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8 민아 =========================================================================
“그런데 왜 이곳에 계속 남아 있었지?”
태상이 그녀를 추궁하는 건 당연한 권리였다. 그는 돈을 지불하고 이곳을 빌린 것으로 분명히 값을 냈으니 잘못은 엄연히 지은에게 있었다. 지은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동자로 말했다.
“그쪽한테 볼 일이 있어서 그랬어요!”
“나한테 볼 일? 날 알아?”
태상은 잠시 접어두었던 의심을 다시 펼쳤다. 지은이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만 늦게 대답했어도 그에게 또 다시 목이 잡힐 것 같았기 때문인지 무척이나 움직임이 빨랐다.
“분해서 그랬어요! 그놈이 엄청 귀한 손님이라기에 제가 빼앗아 볼까 하구요...!”
빼앗는 것은 둘째 치고, 이상한 걸 목격한 바람에 그에게 죽을 판이었다. 지은은 태상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그녀를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려 해도 그에게 붙잡힐 것이고, 왼쪽으로 빠져나가려 해도 똑같을 것이다. 지은을 완벽하게 마킹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날 왜 빼앗는다는 거지?”
“봤잖아요. 저희 체육관은 시설이 낙후돼서 손님이 안 와요. 상도덕도 없이 아래층에 체육관을 내서 저희 쪽 손님을 전부 다 빼앗아 갔어요. 그래놓고 30만원 주면서 오늘 하루만 귀한 손님이 써야 하니까 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거절하려다가 얼마나 귀한 손님이기에 그러나 싶어서 수락하고 숨어 있었던 거에요. 빼앗아 볼 수 있으면 빼앗아 볼까 싶기도 해서....”
지은이 우물쭈물거리며 말끝을 흘렸다.
태상은 이 일의 시작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깨닫고 이해를 했다.
“그래서 날 회원으로 꼬셔보려고 숨어 있었다?”
“...네.”
지은이 이실직고한 사실을 다시 확인받자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운동하는 걸 다 봤겠군?”
일이 곤란하게 됐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운동하는 걸 들켰으니 말이다. 체육관 관장이 아무래도 그가 하루에 빌리면서 주는 돈이 탐이 난 모양이었다. 이런 사정이 있는 곳에 자신을 보낸 것을 보니 말이다.
“체육관 관장이 많이 떼먹었네.”
“네?”
지은은 태상이 자신을 협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네가 본 걸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죽여 버린다던지 하는 말을 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엉뚱한 말을 하자 지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장한테 네가 받은 돈의 배 이상을 줬거든.”
“......”
배 이상이라고? 그럼 빌려준 건 난데 그놈이 돈을 챙겼다 이거야?
지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분노했다. 태상에게 느끼는 두려움도 어느새 사라지고, 그 나쁜 놈을 당장 찾아가 주먹을 날려주고 싶은 마음이 꽉 찼다.
태상은 지은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빤히 응시했다.
아무래도 정말 나쁜 마음을 먹고 태상을 노리는 계약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기왕 들킨 겸에 그녀를 유용하게 써볼까 싶었다.
계약자가 아니라면 단순히 운동하는 걸 들켰다는 이유로 죽일 순 없었다. 시체 처리도 어렵고, 저런 어린 계집애를 그런 이유로 죽일 정도로 살인을 즐기지 않았다.
더욱이 자신이 다니던 체육관은 손님이 많아 아무 때나 체육관을 사용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 위층에 이렇게 조용한 체육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엔 손님이 없고, 오고 싶을 때 와서 운동을 편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몇 번 다니다가 건물 하나를 구매해서 체력 단련하는 곳을 하나 만들려고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마침 저 여자가 자신이 운동하는 것을 봤으니 생각보다 일이 편해질 수 있었다.
그녀에게 앞으로 만들 체력단련장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이로 만들면 서로 나쁘지 않은 결말이 될 것 같았다.
“좋아. 내가 이곳 회원이 되지.”
“네?”
아니, 보통 '지금 여기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구나!! 미안하지만 그 입을 막아야겠으니 이만 죽어라!!' 하고 나와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그런데 태상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지은이 바라던 말이었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금 여기 회원이 된다고 하신 거에요?”
설마....회원이 되어주는 걸로 입막음을 하려고?
“그래. 대신 365일 내가 원할 때 무조건 열어야 해. 다른 손님은 받지 않아야 하고, 내가 연락을 하면 넌 바로 달려와서 내 운동 트레이너를 해줘야 한다.”
“그거야 당연히 가능하죠!”
어차피 받을 손님도 없었다.
돈을 바라고 태상을 꼬시려 한 게 아니었다. 아래층 체육관 관장 엿이나 한 번 먹어보라는 복수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리자 지은이 환하게 웃었다.
시설이 낙후 된 것은 태상이 준 돈으로 고치라고 하면 될 것이다. 아니, 솔직히 그에겐 시설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스파링을 할 것도 아니고, 주먹 한 번에 터져버리는 샌드백을 칠 것도 아니었다.
그냥 튼튼한 바닥과 다른 이들의 시선이 차단 된 공간만 있으면 됐다.
이곳이 더러운 것도 아니고, 지은의 손길이 닿아 먼지 쌓인 곳도 없었다. 태상은 이 정도면 예전보다 훨씬 만족스럽다 생각했다.
“근데....왜 운동 훔쳐 본 거에 대해선 막 입 열지 말라느니 뭐라 안 하시는 거에요?”
지은은 그게 궁금했다. 딱 봐도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는 남자인 것 같은데, 비밀 엄수에 대해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니 이상했던 것이다. 태상이 그런 지은의 물음이 같잖다는 듯 말했다.
“그걸 누구한테 얘기할 건데? 얘기한들 믿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
증거가 있어야 겨우 믿어주는 세상이었다. 태상이 증거를 안 남기면 그녀가 아무리 떠들고 다녀도 믿을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태상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굳이 경고를 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사정을 알았기 때문이다. 돈이 필요한 자는 그것을 주는 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태상은 그녀를 믿는 게 아니라 그녀를 써먹을 돈의 힘을 믿었다. 그럼에도 확실히 한 번쯤 경고를 해주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거야. 난 내 사람을 아껴. 기회가 왔을 때 잡으라고.”
태상의 말에 지은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무슨 기회를 잡게 된 것인지 아무 것도 몰랐다.
그녀의 인생이 그의 등장으로 엄청나게 바뀌게 될 것임을 말이다.
미래를 모르는 지은은 그가 무서워 어떻게 인간같지 않은 빠른 움직임이 가능한지, 그의 정체를 묻지 못하고 있었다.
**
‘뭐야, 너 그렇게 난리를 치고 나가서 길드에 또 든 거냐?’
그녀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는 남자를 떠올리며 사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기서도 우리한테 한 짓 고대로 하고 다니냐?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말이야.’
그녀는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네 년 길드마스터 어디에 있냐? 내가 너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얘기해줄 생각이 있는데 말이야.’
으드득-
사로나의 입 안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사로나는 그가 그렇게 이죽거리는 걸 듣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무시하는 게 이기는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결국 그건 도망치는 것에 불과했다.
놈이 악마 계약자라면 사지를 찢어 죽였을 텐데, 안타깝게도 놈은 그녀와 같은 천사 계약자였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면 지금 그녀가 몸담고 있는 길드에 피해가 올지 모른다.
재수 없고 더러운 새끼지만, 어찌됐든 그놈은 대형 길드의 길드 마스터였으니까 말이다.
자신 때문에 길드에 피해를 줄 순 없었다. 자신의 문제이니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이 아이라가 그 놈과 얘기를 할 때엔 근처에 없어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듣지 못했다.
만약 아이라가 옆에 있었다면, 그녀는 참지 못하고 놈의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인내하고 또 인내한 사로나는 일행과 함께 천계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자꾸만 놈의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라 괴로웠다. 접속을 해제하면 좀 나을까 싶어 인간계로 돌아 온 후, 태상의 몸이 괜찮은지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에 대한 걱정을 그만두면 또 다시 그 개자식의 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울 것 같았다. 해서 사로나는 차라리 생각을 좀 더 유익한 것에 쓰고자 했다. 운동을 하며 머릿속을 비우고 돌아왔다.
“언니, 기분 안 좋아 보여.”
아이라나 사로나나 모두 고생을 했기에 피곤할 수 있었다. 치료를 받은 몸보단 정신적인 피로감이 많았다.
“난 오늘 미션을 하면서 언니가 계속 이런 일들을 겪어 왔다는 생각이 드니까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어.”
아이라가 고개를 푹 숙이고, 사로나에게 얘기를 털어놓았다. 아이라는 이렇게 길고 힘든 모험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여러모로 드는 생각이 많았다.
“내가 편하게 잠을 잤을 때, 언니는 천계에서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었던 거잖아.”
“난 괜찮아.”
“이런 일을 밥 먹듯이 겪었을 텐데 어떻게 그동안 티 한 번을 안 냈어?”
아이라는 이번 미션이 너무 힘들었다. 솔직히 피를 보고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는 게 무척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티를 낼 수 없었기에 혼자서 참고 또 참았었다. 그런데 자신은 쳐다보기조차 힘든 광경을 사로나는 직접 뛰어들어 피를 흘리고, 바닥을 뒹굴었다.
혼자서 그런 것들을 어떻게 견뎌냈을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자신은 이렇게 언니에게 털어놓을 수나 있지, 사로나는 털어 놓을 곳도 없었을 것이다. 아이라가 나오려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냈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앞으로 언니가 의지할 수 있는 계약자가 될 게! 꼭!”
아이라의 다짐에 사로나는 복잡했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힘든 경험들을 어떻게 버텼냐고? 그건 아이라가 그녀의 곁에 있어서줘서였다. 아이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로나에겐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된다.
사로나는 아이라에게 괜스레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이런 간지러운 얘기는 그만두려는 의도였다.
“나도 심장을 먹어볼까 해.”
“언니도?”
“태상이 혼자서 애를 쓰면서 강해지고 있는데, 나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잖아.”
“나도 먹어서 강해지고 싶어!”
“넌 B등급 심장보단 C등급이나, D등급 악마의 심장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여왕이 한 번에 감당하지 못할 심장을 섭취하면 좋지 않다고 말했었다. 아이라도 동의하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심장을 구하려면 어떡해야 해?”
“미션을 해야지.”
“근데 미션을 하면 천사가 심장을 가져가잖아. 대신 점수를 주고. 그럼 어떻게 심장을 모와? 천사한테 점수말고 심장을 갖고 있겠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사로나는 아이라의 말에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거대로 문제이긴 하네. 여왕은 천사들이 우리들에게 일부러 심장을 섭취하면 강해진다는 걸 알려주지 않는다고 했었어. 천사한테 심장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들키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아이라도 그런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들 몰래 심장을 빼돌릴 방법이 필요하구나.”
천사는 계약자들을 보좌해주는 이들이라는 게 보통 인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미션에서 그들은 S등급 미션이 위험해서 하기 싫다고 하는 이들을 강제로 하도록 만들었다. 그건 절대 계약자들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천사들은 계약자들을 생각해주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부려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심장을 통해 강해지는 것을 천사들에게 들킨다면.......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천사들이 마냥 아군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로나는 이 문제를 일행들과 함께 얘기해봐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