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성검에선 냄새가 난다 (3)
“르팔타커스 시온에겐 파천황이란 별호가 붙어 있네.”
파천황(破天荒).
‘보통 하늘을 부순 황제’ 같은 뜻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원래는 혼돈의 우주 상태인 천황을 처음으로 ‘부순 자’라는 뜻이다.
파천+황이 아니라 파+천황인 것.
쉽게 얘기하면 전인미답의 경지를 처음으로 돌파해 새로운 세상을 연 자를 뜻한다.
아무도 가지 못했던 신대륙에 처음 배를 세운 모험가,
누구도 가려 하지 않았던 극지방의 얼음에 제일 먼저 깃발을 꽂은 탐험가,
모두가 불가능하다 입을 모았던 여러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무투가.
파천황이라는 칭호는 그런 개척자들에게 붙여지는 극상의 경배다. 이 세 글자에 담긴 의미가 커다란 이유는 하나의 영역, 하나의 분야마다 단 한 명만이 그 명예를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푸르가토리움에서는 그걸 거머쥔 자가 르팔타커스 시온인 것이다.
“본인의 차원에서 그의 무용은 실로 대단했다고 하네. 노예 검투사에서 출발해 여덟 대륙의 거수들을 무릎 꿇리고 결국 세계를 통일한 황제. 그 무력은 주먹질로 화산을 터트리고 발길질로 바다를 갈랐다고 하더군. 그런 자를 죄수로 잡아 왔으니 감옥 전체가 뒤집어지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지.”
올쿠레 켄타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들어오는 순간 이미 화룡도의 최강자였네. 때문에 등반죄수가 되어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놀라는 이는 없었지. 하지만 4층을 제패하고 6층을 정복한 뒤 당시 최고층이라고 알려져 있던 8층을 깨부쉈을 때는 모두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네. 인간의 몸으로 신화급 존재들이 잡혀온 영역에 다다른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런 존재들조차 열지 못했던 문을 최초로 열어젖힌 것이니까.”
“그렇다면 르팔타커스가 감옥에 오기 전에는 9층의 존재 자체를 아무도 몰랐다는 건가요?”
“맞네. 그 때문에 떠들기 좋아하는 녀석들은 9층이 감옥의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어. 심지어 감옥의 층은 무한하다고 주장하는 녀석도 있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르팔타커스처럼 새로운 죄수가 미개척의 층에 올라서면 한 층이 새로 생기는 구조일 수도 있겠군요.”
“총명하군, 슈바인. 분명 그런 이야기를 하는 죄수들도 있었지. 하지만 아직 그 답은 아무도 모른다네. 르팔타커스의 천공돌파가 9층에서 멈췄기 때문이지.”
내가 르팔타커스의 유해와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왜’ 9층에서 좌절했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었다.
시험 삼아 지금 그를 불러보면 어떨까.
‘르팔타커스? 거기 있어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스마트폰의 인공지능 어플처럼 내가 원할 때마다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다.
“그가 9층에 올라갔다는 소식이 들려온 이후, 자그마치 49일간이나 푸르가토리움 전체가 진동을 느꼈다고 하네. 하지만 9층의 방벽이 뚫렸다는 소식은 없었어. 마침내 르팔타커스가 교도관들에게 저지당한 것이지. 결국 르팔타커스는 9층에서 다시 1층까지 내려와 화룡도의 용암 속에서 한참을 절규했네. 저기 보이는 일곱 개의 봉우리가 보이나?”
화룡도 주변에는 수백 개의 융기 봉우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올쿠레가 가리킨 방향에는 중간 지점이 날아가 버린 봉우리들이 있었다.
광분한 고룡 정도가 아니면 저런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굉장한 광경이었다.
“분노에 가득 찬 르팔타커스가 사자후를 내뱉은 흔적일세. 그 다음 ‘부족했다’라는 묘한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화룡도의 죄수들을 본체만체 했어. 며칠 후 대기실로 자신을 돌려보내 달라고 교도관에게 요청했고, 곧 이송되었지.”
“교도관들이 요구를 들어주었군요?”
“그들의 관점에서 르팔타커스는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방벽의 대부분을 격파한 장본인이니까. 그 정도 요구가 파격은 아니었을 거야.”
올쿠레는 잠시 한 호흡 쉬고,
“그리고 머지않아 르팔타커스는 대기실의 한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네. 자신의 오른손으로 가슴을 뚫어 심장을 꺼낸 다음 터트려 버렸다고 하지.”
모든 생명체는 ‘자기방어본능’이란 것이 있다. 아무리 있는 힘껏 자신의 몸을 때리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차단하는 프로세스가 있는 것이다. 주먹으로 제 심장을 꺼냈다니, 얼마나 비통한 절망을 겪었기에.
지독한 자다.
“그 뒤로 등반죄수가 탄생하기까지 8백 년이나 걸렸네. 극적인 그의 실패가 죄수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거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사내마저 이 감옥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가만히 듣고 있던 스켈레톤 비르카가 끼어들었다.
“할배. 나는 이 감옥에 들어온 이후로 다른 층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으로만 들었어. 개중에는 그냥 지어낸 게 뻔한 루머도 많았고. 그런데 당시의 죄수들은 어떻게 르팔타커스가 층을 오르는 과정을 알고 있었던 거야?”
“1층 화룡도 교도관은 과묵한 편이지만 저 위의 교도관들 중에는 떠들기 좋아하는 녀석도 있거든. 르팔타커스가 어서 좌절하길 기대하며 온 감옥에 생중계했다고 하네.”
자그마치 8개의 세계를 돌파한 르팔타커스를 보며 교도관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죄수가 ‘탈옥’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곧 고금의 죄수들을 통틀어 가장 뛰어났던 사내마저도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과연 내가 그의 뒤를 따를 수 있을까. 소리 한 번 지른 것만으로 일곱 개의 봉우리를 지워버린 사내도 닿지 못한 경지를 뚫어낼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수심을 드러내었는지 디멜이 조소를 보냈다.
“진실을 조금 듣고 나니 기가 좀 죽나 보지?”
“뭐라고?”
잭 프로스트의 이죽거림에 울컥 반발심이 들었다. 그건 단순히 우격다짐에서 지기 싫어 생기는 고집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승부를 걸어볼 만한 패들이 있으니까.
첫 번째로 용사의 육체,
두 번째로 아직 보상이 미미하지만 스탯을 성장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시스템,
세 번째로 게임 캐릭터의 몸으로 전생 되면서 함께 딸려 온 아이템들.
마지막으로 르팔타커스가 남겨준 축복까지.
‘르팔타커스에겐 르팔타커스가 없었다.’
반면 내게는 분명 최강의 죄수가 남겨준 패가 있었다.
그 최강의 죄수조차 갖지 못했던 다른 패들도 손에 쥐고 있고. 이것을 조합해서 원 페어를 만들지,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만들지는 오로지 나의 몫.
자신 있다.
나는 노예 검투사도, 괴수 사냥꾼도, 대륙을 통일한 황제도 아니다. 하지만 그 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수천 개의 가상현실 게임을 모조리 클리어한 알파 테스터다.
“지금 당장 보여주지, 디멜. 내가 황새를 쫓는 뱁새가 아니라 황새마저 잡아먹는 용이라는 걸.”
“보여준다고? 뭘?”
일단 여기서는 세 번째 패를 펼쳐보기로 할까.
나는 차분히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러자 만렙 용사였던 슈바인 스트링거가 갖고 있던 무기와 방어구, 아이템들이 주르륵 펼쳐졌다.
“왜 허공을 보는 거냐? 멍 때리냐?”
비르카가 해골을 갸웃하며 물었다. 메시지 창뿐 아니라 인벤토리도 내게만 보이는 듯했다.
나는 ‘사용 불가’ 표시가 떠 있는 용사의 최종무장 아론다이트에 손을 뻗었다. 분명 이 무기의 설명엔 근력을 극한까지 올리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다는 경고가 쓰여 있다.
하지만 과연 인벤토리에서 꺼낼 수조차 없는 걸까?
아니면 꺼낼 수는 있는데 휘두를 수만 없는 걸까.
‘그걸 확인할 때야.’
나는 차카와의 싸움에서 무의식적으로 포션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던 것처럼 성검 아론다이트를 꺼내겠다는 마음을 먹고 손을 놀렸다.
두 개의 가정 중에서 두 번째 것이 적중했다.
휘황찬란한 빛을 뿜는 성검 아론다이트가 인벤토리에서 뛰쳐나와 내 손에 쥐어진 것이다.
하지만.
“워억!”
딸그라앙.
수억 톤의 아령을 누군가 쥐어준 느낌에 그만 성검을 바닥에 떨굴 수밖에 없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손가락을 뺄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흉한 꼴을 보일 뻔했다.
채석장 바닥에 잔 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진 아론다이트.
“슈, 슈바인. 방금 뭐 한 거야? 갑자기 손에서 무기를 만들어냈어.”
검이 떨어지며 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물러섰던 뚠이 물었다. 그 두더지는 곧 정수리에 떨어진 비르카의 아래턱에 아파해야 했고, 올쿠레 역시 누워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켜 손바닥만으로 점프해 다가왔다.
비르카가 아래턱을 다시 끼워 넣고는 물었다.
“환영마법인가, 슈바인! 우리의 방장이 알고 보니 대마도사였던 건가?”
올쿠레가 푸른 광채를 내뿜는 아론다이트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비르카. 마법도 환술도 아닌 실물이야. 이 검은 내가 있던 차원에서 전설 속의 대장장이가 만들었다는 무기와 견주어도 될 만한, 굉장한 무기일세. 놀랍군.”
깜짝 놀란 일을 당한 눈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아는가? 나는 이제 안다. 지금 내 눈앞에 있으니까.
나는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아론다이트를 가리키며 디멜에게 말했다.
“어때? 이래도 내가 입만 산 허풍쟁이냐.”
“그, 그게…… 어떻게 무기를 들고 감옥에? 손에서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 그것보다…… 겨우 너 정도의 녀석이 왜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무기를? 훔친 게 틀림없어어어억!”
마지막은 거의 발악이었다.
어버버하는 녀석 앞에서 절로 팔짱이 끼어진다.
“엄연히 내 소유의 무기야. 물론 지금 당장 사용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단련해 힘을 되찾는다면 나 역시…….”
등반죄수의 자격이 있지 않겠나,
라는 웅혼하고도 멋진 대사를 읊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내 말을 싹둑 자르고 엄청난 괴성이 채석장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끄아아아아아아아!”
7번 방의 모든 죄수들이 그 괴성의 끔찍함에 비틀거려야만 했다. 지금 들려오는 소리에 비하면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는 오페라나 다름없다.
“누구냐. 누가 감히 내가 있는 반경에서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것이냐아!”
괴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준 것은 수심 가득한 올쿠레였다.
“이건 4번 방장 오르콰이움의 포효 언령일세. 그는 레이스(Race)야. 성스러운 기운을 뿜는 물건이 근처에 있으면 끔찍한 고통을 느낀다네.”
그래서 저 포효는 이토록 골수까지 파고드는 분노를 담고 있는 건가.
두 번째로 들려온 괴성은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아프다아! 너무 아파! 어떤 방의 죄수인지 모르나 내가 반드시 붙잡는다. 그리고 제발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해달라고 빌게 만들겠다!”
사위가 갑자기 어둑해졌다. 검은 안개가 화룡도의 하늘을 뒤덮었기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레이스가 지금 나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때 차가운 느낌이 왼쪽 어깨를 간지럽혔다. 잭 프로스트 디멜 무바크가 다급히 날 붙잡은 것이다.
마도병이어서일까, 오르콰이움의 언령에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디멜이 내게 입 모양으로 다급히 외쳤다.
‘놈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빨리 그걸 숨겨!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