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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93화 (93/251)

00093  여왕  =========================================================================

“왜? 뭐 문제 있어?”

“아니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레베카는 태상의 결혼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이 화들짝 놀라 그녀에게 말했다.

“왜? 어디가려고?”

“....저, 저 좀 잠시....그러니까...머, 먼저 가 있을 게요....죄송해요!”

레베카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길드 건물을 뛰어 나가버렸다. 그 모습이 딱 봐도 상처를 받은 것 같았던 지라 반이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네, 아무래도 레베카가 신경 쓰여서 따라 가봐야겠어. 결혼 미리 축하하지. 나중에 또 연락 할게.”

“응.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봐.”

태상이 굳이 캐묻지 않고 그러라며 그를 보냈다. 반이 길드 건물을 나가자 사로나가 물었다.

“왜 저렇게 나갔는지 이유 알고 있어?”

태상이 레베카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확신하지 못했던 그녀다. 태상은 피식 웃었다.

“응. 알아.”

“알아? 레베카가 상처 받을 걸 생각해서 좀 더 일찍 얘기해줄 생각 없었던 거야?”

만약 그런 거라면 사로나는 태상에게 화가 날 것 같았다. 하지만 태상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를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 한 번도 없었던 그다. 그녀를 희망고문 할 생각 같은 걸 했을 리가 없다.

태상은 오히려 그녀를 위해 그런 말을 하지 못한 거였다. 여동생이 있었다면 저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레베카는 제법 귀여운 맛이 있는 여자였다. 레베카가 태상을 좋아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태상은 레베카를 반처럼 좋아했다.

태상은 머리를 긁적였다.

“날 혼자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그걸 일일이 신경 썼다면 난 과로로 쓰러졌을 거야.”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좋아하는 척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태상은 그런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냉정하디 냉정한 말들뿐이었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런 말밖에 할 줄 몰랐다.

나한테 감정을 요구 하지 마. 하루 동안 함께 한 시간들로 착각하지 마. 난 널 절대 사랑하지 않아. 라고 말이다.

아예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그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를 나름대로 좋아했던 태상이기에 선뜻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오늘 사로나 덕분에 그녀에게 돌려서 그를 더 이상 사랑하면 안 된다는 걸 알릴 수 있어 좋았던 태상이다. 레베카에게 안다는 눈치를 보이면 더 힘들어 할 것 같아 끝까지 시치미를 뗀 것뿐이었다.

“레베카가 저렇게까지 깊어지기 전에 말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나? 난 그게 제일 마음대로 안 되던데.”

누군가를 사랑해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고, 사랑해선 안 되는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레베카에게 그걸 일찍 말했다 해도 마음을 접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녀의 말대로 레베카의 마음을 아는 것을 알리고, 자신에겐 아내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게 나은 선택이었을까?

태상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레베카가 최대한 적게 상처를 받고, 스스로 그걸 아물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일밖에 없었다.

솔직히 태상은 레베카가 자신을 얼마나 깊게 짝사랑 하는지 잘 모른다. 그녀와 있었던 시간이 적었기에 그다지 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가 이 문제를 가벼이 여긴 것은 맞다. 그녀와의 점점이 별로 없으니 언젠가는 자신을 향한 마음이 자연스레 접어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간접적으로 알리지 않았어도, 어느 순간 그녀의 시선은 다른 이에게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거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보기엔 레베카씨 마음이 가볍지 않아 보였어.”

“만나서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했다고. 그럴 리 없어. 그냥 사춘기 때 하는 것처럼 짧은 감정일 거야. 그냥 내버려뒀어도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걸.”

사로나는 글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두 사람의 문제에 깊게 관여하는 건 과한 참견이라 생각했기에,  앞으로 이런 문제는 확실하게 맺고 끊으라고 그에게 충고하고 말을 끝냈다.

하지만 태상은 그녀의 충고를 그다지 새겨듣진 않았다.

**

그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은 임시 전투기지였다. 얼마 후에 모두가 함께 마계를 습격해야 했기에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이다. 베이라는 막 도착한 태상 일행을 반기고 있었다.

“저번에도 봤으니까 굳이 서로 소개는 필요 없겠지?”

베이라가 청룡무사 반카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태상과 반카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로 악수했다. 태상의 뒤로 사로나, 혜연 그리고 카살라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혜연의 품에 안겨 있는 야호가 지루하다는 듯 길게 하품을 했다.

“소식 잘 듣고 있었습니다.”

저번에 함께 했던 미션은 태상 덕분에 무척이나 빨리 끝났기에 서로 깊게 알아갈 수가 없었다. 반카이는 이번 미션을 함께 하며 그와 친분을 다져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쪽은 막스. 힘이 아주 장사이신 분이야. 우리 불카누스 길드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도 있는 분이시지.”

막스는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어깨에 자신의 얼굴보다 더 큰 도끼를 메고 있었다.

근육은 태상의 팔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만큼 그의 몸집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태상은 저런 모습을 한 자가 인간일 수 있는가 의심이 들었다.

“만나서 반갑소.”

막스가 태상에게 손을 내밀었다. 덩치에 맞게 그의 손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마치 거인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태상이 그의 손을 맞잡자 강한 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꽤나 호전적인 성격임은 확실했다.

태상은 통증이 오는 손을 바라보다가 막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마냥 씨익 웃음을 보였다.

막스가 악수를 했을 때 반응은 두 가지 정도 된다.

첫 번째는 아파서 곡소리를 내고 물러나는 놈.

두 번째는 맞서다가 된 통 당하는 놈.

단언컨대 태상처럼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웃는 놈은 한 번도 없었다. 막스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손에 힘을 풀었다.

“그걸 사용했나 보지?”

그가 말하는 그것이란, 바로 태상의 능력인 무력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마 베이라에게 말을 들어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니 지금 그가 태상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고, 힘을 주고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다.

태상은 대답대신 진한 미소를 보내며 그의 생각이 맞았음을 알려주었다.

“이것 참,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보니 할 말이 없군. 진짜 그 어처구니 없는 게 사실이었어.”

베이라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베이라가 두 눈으로 보고 나서도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막스도 똑같았다. 그는 무력화가 이런 것도 가능하냐며 털털하게 웃었다.

그에게 무력화를 사용했다는 것이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그는 그런 것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 막스는 그의 어깨를 온 몸이 흔들리도록 퍽퍽 치며 만족한다는 듯 웃었다.

“베이라가 아주 강단 있는 놈을 제대로 골랐어. 민폐는 끼치지 않을 놈이군. 잘했다.”

“사람을 아주 잘 보시네요.”

“뭐? 하하하!”

그의 말은 곧 막스의 말을 이용해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과 같았다. 막스는 그런 태상의 태도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막스가 흡족해하는 것 같아 보이자 베이라가 안도했다.

사실 막스는 불카누스 길드에서 베이라와 비슷한 발언권을 가진 남자였다.

그녀와 함께 불카누스 길드를 쭉 지켜왔던 초기 멤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태상을 흡족해 하자 그녀의 마음도 크게 놓였다.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제 마음이 푹 놓이네요. 좋아, 이제 아저씨가 이렇게 해주셨으니까 다 끝난 거야. 다른 놈들은 그냥 다 어중이떠중이들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베이라의 말에 주변에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이 반발을 했다.

“우와~ 누님 어떻게 그렇게 저희들을 몰아가실 수 있어요? 우리 이래봬도 정예 멤버들이거든요?”

다른 곳에 가면 다들 콧대 제대로 높이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베이라의 마음에 그다지 차지 않는 진짜 말 그대로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그녀가 사로나와 혜연을 그렇게 여겼듯이 저놈들도 다른 놈들로 충분히 대처 가능한 놈들이었다. 물론 그들을 진짜 그렇게 일회용 도구로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태상에게 소개까지 해주면서 친분을 쌓게 할 것까진 없다 생각했다.

“저놈들 말은 무시하고.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우리가 어떤 경로를 통해 움직여서 여왕에게 접근할 건지에 대해 알려드리겠어요.”

베이라가 도도한 눈빛으로 어중이떠중이들의 아우성을 무시했다. 그들도 그녀의 진중한 얼굴에 장난을 멈추고 귀를 활짝 열었다.

미션이 시작되면 나이트레드가 다른 계약자들을 지휘해서 악마 놈들을 죽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이 악마와 악마 계약자들의 시선을 끌면, 그때부터 베이라의 정예 멤버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앞을 막는 악마들은 태상을 이용해 최대한 빨리 잡고,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 직진할 것이라 말했다.

“여왕은 악마들을 잉태하느라 움직일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여왕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에요.”

악마를 혹은 악마 계약자들을 빠르게 죽이기 위해서는 일행들 사이의 호흡이 중요했다. 태상이 먼저 무력화를 사용하면, 다른 이들이 재빨리 놈들을 공격에 죽이는 것으로 대략적인 전투 방법을 정해놓았다.

“어? 반도 이 미션 공유 받았어?”

베이라와 이야기를 끝내고, 태상은 임시로 세워진 막사에서 나왔다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레베카가 갑자기 뛰쳐나가는 바람에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던 반이 다른 일행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태상이 반가워하며 인사를 하자 반이 힐끔 레베카를 바라봤다가 태상을 봤다.

“어, 어~ 그래. 이렇게 다시 만나네.”

하지만 어쩐지 그의 인사가 떨떠름했다. 태상은 아마도 그 이유가 레베카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짐작대로 반이 그를 마냥 반기지 못했던 것은 레베카 때문이 맞았다. 그런데 그때, 레베카가 태상을 향해 갑자기 달려와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레베카?”

태상은 당황하며 레베카의 갑작스러운 격한 인사를 받아야 했다.

“........”

레베카는 한동안 그를 꼭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놓아 주지 않았다. 상황을 모르는 일행은 레베카의 남자친구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레베카, 왜 그래?”

태상이 말이 없는 레베카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품에서 떨어트리며 물었다. 레베카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고개를 든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불쾌하셨어요?”

“아니, 그냥 좀 당황했을 뿐이야.”

조마조마하게 그 모습을 보던 반은 레베카가 미련없이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부터 계속 된 레베카의 저기압에 이만저만 신경 쓰인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레베카는 태상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본 반은 레베카가 다행히 마음을 접은 듯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레베카 때문에 태상과의 사이가 서먹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태상은 다음으로 다니엘과 안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그들은 베이라가 말했던 ‘미끼’ 역할로 미션에 임하게 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쁘게 표현해서 미끼인 것 뿐이지, 그들이 베이라에게 이용 당하는 건 아니었다. 이 미션에서 그들이 해주는 역할이 미미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어야 베이라 일행이 여왕을 잡으러 갈 수 있었다.

그러니 서로 돕고 도와야 하는 사이임은 확실했다. 만약 그들이 악마들을 훌륭하게 처지해서, 여왕이 있는 곳까지 밀고 들어와준다면 이 미션은 훨씬 손쉽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베이라가 따로 정예 멤버를 구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 보다 뒤로 우회해서 접근하는 게 여왕을 죽일 수 있을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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