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190화 (190/251)

00190  동창회  =========================================================================

“나 내일 동창생들 만나야 될 것 같아.”

태상이 침대에 누우면 송이는 그의 옆에 쪼르르 달려와 도란도란 얘기를 하곤 했다. 그녀의 얘기를 자장가처럼 듣던 태상은 뜻밖의 말에 눈을 떴다.

그가 아는 동창생들이라면 결혼식에 왔었던 송이의 친구라는 여자들밖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네 동창생이면....”

태상과 송이가 서로 함께 있을 때엔 명진에 관한 얘기를 잘 꺼내지 않았는데, 동창이라는 말에는 어쩔 수 없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응.”

송이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그녀의 얼굴이 씁쓸해보였다. 아마 그놈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 거다. 이미 죽어 없어진 놈이지만, 아직도 그놈을 기억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불쾌했다.

“나한테는 동창회 한다는 소식 온 적 없는데.”

“너랑 같은 반 아닐 때 애들이야.”

같은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같은 반이었던 적이 아닐 때도 있었다. 그러니 결론적으론 같은 학교 출신이긴 했지만, 송이만 아는 애들이라는 뜻이었다.

“너 그쪽 애들이랑 별로 안 친하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랬었지.”

송이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동창회에 나간다고 했을까? 송이가 말을 이었다.

“우연히 어머님이랑 전시회를 갔는데 만나서 거절을 할 수가 없었어. 어머님도 나가라고 허락하셨고.”

사실 그녀에게 아는 척을 했던 동창생이 제법 미술계 쪽에서 알아주는 여자애였다. 그러다보니 세연은 그녀에게 친분을 쌓으라는 의미로 동창회에 나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신분이 낮으니 친분이라도 높은 쪽 이들과 쌓으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뭐 필요 한 거 있어?”

“아니, 없어.”

송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태상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알겠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송이는 파티장에서 훌륭한 적응력을 보여주었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곳에서도 잘했는데, 단순히 동창생들 만나는 자리에 나가는 것에 큰 문제가 생길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던 지라 태상이 평소라면 묻지 않았을 말을 했다.

“언제 가는데?”

“내일 K호텔에서 한대. 돈 좀 썼다고 엄청 자랑하더라고. 꼭 오라고. 연락이 안 닿은 애들은 소식을 못 전했는데, 우연히 만난 걸 보면 인연인 것 같긴 한데.....”

그는 송이에게 대답을 들으면서도 눈을 감았다. 그 덕분에 송이는 태상이 자신의 말을 그리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해서 송이는 그가 내일 무슨 일을 할지 짐작 하지 못했다.

k호텔에 도착해 친구들과 만남을 가진 송이는 마치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파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편하게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애들은 모두 다 그녀가 고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등장에 동창생들의 시선이 모두 송이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도대체 고아가 어떻게 저렇게 용이 됐는지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것저것 얘기를 물으면 결국 송이는 남편 잘 만나서 인생 역전한 신데렐라였다.

겉으로는 드라마 같다며 좋아했지만, 속으로는 그녀를 비웃고 깔보고 있을 게 뻔했다. 적어도 파티장에 있는 이들은 태상의 이름 때문에 그녀를 저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그녀의 과거를 알더라도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을 하지 말이다.

“옛날엔 솔직히 이렇게 예뻤는지 몰랐잖아.”

“맞아. 나도 처음에 네가 먼저 나 알아보고 눈 크게 안 떴으면 몰라 봤을 걸? 네가 나 아는 척을 먼저 해서 겨우 알았잖아. 왜 이렇게 예뻐졌어! 분위기도 우아해진 게 확실히 때깔이 달라졌다, 너.”

“개천에서 용 난 거지 뭐. 너 예전에 살던 고아원은 자주 들리니? 거기 자주 가. 그래야 걔네들도 희망을 찾지.”

그녀에게 호의적인 이들이 있긴 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 악의가 깃든 말에 사방에서 깔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럽다곤 하지만 모두들 남자 하나 잘 문 여우로 보고 있었다. 송이는 주먹을 꽉 쥐고 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그녀가 저들의 말에 놀아나면 결국 태상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태상이 일반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회사의 사장이었다. 이대로 그들의 조롱에 휘청거린다면 그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는 거다.

송이가 낮게 가라앉았던 눈빛을 매섭게 들어올렸다.

“고아원 후원은 꾸준히 하고 있어.”

“후원? 어떤 후원?”

“가서 이불 빨래 해주고 그런 거 하는 거지. 뭐겠어?”

그들의 비웃는 말을 못 알아 듣는 척 하며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말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장학재단이 따로 있거든. 이번에 내가 태우를 낳아서 시아버님이 나한테 장학재단을 선물로 주셨어. 그래서 내가 고아원에 후원을 하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기로 하셨고.”

송이의 말에 주변에서 말하던 이들의 입이 닫혔다.

장학 재단?

몇 푼 기부하는 게 아니라 재단이라고?

그것도 아이를 낳은 선물로? 생각지 못한 스케일에 당황하던 그녀들이 호호호 웃음으로 당황스러움을 감췄다.

“어머, 그러니? 정말 부럽다. 시아버님이 참 잘해 주시나봐.”

“응. 근데 난 어머님이 더 좋아. 매일 어머님이랑 데이트 하거든. 전시회장도 가고, 일본가서 온천도 즐기고. 이번에 산후 조리할 때 어찌나 살뜰히 챙겨주시는지, 내가 알다시피 엄마가 없잖아. 그래서 그런지 어머님이 자꾸 엄마같이 느껴지더라고.”

송이가 생글거리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에이~ 얘! 우리 사이에 거짓말하기니? 원래 고부갈등이 힘든 거잖아. 더군다나 넌 재혼한 건데, 시어머님이랑 사이가 좋다고? 말도 안 돼!”

송이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혼? 소문이 그렇게 이상하게 났니?”

하긴, 그들이 알기론 송이는 분명 명진과 결혼을 한 상태였다. 둘 사이는 예전부터 유명했기에 둘 모두 고아원에서 자란 것을 모르는 이들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재벌 사모님의 며느리가 되어 나타났으니 그렇게 생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아마 송이가 40~50대 남자와 결혼을 한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아니라고? 너 명진이랑 결혼했었잖아. 명진이가 갑자기 재벌아들이 될 리도 없고, 당연히 재혼한 거 아니야?”

모두 다 알고 있는 거라며 창피해 할 필요 없다는 말까지 하는 그녀들이었다. 송이는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해졌다.

태상이 TV에 자주 나오는 건 아니지만, 기자회견을 거하게 한 덕분에 얼굴이 제법 알려진 상태였다. 그런데 동창생들 중 누구도 그것이 명진임을 아는 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이 아는 고아 이명진과 재벌아들 강명진이 동일 인물이라고 어떻게 상상을 했겠는가.

저들의 오해를 풀려면 태상의 정체를 전부 다 얘기해야 하는 건데, 그들에게 말하기엔 무거운 이야기들이었다. 들을 자격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송이는 그런 거 아니라고 말을 하려 입을 떼었다.

그러나 그때, 화장실을 다녀왔던 동창생 한 명이 호들갑을 떨며 안으로 들어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대박!”

“웬 호들갑이야?”

“지금 밖에 CMC 사장 와 있다!”

“뭐?”

송이가 이건 뭔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근데 실물로 보니까 어쩐지 좀 본 얼굴 같은데...아무튼 남자가 봐도 대박 잘생겼어. 분위이가 장난이 아니야.”

“어머어머!!”

여자애들이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동창회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눈도장 찍히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디? 어디 있어?”

“화장실 갔다가 난간에서 1층 로비 우연히 봤는데 거기에 난리가 나있더라고.”

송이는 설마 하는 생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에게 유독 뾰족하게 굴던 동창 여자가 말했다.

“너도 가려고? 가정이 있는 몸인데, 행동거지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야?”

“.....”

송이는 동창생의 말을 무시하고 걸어갔다. 뒤에서 욕하는 게 들렸지만, 태상이 이곳에 왔다는 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인 것은 괜한 짓이었다.

CMC 사장 얼굴을 보러 움직이던 다른 동창생들의 행동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CMC 사장의 목적지는 바로 그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그와 만날 수 있었다.

그의 구두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저, 저기...여기는 저희 동창 모임이 있는 곳인데....”

그때, 소심한 목소리로 동창생 중 한 명이 태상에게 말했다. 그는 송이를 찾기 위해 주변을 쭉 훑다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주었다.

“알고 있습니다.”

“예? 알고 있다고요?”

“잠깐 사람을 찾으려고 온 겁니다.”

그는 들어가도 되는지 묻지도 않고 남자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기를 바라는 수많은 여자들을 감정없는 눈동자로 훑다가 이내 그를 바라보고 있는 송이에게로 닿았다.

그녀에게로 시선이 닿자마자 그의 무감각했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그가 동창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송이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짧게 키스하며 말했다.

“내가 좀 늦었나?”

“....여긴 왜 온 거야? 온다는 소리 없었잖아.”

“나도 여기에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렸어. 피곤해 죽겠는데, 네 얼굴 보고 충전 좀 하려고.”

그가 윙크를 하며 송이에게 말했다. 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기.....너...이분이랑 아는...사이니?”

태상이 송이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리곤 송이가 그를 소개하기 전에 스스로 나서서 말했다.

“나도 일단 같은 동급생인데, 못 알아보는 건가?”

하긴, 송이도 그렇고 명진도 그렇고 그땐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았던 지라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도 했다. 거기다가 그들은 고아원에서 자란지라, 풍족한 생활을 누리지 못했었다.

지금처럼 몇 천 만원짜리 장신구, 고급 헤어샵에서 만진 머리 등등의 것들을 받지 못했을 테니 그 괴리감에 알아보지 못할 수 있었다. 고아 이명진이 CMC 사장을 조금 닮았다고 동일 인물이라고 상상하기엔 너무 과한 인생역전이기도 했고 말이다.

태상의 말에 동창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화장실을 갔다가 그를 가장 처음 목격했던 동창생은 달랐다. 아까부터 그가 어딘가 봤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내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설마 이명진?!”

에이, 말도 안 돼!

동창생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소리인가. 송이가 저렇게 용 된 것도 이례적인 일이긴 했지만, 명진이 CMC 회사 사장이라니....? 그건 그들의 상식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태상은 달랐다. 간단하게 그의 혹시나 하는 물음에 긍정을 표한 것이다.

“알아보네.”

그의 말에 동창생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하, 하지만 CMC 사장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가 이명진이라면, CMC 사장이 아니라는 말로 들렸던 모양이다. 태상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회사를 내가 운영하고 있는 건 맞아. 그리고 오늘 여기 비용은 내가 지불하는 걸로 할 테니 재밌게 놀다 하도록 해. 집에서 보자.”

태상이 송이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이곳에 일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송이는 바쁠 텐데, 이곳에 들려서 그녀의 기를 세워준 것이 고마워 걱정스레 물었다.

“바쁜데 괜히 나 때문에 시간 낭비한 거 아니야?”

“널 보러 오는 일인데, 왜 시간 낭비야.”

태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에 여자들이 꺅꺅 거리며 반응했다.

잘생긴 얼굴과 그의 주변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카리스마가 그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송이는 태상의 말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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