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3 고립과 기다림 =========================================================================
“여기로 이동하라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셨어.”
“끙.....”
타치다는 한숨을 깊게 쉬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까라면 까야지 젠장.
언제 자존심이 밥 먹여 준 적 있나. 오히려 자존심 버려서 겨우 먹고 살았던 타치다였다. 그에게 자존심은 무척이나 쓸모없는 거였다. 괜히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서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곤 했는데, 이젠 그런 것도 없었다.
익숙해져버린 것이다.
결국 타치다는 베치와 함께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그가 이동한 곳은, 당연하게도 베치가 알려준 곳이었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타치다는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이동했다가 멕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베치는 걱정하지 말라며 말했다.
“기다리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진득하게 기다리자고.”
“너 나한테 뻥친 거 아니야?”
“내가 왜 그런 뻥을 치냐?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너 같은 놈 속이자고 그 먼 길을 갔을 것 같아?”
“하긴 그렇지. 그럴 이유가 없지.”
베치가 떨떠름하게 말하자 타치다가 멋쩍어졌는지 볼을 긁적였다.
“너한테 한 말은 모두 진짜야. 그러니까 믿어봐. 그분은 꼭 오실 거야.”
악마들을 지배하게 되실 분이니까!
베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세뇌라도 하듯 작게 읊조렸다.
**
마계의 심장.
태상은 붉은 보석을 삼키고 문고리를 바라봤다. 그의 힘이 악마와 비슷해진 것인지, 반응하지 않았던 문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본래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할 악마들이 있어야 했지만, 질서가 어지럽혀진 지금은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악마가 사라진 마계는 말 그대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무질서한 세상이 되어 있었다.
태상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예전에 천사들이 그에게 문을 열어줬던 그 문과 색만 다르고 똑같이 생긴 문이었다.
악마들은 태상이 무슨 의도로 이곳에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그의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더 이상 태상을 감시하지 않았다.
대악마를 잃은 그들은 자신들이 뭘 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인간들로 따지면 대악마는 그들에게 대통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들이 하루아침 사이에 모두 죽어버렸으니 우왕좌왕하고, 자신의 목숨만 챙기게 된 것이다. 아무도 그들에게 태상을 주시하라고 명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태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아직 대악마처럼 강한 능력을 갖고 악마들을 통솔해줄 인재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결국 그들은 태상에게 마계의 심장이 있는 곳을 허무하게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사력을 다해 태상을 막았어야 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태상은 마계의 심장이 있는, 누구도 쉽게 침범해선 안 되는 곳의 문을 열렸다.
사실 악마들이 그를 막으러 왔다 해도 태상은 아마 문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이라는 게 다른 점이었을 것이고 말이다.
결국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다.
다만 그들은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을 태상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게 아직까지 있어서 마계가 무너지지 않은 거구나.”
태상은 문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환한 빛에 잠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예전에 태상이 천계의 심장을 들고 튈 때처럼 오색깔 빛을 내뿜고 있는 마계의 심장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약해보이네.”
빛을 내뿜고 있긴 했지만, 천계의 심장보다 훨씬 약했다. 색이 선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천계의 심장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힘이 미미해보였다.
태상은 저것에 왜 저런 모양을 하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놈들이 힘을 빼내고, 마계를 유지시킬 수 있을 정도만 놔둔 거였었군.”
그러고 보면 천계의 심장을 태상이 취했으면 대악마들은 순식간에 없앨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물론 그것을 태상이 안전하게 흡수 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이 정도 힘을 남겨둔 것은, 마계가 무너지게 할 수 없어서 일 것이다. 태상은 마계가 무너지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그로인해 벌어질 일들이 자신을 골치 아프게 한다면 고려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마계가 무너진다면, 그는 도망칠 구멍도 없는 지금, 무척이나 난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곳에서 빼내기는 해야 하니, 태상은 반짝이고 있는 마계의 심장을 손에 쥐었다. 뜨끈한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빛을 내뿜던 마계의 심장이 순식간에 손에 닿자 순식간에 빛을 잃었고, 태상은 그것을 뜯어냈다.
쿠구구구궁!!
마계의 심장을 뜯어내서 일까?
그곳을 이루던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마계의 심장이 이곳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그런지 이 공간 외의 다른 곳은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태상이 재빨리 밖으로 나오자 얼마 후 문이 부서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계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게 다행인 일이었다. 아직 마계를 받치고 있는 것이 마계의 심장이라는 뜻이었다.
정보 상인이 그 사실을 알고도 이것을 탐한 건지, 아니면 모르고서 태상에게 가져와 달라고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됐든 태상은 이것을 정보상인에게 넘기는 것보다 그가 갖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는 그가 베치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갔을 때, 그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더불어 타치다가 인간계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고 말이다.
대악마가 악마들이 인간계로 이동할 수 없도록, 그리고 인간도 마계로 이동할 수 없도록 막아놨던 것이 아직도 유효해서 태상을 이렇게 귀찮게 만들고 있었다.
태상은 이제 드디어 얼마 지나지 않으면 결말을 볼 수 있을 것이리라 생각하고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악마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가 움직인지 얼마 되지 않아 어마어마한 숫자의 악마들이 그를 반겼기 때문이다.
‘분명 다들 도망갔었는데, 왜?’
문제는 그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점점 더 많은 숫자의 악마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태상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마어마한 숫자의 악마들과 대치하고 섰다.
“싸우자고 온 건가?”
태상이 물었으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악마들도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긴 했다.
“우리는 대악마님의 기운이 느껴져서 그를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그 기운이 네놈한테서 나눈구나.”
“대악마의 기운? 아.”
태상은 어리둥절해 하며 말하다가 이내 깨닫고 말을 멈췄다. 마계의 심장.
이로써 정보 상인이 무엇을 위해 마계의 심장을 얻으려 했는지 깨닫게 됐다. 마계를 붕괴할 순 없으니 흡수는 하지 못할 것이고, 이런 식으로 이용을 하려 한 건가.... 그는 악마들이 대악마의 기운을 내뿜는 마계의 심장을 그의 힘으로 착각하길 바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악마들이 대악마들을 꽤나 열렬하게 그리워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계의 심장 기운이 느껴지자마자 이렇게 쏜살같이 달려오니 말이다.
“내가 그 힘을 가졌다면 어떻게 할 셈이지?”
악마들은 인간들을 얕잡아 본다. 태상은 그들이 자신에게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대항하려 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
“......”
악마들 사이에서 깊은 침묵이 돌았다. 그들은 대악마의 지배를 받으며 천사들을 모두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영광은 대악마를 잃으면서 모두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말이다.
대악마의 기운이 다시 느껴지자 그들은 희망을 찾았고, 그래서 미친 듯이 달려 온 거였다.
그런데 와보니 인간, 그것도 악마 학살자로 악명이 높은 그가 있었다.
악마들은 당연히 혼란스러워했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에게서 대악마님의 기운이 느껴져.”
“그렇다고 그가 악마인 건 아니지.”
“그럼 이제 어떡하라고?”
“기왕 이렇게 모인 거 죽여 버리는 게 어때? 이 정도 인원이 몰렸는데 설마 저놈을 못 죽이겠어?”
“또라이 새끼야! 악마 학살자가 대악마님들을 다 죽였다는 소문도 못 들어봤냐?”
“......”
악마들은 수군대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고 있었다. 태상은 적어도 그들이 자신을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이자 팔짱을 끼고, 그들을 구경했다.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건가 이 악마들은?
태상이 아니꼬운 눈빛을 취하자 악마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건 뭐 장난 하자는 것도 아니고....”
태상은 악마들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또 다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대악마의 기운이 느껴지는 태상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태상은 곧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베치와 타치다를 만날 수 있었다.
타치다는 태상이 어마어마한 수의 악마들을 이끌고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나타나자 입을 쩍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라했다.
베치의 어깨가 한껏 올라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고 말이다.
“어떻게....어떻게...저 많은 악마들을...”
“내가 말 했잖아. 난 거짓말 안했다니까?”
“맙소사.”
태상이 그들 앞에 서자 타치다는 무릎을 꿇고 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베치는 흐뭇하게 그것을 보면서 말했다.
“이놈이 인간계로 이동할 수 있답니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상황이었다. 마계의 심장을 더 이상 정보상인에게 넘길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런, 너무하십니다. 거래를 하기로 하셔놓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파기하면 어떡하자는 거죠?”
그때였다.
타치다의 몸을 낚아채서 하늘 위로 올라가는 악마가 있었다. 태상은 표정을 굳히고 그를 바라봤다.
‘정보 상인...!’
태상은 그가 직감적으로 정보 상인이라던 악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악마들 사이에 숨어 있었던 건가?
제법 강한 기운을 갖고 있어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태상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전 신용을 중요시 생각합니다. 제가 정보를 드렸는데 대가를 주지 않으시려고 하시는 것 같아 부득이하게 손을 좀 썼습니다.”
“커억..!!!”
타치다가 버둥거리며 살려 달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그의 목이 정보 상인에 의해 꺾이려고 하고 있었다.
“당신이 강해서 절 죽일 수 있을 진 몰라도, 절 헤치기 전에 이 악마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은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보의 대가를 주십시오. 그럼 얌전히 이놈을 놓아드리겠습니다. 적어도 이곳에서 원치 않게 오랜 시간을 떠돈 당신이라면, 제 말에 따르는 게 이득이라는 걸 아실 텐데요. 이 자가 없으면 당신은 인간계로 돌아가기 더 어려워 질 겁니다.”
태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렇겠지. 알았어. 약속대로 마계의 심장을 너한테 주지.”
“정말입니까?”
정보상인이 생각 외로 순순히 넘겨주겠다는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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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은 17분에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