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5 귀환 =========================================================================
“오늘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요?”
송이가 그렇게 또 다시 대충 식사를 끝내버리고 밖으로 나오자 혜연이 차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익숙하게 올라타자 혜연이 그녀의 스케줄을 말해주었다.
“오늘은 건강검진 예약 있으세요.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만 받고 다시 자택으로 오신 후에 푹 쉬시면 됩니다.”
“네?”
송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혜연이 간곡하게 말했다.
“부디 안 된다고 하지 말아주세요. 요즘 언제 쓰러지실지 시간문제로 보이는 거 아세요? 사모님까지 잘못 되시면 전 어떡하라고요.”
“전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진짜 스케줄 말해줘요.”
“스케줄 정말 없어요. 제가 다 취소했어요. 앞으로도 최소한으로만 잡을 거에요. 그렇게 해도 충분하세요.”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에요. 혜연씨가 절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이건 절 위한 일이 아니에요.”
송이가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혜연은 이미 그녀의 고집에 몇 번이고 꺾였던 전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제대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ㄷ.
“굳이 필요 없는 일까지 다 몰아서 하시려고 하시니 몸이 축날 수밖에 없잖아요. 이미 충분히 다 하셨어요. 이젠 쉬엄쉬엄 하셔도 돼요.”
“쉬엄쉬엄해서 회사가 잘 돌아가겠어요?”
“물론이죠! CMC를 무시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사모님 아니, 사장님이 이렇게 24시간 일 안 하고 쉬셔도 충분히 잘 굴러간 답니다.”
혜연이 철벽같이 물러서지 않자 결국 송이가 항복을 했다.
“병원은 취소해주세요. 가지 않아도 돼요. 대신 오늘 하루는 혜연씨 말대로 쉴 게요. 그럼 되죠?”
“물론이죠!”
혜연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활짝 웃었다.
“알겠어요.”
송이가 결국 출근 준비를 다 했다가 허무하게 차에서 내려야 했다.
“좋은 곳으로 놀러 가시는 걸 추천 드릴게요. 단풍이 예쁘게 들었어요.”
송이의 스케줄을 비웠다고 혜연이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혜연이 마지막으로 송이에게 오늘 하루를 부디 뜻깊게 사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다. 하지만 송이는 안타깝게도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들어가야지....”
송이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 하루 뭐하지 하는 생각을 하니 마땅찮은 일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송이는 자연스럽게 태우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태우에게 몹쓸 엄마가 되어버린 송이였다. 옆에 있어줘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으니 말이다.
집에 터덜터덜 들어오자 고용인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사모님? 뭐 두고 가셨어요?”
“아뇨. 오늘 휴가래요.”
“휴가요?”
고용인은 듣던 중 반가운 말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잖아도 요즘 너무 피곤해보이셨어요. 잘 됐네요.”
“올라가서 좀 쉴게요.”
“네.”
송이는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그 순간, 송이는 갑자기 휘청거릴 정도로 거센 현기증을 느끼고 난간을 간신히 잡아 버텼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눈앞이 하얀 것으로 보아 또 다시 빈혈이 온 모양이었다. 난간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은 송이가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보면 비련의 여주인공인 줄 알겠다, 임송이.’
몸 하나 튼튼한 걸로 자신 있었는데, 이젠 그것마저 영 시원찮았다. 심호흡을 하고, 귀에서 들려오는 이명이 줄어들자 송이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리에 힘이 쭉 풀려 버렸다.
어?
“꺄악!!”
송이의 몸이 뒤쪽으로 쏠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몸이 실제로도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송이는 곧 닥칠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
에?
잠시 후, 송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가 띵-하고 아파 와서 쉽사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송이는 그저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누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준 모양이었다.
아마 계단에서 굴렀다면 큰일 날 뻔 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으니 말이다. 후하게 사례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뭐야, 왜 이렇게 가벼워?”
“......”
“몰골은 또 왜 이래? 내가 걱정 안 시키게 하라고 했지?”
걱정 안 시키게 하라고 했다고?
송이는 감히 자신에게 이런 무례한 말을 하는 이가 누구인지 몰라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후하게 사례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싹 달아났다.
왜냐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남자가 송이를 노골적으로 아주 진하게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엄연히 구해준다는 것보단 다른 의미의 충족을 위한 행동이라고 봐도 좋았다.
더욱이 그가 하필이면 하는 말이 태상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태상의 죽음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든 일이라서, 그를 떠올리게 하는 그 무엇도 반갑지가 않았다. 그 시간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송이가 겨우 몸을 추스르고 눈을 떴다.
속이 울렁거리고 귀에 이명이 심하게 거슬려서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좀 진정이 되는 듯 했다.
“사모님 괜찮으세요?!”
“세상에...어쩌면 좋아.”
“천만 다행이에요.”
주변에서 소란을 듣고 고용인이 몰려왔다. 송이는 일이 커졌다 싶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전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는 거야. 하나도 안 괜찮구만!”
송이의 말에 남자가 화를 내며 말했다. 그 남자는 당연하게도 송이를 계단에서 구해 준 남자였다.
“저기, 죄송한데 절 좀 놔주시겠어요?”
송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그녀를 꽉 안고 있어서 굉장히 불편했다. 그리고 더욱이 남자에게서 나는 쾌쾌한 냄새가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놔달라고? 이런 건 내 생각에 없는 시나리오였는데.”
남자가 그렇게 말하더니 송이를 미련 뚝뚝 떨어지는 몸놀림으로 바닥에 내려주었다. 사방에서 고용인들이 그녀를 챙기려고 난리를 치며 다가와 남자의 몸을 뒤로 밀어버렸다.
그녀를 구해주긴 했지만, 무척이나 수상했던 것이다.
“누구신데 그런 몰골로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거에요?”
그리고 다들 묻고 싶은 말을 어떤 고용인이 대신 물어왔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와 부산을 떠는 고용인들을 다독이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구해 준 남자를 보려 했다.
“거지 아니야?”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지?”
“지금 그거 나한테 한 말이야? 나를 모른다고? 왜 날 모르지? 거기다가 거지? 아무리 내 몰골이 이따위라지만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아? 기분 좋은 사람한테.”
‘거지?’
하지만 남자를 본 송이 또한 고용인들과 다를 바 없이 저도 모르게 거지라는 생각이 튀어나왔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길어서 턱과 얼굴을 뒤덮고 있었고, 머리도 산발에, 언제 깜았는지 알 수 없이 덥수룩했다.
가장 심각한 건 입고 있는 옷이었는데, 본래의 색이 뭐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때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송이는 그런 거지를 보고 돌연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흐윽...! 흐으으윽....흑....흐아아앙!”
늘 품위를 잃지 않던 사모님이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우는 진풍경에 고용인들은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송이가 사방을 둘러 싸고 있는 고용인들에게 저리 비키라는 듯 울면서 손을 휙휙 저었다.
“사, 사, 사모님...!?”
고용인들이 더듬거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고용인들 때문에 뒤로 물러났던 거지 남자가 드디어 송이의 시야에 가득 보였다.
송이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헉!
고용인들이 숨을 들이 킨 순간, 남자가 말했다.
“안아줘?”
“흐어어엉...!”
송이가 또 펑펑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태상이 씨익 웃더니 길을 막는 고용인들의 몸을 감정 담아 퍽퍽 치고서 그녀의 앞에 다가갔다. 그리곤 송이를 꽈악 끌어안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사모님이 드디어 바람을?! 아니, 돌아가셨으니 바람은 아니지만...!! 이라고 생각하는 고용인들의 생각을 뒤로한 채 서로를 끌어안고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태상이
드디어 집으로 귀환했다.
**
깨끗하게 씻고 나오자 태상은 사람이 달라보였다.
그리고 다들 그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송이가 거지와 바람아닌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세상에..! 살아 돌아오시다니, 이건 기적이야 기적!”
태상의 생환 소식이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주변이 난리가 나거나 말거나 태상과 송이는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송이가 태상을 놓아주지 않았던 터였다. 사실 태상도 송이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긴 마찬가지였다.
태상은 그녀의 곁에 있으면서 자신이 비로소 돌아 왔음을 실감했다. 송이는 태상이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냥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를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냥 돌아와 주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태상은 송이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네가 일을 했다고? 그래서 이렇게 마른 거야?”
태상이 좋아하던 글래머 몸매가 삐쩍 말라있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중인 태상이었다. 송이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살 찌워.”
태상이 단호하게 말하자 송이가 피식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돌아왔는데, 그렇게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어머님이랑 아버님한테 너 돌아왔다고 말해드려야 하는데.”
송이가 번쩍 정신이 든 모양인지 소리쳤다.
“어....그러고 보니까 나도 까먹었네.”
이래서 자식 키워봤자 소용 없다는 건가보다. 송이가 재빨리 핸드폰으로 통화를 걸었다.
“어머님!”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니? 숨 넘어가는 줄 알았다, 얘.]
전화를 걸자 얼마 되지도 않아 세연의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부재중 전화가 있었기에 송이는 그녀가 태상의 생환소식을 들었음을 직감했다.
“태상이가...!”
송이가 말을 하려는데, 세연이 가로채서 말했다.
[정말이니? 정말 태상이가 돌아 온 거야? 지금 태우랑 집으로 가고 있어.]
“네 어머님. 태상이 돌아왔어요. 멀쩡하게요.”
송이는 태상의 손을 꽉 잡았다.
[당장 바꿔줘.]
“네.”
송이가 태상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태상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받아들고 말했다.
“엄마.”
[오...세상에...맙소사...하느님 감사합니다....흐윽...흑...!]
세연의 목소리가 쉼 없이 떨리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태상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놓이고, 진짜라는 것이 실감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네 아빠도 집으로 온다고 했어. 일 다 미루고.]
“태우도 같이 오고 있는 거고?”
귀가 좋았기에 송이에게 한 말이었지만,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응. 태우도 같이 가고 있어.]
울먹이던 세연이 진정하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얼마나 컸을지 모르겠네.”
태상의 목소리가 씁쓸해졌다. 아이가 어떻게 커가는지 제대로 봐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송이는 그의 어깨를 쓸어주며 위로했다.
“사진 많이 찍어놨어. 그러니까 그렇게 아쉬워하지 마. 어쩔 수 없었잖아. 이제 같이 있어주면 되지.”
“......”
[거기 꼼짝 말고 기다려!]
세연이 전화를 끊었다.
서둘러 그를 보고 싶었는지 무척이나 다급해보였다. 태상은 피식 웃고 핸드폰을 내린 뒤 송이를 바라봤다.
“엄마 목소리 들으니까 진짜 집으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 나네. 지금 여기로 날아오고 있나봐.”
"잘 돌아왔어. 돌아와줘서 고마워."
송이의 눈가에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자꾸만 보고 또 봐도 그가 진짜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들 죽었다고 말했고, 심지어 장례식까지 거하게 해주는 바람에 희망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들 태상의 죽음을 믿지 않은 송이에게 그가 죽었음을 인정하라고 재촉만 해댔다.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희망조차 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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