? 걱저어엉?”

12번 방장은 녀석의 머리채를 움켜잡은 다음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이자나르의 일렁이는 불꽃 머리카락이 두들겨 맞은 죄수의 눈썹을 그슬리게 만들고 있었다.

“네 눈엔 내가 저 비리비리한 놈과 단둘이 있으면 걱정이 될 만큼 약해 보이나. 응?”

“아, 아니야 방장. 잘못했어. 살려줘어.”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내가 부르기 전엔 오지 마라.”

결국 이자나르는 다른 죄수들을 모두 물리고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녀석이 화룡도의 서열 3위라는 사실이 내게는 퍽 다행이었다.

삼인자.

넘버쓰리.

일인자의 품격도, 이인자의 카리스마도 없는 어중간한 존재. 유사 이래 가장 권위에 집착하고 무시당하는 걸 싫어하는 부류 아니겠어?

“자, 약속대로 우리 둘만 남았다. 만약 네놈이 가진 물건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각오해야 할 거야. 이 화룡도에 저 마그마보다 뜨거운 게 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네가 무척 기뻐할 거라 확신하거든. 일단 몇 걸음만 물러설게.”

“물러선다고? 겁먹고 내빼려는 건가.”

“아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말이지, 너의 코앞에서 이걸 꺼내는 건 좀 위험해 보여서 말이야.”

뒤로 몇 걸음 물러선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아이템 칸에 오직 5개만 있는 ‘그것’을 꺼내 들었다. 볼링공만 한 크기의 검은 쇳덩어리에 굵은 심지가 붙어 있는 물체.

[대충 만든 기본형 폭탄 x 5]

이자나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어어어어어억!”

녀석과 거리를 둔 건 신의 한 수였다.

이자나르의 기쁨이 극에 달하자 녀석의 머리에서 무지막지한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다.

100년 굶은 원숭이가 바나나를 발견했을 때처럼.

‘후후. 직거래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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