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133화 (133/251)

00133  붉은하늘  =========================================================================

사로나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졌어요.”

“앗? 정말요?”

“상처 없이 저 돌멩이들 사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자신이 없네요.”

태상이 서로 시합을 할 때, 가장 먼저 상대방에게 상처를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라 말했기에 룰에 따라 혜연의 승리였다. 사로나에게서 받은 승리가 굉장히 기분 좋았는지 혜연이 아자! 하고 파이팅 하는 손짓을 했다.

그녀의 집중력이 흩어져서 그런지 돌멩이들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사로나가 터벅터벅 걸어 나와 검을 검 집에 넣었다.

"수고했어. 다들 굉장히 좋아졌네."

"아직 많이 부족해. 좀 더 연습해야겠어."

"맞아요. 더 열심히 연습할 거에요."

"연습이라....사로나는 외국에 있으니 할 수 없지만, 혜연이 너한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곳을 아는데."

태상의 말에 혜연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주세요!"

"인간계에서도 연습하면 훨씬 도움이 될 거야. 나도 자주 다니니까 그곳에서 대련을 해도 좋고."

태상이 말하는 곳은 지은이 운영하는 체육관이었다. 혜연은 접속을 끊으면 당장 가보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사로나는 혜연이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을 얻었다는 것이 부러웠는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다 같은 국적 사람이었으면 훨씬 재밌었을 텐데 아쉽다."

아이라가 사로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아쉬움을 토로했다.

"어쩔 수 없지."

사로나가 그렇게 말하자 태상이 얘기 잘 했다며 말했다.

"혹시 한국으로 이민 올 생각 없어?"

"우리가?"

"아이라 말대로 너희들이 한국으로 온다면 서로 이렇게 그곳에서도 연습할 수 있잖아."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언어였다. 사로나가 그것을 얘기하려고 입을 연 순간, 아이라가 먼저 말했다.

“점수로는 언어를 배울 수 없을까? 뭐든 가능하다고 천사들이 그랬었잖아.”

“....그 생각은 안 해봤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들이 한국으로 아예 들어와 살 때 가장 큰 장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뜻 자신이 평생 살던 나라를 두고,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을 결정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난 한국에서 지낼 수 있다면 지내보고 싶어.”

아이라는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에 그러고 싶은 마음이 많은 모양이었다. 요즘엔 연예인과 드라마에 빠져서 그것 때문이라도 가보고 싶어 하는 듯 했다.

“일단 그건 생각해볼게.”

태상도 가볍게 물어 본 것이었지 진지함을 담아 한 말이 아니었다.

대신 태상은 갖고 있던 미션북을 꺼냈다. S등급 미션을 성공하고 받은 보상이었다.

심장으로 상승한 힘을 확인하기 위해선 이런 대련보다는 미션을 하는 게 최고였다.

그가 어떤 미션을 할지 고심하며 책장을 넘겼다.

**

“이 미션만 성공하면 약속대로 날 강해지게 해줄 수 있다는 거죠?”

한 남자가 초조한 듯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가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던 인물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거만하게도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자신의 계약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들은 계약자를 직접 손데서 강해지게 할 순 없다. 다만 강해지는 방법은 알려줄 수 있지. 우린 이미 서로를 돕기로 계약을 맺은 상태다. 네가 강해져야 내게 돌아오는 이득도 많아지니 걱정하지 마라.”

“그 약속 꼭 지켜야 할 겁니다.”

남자는 그의 확고한 말을 믿겠다는 듯 말했다.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존재, 악마가 클클 웃음을 지었다. 네놈이 날 믿지 않으면 어떡하겠는가. 그는 남자에게 줄 것이 많았으나, 남자는 악마의 마음에 차는 것을 내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접속을 해제할 생각을 하다가 문득 잊은 것이 생각나 악마에게 말했다.

“잊을 뻔했네요. 이번에 미션 성공으로 받은 점수를 모두 돈으로 바꿔주십시오.”

악마가 그의 말이 탐탁지 않았는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점수는 언제 모을 생각이지? 강해지고 싶다면 욕망은 잠시 인내하는 게 좋다.”

하지만 지금 명진의 상황이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빌어먹게도 그는 지금 인간계에서 쓸 돈이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다. 이미 한 번 돈 맛을 본 그의 씀씀이는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본인은 왜 점수로 계속 바꿔오는데도 돈이 모자라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까진 점수로 바꾼 현금이 그의 씀씀이를 부족하게나마 감싸주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명진은 강태상이 되기 전에도 씀씀이가 무척 컸다. 송이에게 생활비 한 번 가져다주지 않고 모두 자신의 사치로 쓰지 않았는가.

그런 사람이 강태상의 몸이 되었으니, 한 번 커진 씀씀이를 다시 예전으로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돈들이 다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깊게 생각 할 생각도 없는 명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미션을 해서 받은 점수를 모두 현금으로 바꾸는데 쓸 수밖에 없었다.

“요즘 여유가 없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걸 바꿔야 생활이 가능해요. 지금 핸드폰 하나를 만드는 것도 대포 폰으로 해야 돼서 돈이 배가 든단 말입니다.”

“....현명하지 못한 놈이군.”

악마가 어쩔 수 없이 점수를 현금으로 바꿔주어야 했다. 그가 번 점수였기에 악마가 그것을 사용 하는데 참견을 할 순 없었다. 다만 자신의 충고를 무시한 명진이 분명 후에 후회를 할 것이라 생각됐다.

악마들이 계약자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점수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명진은 점수를 모아서 크게 쓰기는커녕 현실이 더 중요하다며 무의미한 돈으로 바꾸고 있었다.

악마들이 생각하기에 점수로 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현금이었다. 그런데 명진이 자꾸만 현금으로 점수를 소모하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꼭 성공시키고, 다음에는 그곳에서 뵙죠.”

악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진은 접속을 종료하고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부득이하게 제약되어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이게 다 강태상 그놈 때문이다.

놈이 천사 계약자였다는 것을 몰랐던 자신의 불찰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는 반드시 이 굴욕과 분노를 놈에게 복수하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하기 무척이나 힘든 미션이지만, 이걸 성공시키기만 하면 더 이상 명진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어진다.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계로 바뀌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러려면 자신이 악마에게서 받은 미션을 성공시켜야했고, 그 대가로 강해져야 했다. 그래야 이곳에서 그가 ‘갑’이 되어 생활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계속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갔다.

죽을 뻔 했던 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악바리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태상은 아마 자신을 한 번 이겼다고 잔뜩 도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시궁창에서 살아 온 자신을 절대 무시해선 안 되는 거다.

그는 바닥에서 올라왔다.

해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차피 갈 데까지 간 삶을 살아왔으니 새삼 돌아왔다고, 절망하지 않는다. 다시 이 악물고 올라갈 생각부터 해야 하니 절망할 시간도 없었다.

명진은 비록 강태상에게 당해 실패를 맛봤지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럴 수 있는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안락한 평화를 맛본 후, 그것에 대한 탐욕으로 재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악마의 속삭임으로 자신이 이곳에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얼마나 남았지?”

명진이 수첩을 들어 자신이 죽인 천사 계약자들의 숫자를 셌다. 만약 천사 계약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면 명진은 이 일을 훨씬 빠르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찾기 위해 사람이 풀린 한국을 떠나 몰래 다른 나라로 간다면 확률은 더 높아질 수 있었다.

한국은 재물이 되어 줄 천사 계약자를 찾기엔 너무 작은 나라였다.

그는 좀 더 은밀하게 천사 계약자들을 죽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파티는 늘 그러하듯 똑같이 적당히 지루하고, 적당히 화끈했으며 적당히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태상에겐 그저 그런 뻔한 공간이었지만, 옆에 있는 송이는 그렇지가 못했다.

과거 태상은 '스페어 로쉬'의 회원이었고, 그곳엔 그의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스페어 로쉬'란 후대를 이끌어 갈 후계자들, 그러니까 재벌2세 혹은 재벌3세 들이 모여 만든 노블레스들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송이와 그 모임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펄쩍 뛰었다. 태상이 그곳에 대해 잘 알기에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초대장엔 특별히 태상을 겨냥하기라도 한 것인지 부부 혹은 커플동반 파티라는 주제를 내세웠다. 한 마디로 너희 둘 부부 모두를 보고 싶다는 뜻인 것이다.

태상이 그들 세계에 등장한 것은 엄연히 공식적으로 결혼식이 처음이니 송이까지 궁금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상은 정말 송이를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놈들이 무슨 장난질을 쳐놨을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태상은 그곳에 가입할 조건에 미달한다. 그런데 권력으로 자신을 집어 넣는 것이라면, 그들은 더욱 반발할 것이다. 해서 참석을 하지 않겠다 말을 하려했는데, 송이가 덜컥 참석 하겠다고 강회장에게 말을 해버렸다.

강회장이 아무 것도 모르는 송이를 노린 것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더 이상 참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태상은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송이가 임신을 한 것은 다른 이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걸 모르는 놈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만약 녀석들이 송이와 태상을 골탕 먹일 생각을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런 대비 없이 가면, 좋지 않았다.

송이야 예전 자선파티를 생각하며 참석하고 싶다고 흥미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선파티처럼 우아한 파티는 아닐 거라는 걸 100% 장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정말 얌전히 지내고 싶었는데, 이렇게 주변에서 도와주질 않으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송이와 태상은 과하지 않은 의상을 선택해 차려입고, 파티장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오자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듯 모두가 그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송이가 긴장이 됐는지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태상은 송이를 에스코트하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거나 마시지 마. 술 들어 가 있을 수 있으니까.”

“응.”

혹여 모르고 마실 수 있었기에 주의를 주었다. 그들이 다가가자 주최자인 김도진이 웃으며 반겼다.

“오셨군요. 전 김도진이라고 합니다. 이 모임의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태상은 당연히 그를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도진이 청한 악수를 맞잡았다.

“강명진입니다.”

“그 이름이 요새 무척 핫하다는 건 잘 알고 계시죠? 갑자기 나타난 강호그룹의 새로운 별!”

김도진이 태상에게 와인을 건넸다.

“아름다운 아내 분껜 와인이 좋지 않을 테니, 상큼한 생과일주스를 드리겠습니다.”

도진은 생과일주스를 송이에게 내밀었다. 태상은 송이를 대신해 받은 후, 그녀에게 마지못해 잔을 건넸다.

“이렇게 핫한 분을 모셨는데, 환영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죠. 그렇지?”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그들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태상은 골치 아픈 일은 애초에 생략하자는 생각으로 말했다.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해서 안타깝지만, 전 이 모임에 가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네요. 제가 들은 게 맞다면, 강명진 씨는 저희들 모임에 가입을 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김도진은 생각지 못한 말에 얼굴을 구겼다.

그들이 환영회를 하는 건 태상이 '스페어 로쉬 에 가입을 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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