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1 동창회 =========================================================================
어엿한 아기가 있는 엄마인 여자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 청초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송이다. 태상은 새삼 그녀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저, 저기!”
그때, 자신이 이번에 계약자가 되었다고, 거들먹거리던 동창생 한 명이 다급하게 태상에게 다가왔다. 그가 CMC 사장이라는 게 밝혀진 이상, 이대로 그냥 보낼 순 없었다.
적어도 그와 친분을 쌓을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기왕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시면 좀 섭섭하지 않겠어요?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동창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등학교 때 그와 대화를 나눠본 적 있었으면서도 그는 섣불리 태상에게 반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반말을 하는 것보다 존댓말을 하는 게 더 편했다.
“.....”
태상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송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럴 필요 없다며 말렸지만, 들어왔을 때 그녀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그의 말에 동의하기로 한 것이다.
태상은 이곳에 좀 더 자리를 잡고 앉아 있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아무래도 회의 30분 정도 늦춰야 할 것 같아. 가능하겠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그냥 가도 돼.”
송이가 만류를 했지만 태상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으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대통령 보좌관께서 이쪽에 시간을 전적으로 맞추겠다고 하셨으니 가능하실 겁니다. 그렇게 조정해놓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통화를 금방 끝냈지만, 송이는 통화음에서 대통령 보좌관이라는 말을 들었는지 놀라 말했다.
“대통령 보좌관이랑 만나는 약속인데 미룬다고?”
놀라 묻는 그녀에게 태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 이번에 내가 잠깐 자리 비웠을 때 문제로 나한테 사과하러 오는 거니까.”
정확히는 그가 마계로 납치당하듯 사라져버렸을 때를 말하는 거였다. 탑에 관한 문제로 과하게 CMC 회사를 압박한 것에 대해서 압박을 좀 했더니 계속해서 그에게 한 번 만나자고 난리였다.
물론 고작 그런 일 하나만으로 대통령 보좌관이 나서진 않는다. 그 외에 다양한 일들이 얽혀있는 상황이었다. CMC 회사는 사업체이긴 하지만 정부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그들이 대신하고 있었기에 여러모로 둘 사이가 굉장히 복잡했다.
태상이 직접 나서는 일에 대통령 혹은 그의 보좌관이 나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태상은 솔직히 지금까지 다른 나라 대통령들과 직접 대면을 한 적도 많았다.
그리고 송이와 태상의 대화를 들은 동창생들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지금 우리 때문에 대통령 보좌관이랑 만나는 걸 미룬 거야?
CMC 사장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같은 학교를 나와서 그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긴장감을 조금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어디에서 나온지 모를 친근함을 느끼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과는 평생 연관도 없는 대통령 보좌관이라는 말이 나오자 당황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는 자신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가 지금까지 자신들이 비꼬고 있던 송이였다. 동창생들은 송이가 무척이나 운이 좋은 여자구나 하고 생각했다.
같은 고아원에서 함께 자랐다는 이유로 저 남자를 차지할 수 있다니.
이건 좀 불공평한 것 같았다. 저 기집애가 일부러 미리 그가 이렇게 될 걸 알고 아이를 빌미로 그를 붙잡았을 것이 분명했다. 한 마디로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과 같은 질투였다.
송이보다 자신이 훨씬 괜찮고 훨씬 나은데, 저 멋진 남자를 저런 여자가 차지하다니!
송이에게 넘어 갔으니 자신이 유혹을 하면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엄한 상상까지 하는 그녀들이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건, 태상이 송이 옆에 앉자 동창생들은 그와 그녀의 옆에 몰리기 시작했다. 무려 대통령 보좌관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곁에 남아 준 태상이었다. 그 시간이 얼마 되진 않겠지만 그동안 그에게 얼굴을 제대로 각인시켜야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은 한 둘이 아니었기에 태상과 송이의 주변은 불쾌한 호감을 담은 동창생들로 들끓었다.
이미 그들은 술이 몇 잔씩 들어간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 태상이 생각보다 훨씬 편하게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주자 정말 그와 아주 친한 친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명진이 네가 사장님인 거 알았으면 진작 아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정말 아쉽다. 나 너희 회사 소속 계약자인데, 몰랐지? 나 기억 나? 너랑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었는데.”
당연히 몰랐다. 아니, 알아도 별로 상관없는 얘기였고 말이다. 알았다고 저 남자에게 무언가를 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태상은 피식 웃음을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를 힐끔거리며 지켜보던 여자들은 볼을 붉히며 그가 멋있다고 서로 속삭이고 있었다.
계약자라면 거의 전부가 CMC 회사 소속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동창생이 들어오건 말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번에 무슨 대회? 그런 걸 한다며? 나도 이번에 참가해볼까 했는데. 대회에 대해서 정보 좀 알려주면 안 돼?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도대체 그가 언제 태상의 친구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어도 알려 줄 생각이 없었고, 그가 대회에 굳이 참여를 할 만큼 강한 실력을 갖고 있을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대회에 관한 건 다른 직원이 맡아서 준비하고 있어서. 난 그냥 다 되면 보고 받으면 되는 거라서.”
태상의 말은 그런 사소한 일들에 자신이 굳이 신경을 써야 하냐는 소리였다.
그는 큼지막한 것들만 정해주면 일들은 그 아래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쏟아져오는 태상에 관한 면담요청과 악마와 천사들 사이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하루가 바쁜 사람이었다.
태상의 말을 들은 동창생들의 시선에 대단하다는 듯 존경심이 담겼다.
“내가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체력포션 말이야. 그거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
종종 이런 황당한 질문을 하는 동창생도 있었다.
“그건 영업비밀인데.”
그렇게 동창생들의 질문 퍼레이드를 잠시간 받아 준 태상은 그를 찾는 전화가 계속해서 울리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야 했다.
잠시간의 방문이었지만, 그의 존재감으로 인해 동창회에는 활기가 돌았다. 그들 얼굴에는 자신들이 방금 전 겪었던 태상의 방문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연예인보다 훨씬 더 높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과 몰랐던 인연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기에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마 그들의 지인에게 오늘 일을 얘기하면 믿지 못할 게 분명했다.
태상이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송이는 여전히 동창회의 주인공이었다. 둘의 러브스토리 혹은 태상이 어떻게 CMC 회사를 세우게 되었는지 등등 송이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차분하게 과하지 않은 정도에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이가 나타났다.
“근데 좀 이상하다? 네가 명진이랑 계속 같이 사는 거면, 너한테 어떻게 시어머님이랑 시아버지가 있을 수 있니? 둘 다 고아잖아.”
“헐,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
동창생들이 생각 못한 문제가 튀어나오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문제를 제기한 그녀는 줄곧 송이에게 뾰족한 태도를 유지했던 여자 동창생이었다. 고아원에서 자랐던 그들이 어떻게 시아버지랑 시어머니를 얻을 수 있는지는 확실히 이해 안 되는 상황이긴 했다.
다른 동창생들이 자신의 의견에 동요하자 의기양양해져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거 아니냐는 시선으로 송이를 째려봤다. 이게 전부 다 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물론 태상의 얼굴은 이미 기자회견에서 모두 나온 상황이었으니 그가 CMC 사장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따. 하지만 행복한 척 하는 송이의 말에 거짓이 있다는 것은 밝힐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은 송이는 덤덤했다. 그저 어떻게 상황을 설명할지 고민할 뿐이었다.
“명진이 부모님 찾았어.”
송이가 선뜻 변명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자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으로 착각을 한 여자는 고소하다는 듯 웃음을 짓다가 송이의 말에 와락 얼굴을 구겼다.
“부모님을?!”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거였어. 그래서 지금은 가족이랑 다 함께 살고 있고.”
“어머, 정말 잘됐다! 그럼 송이는 쭉 명진이랑 살았던 거였구나. 우리가 엄청 큰 오해를 했네. 혹시 기분이 나빴던 건 아니지? 그랬다면 사과 할게.”
송이의 남편이 CMC 사장이 아니었다면 다들 그 작은 의문에 빠져 의심하고 거짓말쟁이처럼 몰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송이가 진짜 거짓말을 했다 해도 여전히 태상이 CMC 사장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이미 동창생들은 모두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기로 마음을 정한 상태인 것이다.
무려 CMC 회사다. 대통령 보좌관을 만나고 다니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사람 말이다. 그런 남자의 여자를, 일반인 따질 것 없이 모두가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존재인 CMC 사장의 아내에게 밉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근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아까부터 너 송이한테 너무 공격적으로 말하는 거 아니니?”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너 왜 그러니?”
“질투하는 거겠지.”
“풋! 주제를 알아야지.”
송이에게 뾰족하게 대하던 여자는 한때 송이처럼 신데렐라가 될 뻔 했던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혼녀에 불과했고, 그녀의 인생은 시궁창으로 떨어졌다. 한 때 떵떵거리며 동창생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녀가 말이다.
어찌나 자랑을 많이 하던지, 빈정 상했던 이들이 많았었다.
그녀의 이혼 소식이 퍼져서 원래 이번 동창회에 나오지 않으려다가, 친구가 나가자고 성화를 부려 어쩔 수 없이 나온 거였다. 그런데 나와 보니 고아 임송이가 자신처럼 인생역전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질투가 났던 것이다.
아니, 자신보다 훨씬 더 엄청난 인생역전을 이룬 거였다.
그녀는 임신을 하지 못해 이혼을 당한 거였다. 거기에 더해 남편을 만나기 전에 놀았던 남자들의 일도 터졌고 말이다.
그러니 송이도 자신과 같은 꼴이 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위안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태상이 나타나 완전히 판을 바꿔버렸다. 명진과 송이는 평생을 함께 했기에 과거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불행해진 그녀와 달리 평생 행복하게 살 거란 뜻이었다.
거기다가 아이까지 낳았으니 자신과 그녀의 처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과거 자신에게 알랑방귀 끼던 녀석들이 지금은 송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녀를 제물로 삼아 공격하고 있었다.
보다못한 송이가 말했다.
“그만 하자. 그냥 오해한 것뿐이잖아.”
송이가 착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싸늘했다.
그녀가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는데, 마냥 착한 척하며 그녀에게 당하기엔 송이가 살아 온 세월이 무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쟤가 대놓고 너한테 시비를 걸잖아!”
“맞아. 넌 화를 좀 내야 돼. 화나지 않는 거야?”
“뭐 그런 일에 화를 내니? 괜찮아.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녀에게 아무리 시비를 걸어봤자 자신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왜냐면 결국 그녀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송이의 말은 완전히 그녀를 무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던 지라 어떤 말을 듣는 것보다 훨씬 모욕적이었다. 결국 그녀는 동창회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몰래 스스로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선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는 이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다음편은 17분에 올라옵니다.
아..그리고...야호..음....예....그게 잊어먹은 건 아닌데 등장 시킬 시기를 찾질 못해서....ㅠㅠㅠ 원래 집에 있긴 한데.....크흠....최대한 빨리 등장시키도록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