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9 민아 =========================================================================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니??”
제법 오랫동안 운동을 하고 집에 도착한 태상은 뜻밖의 인물이 집에서 송이와 함께 있자 당황스러워해야 했다. 그 인물은 바로 세연이었다.
“왜 여기 있어? 안 바빠?”
당연히 바빴다. 세연은 민아의 일 때문에 지금 약속도 급하게 해결하고 다시 돌아 온 상태였다. 태상이 자꾸만 전화를 받지 않아 토라져 있었던 세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연히 바쁘지! 근데 너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 아니니. 약속 있었던 것도 빠르게 해결하고 온 거야.”
“끄응....뭐 때문에 그러는데?”
태상은 옷가지를 벗으며 물었다. 땀에 젖어 있어서 입고 있기가 싫었다. 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상의 옷가지를 받아주었다.
"어디서 운동하고 온 거야? 집에 헬스장 있잖아. 가까운데 두고 왜 먼데서 운동을 다니니 너는?"
"거긴 싫어."
"왜 싫어?"
거야 그곳에서 운동을 하고 있으면 이렇게 세연이 갑자기 들이 닥친다던가 다른 고용인들이 알짱 댈 수 있으니까였다. 태상이 왜 싫은지에 대해 답을 하지 않자 세연이 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리며 말했다.
“씻고 와. 할 얘기 있으니까.”
"알았어."
태상이 화장실로 들어가자 주방에 있다가 온 송이가 놀라 물었다.
“태상이 온 거에요?”
“응. 방금 왔어. 지금 씻으러 들어갔다. 저녁밥은 어떻게 됐니?”
“네, 잘 돼가고 있어요.”
송이가 직접 요리를 한 것은 아니고, 고용인들이 메뉴를 받아서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을 그녀가 잘 되어가고 있나 확인하는 차원에서 다녀온 것이었다. 아직까지 송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식사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대령한다는 것 자체를 어색해했다.
“네가 꼼꼼한 건 알겠다만 다들 실력 있는 요리장이니까 믿으렴.”
세연의 말에 송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님. 어머님이 계셔서 좀 더 신경 쓰고 싶은 마음에....”
같은 말을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송이의 그런 말들이 세연의 기분을 나쁘게 하진 않았다.
“흐응~ 그래?”
오늘 세연이 태상에게 물을 말이 송이에겐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다. 태상과 이어주려 했었던 아이들 중 한 명에 대해 말해야 하니 말이다. 해서 세연은 괜스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송이가 갑자기 중간에 끼어든 거지, 원래 갑작스러운 일만 아니었으면 민아는 태상의 짝이 되었을 여자후보 중 하나였다.
그러니 송이는 태상이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고 그녀를 선택했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상이 씻고 나오자 저녁식사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 세연은 식사를 하면서 태상에게 얘기를 꺼낼 기회를 노렸다.
“오늘 민아한테 전화가 왔어.”
“민아?”
태상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민아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세연은 괜스레 태상을 째려보며 말했다.
“네가 예뻐하던 애 있잖니!”
“내가 예뻐하던 애가 있었어?”
태상은 금시초문인 듯한 표정이었다. 송이가 민아라는 여자의 이름이 나오자 쥐고 있던 젓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우진병원장 딸 말이야! 너 정말 기억 안나?”
세연이 답답해져 말했다. 태상은 우진병원이라는 말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우진 병원이라고 하니 생각이 난 것이다.
“그 건방진 꼬맹이?”
“넌 다 큰 처녀한테 꼬맹이가 뭐니 꼬맹이가?”
“나한테는 꼬맹이지.”
“너랑 세살 차이밖에 안 난다?”
“아무튼 걔가 엄마한테 왜 연락을 해?”
“왜 하겠니? 당연히 너한테 연락이 안 닿으니까 걱정 되고, 궁금해서지. 그리고 엄마랑 민아 원래부터 친했어. 그리고 너랑도 자주 만났었잖아.”
태상이 세연의 말에 어이가 없어져서 헛웃음을 지었다.
“엄마랑 걔가 친하다고?”
“응.”
“나 참, 아무튼 그래서 걔가 엄마한테 뭐라고 했는데?”
“너랑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할 얘기가 꼭 있대. 그래서 일단 물어보겠다고 했어.”
태상은 세연과 민아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전혀 모른다. 민아와 만남을 주선해주기로 했던 것도 말이다. 해서 그녀가 자신에게 도대체 무슨 볼 일이 있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아는 거 없어?”
태상의 물음에 세연이 뜸을 들이며 답을 하지 않았다.
“........”
“뭐야, 아는 거면 얘기해줘. 그래야 만날지 말지 결정을 하지.”
“그냥 네가 만나서 수습이나 해주고 말아. 대충 아무거나 핑계 대서.”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꼭 만나야 하는 일이야?”
“그래줬으면 좋겠어. 내가 아끼는 아이니까.”
송이에겐 좀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 해주었으면 했다. 세연의 표정을 본 태상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냥 내 마음대로 알아서 한다?”
“응. 그냥 한 번 만나만 주면 돼.”
세연은 민아가 태상을 좋아하는 마음을 무시할 수가 없어 굳이 그에게 민아와 한 번 만나 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녀에겐 그것으로 보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세연이 민아와 약속을 잡아보겠다고 말했다.
송이는 그런 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직 그녀는 민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연이 있는 앞에서 섣불리 이것저것 캐물을 순 없었다.
“민아가 누구야?”
세연이 할 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자 송이가 본격적으로 민아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태상은 그녀가 찝찝해 한다는 것 자체를 몰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 병원에서 건강검진 받을 때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애 한 명 있었어.”
“......그래?”
송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라면 분명 그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사실 걱정할 건 없다. 그는 이명진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명진은 바람을 피우는 일이 잦았지만, 태상은 명진이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전전긍긍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송이는 자신이 태상과 명진을 똑같은 사람이라 착각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더 이상 표정을 찌푸리지 않고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만나서 잘 설명해주고 와.”
“걔가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어.”
“여러 가지 할 말이 있겠지.”
그 여러 가지가 무엇일지 송이는 예상이 됐지만, 태상은 영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천계에 접속한 태상은 라마스와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태상처럼 상처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쉬니까 한결 가벼워졌어. 이게 공헌도 1위 보상인 거지?”
태상이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을 라마스에게 보이며 말했다. 라마스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태상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책이었다. 그 안을 열어보면 다양한 내용이 적혀 있는 미션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의 글씨는 수시로 바뀌었는데, 글씨가 사라져 새하얀 페이지가 된 곳은 미션을 할 계약자들을 더 이상 받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페이지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미션지로 바뀌게 된다.
즉 이 책은 천사들이 무슨 미션을 하는지 한 번에 알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책인 것이다. 이 책을 수시로 살펴서 마음에 드는 난이도 미션을 선택해 받을 수가 있었다.
미션 난이도에 따라 나눠져 있어서 태상은 이번 보상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젠 굳이 미션을 받으러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이 책 하나면 모두 확인이 가능하니 말이다.
“제법 유용한 것 같아.”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라마스는 태상에게 오랜만에 몸 상태와 점수를 확인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태상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라마스가 그의 몸 상태를 스캔했다.
“현재 총 모인 점수는 871,003,000점이며 최상급 힘 최상급 민첩 최상급 지능 최상급인 상태입니다. 민첩이 최상급으로 오르셨군요.”
본래 태상은 힘, 지능은 최상급이었으나 민첩이 상급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심장을 먹은 탓에 민첩이 최상급으로 오른 모양이었다. 인간계에서 몸소 심장 덕분에 바뀐 몸을 체험했던 태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변화였다.
하지만 라마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민첩이 최상급으로 오르는 일은 없다고 알고 있었다.
“어떻게 민첩을 올리신 겁니까? 제가 알기론 그럴 일이 없으셨던 것 같은데...”
태상이 잠시 침묵했다.
그에게 사실대로 심장을 먹어 강해졌다는 것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한 것이다. 그는 라마스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침묵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번 미션이 어려웠어. 그래서 인드고 눈물을 마셔서 그런 것 같아.”
인드고 눈물을 먹었을 때, 태상은 이번처럼 능력이 상승하는 일을 경험했었다. 반에게 인드고의 눈물을 사용한 거지만, 라마스에게는 자신에게 사용한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러자 라마스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려야 했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알려드리지 못했습니다. 혹시 인드고의 눈물을 먹고, 탈이 나시진 않으셨습니까?”
“응? 탈이라니?”
“인드고의 눈물은 많은 기운들이 집약 된 영약입니다. 태상님께서 예전에 인드고의 눈물을 드신 적이 있었기에 혹여 너무 많은 기운들이 모여 몸이 버티지 못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고보니 그때, 그렇게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셨던 거로군요.”
“난 그냥 상처 치료해주는 물약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통 그렇게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많이 먹을 시에는 몸이 버티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드신지 시간이 좀 지나서 전에 먹었던 약효는 다 흡수가 된 모양이네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태상은 기억을 떠올렸다.
사로나와 만났었던 미션이 말이다.
요정들이 있던 곳에서 페앙을 살렸던 것은 그의 피였다. 아마 그의 피에 인드고의 눈물이 스며들어 있었을 것이다. 태상은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인드고의 눈물을 먹었으면 정말 몸이 터져 죽었겠군.’
반을 살리는 데 사용했던 것은 아주 잘 한 일인 듯 했다. 악마의 심장을 견뎌내고 있는 그에게 인드고의 눈물까지 버텨내는 건 무리였지 않았을까?
“계약자들 중에 능력치를 모두 최상급으로 올리는 이들은 몇 되지 않습니다. 모든 능력이 최상급이 되었으니 서로 상승효과가 나타나 몸이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볍고 강해지셨을 겁니다.”
“맞아. 그냥 점프를 했더니 천장에 머리를 박더라.”
태상이 겪은 변화가 그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태상님의 변한 몸에 적응을 돕는 갑옷이 있습니다. 살펴보시겠습니까?”
지금 태상이 입고 있는 것은 예전에 라마스가 주었던 것들이었다. 이제 점수가 제법 많이 모였으니 갑옷을 새로 장만할 만도 했다. 그리고 라마스는 새로운 마나건도 봐두었다며 그에게 두 종류의 갑옷과 마나건을 보여주었다.
여왕 덕분에 업그레이드 된 마나건이 있기에 굳이 무기를 바꿀 필요는 없었다. 태상은 갑옷을 중심으로 보기로 했다.
“이 갑옷은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나 굉장히 내구력이 뛰어납니다. 가죽임에도 불구하고 무게가 제법 나가지만, 충분히 견디실 수 있다면 웬만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궁금해 들어 올려 보자 가죽은 의외로 굉장히 부드러운 감촉이었고, 털이 달려 있었다. 무게는 충분히 그가 감당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솔직히 무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