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5 천사 =========================================================================
“제 이름으로 나가지 않으면 CMC 사장이 어떻게 나올 거라고 보세요? 그걸 적어도 생각하셔야죠. 그리고 그런 사람이랑 친분이 있는 제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세요?”
민아의 말에 선배는 할 말을 잃어야 했다.
그녀가 CMC 사장과 그렇게나 친분이 두텁다면, 절대 그녀에게 밉보일 짓을 해선 안 됐었다. 요즘 가장 영향력있는 회사 1위인 CMC와 척을 지는 일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아는 도도한 표정으로 선배에게 말했다.
“이번 헤드라인 기사는 제 이름으로 나가야 될 거에요. 적어도 회사에 보탬이 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만들어주셔야 할 걸요? 전 누구한테도 제가 따온 이 인터뷰 기사를 넘길 생각이 없어요. 차라리 내지 않으면 모를까. 선배가 절 도와줬다는 이유로 공동으로 이름 올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어림없어요. 제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요?”
“.......”
CMC 회사 사장의 첫 인터뷰.
아마 이 기사가 터지면 난리가 날 것이다. 다들 주목하는 기사가 될 것이고 말이다. 민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게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써먹을 방법도 충분히 알았다. 태상은 그 기사가 헤드라인에 써져서 이목만 끌면 충분했지, 그 기사를 누가 썼다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없으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다들 민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CMC 사장과 친분이 있는 그녀를 함부로 대할 사람은 없었다.
요즘 대세는 계약자였고, 계약자들을 관리하는 것은 CMC다. 고로 민아의 선배는 그녀에게 더 이상 밉보일 짓을 해선 안 된다는 뜻이 된다.
창백했던 민아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선배의 얼굴이 그녀 대신 창백해지는데까지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혜연과 함께 걸어가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어! 정혜연이다!!”
사람들이 그녀를 가리키며 외치는 말이었다. 그리고 혜연은 그럴 때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주곤 했다. 처음에야 어색했지 이젠 익숙해진 시선이었다.
“인기가 대단하네요 언니. 연예인보다 훨씬요.”
아이라가 혜연에게 말했다. 아이라는 이제 제법 한국어를 능통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발음이 조금 뭉그러지긴 하지만 말이다. 빠른 속도로 그녀가 한국어에 익숙해 질 수 있었던 것은 혜연이 그녀의 한국어 공부를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혜연이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언니 팬클럽까지 있는 거 알아요?”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워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라, 곤란한 말이라도 한 거니?]
그러자 사로나가 아이라에게 프랑스어로 물었다. 아이라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라는 혜연이 너무 부끄러워하자 말을 돌리기로 하고 물었다.
“죽은 3명의 계약자들 처리는 어떻게 되기로 했어요?”
“유가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주어졌고, 시체도 모두 잘 인도됐어.”
“다행이네요. 최대한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아이라는 무척이나 분한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앙 다물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동료의 죽음일 것이다.
동료의 죽음은 늘 슬펐으며 안타까웠다. 아이라는 그럼 다시 악마를 잡으러 가야 할 텐데 그 일은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물었다. 자신도 그때 꼭 함께 가게 해달라고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혜연은 태상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며 아이라를 놀라게 만들었다.
“태상 오빠가 직접요? 하지만 송이 언니 때문에 요즘에는 멀리 움직이지 않았었잖아요.”
“어차피 이번에 영국에 들리기로 하셨었어. 그래서 겸사 그곳 일도 해결하기로 하신 거지.”
영국에다 태상이 말했던 대로 금액을 상향했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런 만큼 그곳 상황이 나쁘다는 뜻일 것이다. 최대한 빨리 일처리를 해달라며 계속해서 부탁에 부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럼 오랜만에 오빠랑 같이 움직이겠네요. 아니, 오빠가 가니까 굳이 저희들이 움직일 필요가 없는 건가요?”
태상 혼자서 해결하면 될 일이니 사람이 굳이 많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응. 혼자 조용히 움직이기로 하셨어. 다른 사람이 따라오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고 싫어하시잖아. 한 번에 3명을 상대하셔야 해서 걱정이긴 한데....금방 해결하고 돌아오실 거야. 내일 출국하기로 하셨으니까.”
“아하~”
[어떻게 하기로 했대?]
그때, 사로나가 혜연과의 대화 내용이 궁금한지 아이라에게 물었다. 아이라는 설명을 해주며 태상이 직접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말해주었다.
[혼자서 가는 건 위험해. 내가 따라간다고 전해줘.]
[언니가? 그럼 나도 갈래.]
[넌 여기에 있어. 금방 다녀 올 거야. 넌 전투 계약자가 아니잖아.]
아이라는 보통 계약자를 파견하기 전에 측정을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계약자 파견 책임자가 사로나였기에 그곳에 좀 더 머물러 그녀와 함께 돌아오려고 했던 거였는데, 이렇게 실패를 하고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렇게 한 덕분에 아이라가 새롭게 나타난 악마의 등급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언니가 태상오빠랑 같이 움직이겠대요. 아무래도 언니랑 가면 오빠가 더 편할 테니까요.”
“아, 그래? 힘들지 않을까? 전투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며칠 쉬는 게 좋지 않아?”
예전에는 천사들이 그들의 피로감을 풀어주기도 했고, 다양한 물약을 먹을 수 있어서 계속해서 전투를 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곳에는 그들의 피로도를 풀어 줄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해서 한 번 전투를 한 계약자는 적어도 일주일 이상 몸을 쉬이게 하는 게 회사 방침이었다. 물론 사로나는 일반 계약자가 아니었기에 그런 방침에서 자유롭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몸을 위해 권장하는 일이니, 걱정되어 그런 물음이 나왔다.
“괜찮대요. 무리하는 거긴 하지만, 태상 오빠가 옆에 있으니까.”
아이라는 태상을 믿었기에 사로나가 무리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의 능력을 믿었고, 그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잘 알았기에 더욱 그랬다.
아무래도 태상이 악마를 한 명만 죽이고 오는 게 아니라, 3명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 보내기 껄끄러웠는데, 사로나가 가준다고 하니 혜연도 마음이 놓였다.
“그럼 그렇게 준비해놓는다고 전해줘.”
태상이 싫다고 귀찮다고 해도 사로나와 함께 움직이게 만들 생각이었기에 혜연이 그렇게 말했다.
“반은 언제 들어와요?”
그녀가 왜 반이 언제 들어 오냐는 질문을 한 것은 그가 CMC 회사 소속 계약자이기 때문이었다. 태상이 반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한국이 가장 안전한 나라 1위로 선정 된 만큼, 앞으로의 미래를 보고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이민을 온 상태였다.
반이 이곳에서 태상처럼 회사를 만들어 재기하긴 어려웠다.
길드원들이 각자 다른 나라 사람들이기도 했거니와 길드가 해체 된 탓도 컸다. 때문에 반은 지금 태상의 일을 돕고 있었고, 사로나처럼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악마를 상대하고 있었다.
“비행기 예정은 이틀 후에요.”
아이라는 반과 굉장히 친했다. 서로 마음이 잘 맞는 모양이다. 반은 아이라를 귀여워했고, 아이라는 반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사로나도 반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많은 계약자들이 CMC 소속 계약자가 되긴 했지만, 천계에서의 인연이 좀 더 돈독한 것은 사실이었다.
“자, 그럼 들어가 볼까요?”
세 여자가 한 차에 타고 움직였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당연하게도 CMC 회사였다. 사로나와 아이라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피곤한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
악마가 소환되기 전에 생기는 현상 같은 게 있다.
보라색 소용돌이가 허공에 생기며 그 안으로 파지직 거리는 전기가 맴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공간이 찢어지며 악마가 나타나는 것이다.
악마가 찢어진 공간 안에서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보라색 소용돌이는 사라지고, 악마만 남아 주변을 폐허로 만들고, 인간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계에 있는 천사 계약자들을 죽이면 인간계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꾸준히 이곳을 침략해오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한 꺼번에 엄청난 숫자의 악마가 침략해와 나라 전체가 망해버린 곳도 있었다. 그곳은 악마의 땅이라고 불리며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한 나라가 악마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곳을 다시 되찾기엔 아직까지 다른 나라의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수시로 소환되어 나라를 노리는 악마들만으로도 막아내기가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러니 땅을 되찾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나라들이 혼란에 가득 차 있을 무렵, 놀랍게도 천사 계약자와 악마 계약자끼리 반목하지 않으며 융합하고,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1위로 꼽힐 만큼 치안도 좋은 나라가 생겨났다.
그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그들은 악마가 나타나면 천사니 악마니 따지지 않고 서로 함께 힘을 모와 악마를 처단한다고 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처음에 들었을 땐 거짓말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 나라는 정말로 악마의 침략으로 인해 생긴 타격이 그리 크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말이다.
나라 상황이 너무 안 좋아지자, 만나기만 해도 싸우던 계약자들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 싸워선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문제는 잘못됐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점이다.
나라는 이미 상처투성이었고, 악마들은 사방에서 날뛰었다.
더욱이 그런 생각을 하는 계약자들을 하나로 묶어줄 만한 이가 없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리더의 부재, 그리고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나라. 그것이 현재 온 나라의 가장 큰 문제거리였다.
한국은 그런 점으로 봤을 때, 가장 빠르게 '리더'가 정해진 나라였다. 덕분에 악마의 침략에 피해가 가장 적은 나라로 손꼽힐 수 있었다.
어떻게 천사 계약자와 악마 계약자를 서로 싸우지 않게 만들 수 있었는지, 왜 다른 나라는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CMC라는 회사가 나타난 덕분에였다.
CMC 회사 사장이 만들어낸 한국의 기적이었다. 그 회사가 출범한 덕분에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는 계약자들이 적어졌고, 계약자끼리의 싸움도 많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은 제대로 된 리더를 만난 천운이 따른 거다.
그리고 지금.
영국은 리더의 부재로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계약자 수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고,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 계약자들을 묶어주는 이가 나타나지도 않았다. 어중이떠중이들이 그 역할을 한 번 해보려고 나섰다가 괜스레 애만 쓰다 죽어나갔다.
계약자들은 리더를 원하긴 했지만, 아무나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들보다 강한 힘을 가진 자를 리더로 원했다.
결국 영국은 자기들끼리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CMC 회사에 지원을 요청을 했다. 그들이 이곳에 오지 않는 이상, 영국이라는 나라의 미래는 없었다.
아슬아슬한 살얼음 판을 걷고 있는 영국의 어느 한적한 골목.
아무것도 없었던 허공에서 흰색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곳에서 길쭉하게 공간이 찢어졌다.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보았다면 악마가 나타났다며 소리를 지르고 도망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이 현상을 볼 이가 없었다.
덕분에 흰색 소용돌이에서 공간이 완전히 찢어질 때까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순조롭게 찢어진 공간에서 누군가의 몸이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공간은 묵직한 성인 남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를 토해내듯 뱉어내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헌데, 이상한 것은 소용돌이의 색이 보라색이 아니라는 것과, 그 공간이 뱉어낸 이가 악마가 아닌 것 같았다. 인간계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파괴하거나 인간을 죽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덩치가 과하게 크지도 않았으며, 뿔이 달리거나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성인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은 몸을 갖고 있었다. 마치 사람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의 생김새였던 것이다.
다만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의 등 뒤에 달린 커다란 날개다.
"하아.....하아....."
그는 숨을 쉬며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던 모양이었다. 그는 흰 날개를 펄럭이며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여기가...어디지?"
주변에는 높디 높은 건물이 우뚝 서 있었고, 사방에는 시끄러운 소리와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는 이마에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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