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241화 (241/251)

00241  고립과 기다림  =========================================================================

“오~ 저는 그 협박을 질리도록 들어온 악마입니다. 악마들은 대부분 거칠지요. 제가 그것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무슨 대비를 했지?”

“당신의 앞에 있는 저는 꼭두각시일 뿐입니다. 인형이지요. 이 몸을 죽인다고 해도 진짜 저는 죽지 않습니다. 손해 볼 게 없지요. 하지만 당신은 절 다시 찾아오기 위해 많은 곳을 걸어오셔야 할 겁니다.”

“.......”

“전 제 몸을 가장 많이 아낍니다. 절 죽이려 했던 자와는 두 번 다시 거래하지 않죠.”

태상이 악마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말이 진짜일지 확인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7개월 동안의 고립에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온통 악마들을 죽이는 데에 시간을 보낸 그는 다소 성격이 거칠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둘 사이에 작고 소심한 베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정보 상인의 말은 진짜입니다. 제가 장담 드릴 수 있어요.”

태상은 베치가 자신을 뒤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점을 확신하게 되어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무슨 대가가 필요하지?”

정보 상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말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층부에 있는 마계의 심장을 제게 가져다주십시오.”

“.....뭐?”

태상은 뜻밖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그의 입에서 마계의 심장이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있기론 마계의 심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대악마의 힘은 마계의 심장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죽고, 폭발이 일어난 이상 그 힘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계의 심장이 있는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악마를 죽인 당신이라면 빼내올 수 있겠지요?”

“마계의 심장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건가?”

“당연합니다. 마계의 심장이 없다면 계속 이렇게 유지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

그러고 보니 그랬다. 천계의 심장을 갖고 도망친 것 때문에 천계가 무너졌다. 그러니 마계의 심장이 없으면 마계도 무너져야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아직 마계는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악마들에게 힘을 주었던 마계의 심장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걸로 뭘 할 생각이지?”

태상이 묻자 악마가 씨익 웃었다. 그의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반짝이는 것을, 태상은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그건 가르쳐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굳이 악마를 찾을 필요 없이 제가 당신을 인간계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걸로 거래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악마와의 거래는 늘 찝찝하다. 하지만 놈들은 영악해서 너무나도 유혹적인 제안만 던진다.

태상은 결국 그 녀석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그것이 악마의 유혹이라 해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가릴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악마와 손을 잡기로 했다.

**

“네 녀석은 언제까지 따라 올 셈이야?”

태상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녀석은 멋쩍은 듯 말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이런 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나한테 죽고 싶다고?”

베치가 태상의 장난을 차마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옇게 얼굴이 떠선 말했다.

“절대 아닙니다!! 그냥 옆에서 모실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그것밖에 바라는 건 없습니다. 아니, 그것만 바라는 건 아니구나. 절 죽이지 않아 주시는 것도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베치가 횡설수설하듯 말하자 태상은 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길잡이 하나는 잘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는 마계의 심장을 가지러 가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정보 상인은 그에게 마계의 심장이 있는 심층부는 공간이동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지도를 주겠다고 말했고 말이다.

처음 가보는 태상보다야 베치가 훨씬 빠르고 잘 길을 안내할 거란 생각은 들었다.

“그래서 너한테 떨어지는 게 뭐가 있다고 날 모신다는 거야?”

“전 태상님을 마계의 지배자로 만들 생각입니다!”

베치가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그건 태상에게 그리 끌리지 않는 소리였다. 하도 인간님인간님하기에 이름을 알려주긴 했는데, 괜히 알려줬다 싶었다.

“그런 거 안 한 다니까.”

“아닙니다! 꼭 하시게 될 겁니다!”

그냥 죽일까?

태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베치는 그와 계속 함께 한다는 생각에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강한 이를 섬겨서 자신도 덩달아 출세해보자 하는 심보였다.

악마 사회에서는 기회조차 가질 수 없는 약함을 가졌기에 이런 모험을 해보려는 것이었다.

태상은 저 수다쟁이 악마가 그를 귀찮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냥 눈 감아 주기로 했다. 적어도 다른 수작을 마음에 염두 해두고 온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마계의 심장이 있는 곳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고위급 악마가 필요합니다. 그들만이 문을 열 수 있죠. 하지만 이게 있으면 굳이 고위급 악마가 없어도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이 열쇠를 이용해 마계의 심장을 가져와주십시오.]

정보 상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태상에게 그렇게 말했다.

해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손톱만한 크기의 붉은 보석이었다. 이걸 목적지에 도착해서 삼킨 뒤 힘을 사용하면 되는 거였다. 그럼 그의 힘이 악마의 힘처럼 뿜어져 나오게 되고, 그렇게 해서 문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마계의 심장과 천계의 심장.

태상은 그 둘이 부딪치면서 생긴 폭발에서 살아남기 위해 균열이 일어난 공간 속으로 뛰어들었었다. 그리고 눈 떴을 땐 홀로 마계에 있었고 말이다.

그 후로 천계의 심장과 마계의 심장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도 천계의 심장에 균열이 갔으니 모두 함께 터져서 사라져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마계에 아직 심장이 남아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자신이 인간계로 돌아가기만 모든 일이 끝난 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태상은 더욱이 이곳의 악마들을 계속 남겨두어야 하는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지금까지 태상은 악마를 만날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죽여 왔다. 하지만 마계는 너무 넓었다. 그곳에 숨어 있는 모든 악마들을 다 죽이고 인간계로 돌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악마들이 사는 이곳을 내버려 둔 채로 인간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절로 만약이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그가 죽고 태우의 세대에서 또 다시 악마들이 쳐 들어오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노파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제가....하는데.....”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 베치를 태상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태상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촐랑촐랑 걸어가고 있었다.

문득 그들을 지배해달라는 베치의 말이 태상의 귀에 솔깃하게 들렸다.

만약 마계와 인간계를 오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마냥 무리인 일이 아닌 듯싶었다. 태상은 일단 자신의 생각을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다.

악마들을 뿌리 뽑지 못하는 상황에선 지배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듯 했다.

‘마계의 심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태상은 어쩌면 마계의 심장을 갖다 주는 것보다 자신이 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치.”

“옙?”

태상이 자신의 얘기를 듣는 것과는 별개로 열심히 떠들던 그가 태상의 부름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뭔가 굉장히 겁먹은 듯해 보였다.

“타치다라는 놈을 데려와라.”

“지금 뭔가를 가지러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나 혼자서 알아서 할 거야. 그러니 넌 타치다라는 놈을 데려와. 내 앞에.”

“하지만.....혹시 절 떼어 내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제가 많이 귀찮으셨습니까?”

베치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이미 베치는 태상을 자신의 주군으로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를 모시기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버림을 받을 것 같아 보이자 눈물부터 나왔다. 태상이 아니라며 말했다.

“아니, 지금 난 부하한테 일을 시키고 있는 건데?”

“헉! 부, 부하요? 제가 부하해도 되는 겁니까? 허락 하시는 건가요?”

베치가 놀라 허겁지겁 물었다. 태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다.

“옙! 제가 꼭 타치다를 데려오겠습니다!”

그놈을 만나면 어디든 이동해올 수 있을 테니, 태상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난 이 지점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게. 이곳으로 오면 돼.”

정보 상인이 준 지도에서 목표지점과 조금 떨어진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타치다가 있다는 곳 지도를 베치에게 건네주면서, 그 지도에도 표시해주었고 말이다. 베치는 지도를 눈에 담고 또랑또랑하게 대답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타치다에 대한 정보는 태상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보 상인에게 받아놨었다. 그는 악마와 거래를 하는 것을 늘 찜찜하게 생각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받아놓은 거였다.

베치가 팔랑거리며 서둘러 방향을 바꿔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놈이 과연 타치다를 데려 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뭐, 선택지는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태상이 그렇게 홀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마계의 심장을 탐하려는 놈이 좋은 의도를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심장에서 나오는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수작일 것이다. 해서 자신이 대악마가 되려 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비록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놈과 거래를 하기로 하긴 했지만, 태상은 찜찜한 마음을 그냥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다 년간 악마를 보아오면서 느낀 것은 악마를 믿으면 손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베치도 악마였지.’

영 악마 같지 않은 놈인지라 잠시 태상이 자신 스스로가 한 말의 어폐를 깨닫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내 그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저건 보험 든 거랑 똑같은 거일뿐이니까.”

만약 데려오지 않아도 곤란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냥 선택지 하나가 줄어 아쉬울 뿐일 테니 말이다.

**

송이는 아까부터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보내는 남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등 뒤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 M&M 사장 부부를 보곤 다시 활짝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파티장이었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초대장들을 대부분 걸러내지만,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파티가 있었고, 오늘이 바로 그런 파티장이었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기에 송이는 불편한 자리를 마다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이 있으면 곤란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좀 조용한 곳에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한성그룹 차남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제법 반반한 얼굴로 송이를 꼬셔볼 속셈인 듯 했다. 장남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더니, 아무래도 송이와 친분을 쌓아서 기회를 엿 볼 생각인 듯 했다.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이는 한 둘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려 CMC 사장이었고, 영웅의 아내였다. 아름다운 외모와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그녀의 사연은 권력을 갖고 싶어 하는 이들의 먹잇감이 되기 좋았다.

어차피 그녀가 평생 혼자 살진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송이는 그런 남자들의 모든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다음 기회가 된다면....”

송이는 익숙한 추파를 늘 비슷한 레퍼토리로 해결하고 몸을 돌렸다. 선약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대충 사람들과 대화를 한 번씩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파티장을 나섰다.

“완전 비싸게 굴던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술에다가 약 같은 거 먹여서 그냥 한 번 자빠트려 버려. 사진 찍어서 협박하면 끝이야.”

“그래도 영웅이라고 칭송받는 남자 아내인데, 그렇게 건드려도 될까?”

송이는 찐득거리는, 그리고 아주 불쾌한 목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옆에 있던 경호원 두 명도 그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었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과히 좋은 내용의 말들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더욱이 마지막에 남자가 한 말 덕분에 그 대상이 송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더욱 더 말이다. 경호원이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어떻게 할까요?”

그녀의 경호원이 일반 경호원 일리 없었다. 당연하게도 계약자들 사이에서 제법 날리고 있는 계약자들이 그녀의 호위였다. 때문에 지금 당장 그녀가 저 불쾌한 말을 떠드는 놈을 끌고 오라고 하면 진짜 할 수 있었다.

“저 사람들 어떤 사람인지 알아와 줘요.”

감히 저딴 말을 지껄인 자체가 죽어 마땅할 죄였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한가락 하는 이들이었기에 섣불리 처단할 순 없었다.

송이는 대신 그들의 얼굴을 기억해두었다. 둘 중 한 명은 한성그룹 차남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였다.

그리고 얼마 후, 한성그룹 차남이 외국으로 쫓겨났다는 소식이 사교계에 은밀하게 퍼져나갔다. 더불어 그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한 명도 함께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