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노역 해방의 왈츠 (1)
“방장! 진짜로 구역을 바꿔 준다고요? 7번 방의 약골들한테 왜 우리가 자리를 내줘야 합니까!”
“닥쳐라. 어디까지나 내 선택에 의한 일이야. 계속 채석장 가운데에만 있었으니, 외곽에서도 좀 놀아봐야지. 산장에 오래 있으면 바닷가 별장이 땡기는 법이거든.”
이자나르의 인물 설명란에는 ‘혈관에 흐르는 불꽃 때문에 폭탄에 들어 있는 화약은 그에게 극상의 마약이나 다름없다’고 적혀 있었다.
나에게 용사의 심안이 없었다면 이런 거래를 떠올릴 수조차 없었겠지.
‘오오오. 화약이라니.’
녀석은 누가 볼 새라 폭탄을 한입에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콧구멍과 귀에서 막대한 불을 뿜어대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쾌락에 젖어 온몸을 떨더니 얼마 안 가 정신을 차린 다음 민망해했다.
“한 달이야. 그 뒤는 우리 방 녀석들이 덥다고 징징대는 걸 감당할 자신이 없군.”
그러고 보니 3인자만의 덕목도 있다.
바로 음흉함.
방금 전 보여준 모습을 보면 이자나르는 자신의 방 죄수들을 완전히 손아귀에 두고 있다. 징징거림을 들어줄 놈이 아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정확히 한 달 뒤에 또 하나의 폭탄을 자릿세로 요구할 심산이겠지.
나는 녀석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알았다.”
하지만 그때면 폭탄들은 이미 다른 쓰임새를 찾아 소모된 뒤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충분한 양의 흙을 섭취(?)하여 목표치의 스탯 업을 이룬 뒤일 터이고.
그렇게 7번 방 구역으로 돌아오니,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슈바인! 대체 어떤 미친 짓을 해야 저 오만하기 짝이 없는 12번 방장이 우리에게 자기 구역을 내준단 말이야?”
디멜이 침을 튀기며 흥분했다.
오묘한 기분이다.
누가 내 앞에서 침을 튀기며 말하면 왈칵 짜증이 나야 하는데, 잭 프로스트의 침이라 에어컨을 쐬는 것처럼 시원했거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너한텐 잘된 일이잖아, 디멜. 마그마의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왔으니 육체가 조금 천천히 녹을 거고. 그렇지?”
“그, 그건 맞아. 분명히 익숙한 동작인데도 채광 속도도 빨라졌어.”
디멜이 여전히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손바닥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당당히 선포했다.
“채광 속도? 그깟 채광이고 어쩌고 따위 이젠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야. 다들 그 곡괭이 던져버려.”
사실 곡괭이를 내려놓을 녀석은 디멜 하나뿐이었다.
뚠은 새 구역의 부드러운 흙더미를 보고 황홀해하다가 잠들었으며, 비르카는 흙의 층이 깊어 무릎뼈가 자꾸 분리된다며 낑낑대고 있었고, 올쿠레 켄타는 오늘도 드러누워 내가 또 무슨 짓을 벌일지 궁금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내 인벤토리에는 아직 4개의 폭탄이 남아 있다.
아마 디멜에게 뽐내려고 성검을 뽑아 들었다가 소동을 일으킨 경험이 없었다면, 이 발상을 떠올리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디멜에게도 살짝 고마운 마음이 있다.
그렇게 고마운 녀석이니 보상을 줘야겠지.
“다들 잘 들어.”
나는 어안이 벙벙해 있는 7번 방 죄수 모두에게 읊조렸다.
“오늘을 7번 방 노역 해방의 날로 선포한다.”
*
“9번 방장을 불러오라고?”
뚠은 졸다 일어난 눈을 부비며 의아해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나보구나, 슈바인. 그 실성한 드워프는 툭하면 죄수를 때려 죽여. 오죽하면 연쇄살수마(連鎖殺囚魔)라는 별명까지 있다고.”
학살죄로 잡혀 들어온 죄수들 사이에서도 살인마로 악명이 높은 9번 방장.
그가 내 계획을 도와줄 두 번째 방장이었다.
“이자나르에게는 내가 부탁하는 입장이었으니 발품을 판 거고. 그 녀석은 반대야. 오히려 나를 만나고 싶어 안달하고 있을걸. 나랑 엮일 계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란 소리지. 녀석에게 가서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
잠시 후.
뚠은 온몸에 흉터가 가득한 드워프 하나를 데리고 왔다.
나는 그의 수갑과 족쇄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생채기를 내었는지 원래 무광의 흑색인 수갑과 족쇄가 회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네가 나를 불렀나, 7번 방장 슈바인 스트링거.”
“꼴찌 방의 방장 이름까지 외우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내 뒤를 캐고 다녔나보지? 실성 드워프 하스록 크라움.”
용사의 심안은 그가 푸르가토리움에 잡혀 들어온 이유를 상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전설적인 대장장이 하스록은 뭔가를 해체하는 데 광적으로 매달리는 해체도착자였다. 오죽하면 왕궁의 지하 기둥을 멋대로 해체해 왕국군의 절반을 생매장시킨 학살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무척 솔직한 녀석이기도 했다.
“맞아! 지금 방장들 사이에서는 네놈이 가장 뜨거운 감자거든. 대체 무슨 수로 음험한 오르콰이움의 속을 뒤집어 놓고, 고약한 이자나르를 헤롱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수염이 빠질 것 같더구만!”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이렇게 부른 이유는 당신과도 거래할 것이 있기 때문이야.”
드워프의 눈이 빛났다.
“슈바인 스트링거. 네가 이 푸르가토리움에 ‘뭔가’를 몰래 숨겨 들어왔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몸을 오늘 처음 봤을 텐데? 나의 뭘 믿고 거래를 하겠다는 거지.”
“미칠 듯한 집착. 당신의 그 수갑과 족쇄가 증명해주고 있잖아? 정기적으로 죄수를 때려죽이는 당신의 괴이한 행보. 일부러 이 감옥에 남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알아. 이유는 푸르가토리움의 수갑을 ‘해체’하는 데 성공하고 싶어서이고.”
“크하하하하! 맞다. 이 몸이 해체하지 못하는 물건이 이렇게 떡하니 존재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거든. 이 수갑을 해체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유일한 숙원이 됐지. 그러려면 이 감옥에 계속 갇혀 있어야 해. 그렇다고 네놈 방의 올쿠레처럼 노역을 거부해서 형량을 늘리는 건 싫어. 그나마 곡괭이질이 이 드워프의 몇 개 없는 여흥이라서.”
나는 그에게 폭탄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우오옷. 진짜였군! 허공에서 폭탄을 꺼내는 재주라니.”
“세 개 더 있어. 이 폭탄들을 해체할 수 있겠어? 절반은 가루 상태의 폭약으로, 나머지 절반은 5분의 1크기의 폭탄으로 재조립해 줬으면 하는데.”
“수락한다! 그래, 나에게는 어떤 보상을 줄 거지? 응응?”
하스록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몸은 용사이지, 결코 산타는 아니라는 점.
“아니. 너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어.”
“왜!”
“뭔가를 해체하는 작업. 그 자체가 너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쾌락일 테니까. 싫으면 돌아가. 흥정에선 아쉬운 쪽이 지는 법이지.”
드워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마치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면 용사의 진정한 속내를 알아채기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크하하! 잘도 꿰뚫어 보았구나. 물건을 숨기는 마법뿐 아니라 독심술까지 갖고 있는 건가? 아마도 그런 능력이 괴팍한 이자나르를 구슬린 비결이겠지.”
하스록 크라움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양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쳤다.
“좋다! 곡괭이 하나만 줘 봐. 당장 해 주마.”
“뭐 당장? 준비시간도 필요 없어?”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하스록은 4개의 폭탄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해체해 피갑과 뇌관, 화약을 늘어놓았다. 녀석은 보이지도 않는 손놀림으로 그것을 10개의 소형 폭탄과 10개의 폭약 주머니로 만들어 주었다.
“자, 어떠냐.”
마치 횟집의 일류 주방장이 30년 동안 다뤄온 참치의 살을 발라내는 영상을 3배 정도로 빨리 재생하면 이것과 비슷할까.
나는 차마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엄청난데. 어떻게 뭉툭한 곡괭이의 날만으로 이런 묘기가 가능한 거야?”
“이것도 오랜만이라 솜씨가 녹슬어 버린 거다, 크하하! 전성기 때였으면 더 빨랐을 거야.”
하스록의 죄수복은 절반이 찢겨져 있었다. 자신의 죄수복으로 폭약의 주머니를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서비스정신도 제법 있는 친구였다.
나는 9번 방장이 만들어준 아이템들을 들어 올려 다시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두 눈으로 그것을 확인한 하스록은 또 한 번 감탄했다.
“다시 넣을 수도 있는 거군. 아마도 네놈에겐 전설 속의 아공간(亞空間) 주머니라도 있는 모양이지? 물건의 입출이 자유로운 아티팩트! 네가 있던 세계에는 우리 드워프 못지않은 굉장한 장인이 있었구나.”
조금 켕기는군.
이건 <블러디 크라운>이라는 게임에서 플레이어인 용사에게 주어지는 기본 능력이니까.
‘용사의 심안’도 인벤토리 능력도 모두.
하지만 그걸 모두 설명할 방법이 없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뭐, 대충 비슷해.”
실성 드워프라는 별명답게 그는 내 생각보다 더욱 심하게 돌아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내게 생각지도 못했던 역제안을 해온 것이다.
“부디 나를 넣어주게!”
“……뭘 넣어주라고?”
“나를 그 아공간에 넣어달란 말일세! 그 안에 재밌는 게 잔뜩 있을 거 아닌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죄수를 인벤토리에 집어넣는다는 발상을 왜 이놈보다 먼저 해보지 못했는지 반성하면서.
시도해볼 가치는 있겠는데.
하지만 그의 팔뚝을 붙잡고 수납을 속으로 외쳐 본 순간,
[생명체는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뜰 뿐이었다.
“미안. 살아있는 건 못 넣는다는군.”
“그런가? 으으음. 그러면 시체는 넣을 수 있다는 거 아닐까. 실험이 필요하다면 내 당장 아무 죄수나 한 놈 때려죽여서 가져와보지. 어때? 넣어 보자!”
“……시체를 넣어본다는 제안은 흥미롭지만 거절하겠어. 나는 이제부터 바빠질 거라 말이지.”
“크하하하하!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만.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9번 방으로 찾아오게나. 쳐 죽여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쓰레기는 이 화룡도에 넘쳐나니까 말이야.”
하스록은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떠나갔다.
그러자 실성 드워프가 무서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7번 방의 죄수들이 몰려왔다.
뚠이 경탄의 목소리로 말했다.
“저 실성 드워프가 부른다고 해서 온 것도 신기한데, 정말 부탁만 들어주고 떠난 거야?”
“부탁이 아니라 거래였어. 그리고 저 녀석이 만들어 준 건 우리 모두를 위해 쓸 거고.”
올쿠레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 지금 우리를 위해서 쓴다고 했는가?”
“네. 물론 어르신에게는 의미가 없는 일이겠지만요. 저는 앞으로 7번 방의 일일 노역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시킬 겁니다.”
나는 모두의 눈앞에 손가락 열 개를 들어보였다.
“단 10분으로.”
내 말에 디멜이 코웃음을 쳤다.
“가장 숙련된 광부라 할 수 있는 저 드워프 하스록도 수레 하나를 채우는 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려. 우리가 무슨 수로…….”
“무슨 수로 할 수 있냐고? 그 방법을 지금부터 보여주지. 다들 뒤로 물러나.”
내가 또 뭔가 수상한 짓을 벌이려는 걸 알았는지 7번 방의 죄수들이 호다닥 물러났다. 누가 보면 미리 연습한 군무인 줄 알겠다. 하여간 도망칠 때는 동작이 척척 맞는 녀석들이야.
심호흡을 하고 곡괭이를 들었다.
물론 그냥 곡괭이가 아니다. 하스록이 해체해서 만들어준 소중한 폭약 가루를 날 부분에 얇게 펴 바른 ‘폭격 곡괭이’였다.
나는 집채만 한 암석더미를 향해 곡괭이를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하늘로 비산한 암석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대부분 주먹만 한 크기로 잘게 쪼개진 광석들이 내 주변에 쌓여 있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이 이 폭발의 중심에 있었다면 결코 멀쩡할 리가 없다. 하지만,
[HP 4,932/5,670]
용사의 몸은 이제 폭탄 하나쯤 눈앞에서 터져도 끄떡 없이 버틸 수 있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내가 말한 10분은.”
나는 보기 좋게 박살난 광석 하나를 주워들은 다음 바닥에 쓰러져 황망해하는 7번 방의 죄수들에게 말했다.
“채광을 하는 시간을 말한 게 아냐. 이걸 수레에 집어 담는 시간을 말한 거지.”
내가 장담했잖니.
“오늘부터 우리 7번 방은 일 안 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