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용사가 삼키는 것 (1)
나는 다급히 아론다이트의 손잡이를 붙잡고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역시 종이 한 장만큼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이이이이익!”
쭈그려 앉은 채 천근같은 쇳덩이를 들어 올리려는 내 모습은 대변을 누는 자세처럼 우스꽝스러웠다.
물론 나는 뭔가를 누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집어넣으려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움직여라, 제발!”
인벤토리에서 꺼내는 건 쉬웠다. 공중에서 튀어나왔으니까.
그런데 들지도 못하는 무기를, 어떻게 다시 넣지?
큰일이다.
‘시동어 같은 게 있을 거야.’
나는 아론다이트의 검신에 손을 올리고 이것저것 외쳐대기 시작했다.
“아이템 넣기! 아이템 복귀! 아이템 되돌리기! ……시발, 아이템 삭제!”
마지막은 홧김에 해본 말이었는데 어이없게도 반응이 왔다.
[SS급 한손검 아론다이트를 삭제하겠습니까? 결정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N]
“아니야! 취소다. 취소.”
아론다이트는 내가 가진 무기 중 최강의 위력을 가진 용사 전용검, 삭제만큼은 절대 아니 될 말이었다.
[삭제 명령을 취소합니다.]
황급히 메시지창의 N 부분을 만지자마자 섬뜩한 기분에 반사적으로 돌아서야 했다.
7번 방 죄수들의 작업 현장을 모두 덮어버리는 새카만 어둠이 드리워졌다. 사실 그것은 한 죄수가 내뿜는 마기(魔氣)였다.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는군.’
흑색의 넝마가 하늘을 떠다니는 가운데, 하얀 가면이 넝마의 가운데에 붙어 있었다. 그 가면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표정을 그리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분노와 짜증에 가까웠다.
일그러진 얼굴의 레이스가 코를 킁킁대고 있었다.
“이 근처다. 여기 어디선가 성스러운 잡것들의 노폐물로 만들어진 뭔가가 있어. 찾아내라.”
흑색 넝마 속에서 뼈다귀만 남은 팔이 튀어나와 손짓했다.
“사신의 명을 받듭니다, 존명!”
회색 피부에 너덜거리는 피부. 화룡도의 이글이글한 열기를 뚫고서 전달되는 악취.
오르콰이움의 수하들은 죄수복을 입은 좀비들이었다. 그런데 느릿느릿한 좀비가 아니었으며 몸집들도 하나같이 거대했다.
그런 좀비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비르카와 디멜은 황급히 곡괭이를 들고 작업을 하는 척을 했고 좀비 죄수들이 녀석들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서성거렸다.
개중 한 놈이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나를 수상하게 여겨 가까이 다가왔다.
“거기 너. 그 뒤에서 빛나는 건 뭐야? 비켜서 봐.”
나는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꺼냈다.
“다 썩어가는 좀비 자식아.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냐. 왼쪽 옆구리에 튀어나온 창자나 집어넣고 썩 꺼져.”
좀비 죄수가 벌컥 화를 내려 하는데, 녀석을 밀치고 레이스 오르콰이움이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하얀 가면이 주는 위압감이 서슬 퍼랬다.
“네놈이 범인이냐? 이름을 대라.”
“7번 방장 슈바인 스트링거다. 목도리 도마뱀인 양 그렇게 파르르 떨면 겁먹을 줄 알아? 오늘내일하는 쉰 목소리로 어디서 행패야.”
나는 오르콰이움의 시선을 내게만 집중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의 심기를 도발했다. 녀석이 내 뒤로 돌아가면 배후의 아론다이트를 발견하고 말 테니까.
“어제 들어온 신입인가. 아직 내 성질을 몰라서 까불 수 있는 모양이군. 나는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들의 간을 수집하는 사신(邪神)이라는 걸 깨닫도록 해 주마.”
샤아아아아아.
오르콰이움이 더욱 흉흉한 기운을 발출했다. 내가 밀려나지 않도록 전신에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였다.
전혀 의외의 곳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당 구역으로 돌아가라, 오르콰이움.”
레이스의 가면이 휘익 돌아갔다. 그곳에는 그에 못지않게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대형 사슴벌레 야불타가 서 있었다.
“끼어들지 마라, 야불타.”
“채석장은 내 관리구역이란 걸 알 텐데. 뭣하면 여기서 한 판 붙어보든가. 네가 거느리는 좀비들은 내 갑각에 상처 하나 못 낼걸. 반면에 나는 가볍게 좀비들을 십팔 조각으로 찢어버릴 수 있지.”
“누가 누굴 찢어버린다고? 으으응?”
두 방장의 기 싸움이 이어졌다.
오르콰이움의 안개가 눈에 띄게 얇아진 걸 보면 녀석에게 있어 야불타는 상성상 까다로운 상대인 듯했다.
하지만 레이스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누군가 이 채석장에 성유물을 갖고 들어온 정황이 있다. 다른 죄수는 속여도 나는 못 속여. 야불타, 대체 채석장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지?”
“있긴 뭐가 있다는 거냐. 엉뚱한 데서 힘 빼지 말고 4번 방 구역으로 가서 할당량이나 채우시지.”
그러자 오르콰이움이 뼈다귀만 남은 팔을 스르륵 들었다. 그 팔의 손가락이 휘릭 움직여 나를 가리켰다.
“저 7번 방장 놈이 등 뒤에 뭔가를 숨기고 있다. 네놈이 직접 확인해 보는 건 어때.”
젠장.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 건가.
야불타가 귀찮다는 듯이 저벅저벅 걸어와 내 뒤를 흘겨보았다. 주취자가 골목에 쓰러져 있단 신고를 받은 경찰관처럼.
턱 밑으로 식은땀 한 방울이 타고 내려왔다.
*
그 짧은 순간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야불타가 성검을 발견하는 걸 막을 방법이 내게는 없었다.
망했다.
내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그냥 흙더미뿐인데?”
엥? 뭐라고?
내가 등을 돌리자 야불타의 말이 옳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성검 아론다이트는 온데간데없이 뚠 아티르가 흙더미 위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흠냐흠냐. 쿨쿨.”
아니, 자는 척이 분명하다. 자세히 보면 수염이 겁에 질려 파르르 떨고 있으니까.
이런 잔망스러운 두더지 녀석. 대체 어느 틈에 이만큼의 흙으로 성검을 덮어버린 거야?
“이상하군. 분명히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물론 오르콰이움은 한참 동안 나와 뚠을 노려보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채석장의 관리자인 야불타의 서슬 퍼런 눈빛 때문에 일단 물러서기로 한 것처럼 보였다.
“두 번째는 놓치지 않아, 두고 봐라.”
오르콰이움은 좀비 죄수들과 함께 자신의 구역으로 돌아갔다.
야불타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곤 거대한 사슴벌레의 집게가 딱 하고 부딪혔다.
“시끄럽게 소란을 만들지 마라, 불량 노역자들. 이런 소요가 벌어지면 죄수들의 작업 속도가 늦어진단 말이다.”
잔소리를 던진 야불타마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자 성검 주변에는 7번 방의 죄수만이 남았다.
휴, 다행히 일단락 된 모양이군.
나는 기특한 뚠의 뱃살을 두드렸다.
“갔어. 이제 일어나도 돼, 뚠.”
녀석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으며 웅얼거렸다.
“후아아.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오르콰이움이 마음만 먹으면 나는 끔살당할 거란 말야.”
“몹시 용기 있었어. 전광석화였다고. 굼뜨기만 한 줄 알았는데 정말 대단하구나, 너.”
“헤헤헤. 뭘 또 그렇게까지.”
내 칭찬에 고무되었는지 뚠은 파바박 앞발을 놀려 성검 아론다이트의 손잡이만을 노출시켰다.
“그런데 이거 이대로 놔둘 거야, 슈바인?”
“아니. 어떻게든 다시 수납해야지. 다만 올바른 시동어를 생각해내야만…… 잠깐, 수납?”
나는 설마 하며 말을 중얼거렸다.
“아이템 수납.”
슈욱.
아론다이트가 다시 인벤토리로 돌아감과 동시에 뚠이 덮은 흙더미가 아주 얇게 내려앉았다.
“왁! 사라졌어, 슈바인. 설마 날려서 버린 거야?”
“아니야. 언제든 다시 꺼내올 수 있어.”
수납.
왜 이 간단한 표현이 생각 안 났던 거지? 인벤토리 시스템에 대해 미리 파악해두지 못한 내 실수였다.
‘경솔했어. 디멜 녀석의 이죽거림에 울컥해서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건 분명 잘못이야.’
뚠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오르콰이움이 성검을 발견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랬을 경우 어떤 사단이 일어났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골이 지끈거렸다.
“고맙다, 뚠. 네가 날 살렸어.”
녀석은 애꿎은 코를 쓱 훔치며 웃었다. 아무래도 칭찬에 무척 약한 녀석인가 보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같은 방 친구끼리는 서로 돕고 그런 거지.”
*
친구라.
생각해보면 게임 속에서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알파 테스터는 기본적으로 솔로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주로 정해진 스토리라인을 따라 새로운 스테이지를 격파하는 싱글 캠페인이 내 주종목이었다.
깨어 있는 시간 중 3분의 1을 픽셀과 알고리즘으로 이뤄진 가상현실에서 살아왔다.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들이야 물론 많았다.
내게 퀘스트를 주는 근엄한 왕국의 경비병. 내 무기를 숫돌로 갈아주겠다면서 팔뚝을 자랑하는 노회한 대장장이. 부디 자신을 구해달라면서 철장 안에서 구슬피 우는 엘프 공주.
하지만 그들이 내뱉는 대사들은 공허했다. 게임 개발사의 스크립터가 짜 넣은 여러 개의 대사 중 하나를 랜덤으로 내놓는 것뿐이다.
나는 그들의 대사를 집중해서 들으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공략법의 힌트를 찾아내는 데만 열중했다.
‘내게 구원을 바라면서도 정작 나를 구원해줄 순 없는 NPC들이었어.’
물론 게임 바깥세상에서도 마음을 터놓을 친구 따윈 없었다. 내 성격이 개차반이라서?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라서?
아니다. 그런 이유로 상처받기 전에, 내가 먼저 세상과 장벽을 쳐 왔기 때문이다.
만렙 용사 슈바인 스트링거에게도,
알파 테스터 박상식에게도,
친구란 단어는 그래서 낯설었다.
*
하지만 여긴 게임 속 세상이 아니며,
나 또한 더 이상 휠체어에 앉아 세상을 저주하던 청년이 아니다.
어쩌면 친구라는 걸 제대로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뚠. 언젠가 내가 탈옥하면 감옥에서 명품 수염을 가진 두더지 친구를 사귀었다고 자랑하고 다닐게.”
내가 녀석의 털에 묻은 흙을 털어주면서 웃고 있을 때, 새로운 메시지 창이 떴다.
[죄수 뚠 아티르가 새로운 친구 목록에 등록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스킬을 빌려 쓸 수 있습니다.]
상태창의 친구 목록에 떠 있던 르팔타커스 시온의 이름 옆에 뚠 아티르가 추가되었다.
나는 순간 하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르팔타커스는 이 감옥 안에서 계속 친구를 만들라는 의미에서 이런 축복을 준 걸까?
나는 내게만 보이는 뚠 아티르의 스킬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뚠. 너의 잠에 대한 사랑은 정말 찐이구나.”
“응? 그 얘기는 갑자기 왜?”
눈앞에 주르륵 뜨는 스킬들이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온통 잠에 관련된 거잖아.
잠들 때 소음을 차단해주는 스킬,
눈꺼풀을 두껍게 만들어 밝은 곳에서도 빠르게 잘 수 있는 스킬,
꿈속에서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스킬 등.
온통 숙면에 도움이 되는 액티브 스킬들뿐이었다.
‘뭐 하나 쓸 만한 게 없는 걸.’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탈옥의 방법을 궁리해야 하는 내게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응? 잠깐. 마지막에 이 스킬 뭐야.’
내 시선은 뚠 아티르가 가진 괴이한 패시브 스킬에 못 박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스킬이.”
내 발언을 철회한다.
뚠 아티르는 수염만 명품인 두더지가 아니었다.
진정 상상을 초월하는 희귀 스킬 한 가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